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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792화 (792/1,497)

〈 792화 〉2부 7장 24 헬조선 빌런의 기본 소양

게임을 잠시 멈춘 뒤.

인간인 나는 밥을 먹어야 한다.

신진대사의 일부를 신라에게 맡겨 인간으로서 꼭 해야하는 일 중 몇몇을 하지 않게 되기도 했지만, 기본적인 영양분 공급은 필요하다.

그리고 기분이라는게 있다.

내가 이 집의 가장으로서, 신라와 석하랑에게 밥을 해주는 것은 나의 몇 안 되는 소소한 재미 중 하나다.

그래서 모처럼 거하게 식사를 준비하고 함께 밥을 먹으려고 하니....

"뭐 바라는 거 있어?"

"음...."

"일단 보고."

신라도 석하랑도 고민에 잠긴 얼굴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뭔가를 바라는 눈치인데 차마 말하기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뭔데? 말해봐."

"아니예요. 나중에 말할게요."

"우리 사이에 무슨 비밀을 챙긴다고 그래?"

"비밀이라기보다는 부끄러우니까 그렇지. 마, 암만 우리가 볼짱 다 본 사이라고 해도 최소한의 매너가 있는 법이다."

여자의 비밀이라는 건가.

이제와서 그런 걸 챙기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 싶다만, 그래도 그런 매력이 있는 것이 또 색다른 느낌이 있다.

'너무 없으면 그건 좀 그렇지.'

여자친구가 아내가 되고 당신이 되는 순간이 가장 위험하다더라.

아내를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아니라 인생을 함께 헤쳐나가는 전우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 때는 사랑이 아니라 의무감으로 살아가는 단계라고 그러더라.

그 때가 가장 위험하다.

남자가 사랑을 잃어버리고 다른 여자가 다가오는 것에 설렘을 느껴, 결국 바람으로 이어지게 된다.

신라와 하랑이 스스로 그런 걸 지양하기로 했다면, 나는 묵묵히 앉아서 이들의 매력을 받아먹으면 그만이다.

"기대할게."

"으, 응."

"기대까지야...."

둘은 도대체 어느 정도 수준으로 나를 깜짝 놀래키려는 걸까?

'알몸 에이프런은 이미 했고, 인간 선물도 했고, 코스프레야 하루 이틀이 아니지. 결국 최근에 하기로 한 건 오네쇼타 플레이인데.'

히드라를 공략하고 난 뒤, 나는 누님이 된 신라와 하랑을 상대로 3P를 하기로 했다.

D컵 석하랑이라는 것이 과연 자지 22cm 선의철이라는 것처럼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지만, 이계의 존재가 게임 속에 갇혔다가 현실로도 나올 수 있는 세상인데 불가능한 일이 어디있겠는가?

모르는 일이다.

어느 세상에는 22cm 자지의 선의철이라는 존재가 이 여자 저 여자 다 범하고 다니는, 그런 기적과도 같은 세상이 존재할 지 모른다.

'D컵 석하랑에게 블루베리 라떼를 받아먹는다.'

...은근히 좋을 지도?

좌측에 신라를 두고 딸기라떼를 마시고, 우측에 하랑을 두고 블루베리 라떼를 마신다.

그러다가 두 가슴을 가운데로 모아 좌우로 유두를 동시에 깨무는 그런 플레이도 가능할 지 모르겠다.

'근데 이 정도도 약하단 말이지?'

이들이 이렇게-특히 신라가-기대감 어린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는 건 처음이다.

도대체 어떤 플레이를 해주려고 하길래 나를 이렇게 감질나게 하는 걸까?

"신라야. 히드라 공략 끝나면 바로 다음 챕터인 거 알지?"

"아, 네. 분명...히카리 구출 작전이었죠?"

"그래."

히로인 No.5.

정상적으로 게임을 플레이한다면 유나-라온-누리-가온에 이어 다섯 번째로 합류하는 캐릭터다.

히메지 히카리.

천재 기술자로 어떤 이능력 서브컬쳐 작품이든 한 명 쯤은 존재하는 '박사 캐릭터'.

일본인에 과거 교토 출신의 오랜 왕가 혈통이었으나 이지메를 당한 뒤, 모종의 이유로 한국으로 왔으나 아주 나쁜 사람에게 붙잡혀 한국 내 빌런의 하수인이 되었다.

그런 그녀가 게임에서 처음 등장하는 건은 지휘관에게 남들 모르게 'SOS'를 보낸 것.

일명 '히카리 챕터'라고 불리는 스토리는 히드라 챕터가 끝나는 즉시 진입 가능한 챕터다.

SOS는 언제든지 들어올 수 있고, 지휘관이 히카리가 보내는 신호를 얼마나 빨리 캐치하느냐에 따라 이후 스토리 진행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히카리 구출에 성공하면...본격적으로 큐브 공략이 가능해지겠네요?"

"응. 히카리 챕터부터 큐브의 존재가 공식적으로 드러나니까."

정상적인 플레이라면, 플레이어는 구출한 히카리의 폭로를 통해 다크 레기온과 큐브의 상상도 못한 정체에 대해 알게 된다.

히카리를 구출하지 못했더라도 히카리가 남긴 데이터를 통해 메인 스토리의 흐름을 알 수 있다.

"대전 과학 단지, 비밀 연구소 지하에 있는 큐브. 그게 밝혀지게 되겠지."

대전에는 큐브가 있다.

지하 깊숙한 곳에 박힌 큐브 위에 연구소가 세워지고 극비리에 운영되며, 히카리는 이곳 연구소에서 그 누구에게도 정체가 알려지지 않은 채 고문에 가까운 삶을 지내고 있다.

나로서는 20년의 지구에서 두번째로 큐브를 얻었던, 그리고 잊지 못할 장소 중 하나.

"그러고보니 오빠야...거기서 우리 아빠랑 한 판 붙었제?"

"그랬지."

나는 거기서 광검 허윤환과 붙었다.

광검의 궁극기 속에서 그를 정신적으로 사정없이 몰아세웠고, 결국 강철같은 정신력을 가진 그를 포기하게 만드는데 성공했다.

"괴인이니까 가능한 방법으로."

"정말.... 이 인간이 어떻게 싸웠는지 알아요? 뼈를 내주고 살을 취했다니까요?"

신라는 구시렁거리며 내게 불만을 토해냈다.

"내가 그렇게 몸 아껴가며 싸우라고 몇 번을 얘기했는데."

"그 때는 기억을 저당잡혀있었을 때니까 괜찮지 않나?"

"기억과 상관없이 영혼에 딱지 내려앉도록 말했는데 안 들었잖아요! 어차피 재생되는 몸이니까 괜찮아라면서."

"그랬지.... 미안."

나는 신라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생각해보니 괴인체로만 상처입히려고 했는데, 인간형으로도 상처를 입혔던 것 같아. 인간형은 절대 피 못보게 했어야 했는데."

"...오빠야, 진짜 미쳤네."

"그 때는 미쳐있었지. 누구 구한다고."

괴인이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그 때의 고난이 있었으니까 이렇게 서로 같이 밥도 먹고 할 수 있는 거지. 다들 국 식겠다. 모처럼 차린...음...."

"왜 그래요? 뭐 잘못된 거 있어요? 음식 식은 거 있으면 말해요. 금방 데울테니까."

"...이거 보니까 생각난다. 인게임이지만 빨리 히카리를 구해야겠네."

"와?"

석하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히카리, 그래도 좀 편하게 사는 거 아니야?"

"그건 20년의 히카리구요. 25년의 히카리는 상황이 완전 달라요. 우리는 히카리를 한국에 넘어오자마자 구했지만, 인게임 속 히카리는 엄청난 고문을 당하고 있다고요."

신라의 목소리에 점점 불이 붙었다.

"매일매일 철야에 가까운 연구.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기름과 코어와 철판만 만져야하는 삶! 여자다운 삶이 아니라 연구원으로서 계속 살아가게 되는 거라고요."

"그거 히카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삶 아이가?"

"물론 둘다 똑같기는 해요! 하지만 그녀는 지금 모진 고문을 당하고 있다고요! 빌런은 한국인! 히카리는 일본인! 그럼 어떻게 되겠어요?"

"...설마."

석하랑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내, 내가 원작 플레이 영상 볼 때는 그렇게 심각하지 않던데? 뭐 안 보이는 곳을 때렸나? 멍든 거 치료하고 재생시키고 뭐 그런 거 아니제?!"

"별 건 아니고, 뽕을 맞았어."

"뭐...?"

내 말에 주변 온도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설마...마약에...?"

"국뽕이요."

"뭐...?"

"히카리, 국뽕을 주입당했어요. 매일 아침 8시부터 10시, 그녀에게는 자신을 납치한 빌런과 함께하는 일이 하나 있어요. 그게 뭘 것 같아요?"

"어...음...뭐 역사 교육이라도 하나?"

"그런 거라면 다행이지."

히카리 루트를 탄 모두가 경악하고 말았다.

게임을 플레이하거나 자막이 달린 실황 영상을 본 이들도 모두가 공포에 빠졌다.

히카리에게 주입된 국뽕.

그것은....

"히카리, 매일 아침드라마 강제로 봐야해요. 그것도 막장으로만."

"......."

석하랑은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 * *

인게임.

대전 연구 단지 지하 8층.

아무도 모르는 지하의 8층, 검은 장발의 단아한 여인은 초췌한 얼굴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짜악!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모니터 속에는 한 여인이 손에 뭔가를 들고 남자의 뺨을 후려치고 있었다.

뺨을 얻어맞은 정장 남자는 자신의 뺨에 묻은 것을 만지작거리며 허탈하게 웃었다.

-기, 김치...?! 거기에...치킨이라고...?!

-그래! 종갓집에서 담근 김치로 만든 치킨이다!

"협찬이네. 김치양념치킨을 먹으라고 판매하다니, 이 나라는 안 망하나."

여인은 피로에 찌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커 쥬 올 마 이 걸-

"아, 끝났다."

여인은 조용히 모니터를 내렸다.

마침 시간도 10시를 정확하게 넘긴 때였고, 여인은 바로 가상 키보드를 꺼내 빠르게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오늘의 감상문.... 드라마 정말 재미있었죠? 우와, 정말 먹고 싶은 치킨이예요.... 그런데 여러분, 그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사실 김치양념치킨이라는 게...."

여인은 빠르게 자판을 두드렸다.

중간중간 하얀 대머리 캐릭터가 정면을 바라보며 놀라는 이모티콘도 함께 넣으며, 그녀는 장문의 '김치양념치킨' 리뷰를 마쳤다.

"세상에 존재하지 말아야 할 것이 두 가지 있다면, 그건 민트초코랑 이걸 거야."

여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리클라이너 의자는 여인의 움직임에 따라 자연스레 뒤로 넘어갔고, 여인은 천장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방송국 싹다 망해버렸으면 좋겠다...."

여인의 목소리에는 깊은 절망감이 가득했다.

벽면에 비친 또다른 모니터에는 당장 괴수의 습격을 당해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신서울의 사람들은 김치양념치킨의 리뷰를 보며 하하호호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조종'을 당하는 입장이였고, 그나마 지금의 자유도 수 년간의 조종 속에서 얻어낸 잠깐의 휴식일 뿐이었다.

[히카리.]

"히, 히익?!"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여인, 히카리는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뒤에는 검은 로브를 쓴 인영이 갑자기 나타나 히카리에게 뭔가를 건넸다.

[VVVIP로부터 들어온 의뢰다. 만들 수 있나?]

"어, 어디...."

방금 전까지 무기력함을 보이던 히카리는 겁에 질려 벌벌 떨었다.

검은 로브의 사람이 금방이라도 자신을 해코지할 것 처럼 두려워하며 데이터를 넘겨받았다.

"이, 이건...?"

[소프트부터 하드한 정도까지, SM플레이를 하기 위한 도구들을 만들어달라더군. 코어의 마력을 집어넣으면 가동할 수 있는 걸로.]

"SM 플레이...?"

[그래. 클라이언트의 주문에 따르면 촉수 플레이가 좋을 거라고 하더군. 기계 촉수 플레이라...후후, 아주 떼돈을 벌겠어. 할 수 있나?]

"시, 시간과 예산을 좀만 더 주시면...."

[뭐?]

검은 인영은 히카리에게 다가와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김치양념치킨을 민트초코에 찍어 먹고 싶나?]

"아, 아니예요! 금방, 금방 만들게요!!"

[그래. 히카리, 나는 너를 믿는다.]

사락.

인영은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한동안 거칠게 숨을 쉬던 히카리는 사색이 된 채 의뢰서를 붙잡았다.

"SM플레이...VVVIP...앗, 설마...?"

히카리의 눈에서 서서히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만약 내 생각이 맞다면."

꽈아악.

"...이게, 내 희망이야."

히카리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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