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5화 〉2부 6장 09
흑화단 빌런들에 대한 정보는 차치하고.
다시 게임으로 돌아와서.
낮.
나는 여자인 상태로 흑화단 대응에 나섰다.
'결국 괴인들인 건 똑같죠.'
서울의 지하에 자리잡은 괴인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속 편하게 생각해서, 그냥 난이도가 올라갔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
SS+급 두 명이 있으니 그에 맞추어 난이도 조정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그렇기에 나는 우리 팀원들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가며 몇 번이고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정말 지휘관을 먼저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냥?
팀원, 히로인들의 안전.
김펜릴은 당연히 자신이 지키지 못하는 것에 우려를 표했다.
내가 아닌 유나나 다른 팀원들을 우선으로 지키면, 행여나 지휘관을 노리는 자가 나를 습격할 수 있지 않은가.
-펜릴! 크윽, 나를 구하지 말고 사장님을 구해!!
-지휘관이 먼저 너희를 구해라고 했다냥!
-안 돼 에 에 에---!
라는 미래가 펼쳐지더라도, 나는 위험을 감수하고자 했다.
서울의 지상이 정글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곳이라면, 서울의 지하는 무법지대와도 같은 질서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힘있는 자가 곧 질서이며 권력이다.
그곳에서는 선겨울이 지저여왕으로서 막대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떨지.'
선의철에게 피해를 본 이들이 과연 선의철의 딸에게 복종할까?
만약 복종한다면 두 가지 중 하나다.
선겨울이 히로인이기 때문에 진심어린 마음으로 그들의 협조를 구하는 소년만화 같은 이야기거나, 그게 아니면 원작 게임 답게 지하의 모든 이들에게 복종과 세뇌의 주문을 읊어 지저를 지배했거나.
'어느 쪽이든 반란 같은게 일어날 것 같지는 않지.'
선겨울이 신서울에서 돌아다니는 건 분명 잠시 서울에서 자리를 비워도 자신의 영향력이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이번 챕터는 선겨울을 공략해야하는 걸까?
'당신, 새로운 히로인인데 공략할 생각 없어요?'
[나는 너 공략한 걸로 충분히 만족하는데?]
'쳇.'
기분 좋은 말로 띄워주니 어떻게 넘겨볼 수도 없다. 나는 그냥 스피드런으로 밤일에만 집중하고 싶은데, 왜 내가 복잡하게 지휘관과 헌터와 괴인들의 알력다툼에 신경을 써야하는가?
'메인스토리 스킵 같은 거 없나?'
어차피 사람들이 바라는 것도 메인스토리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다는 히로인들이랑 비비고 보비고 지지고 볶는 미연시일텐데.
[이게 다 그걸 위한 빌드업이지.]
'너무 길면 질리는데요.'
[아지다하카를 범하고 싶어서 아주 난리구나?]
'다른 건 몰라도 걔는 좀.'
아지다하카.
괴인체인 그녀는 창녀지만, 정령인 앙그라 마이뉴는 처녀다.
조금 음험하고 음침하고 음습한 욕구를 가지고 있는 처녀라서 그렇지, 마음만 잘 맞으면 가장 공략하기 쉬운 캐릭터다.
무엇보다도-
[친구끼리는 보비는 거라면서 막 범하려는 거 아니냐?]
"쳇."
들켰다.
[절풍은 싫어하니까 패스했지만, 다른 정령들은 못참을테지.]
게임 속이라도 좋으니 제발 보벼봤으면!
다른 인간 히로인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사실 나는 정령들과 그렇고 그런 관계를 더 맺고 싶은 생각이 강하다.
그들과 비벼야만이 왠지 모르게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예감.
그러니 이번 챕터를 통해 아지다하카를 사로잡을 필요가 있다.
그걸 위해선 뒷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원작?
플레이 루트?
뒷 일?
보비는데 그런 건 이제 중요하지 않다.
'원래 피닉스 루트도 원래 흘러가야할 흐름을 개무시하는 걸로 열리는 거니까요.'
정도를 걷는다면 정상적인 엔딩이 나왔겠지. 하지만 먼저 선을 이탈한 건 아지다하카다.
'얌전히 괴인들을 이끌고 전국에서 날뛰었으면 이럴 일도 없었을 것을.'
먼저 헛짓거리를 시도한 건 아지다하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 잘못이 없다.
'철저하게 박살낸다.'
아지다하카.
지금부터는 내가 이 게임 속에서 가진 모든 자원을 활용하여, 그녀를 박살내고 정령 앙그라 마이뉴로 만들 것이다.
[한 때는 함께 세계를 다스렸던 동료 여신을 따먹기 위해서.]
"......."
틀린 말은 아니라서 반박하지 않기로 했다.
* * *
밤.
"우리는 서울로 갈 거야."
나는 사무실에 모두를 모았다. 따로 이전에 원작에 대한 대응을 이야기하지 않았기에, 팀원들 모두 내가 서울로 간다는 말에 대해 특별한 거부감은 보이지 않았다.
"서울이라...."
기껏해야 서울에 악연이 있는 라온이 잔뜩 긴장하는 정도.
"좋군요. 예전의 쓰라림을 씻어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 같습니다."
그나마 라온도 절치부심하며 서울로 가는 걸 학수고대하고 있다.
자신의 어린 시절 실책을 만회하기 위해, 그리고 혹시나 자신의 히어로 인생을 망가뜨린 존재가 아직 서울에 살아있다면 복수를 하기 위해.
"다들 자신감 넘치네. 좋아."
"하랑 언니는 못 온다고 해도, 펜릴이 지켜주니까 안심이니까요."
[미안해. 내가 거기는 같이 못 올라가.]
"맡겨달라냥."
우리 팀원 중 참가하지 못하는 사람은 딱 한 명 있었다.
석하랑.
사실상 우리 팀 전력의 쌍두마차 중 한 명이지만, 그녀는 대놓고 서울에 올라오지 못한다는 이유로 전력에서 제외되었다.
왜 올라오지 못하는가?
[내가 올라가게 되면 바로 서울수복작전이 시작될 거야. 한강 너머로 북진이 시작되겠지.]
석하랑이 움직이면 부산이 들썩이고, 선의철의 엉덩이도 들썩인다.
어떻게든 서울의 큐브를 가지고 싶어하는 선의철이기에, 서울 전역을 점령하고 큐브를 찾으려고 안간힘을 쓸 것이다.
"서울에 꿀단지 놔두고 온 것도 아니고 왜 그렇게 서울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니까. 그 꿀단지를 괴수가 날름 삼킨 것도 아니고 말이야."
큐브라는 아주 중요한 물건을 삼킨 자가 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하랑아. 서울에 있는 S급 괴수 반응은 아직 시청사의 뱀 뿐이지?"
[응. 다른 건 아직 반응이 없어. 적어도 지상에서는.]
"여의도에도?"
[여의도는...응. 여의도에도 없어.]
보스, 증발.
큐브를 집어삼킨 S급 괴수, 촉수꺼비는 여의도에 없다더라.
물론 레이더에 촉수꺼비가 잡히지 않지만, SS+급 반인반령이 된 석하랑이 눈치를 채지 못한다?
"펜릴아, 너는 어때?"
"정찰 다녀왔을 때는 여의도에 그런 거 없었다냥. 지상에는 뱀 한 마리 냄새밖에는."
"음…."
거기에 펜릴조차도 눈치채지 못했다.
필드보스, 소실.
'이것도 아지다하카의 영향인가, 아니면 뭔가 DLC에 따른 변화인가? 그도 아니면 TS빔에 쓰인 큐브가 촉수꺼비인 건가?'
그의 플레이 로그 상, 촉수꺼비는 언제나 여의도에 있었다.
큐브를 가지고 있던 존재가 모습을 감추고 사라졌다?
큐브가 누군가의 손에 들어갔다는 합리적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펜릴한테는 안 돼.'
1:1 전투를 생각해보면 펜릴은 상성상 밀리는 피닉스와 평양의 초특급 괴수를 제외하고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석하랑을 상대로 '죽일 수 있다'는 전제가 깔리면 무조건 펜릴이 이긴다. 그러니까 이번 챕터에서 위기에 대한 대응은 모두 펜릴에게 맡겨야한다.
"다시 한 번 더 말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너희들의 안전이야. 자기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나를 위한, 우리 팀원들을 위한 거라는 걸 명심해줘. 그러니까 펜릴에게 너희들의 안전을 맡긴 거야. 펜릴, 누구도 다치지 않게 할 수 있지?"
"물론이다냥. 대신 한 가지 제안이 있다냥."
펜릴은 음흉한 미소로 아이스박스 하나를 꺼내들었다.
"숟가락으로 퍼먹으라냥."
"...이건 설마."
"민트초코 한 컵 씩! 후안 사장님이 만든 특제 젤라토. 이걸 먹으면 내가 마도기어보다 더 쉽고 빠르게 찾을 수 있다냥. 이 몸의 감각은 청각이나 촉각보다 민트초코에 대한 후각이 더 발달해 있으니까!"
늑대는 개과고, 펜릴은 늑대다. 그러므로 펜릴의 후각이 뛰어나다는 건 이견의 여지가 없다.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몸에 센서칩 같은 걸 박아넣는 경우는 있었어도, 민트초코를 먹으라는 건 처음이군요."
"좋은 거 아님? 피부 다칠 일도 없잖음. 근데 사장님, 이거 먹는다고 진짜 알 수 있는 거? 양치하면 냄새 사라질텐데."
"혹시 양치 안하고 그런 건...아니겠...죠?"
음식으로 건넸더니 다들 오해를 했다. 민트초코 젤라토의 진짜 목표는 젤라토에 첨가된 '펜릴의 마력'이며, 그걸 우리 팀원들에게 먹임으로써 펜릴이 자신의 마력을 쉽게 찾을 수 있는데 의의가 있다.
"그럴 리가. 펜릴을 믿어. 설마 구취로 찾겠어?"
"그건 나도 싫다냥."
"펜릴은 믿지만…. 알겠어요. 사장님, 그럼 저희가 서울로 가면 뭘 하면 될까요?"
[너무 무리는 할 필요 없어. 괜히 시청사의 뱀 건드리면 안 돼.]
석하랑의 말대로다.
[전력이 충분하지만, 그렇다고 서울의 괴수들을 모두 죽이면 안 되는 거야. 이유는 말 안 해도 알 거고.]
"38선에 있는 더 강한 괴수들이 서울로 내려오는 것."
"그리고 서울이 비면 옳다꾸나 하고 히어로들을 움직이려는 자가 있다는 것."
팀원들은 이미 서울 수복이 당장 이루어져서는 안 될 이유에 대해 금방 수긍했다.
"맞아. 하지만 언제까지 서울을 그런 식으로 방치할 수 없지. 그러니까 우리는 그걸 위해 기반을 마련할 거야. 이번 작전의 목표는…."
나는 마도기어를 통해 모두에게 작전의 개요를 전했다.
"서울 바캉스."
"사장님, 작전 이름은 누가 지은 거예요?"
"...회사에서?"
다들 오라클 스튜디오를 생각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회사는 당연히 게임 제작사다.
바캉스라는 소제목과 달리, 그 내용은 끔찍한 전투의 연속에 불과하다.
'과연 이번에는 어떨 지 모르지만.'
변화를 직접 마주하기 위해, 우리는 서울로 향했다.
"스쿼드 발표할게."
지휘관에 나.
이유나, 박라온, 김누리, 김가온, 정슈리, 하유은(유하). 김펜릴.
"그리고 선겨울."
부산에 있는 석하랑과 모종의 이유로 잠시 이탈 중인 천가을을 제외하고, 우리 팀이 동원할 수 있는 최대 전력이다.
"잘 들어. 이번에 서울의 일은 이전과는 많이 다를 거야. 어쩌면...적을 죽여야 하는 일도 있을 수 있어."
[그게, 설령 괴수가 아니더라도?]
"물론."
좋게 말해서, 괴인으로 '코어'로 만든다고 하더라.
"제일 중요한 건 우리야. 우리의 적은...죽인다."
모두의 표정이 굳었다. 지금까지 내가 이렇게 표정을 굳히며 신신당부하는 경우는 잘 없었다.
[마법의 주문을 가르쳐주지.]
그는 내게 뭔가를 속삭였다. 나는 우리 팀원들을 훑어보며, 그가 말한 주문을 읊었다.
"서울 지하에 지휘관을 따먹으려는 놈들이 있다고 하더라."
"......헤에."
모두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푸엣취! ...크흠, 왜 이러지?"
1층 카페에서 아르바이트 중이던 천가을은 갑작스럽게 목이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