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9화 〉3부 1장 01 피닉스 어 라이징
나는 한 번 세계를 구했다.
세계를 구한 대가라고 하기에는 그렇지만, 그 보상으로 사랑하는 여자를 구했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 나를 사랑했던, 그리고 나를 사랑하게 된 여인과도 좋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
내게 남은 것은 이 세계에서 사랑을 나누고, 아이를 기르며 국가 발전에 도움을 주는 일 뿐.
왜 그게 국가 발전이냐하면, 평균 출산율이 0.7명 이하로 떨어진 이 시대에서 나 혼자 3명의 자녀-어쩌면 그 이상-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 다자녀 축하해요! 나이 터울은 어떻게 되나요?
-여자 셋이 각각 한 명씩 낳아서 서로 같은 나이인데요.
-개새끼가?
...누군가에게는 부러움을 사거나 어그로로 끌려서 조롱을 받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게 썩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그만큼 사람들이 나와 신라의 관계를,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이들과의 관계를 부러워한다는 거니까.
그렇게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이계의 구원자가 되어달라고?"
"네.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신라는 자세하게 내게 자신이 듣고 온 내용을 모두 전했다.
"그러니까 나를 거기에 집어넣은 그 직원 놈이 죽지 않고 살아서 테라를 부활시키고, 테라에서 괴물들을 만들어 다시 지구를 침공하려고 한다는 거지?"
"네. 이쪽 세계와는 전혀 관계가 없지만...20년의 지구는 관계가 있죠."
"하필이면 인류 최강 셋이 빠져버렸으니까, 상황이 보통 일은 아니네."
20년의 지구 기준으로 인류 최강은 누가 있는가?
창염의 피닉스가 있다.
석하랑이 있다.
이유나가 있다.
그 셋이 모두 지구로 넘어온 이상, 인류는 살아남지 못한다.
기껏해야 은유하와 싱크로한 카르나?
그마저도 개천광 본인이 싱크로한 게 아니라 카르나가 싱크로한 이상, 테라의 정신 오염에 쉽게 노출될 수 있다.
그 다음으로 샤오린과 싱크로한 환룡이 있고, 루살카와 싱크로(..)한 광검이 있을테고, 아르엘과 싱크로한 펜릴이 있다. 백희아와 싱크로한 앙그도 있기는 하지만, 전력으로서는 글쎄.
4명의 정령들이 아직 그쪽 세상에 남아있다고는 하지만, 불안 요소는 많다.
그리고 우리쪽에서도 불안한 요소는 많다.
"당신이 남기고 간 분신 X로이드가 따먹히면 어떻게 해요? 당신의 분신들을 일렬로 나열한 다음, 뒤가...흑."
"그건 안 되지."
"내가 사랑 찾아서 불효를 저지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울 엄빠가 범해지는 걸 보는 건 좀 그런데...."
"광검은 몰라도 장모님이 그러면 안 되지."
신라는 장난식으로 이야기하고, 석하랑은 다소 진지하게 이야기를 했지만, 어차피 나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마음을 굳혔다.
"다녀올게."
"...당신이 굳이 안 그래도 돼요."
"아니야, 가야해."
가야할 이유가 있다.
"내가 넘어가지 않으면 테라는 분명 놈들에 의해 지배당하는 거지?"
"네. 역사가 반복되겠죠. 그리고 20년의 지구와는 자연히 연결이 될 거예요. 테라에서 넘어가지 않으려고 해도...차원문을 개발한 인류가 테라로 넘어가려고 할테니."
"잘못하면 역류하는 기다. 20년의 지구...완전히 쑥대밭이 되겠지."
"씁. 애프터 케어까지 신경쓰고 싶지는 않았는데."
솔직히.
20년의 지구가 신경쓰이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내 '평화'와 '사랑'을 위협하는 선이라면, 나는 가차없이 20년의 지구를 버릴 것이다.
'그래도 가야지.'
이건 신라가 부탁한다고 해서 들어주는 게 아니다.
나 스스로 선택을 내린 것이다.
"임산부는 조용히 태교하고 있어."
임신한 아내를 대신하여.
"테라의 장모님도 구하고, 20년의 지구에 있는 장모님도 구하고."
장인어른? 그런 건 알아서 살라고 하지.
"마지막으로...."
나는 계약서의 서명란에 이름을 기입했다.
"간부로 타락하기 전의, 정령으로 타락하기 전의 -롸-양도 구해야 하지 않겠어?"
테라가 멸망당한다는 것은 과거의 신라가 또 똑같은 고통을 겪는다는 것.
나는 이번 일을 통해 그 역사를 지워버릴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지?"
"간단합니다."
계약서를 받은 하선태는 내게 가상현실 기기의 새로운 패키지를 건넸다.
겉에는 아무것도 없는, 안에 팩 하나만 달랑 들어있는 패키지였다.
"전용 기기를 가져왔습니다. 외부와 간섭이 이루어지지 않는, 철저히 이면에서 움직일 수 있는 기기입니다. 안심하시길. 만약 당신이 그 세계에 갇힌다면, 제 위상과 바꾸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을 꺼내오겠습니다."
달칵.
나는 캡슐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헤드기어처럼 착용하는 기기와 달리, 완전한 풀다이브처럼 생긴 모습에 너무나도 리얼한 기분이 들었다.
"후."
솔직히, 불안감은 많다.
하지만 그 불안감을 이겨내야한다.
그래야 나를 사랑하는 여자의 과거도 지킬 수 있으니까.
'예습은 다 끝났어.'
정말로 도움이 되지는 않지만, 테라에 대한 신라의 기억은 온라인 게임 홈페이지에 있는 게임 세계관 소개만큼의 도움은 되었다.
지수화풍광암환의 일곱 원소로 뒤덮인 세계.
원소의 힘으로 살아가는 주민들.
그리고 각 원소의 '신'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 중세 판타지 세계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다이브 뿐.
"다녀올게. 둘 다."
"......당신."
신라는 내 양손을 꼭잡았다.
그러다가 눈을 지긋이 감고는 한 손을 석하랑에게 내밀었다.
"당신도 손 잡아줘요. 응원해주는 거예요."
"뭐...어련히 잘 알아서 할 거라고 믿기야 한다만."
석하랑은 붉어진 눈시울로 내 손을 꼭 붙잡았다.
"우리 엄마...꼭 구해줘."
"...당연하지."
나는 둘과 키스를 나눴다.
이미 어제 마지막 섹스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열의를 불태운 만큼, 이미 나는 떠날 준비가 다 됐다.
손을 놓고.
나는 기기에 몸을 맡겼다.
"링크, 스타트."
나는 예습한 자료를 바탕으로, 테라로의 첫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나는 아주 멋진 광경에 넋을 잃었다.
"와...."
절경이다.
힐링 여행으로 영상을 보면 거기서나 나올 법한, 사람의 행적이 드문 숲이었다.
새들이 지저귀고, 꽃들이 피어나고, 이런 화창한 숲은....
'언젠가 불에 전부 타들어가겠지.'
세계를 지키는 당사자들에 의해, 세계는 멸망할 것이다.
타락한 신들은 세계를 멸망시킬 첨병이 되어, 주민들을 괴수로 만들고 학살할 것이다.
그런 미래는 막아야한다.
신라를 위해서.
석하랑과 석하랑의 장모님을 위해서.
그러므로, 내가 지금 해야할 가장 첫번째 행동은....
"로그아웃."
빠져나왔다.
* * *
"응? 왜 울고 있어."
"오빠야, 비장하게 들어가놓고 1분도 안 돼서 다시 나오면 우리가 뭐가 되는데?"
"그야 다시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걸 확인하는 게 중요하잖아. 나 또 이계에 영원히 갇히는 건 싫다고."
"...가자마자 뭘 한 건데요?"
"구경하자마자 바로 로그아웃 했는데."
"아니, 보통은 상태창부터 말하는 게 정석 아니예요?"
"게임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세계를 구하러 가는 건데, 상태창 같은 걸 찾을 리가 없잖아."
"......."
"내, 내 눈물 돌려줘!!"
다시, 링크 스타트.
* * *
돌아왔노라, 테라여.
'5분만에.'
나는 다시 테라에 접속했다.
'들어가자마자 로그아웃한 판단은 완벽했는데.'
왜 혼이 났는지 모르겠다.
'집에 돌아갈 수 있는지부터 확인하는 게 급선무잖아.'
나는 분명 완벽한 판단을 내렸는데, 신라와 석하랑에게 혼나고 말았다.
상황을 모니터링하고 있던 유나에게도 그만 한 소리 듣고 말았다.
"...아아. 들리나?"
대답은 없다.
하지만 내가 말을 함으로써, 나와 연결된 '패스'를 통해 저쪽에서는 내 상황이 모두 보이고 들릴 것이다.
"최소한 두 시간은 돌아다니면서 데이터 모으라고 했으니까, 일단 두 시간 뒤에 로그아웃한다?"
연락이 전해지지 않으니 뭔가 알 수가 있나.
일방적으로 혼자서 떠드는 셈이 되겠지만, 그래도 나는 분명히 나를 지켜보는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숲이야."
"나무야."
"버섯이야."
"물이야."
"괴수야."
"......어, 괴수야."
내 앞에는 막 괴수가 나타났다.
토끼처럼 생긴 짐승을 먹어치우는 괴수는 몹시 익숙한 형태였다.
테라사이트.
동물에 기생하여 그 대상을 마수로 만들어버리는 성주의 첨병.
들어오자마자 사람에 기생하는 테라리스트와 만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지만, 문제는 저 괴수가 나를 포착했다는 것.
크르르....
놈은 나를 경계하며 이를 갈았다.
나는 물에 비친 내 모습을 가볍게 훑었다.
테라 식 복색을 최대한 유지한, 중세 판타지 버전 지휘관 코트.
아무리 봐도 고위 신관같은-드높은 천상에 있는 천사의 로브 같은 모습이기는 하지만, 멋은 분명했다.
석하랑의 흰색.
이유나의 금색.
그리고 신라의 청색을 적절히 섞은 내 옷은 조금 튀더라도 현실에서 입고 다니고 싶을 옷이었다.
이계로 넘어온 내가 어떻게 이런 옷을 입고 있느냐하면....
'그쪽에서도 이걸 입고 있으니까.'
이른바 디폴트 복장인 셈이다.
그리고 셋의 마력으로 이루어져있기에, 아무리 테라사이트에게 기생당한 짐승이라고 해도 나를 감히 넘볼 수는-
캬아악!!
놈은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코트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반격할 준비를-
"하-앗!"
뭔가 기합과 함께, 금빛의 궤적이 그려졌다.
서걱!
마수는 순식간에 반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 뒤로, 나는 금발벽안의 여기사를 볼 수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다행히 언어는 잘 들린다.
"...괜찮다."
편안.
'편안한 거시에요'와 같은 말투는 이제 없다.
이제는 겉모습 그대로 돌아다닐 수 있다.
"감사를 표하지. 덕분에 살았다."
다만 이건 신라의 주문이라, 다소 고압적인 태도로 나가기로 했다.
내 남편이 내 아랫것들에게 무시당하거나 하지 않도록, 처음부터 알아서 오해하도록 만들라는 신라의 부탁이 있었다.
"당신은...도대체...?"
"나?"
정해진 대답은 하나.
"나는 피닉스라고 한다."
피닉스.
이것만큼 나를 정확히 표현하는 말이 또 어디에 있을까.
"당신은...왜 이곳에?"
"음...."
정해진 교본대로.
대답은 하나 뿐.
"모르겠군. 기억 나는 건 두 가지 밖에 없어."
"두 가지?"
"내 이름. 그리고...내가 반드시 해야하는 것."
나는 나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나는 사랑하는 내 아내를 찾아야한다."
하신라.
석하랑.
이유나.
세 명이 공통으로 내민 조건.
그것은 바로 '유부남 커밍아웃'이다.
"아내...요?"
"그래.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는...나의 아내. 이름조차,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지만...확신해. 나는 그녀를 보면, 반드시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 거야."
불꽃의 신.
나는 과거의 신라를 구하러 왔다.
* * *
"...점마 얼굴 보고 반한 것 같은데?"
"이름 나오면 기록해둬요. 어디서 유부남이라고 하는데도 반하고 지랄이야."
[알겠어요. 헤에, 눈빛 풀린 거 봐라...?]
셋은 피닉스의 시야로 테라를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