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0화 〉2부 7장 13 폭로
히드라의 진의를 파악하게 된 뒤.
나는 그와 녹화 방송이라는 이유로 오랜만에 부부침실에서 따로 게임을 플레이하기로 했다.
"쇼타콘의 말로가 마망이라니, 어처구니 없네요."
[이쪽 세상의 원전을 생각해도 그렇기는 하지.]
이쪽 세상의 원전, 그러니까 우리 '정령'들이 본래 테라의 여신들이었던 위상은 이쪽 세계의 신화 속 존재들과 매칭이 이루어지는 이들이 존재한다.
히드라같은 경우에는, 정령 지륜같은 경우에는....
"가이아?"
[가장 유명한 대지모신이지. 한 신화의 주축이기도 하고.]
히드라.
그녀는 이 세계의 지구로 따지면 그리스 로마 신화의 가이아와 같은 존재였다.
신화란 전해져내려오는 이야기를 후대의 사람들이 모아 엮어 책으로 정착되기에 실제 이야기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내가 아는 지륜과 가이아의 위상은 같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대지모신.
그런 존재가 정령으로 격하되고, 악의 조직 간부가 되었다.
"왜 쇼타콘."
[그건 지금부터 직접 물어봐야지.]
그는 내 머리 위에서 주변을 둘러봤다.
우리가 있는 곳은 부산의 김해국제공항.
인천 쪽을 한 번 정리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해외에서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는 항공길은 김해가 유일하다.
그리고 현재 이 김해국제공항은 이곳이 한국인지 아랍계 국가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아랍계 외국인이 많았다.
"오오, 살라딘, 오오...!"
터번을 두르고 자신이 아랍계 사람이라고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절박해보였다.
"외노자...네요?"
[불법체류자이기도 하지. 한국에 돈벌러왔다가 서울 붕괴 이후로 고국에 돌아갈 방법이 끊긴 사람들이기도 하고.]
서울 붕괴 이후.
한국에 있던 외국인 노동자들 대부분은 고향으로 돌아갈 방법을 잃었다.
인천국제공항이 파괴되고 김해로 비행기가 드나들게 됨에 따라, 주요 선진국을 제외한 모든 비행기 노선은 괴수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는 이유로 항공편이 모두 소멸되었다.
이들이 고향의 가족과 만나러 갈 수 있는 방법은 단 두 가지 뿐.
하나는 그나마 가장 가까운 선진국에 내린 다음, 육로를 통해 국경을 넘어 본국으로 돌아가는 방법.
"살라딘! 저를 데려가주세요!!"
"고향에 어머니가 있어요!!"
그리고 또 하나는 이렇게 자신들의 처지를 이해해줄 수 있는 동포에게 기대는 것 뿐.
"멈춰!!"
"큭, 진정해! 살라딘의 심기를 거스르면 너희는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가지 못한다고!"
그들을 수많은 이능력자들이 바리게이트를 치고 막고 있었다.
저들은 협회에서 파견된 이능력자인 동시에 선의철 휘하의 부하들이었다.
"진정...하라니까! 씨발, 이 자식들이...!"
"하지마. 그러다 죽으면 우리가 딲여."
"젠장...!"
그들의 표정은 가히 좋지 않았다.
불법체류 노동자들을 벌레 보듯이 바라보며, 그들이 살라딘에게 손을 뻗으려고 하는 것을 마치 벌레가 살아남기 위해 꿈틀거리는 것처럼 여기는 눈빛이었다.
"저러다 다같이 괴인 될텐데."
먼 훗날, 아니 조만간.
약 반 년 뒤, 최종전을 앞둔 시점에서 괴인이 될 자질을 가진 인간들은 너나할 것 없이 사이좋게 괴물-테라리스트가 된다.
자신의 절박함에 공항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이들도, 명령에 복종하면서도 절박한 이들을 경멸하는 이들도 모조리 사람을 학살하는 벌레 괴물이 된다.
그리고 그런 괴물들을 지휘하고 군단으로 부리는 자들이 바로 '플레이어가 공략하지 못한 괴인들'이다.
"...말씀드리는 순간, [살라딘]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와아아아아!!
근처에 있던 기자의 말과 함께, 많은 이들이 박수를 치며 살라딘의 방문을 환영했다.
하얀 터번을 두른 그는 전형적인 아랍계 남자들의 복장을 두른 채, 예상보다도 더 얌전한 얼굴로 대합실로 들어왔다.
"충성. 반갑습니다. 저는 히어로 협회 소속으로...."
"쯧."
살라딘은 자신을 안내하기 위해 온 협회의 남자를 향해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기본이 안 되어있군."
"......이쪽으로 오시지요."
대놓고 모욕을 들은 남자는 꿋꿋하게 살라딘을 인도했다.
나는 그의 표정을 보면서 절로 비웃음이 터져나왔다.
"지금 여자가 자기 마중 안나왔다고 저러는 거죠?"
[정확히는 자기 급에 맞는 여자가 안나왔다 이거지.]
우리의 시선은 나의 마도기어로 향했다.
'석하랑.'
S급 히어로를 맞이하는데 당연히 그 나라의 S급 히어로가 마중을 나오는 것이 도리다.
하지만 석하랑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에 살라딘은 몹시 불쾌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해는 한다.
하렘왕이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으니, 세상 곳곳의 미녀들과 살을 섞으며 노는 걸 좋아하겠지.
나도 남자가 나를 시중드는 건 그를 제외하고는 무조건 사양이다.
그러나 국제적인 관점에서, 외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상황은 무조건 아웃이다.
어찌됐든 살라딘은 원탁의 히어로이며, 전세계에서 가장영향력이 강한 세계구급 영웅이다.
[그거 아나? 살라딘은 자신이 방문한 나라의 여자를 납치해가는 취향이 있지. 이능력자는 확실히 티가 나니까, 적당히 반반한 여자를 데려가 자신의 하렘에 가두는 거야.]
"그럼 보스 살라딘 전에서 그의 부하들로 나오는 여자 괴인들이 혹시...?"
[그래. 납치당한 여자들이지. 본인이 원해서 들어간 경우도 있지만, 살라딘을 대접하려는 국가들이 일부러 한 명 희생양을 집어던진 경우도 있었어. 그래야 나중에 차원문이 열렸을 때 도우러 올테니까.]
"잔인한 일이네요."
그런 존재의 환심을 사기 위해 허니 트랩을 펼친다거나 하는 건 공공연한 일인만큼, 그의 주변에 철저히 남자를 배치하는 건 사실상 살라딘과 척을 지겠다는 것과 마찬가지.
"미안하지만 당신은 이제 영웅이 아니예요."
여자 영웅이었다면 그를 살려두는 길을 고민해봤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다.
이에 나는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던 명언을 상기했다.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겁탈하라."
[그거, 그냥 평범한 약탈꾼들 대사 아닌가?]
"여자가 그런 걸 한다는 게 포인트예요. 푸흐흐."
지금은 낮.
햇빛이 가장 강한 시기.
음습한 괴인의 실체를 낱낱이 파헤치기에 너무나도 좋은 때다.
현재, 나의 동료들은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모종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잠복해있다.
괴인 살라딘을 죽이기 위해서.
* * *
기자회견장.
"하하하, 그렇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정해진 질문과 정해진 답변이 오고 가는 기자회견장의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화목했다.
화목하지 않으면?
세계가 멸망으로 달려가는 이 시대에 S급 히어로는 각국 정상보다도 더 중요한 요인이었다.
연예인과 비슷한 인기를 가지고 있으면서, 정치적 중요도는 여느 나라의 대통령이나 총리보다도 높으며, 국가가 억제할 수 없는 한 명의 개인이기에 많은 나라에서 노리고 있는 인재다.
S급 히어로가 어느날 갑자기 망명했다.
원래 국가와는 척을 지게 되겠지만, 노골적으로 욕을 하지도 못한다.
혹시나 그가 앙심을 품고 자신들을 구해주지 않으면 어쩌나하는 걱정 때문에.
하지만 S급 히어로의 망명을 기대하는 이들의 입장은 다르다.
처음에 남자가 다가가 인사를 하는 것부터 접대가 조졌구나 싶었지만, 정말 다행히 기자회견장으로 넘어온 순간부터는 상대적으로 분위기가 화목했다.
심기를 거슬리게 하는 질문은 모조리 쳐냈고, 살라딘을 물고 빠는 이들로만 가득 채워놨다.
"후.... 어떠냐, 하하. 이게 헬조선식 접대의 뽕맛이다."
히어로 협회의 부회장은 얼굴에 금칠을 하다 못해 금을 부어버리는 기자들을 보며 감탄했다.
인적사항을 꿰고 있는 것은 기본이고, 영웅 살라딘의 업적을 시시콜콜한 것까지 전부 알고 그를 칭송하느라 혀가 쉬지를 않았다.
"...혹시 한국에 와서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은 히어로는 있습니까?"
130번 질문이 들어갔다.
부회장은 예상 답변을 꺼내들었다.
S급 히어로들끼리 서로 치켜세우는 것은 관례 중의 관례.
아마도 광검이거나, 설화공주의 이름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그렇군요...개인적으로라. 개인적이라면 한 명 만나고 싶은 여성분이 있습니다."
"...응?"
부회장은 뭔가 찝찝한 분위기에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예전에 큥튜브에서 그걸 본 적이 있습니다. 지하상가였던가요. 거기서 날뛰는 괴인을 상대로 체구는 작지만 당차게 괴인을 쓰러뜨리던 그 소녀. 아, 소녀가 아닌가요? 그녀를 만나고 싶군요."
"...이런 젠장."
부회장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자신보다 훨씬 큰 이를 상대로도 물러서지 않는 강인한 용기. 그것이야말로 히어로의 귀감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그 꼬맹이, 그 또라이 팀인데."
부회장은 살라딘이 말하는 소녀, 김누리의 소속을 깨닫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대한민국의 히어로나 헌터들 9할은 애국심과 가족애를 살살 자극하면 전부 넘어오게 되어있다.
9할이 많은 것 같지 않냐고?
안 넘어오던 이들은 국경을 넘어 외국인이 되었다.
이제 남은 이들은 자기들끼리도 '호구'라고 자조하며 웃는 이들밖에 없다.
그런데 애국심도 국뽕도 통하지 않는 미친 집단이 있다.
부회장이라 그들이 어떤 실적을 내는지 구체적으로 알고 있지만, 대외적으로는 한국으로 배경으로 마법소녀 이능력자 물을 찍는 미친 자들로 알려져있다.
"혹시 아시는 분 있습니까? 하하하."
기자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침묵했다.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이 쥔 질문지에는 광검과 설화공주에 대한 답변만 수두룩하지, 플랜 C도 D도 아닌 새로운 변수에 대응할 방법은 없었다.
"제가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이전까지 이런 기자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그녀는 막강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어우야."
분명 다른 기자와 비슷한 셔츠에 정장차림이지만, 가슴이 터질 것처럼 크다.
"매일큥큥신문의 천가은이라고 합니다. 답변을 하기 전에 먼저 제가 질문을 해도 될까요?"
"하하, 얼마든지요."
살라딘은 천가은을 훑으며 인자하게 웃었다.
다들 역시 남자라고 미녀를 좋아하는구나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매일큥큥신문이라니-"
"살라딘 님은 아이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살라딘의 표정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화기애애했던 기자회견장이 서서히 얼어붙기 시작했다.
"아이들...? 갑자기 저런 건 왜 물어보는 거야?"
부회장은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뭔가 큰 건이 터질 것 같아, 그는 초조해져서 자신도 모르게 천가은이 쥔 마이크를 빼앗으려고 다가갔다.
"그럼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살라딘. 당신은...."
"멈춰!!"
"로리콘이자 페도필리아가 아닌가요?"
살라딘.
괴인인 그가 노리는 히로인은 김누리.
그는 중증의 페도필리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