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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810화 (810/1,497)

〈 810화 〉3부 1장 12 아침에 눈을 뜨면

동료를 영입하거나 부하를 들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내가 '로그아웃'을 한 사이, 나를 지켜줄 사람은 필요했다.

마침 하리는 이에 딱 맞는 사람이었다. 여자라는 것이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 일국의 공주인만큼 분별력은 가지고 있을테고, 설령 하리가 나를 상대로 이상한 짓을 저질러도 다 대처할 수 있게 조치는 해뒀다.

나머지는 내가 해야할 일을 할 뿐. 이제 내게 주어진 방향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지륜-그러니까 '대지모신'의 나라로 가는 것. 하리의 말에 따르면 '가이아나'라고 불리는 나라는 거대한 지하 왕국이라고 했다.

햇빛을 등지고 살아가는 이들.

하지만 지하에서 누구보다도 발전된 문명을 가지고 있는 이들.

대지모신은 그들의 지배자이자 지하의 여신이었고, 나는 그녀와 접촉하여 지원을 얻어낼 필요가 있었다.

금태양신의 신관을 보고 혼돈에 오염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만하고 넘어간 지금과는 다르다.

내가 이 세계에서 온전한 힘을 사용하기 위해서, 그리고 또다른 힘을 사용하기 위해서 나는 대지모신의 호의를 받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비슈니아 왕국에서 가이아나 지저왕국으로 가야한다. 그게 현재 내게 주어진 상황 하나.

그리고 또다른 방향은 가는동안 혼돈의 사도들을 찾아서 제거하는 것이다. 일일이 제거하러 다니지는 못한다.

하지만 지나가다가 공원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가 있고, 마침 바로 근처에 쓰레기통이 있고, 손을 씻어낼 수 있는 분수가 있다면 아마 대부분은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버리고 지나갈 것이다.

쓰레기야 언제 어디서든 굴러다니겠지만, 그래도 그러면 기분이야 좋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방향을 정했다.

"저기, 신관님."

"왜."

"저희 분명 도망치는 거 맞죠?"

"그래."

"그런데 저희 이렇게 느긋하게 움직여도 되는 건가요?"

"응."

짐마차의 뒤에 앉은 하리는 마차를 끌고 있는 내쪽으로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저 때문에 지금 전속력으로 도망쳐야하는 거 아닌가요?"

"굳이 힘들게 도망칠 필요는 없지. 어차피 국경마다 경비는 강화되었을테고, 지금 당장 가면 경비병들도 바짝 긴장감이 높아져있을 거야. 마치 지금의 너처럼."

"아...."

"굳이 지금 경계가 삼엄할 때 국경을 돌파할 필요는 없지. 어차피 뚫어야 할 국경이라면 느긋하게 체력을 비축하면서 가면 되는 거야."

신관을 욕보인 순간부터 비슈니아 왕국은 사실상 폐쇄상태에 들어갔을 것이다.

신관 개인으로서는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추격자를 끊임없이 보낼 것이며, 신관 아래에 있는 팔부신중은 비슈니아 왕국의 명예를 위해 우리를 쫓을 것이다.

왕녀파는 공주의 신변 보호를, 신관파는 공주의 제거를.

과연 누가 우리를 쫓아올지는 아직 모르지만, 누가 우리를 발견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 전까지는 느긋하게 가면 된다.

"걱정하지 마. 들킬 염려는 없어. 지금 그래서 일부러 머리도 염색했잖아."

나는 내 머리칼을 가리켰다.

딱히 바꾸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현재 나는 내 원래의 모습에서 금발로 염색한 상태가 되었다.

"비슈니아 왕국에서 검은머리 외국인이 돌아다니면 다들 의심할 걸. 특히 눈도 푸른 남자라면 더더욱."

"그렇긴 하죠. 이 나라의 사람들은 다들...금발이니까요."

"그래."

판타지 배경 세계답게 이 세계의 머리카락 색은 정말 형형색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빨강, 파랑, 초록, 녹색, 금색, 흑색, 회색.

채도나 농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혼혈로 태어난 아이가 브릿지를 달고 태어나거나 색이 섞이거나 하는 일이 있을지는 몰라도, 그 나라의 순혈에 가까울수록 신관들이 가지고 있는 원색에 가까운 색을 가지고 있다.

눈동자색도 마찬가지. 신라는 테라의 주민들은 부모 중 한 사람에게 색을 물려받는다고 했다.

혼혈의 경우 색이 섞이거나 머리칼색을 부친, 눈동자색을 모친이게서 물려받는다고 하더라. 듣자하니 패턴이 너무 다양했고, 나는 그걸 이용해 염색으로 나의 모습을 바꿨다.

현재 나의 모습은 금발벽안.

즉, 비슈니아 왕국 출신의 아버지와 '로드니아' 수상왕국의 어머니를 둔 남자가 되는 셈.

"슬슬 마을이 보이는군. 하리, 너는 내 뭐라고 했지?"

"......주인님의 노예입니다."

하리는 얼굴을 붉히며 목에 채워진 목줄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왕족이 목걸이 말고 목줄같은 걸 차는 경우는 흔치 않고, 그런 경우는 적국에 잡혀 노예 공주가 되는 경우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과감히 하리의 목에 목줄을 채웠다.

절대 최근에 유나와 했던 SM플레이에 감명을 받았다거나, 왠지 카르나를 닮은 듯 안 닮은 이 여자에게 목줄을 채워 카르나를 굴복시킨다는 듯한 음습한 욕망 때문은 결코 아니다.

"그래. 어디까지나 이건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것이다. 비슈니아 왕국에 노예제도가 없었으면 다른 방법을 취했겠지만, 마침 노예제도가 있지."

"으으, 왕국을 되찾으면 노예제도를 없애버릴 거예요...."

아직 본격적인 노예 생활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하리는 벌써 우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너 정말 웃기는 구나. 내가 네게 언제 물 떠오라고 시켰냐, 식사 만들어오라고 시켰냐, 어디 가서 사냥을 해오라고 시켰냐, 설거지하라고 시켰냐, 불 지피라고 시켰냐, 이부자리 깔라고 시켰냐, 마차를 몰라고 시켰냐?"

"다 시켰잖아요!"

"그래. 이걸 무급으로 하는 거면 노예지. 하지만 나는 네게 그만큼의 보수를 분명히 지급했다."

화륵.

나는 손가락 끝에서 불꽃을 피웠다. 머리는 금색으로 바꿀 수 있어도, 나의 근원에서 올라오는 푸른불꽃의 색은 바꿀 수 없다.

"나는 네게 나의 신으로부터 받은 마력을 부여했다. 네가 말했지? 다른 이에게 이렇게 마력을 쉽게 부여할 수 있는 것은 누구의 권능이라고?"

"...신관님들의 권능이요."

"그래. 내가 직접 보여줘야 믿는구나. 내가 하늘에 떠오른 푸른 태양의 사도, 창염의 피닉스라는 것을."

마침 아침해가 밝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마차의 고삐를 잡아 잠시 짐수레를 멈춘 뒤, 제자리에서 서서 하늘을 향해 섰다.

"따라해라."

"흑...."

하리는 울상을 지으며 두 다리를 붙였다. 그리고 양팔을 좌우로, 하늘을 향해 찌르도록 만들며 외쳤다.

"태, 태양만세!"

만족.

* * *

"멈춰."

경비병 잭은 다가오는 짐마차를 향해 창을 뻗었다.

"처음보는 얼굴이군. 여기는 무슨 일이지?"

"본인은 로드니아 왕국에서 온 행상인입니다."

잭은 스스로를 행상인이라고 소개한 남자를 위아래로 훑었다. 가벼운 복장에 로브를 걸친 그는 장기간의 여행으로 피곤한 듯 보였다.

"신분증명서는?"

"오다가 도적 놈들과 싸우다가 그만 분실했습니다."

"음...."

싸움을 증명할 방법은 없다. 하지만 싸움의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있다. 행상인이 탄 짐마차는 날카로운 칼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고, 사람의 피가 굳은 흔적도 있었다.

"다른 일행은?"

"없습니다. 제 노예 한 명이 끝입니다."

"노예?"

"예. 저 혼자서 행상을 나선 거지만...뭐, 남자 혼자 다니면서 해결해야할 것들이 많지 않습니까?"

행상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뒤를 가리켰다. 짐마차의 위에는 거적데기같은 옷 하나를 두른 금발의 여인이 목에 목줄이 채워진 채 벌벌 떨고 있었다.

"크흠."

미인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움에 벌벌 떨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안타까움마저도 느껴졌다.

"노예치고는 상당히 미인이군."

"밤에 끼고 자야 잠이 잘 오는데, 예뻐야지요. 덕분에 산적들에게 습격을 당하기도 했습니다만...."

행상인은 자신의 옆에 걸어둔 낡은 철검을 눈으로 가리켰다.

"제 재산 정도는 스스로 지킬 줄 알아야죠. 흐흐."

"좋군. 알겠다. 그럼 이곳, '카마트라'에서 뭘 팔려는 거지?"

"사실 팔 것도 없습니다. 내용물은 도적 놈들이 습격을 하면서 다 유실되었습니다. 그래서 도적 놈들을 격퇴하고 난 뒤에 얻은 것들을 팔아서, 푼돈이라도 챙기고 싶은 마음으로 왔습니다."

"음...."

노예의 옆, 짐마차에는 정말로 '잡동사니'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물건들이 가득했다. 평범한 행상인이라기보다는 도적들을 서리해 온 스캐빈저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도 도적들로부터 살아남아 본전이라도 챙기고 싶은, 아니 이대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갈 수 없다는 집념이 느껴졌다.

그리고 도적들과 싸우는 와중에도 자기 여자는 잘 챙겼다는 것이 조금 우습기도 했다.

"참. 오는 길에 도적 놈들 주머니에서 주웠습니다. 이것에 대한 처리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행상인은 작은 주머니 하나를 건넸다. 제이는 주머니 속 물건을 보고 근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카마트라 경비대가 잘 처리하도록 하겠네. 통과. 카마트라에서 좋은 여행 되기를."

"좋은 하루 되십쇼."

행상인은 고개를 푹 숙이며 짐마차와 노예를 데리고 카마트라 안으로 들어갔다. 제이는 품에 들어온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비릿하게 웃었다.

"오늘 밤에 재미 좀 보겠는 걸. 흐흐."

그는 자신이 누구를 안으로 들여보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 * *

경비병에게 도적들로부터 챙긴 뇌물을 쥐여준 뒤.

우리는 카마트라라는 작은 도시에 당당히 입성했다. 말과 마차, 그리고 짐수레에 실려있던 모든 것들을 헐값에 처분한 우리는 그 돈으로 식사가 가능한 여관에 들어왔다.

"예상대로 경비가 삼엄하더군. 벌써 수배령이 떨어지기도 했고."

여관에는 흑발의 청년에게 현상금이 걸렸다는 벽보가 붙어있었다. 얼굴은 자세하지 않지만, 나름 만족스럽게 그려놔서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이상한 몽타주였으면 보이는 족족 훼손했을텐데.

"...지금 그게 중요한가요?"

"그러면?"

"바, 방은 하나로 하는 건 알겠어요! 노예에게 방을 따로 내어주는 건 오히려 더 오해를 살 수 있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하리는 침대를 가리키며 성을 냈다.

"침대 하나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무슨 오해를 하는지 알겠군. 너는 침대에서 자라."

나는 하리를 단숨에 침대로 집어던졌다. 하리는 베개를 끌어안으며 억울한 듯 눈물을 흘렸고, 나는 침대 옆에 마련된 소파에 앉았다.

"무슨 일 있으면 얘한테 이야기하고."

화륵.

나는 미니피닉스를 소환했다. 그리고 녀석을 하리의 머리 위에 올려 경계모드로 만들었다.

"나는 잔다."

"네, 네?"

로그아웃.

* * *

"음...이쪽인가?"

금발의 여인은 동굴 안에서 혀로 입술을 훑으며 비릿하게 웃었다.

"한 번 제대로 붙어볼만하겠는데?"

히죽.

"오랜만에 재미 좀 보겠어."

여인, 킨나라는 동굴 속에 가득한 시체들을 보며 이죽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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