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9화 〉3부 1장 11 창염신교
신관의 처소에 침입자가 나타났다!
신관이 적습을 알리는 말에 팔부신중은 비상에 걸렸다. 방금 전까지 평화롭..지는 않았지만, 감옥에서 누군가가 탈출하는 소동이 일어났지만 그만큼 궁 내 경비에 만전을 가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곳도 아닌 신관의 처소에 적이 나타났다. 신관이 다급하게 외친 적습에 팔부신중은 하던 일을 모두 내팽겨치고 급히 신관의 처소에 모였다.
그리고 신관이 보이는 치태에 다들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뭐! 왜!"
신관은 자신의 위를 깔고 기절한 심문관에 얼굴을 붉히며 악악 소리를 내질렀다. 둘 다 알몸이 된 채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고, 심문관은 마치 복상사라도 한 것처럼 생기가 없어보였다.
그리고 둘을 감싸는 푸른 불꽃은 그들의 치태를 만천하에 드러내듯 말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안쪽이 비치는 얇은 이불처럼 두 사람을 덮고 있었다.
문제는 그게 둘을 완전히 휘감고 있어서 신관과 심문관 둘 다 이불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상황.
"당장 이거 어떻게 하지 못 해?!"
"후…."
방 안에 들어오기 위해 일반 사람들과 비슷한 형태-사람 사이즈로 몸을 작게 변신한 가루라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소문이 사실이었던 건가."
"윽…."
가루라가 방 안에 들어온 이들 중 한 명을 째려봤다. 다른 이들도 그를 책망하는 눈빛을 보냈고, 시선을 받은 당사자는 눈치를 보며 뒤로 물러났다.
"나, 나도 신관 님의 명령이 있었으니까...."
"명령이 있다고 한들 이런 거라면 얘기를 해야했을텐데."
"신관 님이 설마 심문관과 이런 관계일 거라고는."
누군가 꾸며놓고 갔다고 하기에는 주변에 널브러진 옷가지나 분위기가 영 그랬다.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비상식적으로 판단해도, 신관과 심문관이 서로 섹스를 하다가 적습을 받은 것이 틀림없었다.
두 남녀의 교접을 본 습격자는 마치 둘을 조롱하듯 푸른 불꽃으로 둘을 구속하고 다시 떠났다.
"사라진 물건은 없나?"
"없다.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았다."
"암살도 아니고 강탈도 아니고...도대체 적의 목적은 뭐지?"
팔부신중은 너나 할 것 없이 혼란에 빠졌다.
"가루라에게 한 방 먹인 적이, 이런 곳에 몰래 잠입할만큼 대단한 적이 한 짓이 고작 밀월관계의 폭로라고...?"
"적국에 고용된 스파이가 아닐까요? 신관의 명예를 떨어뜨림으로서 비슈니아 왕국과 신을 모욕하려는 짓이 분명합니다!"
"스파이는 아닐 걸. 그 미친 놈의 진술을 봤다. 온통 자신의 신에 대한 찬양밖에 없더군."
머리만 드래곤인 남자가 이죽거렸다.
"태양이 파란색이라고 말하는 미친 놈인데 제정신일 리가 없지."
팔부신중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팔부신중이 상황을 정리하는 동안, 여전히 심문관에게 섹스하던 자세 그대로 깔려있는 신관은 수치심에 악 소리를 질렀다.
"뭐해! 당장 이거 풀어내라니까!"
"안 됩니다."
팔부신중은 서로 눈치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나마 신관에게 호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던 이들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저 푸른 불꽃은 보통 불꽃이 아닙니다. 무슨 원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저 불꽃은 마력을 태울 수 있습니다. 저희가 접근하면 손발이 통째로 소멸할 겁니다."
"정령에게는 최악인 공격이군. 아아, 이거 큰일인 걸. 팔부신중 모두 정령이라서 저 불꽃을 건드릴 수 없으니. 그래도 인간인 신관과 심문관은 살 수는 있으니 그나마 다행인 건가. 크큭."
신관을 덮은 푸른 불꽃은 정령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구해주고 싶어도, 이 민망한 상황을 당장 타개하려고 해도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 적이 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곰곰이 생각하는 수밖에.
"가루라. 당신이 생각하기에 그 자가 굳이 여기까지 와서 신관을 습격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글쎄요."
가루라는 주변을 의식했다.
팔부신중 내에서도 정치적 관계가 복잡하기는 하지만, 차마 여기서 자신이 봤던 것을 그대로 이야기를 해도 될까 걱정스러웠다.
적, 남자가 안고 있던 '그녀'의 존재.
그녀의 존재를 언급했다가는 신관파와 '공주파' 사이의 갈등을 순식간에 한쪽으로 기울게 할 것이다.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가루라는 그 강력한 힘 때문에 중립에 선 만큼, 자신의 말과 힘이 가진 영향력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함부로 말을 하지 못했다.
가루라 자신도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공주가 단순히 이교도에게 인질로 납치를 당한 것인지, 아니면 공주가 직접 비밀통로에 대해 말하여 신관을 욕보인 것인지.
당사자에게 직접 듣지 않으면 오해가 생길 수 있다. 가루라는 언제나처럼 침묵으로 일관했다.
"여기사 델피아의 말에 따르면 그는 세계의 혼란을 정화한다고 했죠. 어쩌면 그걸 확인하러 온 걸지도 모릅니다."
"정체도 목적도 모르는 자의 행동을 두둔하자는 말인가? 까딱 잘못했으면 신관께서 살해당했을 수도 있어!"
"그럴 리는 없습니다. 신관께는 항상 그분의 빛이 서려있으니까요."
"그럼 뭡니까? 신관이 당하는 걸 신께서 가만히 보고 계셨다는 말입니까? 크큭."
"그런 말이 아니라...!"
"맞을 지도."
가루라의 침묵에 팔부신중들이 저마다 의견을 제시하는 가운데, 가루라는 신관의 옆에 놓인 길쭉한 지팡이를 가리켰다.
"신께서 분명 신관이 습격을 받고 있음에도 가만히 계셨던 건 아마 신꼐서 묵인하신 일이 아닐까 합니다만."
신의 묵인.
그 말에 신관은 사색이 되어 가루라에게 삿대질을 했다.
"감히 신의 뜻을 함부로 헤아리려고 하느냐?"
"그렇지 않고서는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됩니까? 만약 신께서 신관을 지키려고 하셨다면, 지금 여기에는 이단자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어야 겠죠. 신의 힘을 받는 신관께서는 저희보다 훨씬 강한 존재가 아니십니까."
가루라의 말에 팔부신중은 침묵했다.
"만약 신관께서 순순히 목을 내어주셨어도, 신관을 보듬어주시는 신께서 습격자에게 천벌을 내렸을 겁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신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자가 신관이다. 그런 신관이 정체불명의 적에게 습격을 당했음에도 신이 가만히 신관을 내버려뒀다는 것은 정말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신이 신관을 버렸을 때라거나.
"습격자는 누구였습니까? 흑발의 남자가 맞습니까?"
"그, 그렇다."
"그 자가 뭔가 별다른 말을 한 건 없구요?"
"...모른다. 그냥 습격을 하고 난 뒤에 우리를 이렇게 만들고 사라졌을 뿐이다. 그보다…!"
신관은 역정을 내며 소리쳤다.
"빨리 이것 좀 어떻게 해봐!"
"어떻게 하고 자시고...."
가만히 있던 여인이 킥킥 웃으며 이불의 끝을 가리켰다. 불꽃처럼 하늘하늘 거리던 이불이 서서히 끝에서부터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이건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제되는 형태의 소형 결계네요. 기다리시면 돼요. 술자와 거리가 멀어질수록 결계가 사그라드는 형태인가? 히힛, 도망치고 나면 풀려날 수 있겠네요. 축, 섹스 끝!"
"너!"
"또 모르죠. 남편을 잃고 고작 1년도 안 돼서 새 남자를 들인 신관 님의 문란함에 대해 벌을 내린 걸지도."
"킨나라!"
금발의 여인, 킨나라는 낮게 웃으며 통로 안쪽을 가리켰다.
"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적을 추격하도록 하죠. 신관 님의 즐-거운 시간을 방해한 무례한 놈을 찾으러 가겠습니다! 뿅!"
사아악.
킨나라는 자리에서 사라졌다. 남은 팔부신중은 저마다 시선을 교환하며 본심을 숨기거나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
"왜 그러시오, 가루라?"
"간다르바."
가루라는 간다르바에게 조용히 손가락을 두 개 펼쳤다. 그리고 복도 안쪽의 바닥을 가리켰다.
"...설마. 그...."
"쉿."
가루라는 공주파의 수장에게 자신의 추측을 전했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 팔부신중들은 서로를 주시하며 조용히 기다리기만 할 뿐이었다.
쯔걱.
"......."
불꽃의 구속 결계가 해제되자마자 신관의 위에 올라타 기절한 심문관이 신관의 안에 뭔가를 토해냈지만, 모두 모른척 넘어가기로 했다.
비슈니아 왕국의 명예를 위해서.
* * *
아주 먼 옛날, 왕국에는 어여쁜 공주가 살았습니다.
공주에게는 아주 친한 오빠가 있었어요. 오빠는 왕국의 국왕이었고, 어느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사랑을 나눠 아이까지 가지게 되죠.
하지만 어느 날 오빠가 죽었어요.
공주는 오빠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지만, 국왕의 자리는 누군가가 이어야해죠.
왕국을 지키는 수호신이 오빠의 아내에게 왕좌를 건네줬어요.
왕비는 여왕이 되었답니다.
하지만 왕비가 죽으면? 그 다음의 왕좌는 공주의 것이예요.
왕비가 낳은 아이는 이제 걸음마를 뗀 아기고, 공주는 오빠 만큼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왕비는 공주를 가두고 죽이려고 한 거예요.
감옥에서 시름시름 앓던 공주는 삶의 마지막을 마무리하려는 순간, 한 줄기 빛을 봤어요.
그래요.
공주를 구해 줄 백마탄 왕자님을-
"그렇군. 이야기는 잘 들었다."
"제 얘기를 하는 거라고요!"
하리는 씩씩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나는 그녀의 속도에 맞춰 산길을 걸으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줬다.
"제 이야기, 듣고 있어요?!"
"듣고 있다."
"듣고만 있는 거잖아요!"
"그래. 듣고만 있지."
나는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바위를 찾았다. 하리는 바위에 앉았고, 나 또한 바위에 잠시 걸터앉았다.
"그래서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왕비의 비위를 알았으니 너를 도와서 왕비를 몰아내는데 도와달라고? 아니면 이 나라의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아니면 내가 이렇게 비극을 겪은 공주니까 나를 책임져달라고?"
"다 안해주실 거잖아요."
"잘 아네. 그래서 그냥 들어주기만 한 거다."
나는 하리에게 수통을 건넸다. 어디서 수통이 난거냐고 묻는다면, 어느 지역이든 남의 것을 빼앗아 살려는 도적들이 있다는 것만 알면 될 것이다.
"나는 네 문제를 해결해주는 해결사가 아니다. 그냥 지나가던 신의 사도일 뿐이다. 만약 내가 빛의 신이 보낸 사도였다면 네 문제를 해결해줬겠지. 하지만 나는 네가 믿는 신의 사도가 아니야."
"그럼 당신의 신은 무엇이죠?"
"나의 심장에서 타오르는 푸른 태양이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이 아바타의 몸, 20년의 지구에서 괴인 피닉스와 다를 바가 없으니까.
심장에 활활 타오르는 창염이 내가 이 세계에서 움직일 수 있는 원동력이며, 이 힘은 당연히 신라의 힘이다.
"믿지 못하는 눈치군."
"그럴 수밖에 없죠. 태양은 하늘에 빛나는 금빛...."
"태양은 푸른색이다."
"그러니까 이단으로 잡혀왔죠."
하리는 툴툴거리며 바위를 발로 찼다.
"이 왕국에서나 이단이지, 다른 곳에서는 이단이 아니지."
"어떻게 남자가 말 한 마디 안 지려고 하지?"
"져 줄 이유가 없으니까."
신라나 하랑이나 유나도 아닌데.
"그러니까 나를 꼬드겨서 네 왕국의 일을 해결할 생각을 하지 마라. 나는 내게 주어진 사명을 해결하는 것만으로도 바쁜 몸이니."
"그럼, 거래를 하죠! 당신을 고용할게요!"
"...호오."
거래라.
갑자기 누가 떠올랐다.
"나를 고용하려면 상당히 비싼 값을 치뤄야할텐데. 무엇으로 나를 고용할 거지?"
"저를 국왕으로 만들어주신다면, 저는 누구보다 가장 먼저 나서서 푸른 태양을 전파하는 사람이 되겠어요."
".......어처구니가 없군. 그런 말로 나를 설득할 수 있을 것 같나?"
나는 두 팔을 높이 치켜들며, 석양을 향해 섰다.
"정말로 네가 창염을 숭배하고자 한다면...."
"차, 창염개진!"
"......."
"이, 이거면 되는 거죠...!"
아직 하라고도 안 했는데, 하리는 석양을 향해 두 팔을 45도로 높게 치켜들었다.
"틀렸다. 그 때는 태양만세라고 하는 거다."
"......."
이계 진입 후.
나는 창염신교의 첫번째 교도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