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0화 〉3부 1장 02 비슈니아 왕국의 화전 마을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이곳 비슈니아 왕국의 기사, 델피아라고 합니다."
스스로를 델피아라고 소개한 금발벽안의 여기사는 군마의 고삐를 잡은 채, 나와 함께 길을 걸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줬다.
"이 곳은...."
이 세계에 대한 정보.
일곱 원소의 힘을 통해 인간은 힘을 얻으며, 각 원소별로 신이 존재한다는 것.
신의 힘을 사용하는데에는 신의 축복이 필요하며, 각 신을 따르는 원소의 교단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 교단이 더 거대한 세력이 되어 '국가'가 되었고, 제정일치 사회에서 국왕이 신의 대리자 역할을 한다는 것.
이 나라에 대한 정보.
이곳은 빛의 신을 따르는 국가 '비슈니아'이며, 비슈니아 중에서도 델피아는 기사이자 귀족이라는 것.
나를 덮친 마수, 테라사이트에 대한 정보.
최근 들어 갑자기 대륙 곳곳에 나타나는 괴물들은 동물이나 식물 등이 가지고 있는 마력을 오염시켜 괴물로 변모한 것.
등등.
"뭔가 기억나는 게 없습니까?"
델피아는 내게 이 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뭔가 실마리를 잡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그게 기억을 잃은 사람에 대한 동정도 있지만, 나라는 존재에 대해 아직 불신을 떨쳐내지 못한 것에 대한 경계심이 있었다.
당장은 델피아의 도움이 필요하다.
내가 찾고자 하는 이는 내 아내의 과거지만, 그건 내 개인적인 용무와 바람에 불과하다.
내가 진짜로 이 세계에 온 이유는 테라의 구원.
언젠가 여신라는 만날 수 있을테니, 지금은 델피아의 도움을 받으며 어딘가 잠시 정착할 곳을 찾아야 한다.
"...기억나는 게 몇 가지 있다. 듣고나서 뭔가 떠오르기 시작하는군."
"무엇입니까?"
"...푸른 불꽃. 햐안 눈, 그리고 금빛의 대지."
"정말...이상하면서도 알 것 같은 말씀이네요."
"그런가?"
창염, 설야, 지륜.
각각을 가리키는 비유였는데, 유감스럽게도 델피아는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기억나는 거라고는 이 세 가지 밖에 없다. 미안하군."
"미안할 건 없어요. 당신도 기억을 되찾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거니까요."
종자도 데리고 다니지 않는 것으로 보아 기사로서는 작위가 상당히 낮은지, 델피아는 뭔가 있어보이는 이들인면 바로 알아챌 법한 비유를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하얀 눈은 뭔지 알겠어요. 이 땅에서 눈이 뒤덮인 곳을 말하자면 '로드노로프'밖에 없죠. 남쪽에도 겨울에 눈이 흩날리기는 하지만, 설원이라고 부를만큼 쌓이는 곳은 로드노로프 왕국 뿐이예요."
"거기에 가면 내 기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건가?"
"그건 모르죠. 당신이 생각하는 설원이 전혀 다른 곳의 설원일수도 있죠. 당장은 당신의 기억을 되찾을 수 있는 지역을 하나하나 정리하는 거예요."
델피아는 내게 손을 뻗었다.
"마침 저를 만난 걸 다행으로 아세요. 저는 방랑기사. 세계를 떠돌아다니면서 고대의 유적에 관해 조사하는 게 취미인 기사랍니다."
"아아, 고맙다."
나는 인사를 했고, 델피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기요, 악수 몰라요?"
"악수?"
"네. 이렇게 손을 맞잡고 서로 흔드는 거."
"아는데."
악수를 모를 리가 있나.
델피아는 내게 뻗은 자신의 손을 가리켰다.
"그런데 왜 악수 안 해요?"
"내 아내가 보고 있거든."
농담이 아니다.
아무리 이세계라고 한들, 어찌 아내가 있는 남자가 함부로 외간여자의 손을 잡는단 말인가?
'더군다나 손을 잡았다고 무슨 짓을 할 지 몰라.'
마을에 가서 '꺄아악'거리면서 비명을 지를 수도 있다.
델피아가 내게 호의를 베풀어주는 건 분명 감사한 일이지만, 감사는 감사고 거리는 거리다.
"아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면서요."
"그래. 하지만 느낄 수 있어. 그녀는...나를 찾고 있다는 걸."
"하...알겠어요. 당신, 정말 아내를 사랑하나보네요."
"당연하지. 나는 내 아내를...크윽."
나는 잠시 머리를 손으로 눌렀다.
델피아는 화들짝 놀라며 내게 다가왔고, 나는 뒷걸음질로 거리를 벌렸다.
"왜 그러세요?"
"...아니, 뭔가 이상해서."
떡밥 하나, 살포.
"보통 아내라고 하면 한 명인 게...정상 아닌가?"
"그렇죠. 아내는 한 명이 보통이긴 한데, 앙그라바티움처럼 일부다처제인 곳도 있어요."
"앙그라바티움?"
"어둠 원소를 숭배하는 지역이죠. 암흑 대륙이라고도 하는 곳인데...거기서 온 것 같지는 않고."
델피아는 계속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굳이 어디 출신이냐고 비유를 하자면...음...모르겠네요. 흑발에 갈색 눈동자인 사람은 처음봐서요."
"출신은 중요하지 않지. 중요한 건 내가 지금 이 땅에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이 땅 어딘가에 아내가 있다는 것."
"정말, 질릴만큼 아내 타령하시네요. 그런 거, 싫지는 않을지도."
델피아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쿡쿡 웃었다.
"따라오세요. 근처에 아는 마을이 있어요."
드디어 문명으로 나아가는 건가.
나는 델피아를 따라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아아악!!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
분명 사람들이 무언가에 의해 습격을 당하는 소리다.
"저건...!"
'괴수?'
익숙한 형태의 괴수가 눈에 보인다.
대 카르나 전.
간부로 타락한 개천광은 수하를 많이 만드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광속성을 가진 정령들이 테라의 오염된 마력에 너무나도 많이 노출되어 스스로 괴수로 변해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멀리서만 봐도 그 형태가 보인다.
나찰.
인도 방면에서 나왔던 S급 시체 괴수, 야차의 하위 개체.
아직 테라에 의한 오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원래의 모습을 갖추고 있을테지만....
"세상에, 저게 뭐야...?!"
역시나.
금색의 정령은 머리에 보라색의 무언가가 덧씌워져 있었다.
사람처럼 생긴 금색 정령의 머리 위에는 마치 문어와도 같은 보라색 이형의 물체가 붙어있었다.
누가봐도 세뇌하는 것처럼 보이는 형태.
실제로 세뇌가 맞고, 정령은 테라사이트에 의해 침식되어있었다.
[도망...쳐....]
양손에 든 검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주민들을 습격하지만, 정작 본인은 일그러진 얼굴로 도망치라고 말한다.
필히 약간이라도 정신이 온전히 남아있는 것일 터.
완전히 보라색으로 물들지 않는다면, 아직까지는 정화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큭...!"
머리를 한 번 손으로 짚는다.
주민들을 향해 달려가려던 델피아는 기겁을 하며 몸을 돌렸다.
"왜, 왜 그러세요?!"
"내...적....!"
나는 저들을 쓰러뜨려야 하는 당위성을 지금 여기서 세울 것이다.
"내 아내를...크윽...!"
"설마 저 자들 때문에...?!"
뒷말은 하지 않는다.
알아서 오해하라고 뒷말을 삼킨 채, 코트 안에서 '무기'를 꺼낸다.
스륵.
나는 평범한 인간이다.
하지만 이전에 '피닉스'로서 싸운 경험이 있다.
인류 최강의 영웅이라고 불리우던 광검이나 가웨인 경, 그리고 대인전 최강의 존재인 샤오린을 상대로도 승리한 전적이 있는 인간이다.
지구와 달리 이곳에서의 아바타는 본래 내게 주어졌던 '창염의 피닉스'로서의 힘이 온전히 깃들어있다.
괴인 피닉스.
나는 피닉스다.
괜히 이름만 빌려온 것이 아니라, 실제로 피닉스의 전투 경험을 바탕으로 아바타를 구성했다.
DLC에 업데이트가 이루어진 그 데이터를 바탕으로, 이 세계에 어울리게 투입된 그의 힘이 있다면-
탕!
"에...?"
푸화악.
"...역시 명중이군."
나는 총을 쐈다.
총이 이 세계에서 통용되는 물건인가?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총을 쐈다.
이게 제일 쉽고 빠르니까.
사아아.
마탄에 맞은 테라사이트는 전신이 구겨지며 소멸했다.
테라사이트에 잠식된 금빛의 나찰은 서서히 금빛이 사그라들기 시작했고, 점차 흰 피부의 사람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엘프.
이곳에서의 정령은 대부분 엘프의 외모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테라사이트로부터 해방되어 폭주가 멈춘 정령 또한 금발벽안이라는 엘프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당신, 도대체...?!"
"......."
이럴 때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은 단 하나.
일단 습관적으로 총을 코트 안으로 집어넣고, 나는 전신의 긴장을 풀었다.
"다행...."
풀썩.
나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낙법을 취한 것이 들키지 않게 최대한 주의하며, 나는 눈을 감았다.
'로그아웃.'
나의 의식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 * *
"왜 하필 총을 쏜 거죠?"
"그래야 몸을 안 다치니까. 근접전으로 가면 다친다고 위험하다고 할 거잖아."
"저 시대에는 총이 없다구요!"
"이제 보편화되는 거지. 현대 지구인은 주먹보다 총을 더 잘 다루는 법이라고. 후, 7살 때 동네 놀이터에서 K2로 모두를 학살하고 다니던 때가 생각나는군...."
"오빠야, BB탄 아이가?"
"한 번도 눈에 맞춘 적 없어. 어려서부터 특급사수였다 이거야."
[하긴, 오빠가 쏘는 건 정말 잘 하죠.]
"유나, 정액은 쏘는 게 아니라 싸는 거예요."
[.......]
* * *
눈을 뜨고 나니, 낯선 천장이다.
몸이 푹신한 것으로 보아 침대.
주변을 보니 중세 판타지의 여관방과 비슷.
그렇다면 나는 지금 기절한 상태로 옮겨진 것일 터.
'생각대로라 다행이다.'
로그아웃 중에는 내 몸이 기절한 것처럼 의식을 잃는다.
나의 가설은 정확했고, 나는 마치 총을 쏘고 난 뒤에 안도하는 것처럼 기절했을 터.
아마도 기절한 나를 옮겨준 사람은 델피아일 것이다.
폭주하는 정령을 이상한 물건으로 한 방에 제압했으니, 나의 정체에 대해서 불신은 덜었지만 내 힘에 대해서는 궁금해하리라.
'슬슬 내가 깬 걸 눈치채고 누군가는 와야할 때가 되었는데.'
"정신이 드십니까?"
처음보는 사내다.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는 짙은 녹색 머리칼로, 책을 좋아할 것처럼 보이는 학자 처럼 생겼다.
"마을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용사 페니스 시여."
"용사?"
"예. 폭주하는 정령을 구해주신 용사시지요. 아,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비엘리언. 이 마을 촌장의 아들입니다."
촌장 아들.
그럼 이곳은 촌장의 집?
"델피아는?"
"아, 기사 님이라면...."
촌장 아들은 난처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정령의 문제에 대해 급히 처리할 일이 있다면서 왕도로 떠났습니다."
"......."
한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할 점.
테라든 20년의 지구든 나의 현실이든, 한 가지 지고불변의 법칙이 하나 있다.
'좆간 네버 체인지.'
이 남자.
거짓말을 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총 같은 걸 쏘는 자를 감시하기 위해서라도 자기가 아니라 마을 사람을 보내는 게 맞지 않나?
"델피아는 지금 어디에 있지?"
"예?"
"정정. 델피아는...어디에 갇혀있지?"
철컥.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총을 꺼내, 촌장 아들에게 겨눈 뒤-
"나를 페니스라고 부르다니. 용서할 수 없다."
탕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