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7화 〉2부 7장 10
신라와 있을 때, 나는 특별한 고민이 없었다.
기껏해야 아침에는 어떻게 신라랑 할 지, 점심에는 어디서 신라랑 할 지, 그리고 저녁에는 무슨 옷을 입히고 신라랑 할 지 그런 고민밖에 할 게 없었다.
신라가 방송에 재미를 들렸을 때도 마찬가지.
하지만 석하랑이 들어오고 나서부터 나는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유나가 들어오면서 나의 고민은 더 깊어졌다.
선섹후결.
유나의 논리는 간단했다.
-시식코너 같은 느낌인 거죠. 섹스코너, 어때요?
유나의 논리에 나는 머리를 얻어맞은 것 마냥 정신이 다 얼얼했다.
이게 이유나?
아무리 히드라가 섞여도 그렇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는 여자란 말인가?
그래서 나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석하랑까지 들어온 이 시점에서, 내가 과연 유나까지 받아들이면 어떻게 되는지.
유나를 받아들여도 될 지.
그런 걸 신라에게 상담해봐야, 그리고 석하랑에게 상담해봐야 '답은 정해져있고 너는 박으면 돼'와 같은 말밖에 안 나올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누구에게 고민을 나눠야할까.
"하, 하읏, 아아...."
"하랑, 좀 더 세게...."
"......."
늦은 밤.
신라가 석하랑과 둘이서 오붓하고 끈적하게 나누고 있는 시각.
나는 석하랑의 방문 앞에서 둘이 비비는 것을 보았다.
"어머, 같이 할래요?"
신라는 나를 보자마자 얼굴 바로 앞에 있는 석하랑의 그곳을 향해 키스했다.
자신은 정작 석하랑을 얼굴로 깔고 앉은, 마치 69로 서로의 소중한 곳을 혀로 적셔놓는 듯한 플레이.
"하아, 하아. 오빠야...난입각인 거 같은데...?"
신라의 허벅지 아래쪽으로 고개를 돌린 석하랑은 내게 은근한 눈빛을 보냈고, 신라는 눈썹을 찌푸리며 혀를 좌우로 움직였다.
"나중에 새벽에 올게."
"아, 아아...! 새벽까지 시간 많이 남았잖아...!"
"좀 더 즐겨. 더 젖으면 그 때 올게."
"오빠야, 배신, 햐읏...!"
할짝, 할짝.
신라는 내게 윙크하며 다시 석하랑을 적시기 시작했다.
나는 문을 닫으며 가볍게 윙크했고, 시간을 확인했다.
늦은 밤.
이미 자정을 훌쩍 넘긴 시기.
어차피 내일은 아무것도 예정된 바가 없으니, 낮에 자는 걸로 수면을 보충하면 된다.
지금은 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는 문제를 해결해야할 때.
"...진짜 오랜만에 직접 플레이하네."
신라가 접속하기 전에 테스트를 했던 때 말고, 내가 안에서 직접 플레이어가 되는 건 사실상 처음이다.
예전에 신라가 배턴 터치로 나를 불렀던 건 예외.
그건 신라가 나를 부른 거지, 내가 순도 100% 내 '자의'로 들어간 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인게임 클리어 이후.
지구2020 클리어 이후.
나는 처음으로 나 스스로 게임에 접속하기 위해 헤드기어를 집어들었다.
'묻고만 오자.'
인게임 시간은 아마 저녁.
어제 신라가 남자가 되는 타이밍에 게임을 끝냈으니, 딱 맞게 남자로서 활동할 시간이다.
'게임이지만 여자가 되는 건 이제 질색이야.'
잠깐이지만 여자가 되어야 한다.
그건 이제 싫다.
그러므로 신라가 플레이하는 계정이 아닌 나의 원래 계정을 꺼낸다.
TS빔을 맞지 않은, DLC 업데이트는 이루어졌지만 인게임 플레이는 전혀 하지 않은 '그 계정'.
신라가 플레이하는 계정이 나의 명의로 만들어진 부캐라고 한다면, 내가 지금 접속하려고 하는 건 엄연한 나의 '본캐'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삐빅.
접속개시.
'파랑새.'
계정은 당연히 내 본래의 계정.
신라가 인게임 플레이를 위해 기기 내에 다중계정으로 접속하고, 내 세이브데이터를 복붙하여 이어받기 한 레즈플레이 용 계정이 아닌 순수한 나의 계정.
[Blue Bird 님, 접속하시겠습니까?]
과거, 내가 여기서 접속했다가 마그마 속으로 빠져버렸던 그 계정.
"예."
[접속 중입니다.]
삐빅.
"...에러났다고?"
[고객님의 계정은 장기휴면계정으로 현재 접속할 수 없습니다. 아래 홈페이지 주소로 접속하여 고객센터_장기휴면계정해지 서비스를 이용...]
"......씁."
너무나 오래 접속을 하지 않아서 그런 걸까.
"다른 계정으로 접속하면 자동으로 휴면 좀 풀어주지. 씁."
최초의 피닉스 루트 클리어 계정, BB는 휴면에 들어갔다.
"그냥 신라 거 쓰자."
여자가 되는 건 싫지만, 휴면계정 상태를 해제하느라 시간이 걸리는 게 아깝다.
다시 이계로 빨려들어간다거나 하는 걱정도 없으니, 아무 문제 없음.
계정 전환 중....
"......."
"사장님, 무슨 심각한 일 있으세요?"
"지금 몇 시지?"
목소리는 다행히 남자, 그러니까 나의 목소리다.
즉, 목소리도 남자라는 것은 내 몸 또한 남자라는 이야기.
"저녁 6시 33분이요."
마침 시간도 저녁이었다.
바깥이 아직 밝다고 생각해서 의아했더니, 해가 떨어지는 중이었다.
"그런데...유나야."
"네?"
현재.
나는 사무실 소파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유나는 내 소파 맞은 편에 앉아서 종이 편지 한 장을 꼭 움켜쥔 채 가만히 있었다.
이유나.
머리칼의 색과 헤어스타일은 다소 다르지만, 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장본인.
인게임에 들어오자마자 만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막상 이렇게 또 보니 당황스럽다.
"나 잠깐 1층 다녀올게."
"뭐 주문하시려고요?"
"아니. 사장님이랑 잠깐 남자끼리 이야기 좀 하려고."
"아...."
나는 엉거주춤 일어나려던 유나의 어깨를 두드리며 아래로 내려갔다.
1층, 카페 Padre Juan은 제법 늦은 저녁시간임에도 여전히 손님 한 명 없었다.
"크흠. 사장님."
마침 좋은 기회다.
'후안이라면 이 상황을 겪어봤을지도 몰라.'
AI지만 이미 나는 이 세계의 사람들을 AI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따라서 인게임 속 AI라고 해도 실제 인물에 준할 정도로 깊은 조언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무슨 일인가? ......음?"
막 냉장고로 손을 뻗으려던 후안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상담이 있어서 왔습니다. 일단 딸기라떼로 부탁합니다."
"에휴, 놀래라."
후안은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웃었다.
"분위기가 워낙 달라서 자네가 아닌 줄 알았네. 그 뭐냐, 도플갱어나 복제기계 그런 건 줄 알았어."
"분위기요?"
"그래. 눈에 색기가 없어. 현자타임에 내려온 줄 알았잖나. 자네가 그럴 리가 없는데."
"......."
평소에 신라는 어떤 눈으로 보이는 걸까.
객관적으로 봐도 사랑스럽기 그지 없는데, 일부 사람들의 시선에서 어떻게 보이는지 다소 걱정이다.
"농담일세. 그런데 라떼는-"
"따뜻하게 부탁드립니다. 40도 정도로."
"왜 하필 40도?"
"그냥 그 정도 느낌입니다. 너무 뜨거우면 델 것 같아서."
그게 사람의 체온과 가장 맞으니까.
나는 뒷말을 삼키며 신라의 맘마와 가장 비슷한 맛 음료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후안과 마주 앉는 자리에 앉았다.
"고민 상담 좀 들어주시겠습니까?"
"자네가 상담을 신청하다니, 의외로군."
"저도 어려운 건 어려우니까요."
본디 후안은 플레이어의 선택을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도우미 NPC다.
그런 만큼 그는 주인공의 고민에 대해 적절하고 확실한 조언을, 아니 정답에 가까운 선택지를 제공한다.
특히 연애에 관해서는 통달한 후안이라면 내 고민에 대한 좋은 조언을 해주리라.
"아는 사람 이야기입니다. 한 여자를 사랑하는데, 다른 여자가 계속 대시를 합니다."
"아는 사람 이야기가 확실하군. 자네가 한 여자 사랑한다고 했으면 일단 여기 전쟁터가 되었을테니. 흐흐, 그만큼 경솔한 사람은 아니니 말이야...."
후안은 사방을 눈으로 가리켰다.
나는 괜히 목 뒤가 뻐근했지만 당당하기로 했다.
에둘러 표현한 아는 사람은 인게임 속 '피닉스'의 이야기가 아닌, 현실의 내 이야기니까.
"그러니까...."
나는 유나와의 현 상황에 대해 어느정도 각색하여 털어놓았다.
"...알겠네. 결혼한 아내가 자기는 후처도 괜찮다고, 다른 여자랑 자꾸 결혼해도 된다고 하는 거지? 그게 농담이 아니라?"
"예."
"......이 간단한 걸 왜 고민하지?"
후안은 자신 몫의 커피를 마시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기 중동 쪽으로 가서 결혼한 다음 한국으로 넘어오면 되잖나. 사는 건 이 땅에서 살고, 검은 머리 외국인으로 말일세."
"사장님?"
"둘 다 결혼하면 된다는 말일세. 편의상 P와 S라고 하지. P도 자네를 사랑하고, S도 자네를 사랑하면 둘 다 품으면 되는 거 아닌가?"
"만약에 거기에 Y양도 생긴다면요?"
"1명 더? 흐음...."
후안은 진지한 얼굴로 턱을 쓸었다.
"다다익선이라고 했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지 않겠습니까?"
"여자 하나에 남자 여럿이 아니라, 남자 한 명이 여자 여럿 꽉 잡고 있는 거 아닌가? 그런 상황은 자고로 남자가 하기 나름이야."
후안은 먼 산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아는 사람 이야기일세. 아주 잘생긴 가 남미에 갔을 때, 그는 두 명의 자매와 만나게 되었지."
"프랑스 이야기 아닙니까? 둘 다 처녀였다는-"
"아, 그건 쌍둥이고! ......크흠."
"......예, 그래서 그분이 남미에서 두 여자랑 그렇고 그런 관계를 맺었는데요."
후안은 커피를 홀짝였다.
"셋은 금방 열정적인 관계를 맺었네. 그리고 두 자매는 한 남자를 두고 다투기 시작했지.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 줄 아는가?"
"서로 찌르거나, 한쪽을 크게 다치거나 하게 만들었습니까?"
"사이좋게 한 날 한 시에 임신하기로 했네. 법적인 절차는 연장자 우대로."
"......뭡니까, 그게."
"뭐긴. 아내가 공인하는데 집에 더 들어오겠다는 여자 마다하는 놈은 멍청이라는 얘기지."
후안의 조언은 간단했다.
-하렘을 걷어차다니, 머저리인가?
그는 눈으로 그를, 그러니까 이야기 속 아는 사람-나를 경멸하고 있었다.
"부담을 가지지 말라고 전해주게. 그가 가져야 할 건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여러 여자를 동시에 안아도 지치지 않는 열정적인 체력 뿐이지, 사회적 시선에 대한 부담감은 떨쳐내라고 해주시게. 주어진 운명이다, 하고 생각해야지."
"...알겠습니다. 반드시 전하겠습니다."
삑.
[게임을 종료하시겠습니까?]
예.
삐빅.
나는 게임을 종료했다.
"하렘인가...."
미연시 주인공도 아닌데, 현실인데, 결국 신라라는 존재로 인해 나는 그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단 말인가?
"운명...."
나는 헤드기어를 벗었다.
그리고.
"늦게까지 하시네요?"
"......."
헤드기어를 벗은 내 앞에는 붉은 눈동자를 반짝이는 유나가 웃고 있었다.
"신라 님이랑 하랑 언니가 기다리고 있어요. 어서 가요."
"너...언제부터...."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냐고요?"
유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그러게요.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더라."
유나는 한손을 볼에 붙이며 말갛게 웃었다.
"죄송해요. 오빠 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
"왜요. 오빠 몰래...덮칠까봐 놀랐어요?"
유나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첫경험 전까지는 안 그래요."
...그럼 그 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