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803화 (803/1,497)

〈 803화 〉3부 1장 05

나는 나와 처음 만난 델피아가 사람인 줄 알았다.

도플갱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처음 만난 사람이 설마 사람이 아니고 마물일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냥 델피아가 납치당했겠거니 생각했다.

촌장 아들이 나를 '페니스'라고 불렀을 때, 델피아가 뭔가 이상한 상황이니 나보고 눈치채라는 신호인 줄 알았다.

그리고 통수를 맞았을 때는 그냥 이 마을의 일원인 줄 알았다.

통수에 통수에 통수를 거듭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내 판단을 흐리게 만들려는 상황인 줄 알았다.

아니더라.

결론은 의외로 복잡하면서도 간단했다.

"그래서 네가 진짜 델피아고, 내가 만났던 델피아는 촌장이 부리는 도플갱어였고, 나는 촌장이 부리는 사역마에게 자기소개를 했던 건가?"

"그래. 미안하지만 다시 한 번 알려줘야겠는데? 너, 누구야?"

눈앞의 진짜 델피아는 나에 대해 전혀 모른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 내가 델피아에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녀는 여기서 강간을 당하고 있었다.

아니, 본인은 아무렇지않게 취미생활을 즐기고 있었다고 하니 화간인가?

"똑같은 사람에게 한 번 더 소개를 하려고 하니 조금 그렇군."

"미안하지만 똑같은 사람 아니야. 도플갱어라고. 그러니까 한 번 더 소개를 해. 넌 뭐야?"

기억을 잃었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찾으려고 하는 남자라는 나의 자기소개는 대체 무슨 의미가 있던 걸까. 도플갱어를 감동시키는 선에서 끝났다고 생각한다면, 정작 그

도플갱어는 내가 태워버렸다.

조금 슬프다.

졸지에 자기 소개를 한 번 더 해야한다는 것을.

"나는...."

"세계의 어둠을 정화할 푸른 불꽃이라니, 그게 뭐야? 네 이름이야?"

"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생각을 해보니 내가 델피아를 비롯하여 촌장을 죽이는 모든 광경을 이 여자는 두 눈 똑똑히 보고 말았다.

심지어 내가 '정령'이라고 말했으니, 내가 피닉스 상태로서 말한 것도 알아들었을 터.

알아들었으니까 나보고 저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세계의 어둠을 정화할 푸른 불꽃 씨, 뭔가 말 좀 해봐. 응? 당신이 없었으면 내가 조용히 이 마을을 없애버리려고 했다고."

"없애버려?"

"응. 이걸로."

델피아는 손을 위로 뻗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 위로 거대한 금빛 덩어리가 뿜어져나왔고, 내게는 익숙한 형체로 변하기 시작했다.

"정령?"

"그래. 이 녀석을 폭주시켜서 쑥대밭으로 만들려고 했어. 나는 기사이자 정령사거든. 그런데 정령이 갑자기 폭주를 하기 시작했고,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 정령을 향해 이

상한 걸 겨누더니...탕."

델피아는 스스로의 목을 조였다.

"죽어버렸다구. 당신, 도대체 뭐야? 세계의 어둠을 정화할 푸른 불꽃이라는 건 도대체 뭔데?"

"......."

침착하자, 나.

스스로의 얼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으니 쪽팔림이 장난 아니다.

예전에는 신라의 몸을 쓰고 있어서 딱히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었지만, 내 얼굴로 그런 말을 하고 있으니 속에서 뭔가가 들끓는다.

'아니지.'

내가 부끄러워할 이유가 있나?

'세계의 어둠을 정화할 푸른 불꽃'이라는 칭호는 내가 신라로부터 받은 세례명이다. 여신으로부터 받은 나의 또다른 이름이며, 나는 신라의 대행자다.

"...큭, 크큭."

그러므로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이것 참, 상황이 상당히 꼬여버렸군. 기껏 속이려고 했던 건 도플갱어였고, 강간 취향의 여기사를 상대로 내 정체를 드러내게 될 줄이야."

델피아는 한껏 긴장하기 시작했다.

나는 왼손의 손가락 일부를 이마에 올리며 델피아를 내려다봤다.

"나의 정체가 알고 싶나? 후회할 지도 모르는데?"

"알아야겠어.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는 모르지만...나는 이 비슈니아 왕국의 기사니까! 왕국의 위협이 되는 존재라고 한다면, 나는 당연히 그걸 파헤치고 대처할 의

무가 있어!"

나를 향해 삿대질하는 델피아는 불과 5분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래에서 정액을 흘리고 있었다.

박력은 있지만, 의기는 느껴지지만, 방금 전에 불타 죽은 촌장에게 따먹히던 모습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대화를 하기에 앞서, 일단 하던 건 마저 하지."

화륵.

나는 하늘 위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내 손바닥 위에서 푸른 불꽃의 새들이 하나 둘 꽃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가서 다 잡아와."

새들은 저마다 각자의 방향으로 퍼져나갔다. 한 마리 한 마리에 막대한 마력을 불어넣어, 어지간한 B급 괴수는 혼자서 사냥할 수 있을만큼 강력한 미니피닉스들이다.

"한 가지 물어보도록 하지. 이 마을에 있던 이들도 모두 죽여야하는 대상인가?"

"...그건 아니야. 범인은 특정할 수 있어."

델피아는 엄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를 따먹은 놈들이 다 범인이야!"

"...그건 확실한 증거군."

증거가 아주 차고 넘친다.

따먹힌 당사자가 직접 얼굴을 보고 판단할 수 있으니, 강간을 저지른 자도 '제가 그런 짓을 하지 않았어요!'하고 외치지도 못할 것이다.

-개천광의 나라는 섹스촌이지만, 강간은 법률로 금지되어있어요.

신라의 증언이다.

-자유로운 섹스를 지향하지만, 자유를 지향하기에 자유가 침해되는 섹스는 원하지 않죠. 그래서 개천광의 나라에서는 강간이 금지예요.

-그래서 개천광의 타락체인 카르나가 강간 패티시가 있던 기가?

-정확히는 '전력으로 싸워서 자신을 이긴 상대'에게 강간당하는 거죠. 그래서 오빠가 카르나를 강간할 권리를 얻었던 거고, 카르나가 오빠에게 강간당하고 싶어서 그렇게

열심히 일했던 거고요.

각각 파랑, 하양, 노랑의 말이다.

성주는 강간이 없던 나라에 강간을 퍼뜨렸다. 남들의 이목이 닿지 않는 아주 조용한 산골에 강간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건 분명 비슈니아 왕국에서 해결해야하는 문제

였다.

설마 그걸 강간당해서 해결당한다는 해결책을 내놓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으아악!"

멀리서 비명소리가 울려퍼지고, 그게 점차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펄럭, 펄럭.

미니피닉스들은 도망치던 이들의 목덜미를 낚아채고 광장으로 잡아왔다.

내가 델피아를 태우는 순간부터 사방으로 도망쳤던 이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마을로 돌아오게 되었다.

"다, 당신은 도대체 뭡니까?!"

나를 향해 쟁기를 겨눴던 청년이 물었다. 그의 눈에는 공포가 가득했지만, 동시에 자신의 뒤에 있는 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의기가 가득했다.

"본인은-"

"세계의 어둠을 정화할 푸른 불꽃이다."

내가 답한 것이 아니다. 델피아가 근엄한 얼굴로-어느새 주웠는지 모를-검을 들고 마을 주민들을 향해 겨눴다.

"그리고 나는 비슈니아 왕국의 여기사, 이시리아 델피아! 후후, 어리석은 녀석들. 설마 내가 그렇게 쉽게 당할 거라고 생각했나?"

델피아는 마을 주민들-특히 더 겁을 먹은 남자들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이 마을에서 강간이 일어났다는 첩보를 듣고 찾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강간이 이루어졌더군! 심지어 나를 강간했으니 변명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큭, 설마 일부러 강간을 당했다고...?!"

"범죄를 밝히기 위해 스스로 강간까지 당한다니...이게 왕국의 여기사...?"

마을 주민들은 제멋대로 해석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속이 뒤틀렸지만 너무나 뻔뻔한 얼굴로 고개를 치켜드는 델피아를 바라보며 속으로 다짐했다.

'나도 뻔뻔해지자.'

강간 당하고 싶어서 당한 여자도 저렇게 철면피를 깔고 있는데, 신라의 사도인 내가 스스로에 대해 부끄러워할 이유는 하등 없다.

"당신, 당신, 그리고 당신. 이쪽으로."

"힉...!"

공포스러우리라.

자신이 범한 여자가 엄숙한 기사가 되어 검을 겨누고 있으니, 자신의 행동에 대한 결과를 머릿속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왕국의 여기사를 상대로 약을 먹이고 강간을 한 죄. 즉결처형입니다."

"자, 잠깐! 너도 즐겼잖아, 씨발!"

"어머나. 그게 무슨 개소리. 저는 이분이 구해주지 않았다면 분명 당신들에게 계속 강간을 당했을 겁니다. 자유의지를 빼앗기고, 그저 뱃속에서 정액을 울컥거리며 나신으

로 창고에서 따먹히기만 했겠죠."

"개소리 집어치워! 중간에 너도 허리를 흔들었잖아!"

"그건 간단합니다."

델피아는 검을 높이 치켜들며-

"미약 탓입니다."

서걱.

남자의 목을 갈랐다.

곳곳에서 비명이 울려퍼지려고 했으나, 주민들은 자신의 머리 위에서 날갯짓을 하는 미니피닉스들에 겁을 먹고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당신들도 죄인입니다. 마을 안에서 있었던 일을 아무도 알리지 않았으니까요. 방조하고, 은폐한 공범입니다. 죽이지는 않겠지만...법으로 다스려야겠죠. 당신처럼 직접

범죄를 저지른 자는 여기서 사형."

"그, 그것만은 제발...!"

"시끄럽습니다."

뎅겅.

남자는 목이 날아갔다.

나는 죽은 이를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화르륵.

푸른 불꽃이 남자를 덮었다.

이번에는 마력을 태우는 것이 아니라, 마력과 함께 육신마저 통째로 불태우는 불꽃이었다.

"당신-"

"전능하신 나의 신이시여, 위대한 나의 신이시여. 혼돈에서 태어난 존재를 정화하여 이 땅에 안식을."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기도를 읊었다.

마음 같아서는 '신라가 얼마나 아름다운가'에 대해서 읊어버리고 싶지만, 아직까지 나는 '기억을 잃은 남자'라는 컨셉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푸른 불꽃의 이름으로."

화륵.

남자는 흔적도 남기지 않고 타버렸다.

당연히 남자의 몸 속에 기생하고 있던 테라리스트 또한 불꽃과 함께 소멸했다.

뎅겅, 뎅겅.

델피아는 그 사이 자신을 강간한 남자들을 베었다.

강간을 당한 당사자가 직접 얼굴을 보고 자지도 까보고 죽인 것이니, 억울할 일도 없을 것이다.

"고생했습니다. 정체모를 당신."

델피아는 검에 묻은 피를 한 번 휘둘러 털어냈다.

"이 마을에 있던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당신의...도움 덕분에."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예?"

"이곳에 드리운 혼돈의 손길을 그대는 느끼지 못했나?"

"......정말로 이상한 사람이군요."

내 암시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어쩐지 장기에 오염된 이들 말고도 더 죽이더라니, 이계의 기운을 파악하기는 커녕 자신을 강간한 자만 쏙 골라서 죽인 듯 하다.

'차라리 다행일지도.'

내가 불로 태워 죽인 이들은 모두 델피아를 강간했다. 그래서 강간하지 않고 눈치만 보던 이들 중 테라리스트에게 감염된 이들을 정화라는 명목으로 불태울 필요가 없어

졌다.

만약 강간하지 않은 자를 태웠으면 델피아가 항의를 했을 것이다.

화륵.

나는 시체들을 모조리 불태웠다. 그리고 델피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 마을은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일단 이곳에 있는 모두는 병사들을 불러서 연행할 겁니다. 그리고...당신도 일단 연행해서 상황을 들어야겠죠."

델피아는 아직 나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이형의 존재로 변신하는 힘. 그리고 이 세상에는 없는...'푸른 불꽃'."

"음?"

"부디 얌전히 협조해주시겠습니까? 당신과는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델피아는 나에 대한 경계를 낮췄지만, 완전히 풀지는 않았다.

"당신을 '신관'님께 인도하고 싶습니다. 따라와주시겠습니까?"

"알겠다. 하지만 그 전에 해야할 일이 있어."

나는 바닥으로 땅을 두드렸다.

"이 마을을 정화해야한다."

"정화...요?"

"그래."

화륵.

"바이러스는 죽여야 하거든."

이 마을.

불태워야한다.

"그 기술을 써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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