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4화 〉3부 1장 06
마을 사람들은 모두 마을 밖에 있는 공터에 몰아뒀다. 혹시나 도망칠 때를 대비하여, 나는 미니피닉스들을 마을사람들의 주변에 원으로 배치하여 아무도 도망치지 못하게 만들었다.
설령 도망친다고 해도 미니피닉스가 번개같이 날아가 목덜미를 낚아챘다.
카나리아같은 귀여운 형태도 아니고 말 그대로 불사조, 독수리와 같은 형태의 불꽃새가 날개를 펄럭이니 주민들은 감히 더이상 도망칠 생각도 못했다.
"세상에는 장기라는 것이 있다. 장기는 모든 것을 오염시키지. 식물도, 동물도, 사람도, 심지어 정령도."
나는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델피아는 긴장한 얼굴로 내 주변을 훑었다.
"화속성…!"
"불꽃을 다루는 자니까 당연히 화속성이지. 아, 이런 색깔은 처음보나?"
"푸른 불꽃은 단 한 번도 본적 없다고 했잖아."
"호오. 그건 재미있군."
내게 있어서 불꽃은 오직 푸른색 뿐인데, 역시 이 세계의 불꽃은 흔한 색깔인 것 같다.
붉은색.
그것이 이 세계의 화속성 정령들이 가진 디폴트 색상이었다.
"당신은 도대체 어떤 정령이죠? 불의 신이 만들어낸 새로운 정령인가요? 아니면…."
"미안하지만 나는 나를 모른다. 아직 여기가 복잡해서."
기억을 잃고 아내를 찾는 남자.
이 설정은 신라가 내게 부여한 설정이기에, 나는 이걸 어길 수 없었다. 하지만 이걸 그대로 고수하면 여러모로 난감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적당히 변명 거리를 던
질 필요가 있다.
"하지만 오늘 이곳을 보고 알았다. 나는 이형의 괴물을 정화하는 불꽃의 사도야. 나의 신께서 이곳에 구원을 가져오라고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이지."
"영문을 모르겠는데."
이해하지 못해도 된다.
오히려 이해하면 곤란하다.
이 세계가 멸망하면서 세계의 신이 게임 속 캐릭터로 게임 세계에 갇혔고, 플레이어인 내가 그녀를 게임을 바탕으로 창조된 세계에서 구해냈고 다시 멸망한 세계로 돌아
와서 멸망의 원흉을 제거하려고 한다는 이야기는 이해하지 않는 편이 더 좋다.
솔직히 이걸 이해시키려고 말하는 것보다….
"신께서 말씀하시길, 더러움은 정화하라고 하셨으니."
"예, 예. 그러니까 더러움이 있는 이 마을을 불태우겠다는 거지?"
차라리 이렇게 대화가 안 통하는 광신도 또라이로 취급받는 편이 더 낫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그렇지."
"알았어. 대신 이 마을만 태우는 거다. 숲으로 불이 번지거나 인명피해가 나오면 곤란해."
기사로부터 허가를 받았다. 허가를 받지 않아도 태울 생각이기는 했다.
이곳에 테라리스트가 나온 이상, 땅을 한 번 불꽃으로 정화하여 감히 이곳을 지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다.
다른 힘도 아닌 '창염'이기에 가능하다.
원작 게임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신라의 힘은 푸른불꽃이 되었고, 이 푸른불꽃은 주인공의 힘이 되기 위해 혼돈의 힘에 대적하고 정화할 수 있는 성질이 부여되었다.
즉, 이곳의 '불의 신'에게는 나에 대한 사랑과 혼돈을 불태우는 힘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신라가 더 강하고 위대하다고 할 수 있으며, 신라의 사도인 나는 이 세계의 정령들과는 다른 여덟번째 속성의 정령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이 테라를 구하기 위해 이곳으로 보낸 정화의 사도로서, 나는 개천광의 나라에 자리잡은 혼돈의 장기를 불태워 정화할 것이다.
"창....한 가지 질문. 나야 당연히 이곳을 태워야 하지만, 정말로 이곳을 불태워도 되는 건가?"
"괜찮아. 화전마을이고, 세금도 안 내는 곳이었으니까. 이런 곳에서 강간같은 일이 일어났다는 게 퍼지면 이쪽이 더 곤란해."
"과연, 없는 마을 취급하는 건가?"
"그런 셈이지."
없던 것으로 만들기에는 조금 화려하지만, 그래도 잿더미가 된 모습을 누군가가 보고나면 그냥 화전마을이 멸망했겠거니 생각하게 되리라.
"알겠다. 그럼 시작하지."
나는 제자리에 서서 두 손을 앞으로 모아 기도했다.
"나의 신이시여, 나의 빛이시여, 당신의 남자가 이 땅에 도래했나니, 당신의 낙원에 드리운 혼돈의 씨앗을 불태워 이 땅을 정화할 힘을 주소서."
적당한 기도문을 읊으며 몸에서 마력을 뿜어낸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하며, 로브 너머로 뻗어나간 푸른불꽃이 마을 전체를 감싸는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척.
"전능하신 나의 태양을 위하여!"
나는.
"창염, 개진!!"
이 땅에 신라의 사도가 당도했음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해.
화르르륵!!!
밤하늘의 구름을 뚫을 창염의 불기둥을 만들었다.
하늘애 드리운 구름을 뻥 뚫어버릴, 하늘에 닿을 듯한 불기둥을.
'보고 있나, 신라?'
테라의 재생을 위해, 당신의 낙원을 지키기 위해.
나는 신라로부터 받은 힘을 모두에게 과시했다.
자.
창염의 피닉스가 테라에 당도했노라.
* * *
"왔다! 다들 외쳐요! 시즌 1호 창☆염★개☆진!"
"들을 때마다 진짜 거지같은 기술명이라고 생각하는데, 또 그거 써먹을 거가?"
"나름 유니크하고 좋지 않아요? 하랑 언니는 기술명 하나도 없잖아요."
"응 다음 그라운드 제로 원툴."
"......."
* * *
"신호를 보낼테니까 기다려. 4시간 안으로 병사들이 올 거야."
강간촌, 아니 비슈니아 왕국의 이름없는 화전 마을의 문제는 빠르게 정리되었다.
도플갱어였던 델피아가 나를 상대로 취조를 했던 것처럼, 원본인 델피아도 상당히 유능한 존재였다. 하긴, 강간을 당한다는 상황을 직접 겪으면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
으니 해결책도 미리 다 준비해뒀을 것이다.
"네가 만든 이 불기둥에 놀라서 달려오고 있을 사람들한테 무슨 상황인지 알려줘야 할 거 아냐."
피유우웅.
하늘 위로 불빛이 날아가고 폭죽이 터졌다. 이미 해가 떨어진 밤이라 불빛은 어둠 속에서 확연히 보였고, 심지어 그 색깔마저 광속성 정령들 특유의 색인 금빛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이야기나 좀 하지?"
"그래. 나도 묻고 싶었던 것이 있거든."
나는 델피아와 둘이 마주보며 섰다. 상당히 아름다운 여자지만, 얼굴을 볼 때마다 세상 잃은 눈빛으로 창고에서 나를 바라보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건 마치 쇼트케이크 위에 올려진 딸기를 내가 날름 먹어버렸을 때의 신라가 짓던 표정과도 같았다. 과연 신라의 경우와 델피아의 경우가 같냐고 묻는다면 '글쎄'라고 답
할 수 있겠지만, 기대하던 일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을 때의 표정인 건 다를 바가 없었다.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
"우연인 걸. 나도 마찬가지야."
서로 묻고 싶은 게 하나씩 있다. 그래서 나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서로 동시에 말하기 어때?"
"좋아, 셋 세면 말하는 거다."
셋. 둘. 하나.
"그 정령 뭐야?"
"그 정령은 뭐야?"
"...내가 말한 그 정령이 네가 말한 정령이랑 같은 건가?"
"그런 것 같은데. 당신이 쓰러뜨린 그 정령. 폭주하는 정령 말이지."
델피아는 알고 있었다.
"내가 창고 안에서 촌장에게 따먹히면서 안에-"
"네 상황은 묘사하지 않아도 된다."
취미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걸 자꾸 이야기를 하면 오히려 내가 불쾌한 상황에 이르게 된다. 실제로 지금도 살짝 기분이 더러워져서 일부러 말을 끊었다.
"...내가 창고에 있을 때, 정령의 기운이 느껴졌어. 촌장은 난리를 치며 사람들을 불렀지. 그리고 들었단 말이야. 미친 정령이 날뛰고 있다고. 그래서 아, 혹시 내가 당하는
걸 눈치채고 누가 달려온 건가 싶었어."
"그럴 수 있지. 하지만 녀석은 그것 때문에 달려온 게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맞아. 내가 부른 정령도 아니고, 내가 부리는 정령도 아니지. 완전히 별개의 개체가 갑자기 튀어나온 거야. 마치...다른 곳에서 나타난 것처럼."
"흐음."
갑자기 나타난 폭주하는 정령.
하지만 나는 그녀를 공격하면서 그녀의 모습을 봤다.
장기에 오염되어있었지만, 그녀는 분명히 폭주하는 정령 그 자체였다. 20년의 지구에서나 원작에서나 광속성의 인간형 괴수, 나찰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왠지 모르게 델피아를 닮은 것 같기도 한….
'에이, 설마.'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가정을 지워버렸다. 설령 내 가정이 진실이라고 해도, 정령을 죽인 것은 변함이 없다.
오히려 창염에 죽은 것이 정화와 안식을 가지게 되었으리라.
"그런가…. 그럼 너도 그 정령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거네. 이건 조금 조사가 필요하겠는 걸. 물론, 그쪽도 말이지."
"내가 바라는 바다. 단, 내 목적이 생각난 이상 나를 막을 수는 없어."
나는 손가락을 두 개 펼쳤다.
"하나는 혼돈의 씨앗을 전부 불태워 없애는 것."
"그건 나쁜사람들을 얘기하는 거야?"
"아니다. 혼돈에 중독된 이들이다."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는데. 혼돈이 뭔지도 모르겠고."
"이 세계를 혼돈으로 물들일 악의 씨앗이다. 나는 그것들을 정화하기 위해 나의 신으로부터 명령을 받고-"
"알았어, 알았어. 그러니까 당신의 신으로부터 나쁜 놈들을 쓰러뜨리기 위해 왔다는 거지?"
틀린 말은 아니다.
"그 나쁜 놈들이 엄청 강한 놈들이니까 당신같이 강한 정령을 보낸 거겠지. 일단 당신에 대한 판단은 신관 님이 하실 거야."
"신관인가. 알았다."
신관.
'모르는 단어다.'
신라는 신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내가 아는 신관은 분명 플레이어-그러니까 '지휘관'을 지칭하는 이명 중 하나였다.
이곳에서의 신관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신관으로, 신의 사도와 같은 역할을 하는 자들을 말하리라.
개천광의 신관.
어떤 존재일지는 모르겠지만, 밝혀도 좋으니 제발 오염으로부터 무사하기를 바랄 뿐이다.
'개천광은 4번째로 당했지.'
아직 빛의 나라가 무사한 걸 봐서는 뒤쪽은 괜찮다.
만약 지륜이 벌써 당해서 히드라가 되었다고 한들, 개천광부터 수비를 굳건히하며 하나하나 정화해나가면 되는 일이다.
"좋아. 당신의 두번째 목적은 뭐야?"
"사랑하는 내 아내를 찾는 것."
"뭐?"
"나는 잃어버린 내 아내를 찾고 있다."
로그아웃하면 침대 위에서 딸기케이크를 먹고 있을 아내를 찾고 있다.
"당신, 유부남이었어?"
"기억은 그렇군."
"음...아쉽네."
델피아는 입맛을 다시며 나를 훑었다.
"프리면 나랑 원나잇 한 번 하자고 말하려고 했더니."
"미안하지만 그건 거절이다. 설령 아내가 이 세상에 없다고 해도, 이 가슴에 살아가니까."
"어우, 알았어요. 알겠으니까 그만. 당신 아내에 대한 것도 한 번 조사해볼테니까, 당신도 우리한테 협조해. 서로 서로 돕고 살자고."
"물론. 나는 분란을 바라지 않는다."
"다행이네. ...아, 온다."
지평선 너머.
하늘에서 뭔가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눈에 마력을 불어넣어 시야를 강화하니, 하얀 그리폰과도 같은 새 위에 탄 금색 갑옷의 기사들이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오는구나. 내 동료들이야. 이제 안심해도 돼."
"그런가. 이제 나는 네 본거지로 가는 건가?"
"그래."
"그렇군. 그러면…."
할 일은 다 했다. 중간에 장기의 힘을 지닌 존재가 나를 건드리면 즉시 '자율제어' 형태로 움직일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슬슬 넘어가야할 때.
"조금...졸리군."
"뭐?"
나는 나무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그리고-
[로그아웃.]
테라의 나는 기절했고, 현실에서 다시 눈을 떴다.
"잘 다녀왔어요, 당신."
"오빠야, 괜찮나?"
[몸은 좀 어때요?]
현실에서 나를 기다리던 이들을 향해, 나는 손을 뻗었다.
"다녀왔어."
테라의 내 아바타?
델피아가 알아서 비슈니아의 수도까지 옮겨놓겠지.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