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4화 〉2부 6장 08
역수입.
서브컬쳐계열에서 흔히 사용되는 이 단어는 소위 '2차 창작'에서 인기를 끈 주요한 설정이 역으로 '원작'에 편입되는 경우를 말한다.
가령 매력적인 오리지널 캐릭터를 모티프로 한 캐릭터가 DLC에서 추가가 된다거나.
가령 팬들이 원하는 또다른 이야기가 IF 엔딩과 같은 형식으로 팬디스크 발매가 이루어진다거나.
가령 캐릭터의 성격에 2차 창작에서 인기를 끈 요소가 원작에 주기적으로 업데이트가 이루어진다거나.
이러한 요소들은 싫어하는 이들도 많지만 좋아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뇌절에 이르는 영역이 아니라면, 건전한 방향에서 이루어지는 정도라면 누구나 인정할 흥미 요소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이건 예상 못했는데요."
설마 그가 '원작에서 살아남기'를 하면서 했던 행위들이 DLC의 내용으로 편입될 줄이야.
"당신, 이거 알았나요?"
"알고 있었지. 커뮤니티 들어가보니까 DLC 특수 조건에 따른 스토리 변경이 있다고 스포를 당했거든."
"아, 그러면…."
스포일러라.
"그냥 당하는 걸로 하죠. 어차피 알고 있는 내용과 크게 차이는 없을테니까."
청화단.
흑화단.
서울에 자리잡은 괴인 조직이라는 건 똑같다. 단지 그들의 수장이 누구인가 하는 차이가 있을 뿐.
"기존 청화단이 양지를 추구하는 범죄조직이었다면, 흑화단은 음지에서 철저히 숨어 지내며 국가 전복을 꾀하는 빌런 조직이야."
"대통령 딸이 쿠데타 세력의 수괴란 말인가요?"
"실패하면 쿠데타고, 성공하면 혁명이라고 하더라. 그리고 플레이어들은 대부분 혁명을 일으키더라고."
그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약 90%의 플레이어가 선겨울 루트에서 혁명을 지지하게 된다더라.
이미 알고는 있지만, 예상은 했지만 스포일러를 당했다.
선겨울은 히로인이었다.
그것도 DLC의 메인 히로인.
"배신이에요. 그냥 일반 캐릭터랑 크게 다르지 않을 줄 알았는데. 천가을이랑 가슴 크기가 똑같다는 것만 빼면 딱히 다를게 없지 않나요?"
"그 가슴에 처녀라는게 지휘관들의 동정을 샀지."
"하여튼 남자들이란. 가슴에만 푹 빠져서 아주…으휴."
선겨울이 만들어진 배경은 천가을의 비처녀 속성을 갑자기 바꾸면 대대적인 욕을 먹을 것 같아서 새로운 캐릭터를 만든 것 아닐까?
마침 선의철과 사이가 좋지 않은 딸이라는 신분에서 오는 야릇한 꼴림이 분명히 존재했다.
선의철은 플레이 내내 방해요소가 되고, 대부분의 플레이어는 백희아를 통해 선의철을 물러나게 만들었다.
이제는 선겨울이라는 또다른 길이 생긴 셈이다.
"지저여왕 선겨울이라…."
"서울에서 신서울까지 땅굴을 파고있다던데?"
"뭐죠? 그거 북괴에요?"
"원래 음험하고 안좋은 것들이 게임 속 설정으로 구현된게 이 게임이잖아."
현실에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게 '있으면 아주 끔찍하겠다'싶은 것들만 모아놓은게 게임 원작이다.
설정 상 북한이 괴수에 의해 폭발하여 멸망하고 나니, 서울 지하에 있는 괴인들을 북쪽에서 내려오는 괴인-북괴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저기요. 이거 그 말로만 듣던 빨갱이 게임인가요?"
"그럴 리가. 만약에 그런 거였으면 흑화단이 아니라 대놓고 적화단이라고 했겠지."
"심의에서 벗어나려고 그런 건 아니고요?"
"그러기에는 이미 저질러놓은게 너무 많아서 의미가 없지 않을까?"
하긴. 당장 환룡 스토리의 메인 빌런만 하더라도 '모택평'이 아닌가?
모택평의 딸도 샤오린이라는 히로인으로 있는데, 선의철에게도 히로인인 딸이 생기지 말라는 법은 없다.
다만 분명히 신경쓰이는 요소가 있다면….
"흑화단. 도대체 왜 흑화단이죠?"
서울의 지하,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는 이유로 흑화단일까? 나는 이 미묘한 이름에 차마 평가를 내리기가 민망할 지경이었다.
"흑화단이 된 이유는 간단해. 그 놈 때문이야."
그는 흑화단의 전신, 흑화단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상당히 즐거운 것처럼 보였다.
"흑화라고 할만한 요소가 하나 있지."
그가 무한의 굴레에서 탈출하게 해준 '동료'들이었으니, 그들을 떠올리는 것으로 추억에 잠긴 듯 했다.
"흑염룡."
"네?"
"마스코트가 흑염룡이래."
"......."
용서할 수 없다.
"블랙 피닉스가 아니고요?"
"블레이즈 딥 다크 드래곤을 블랙 피닉스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
"......이름은 또 왜 그 모양이람."
역수입.
2차 창작에서 원작으로 역수입을 할 때, 직접 그 대상의 명칭을 들여오지는 않는다. 가급적이면 다른 설정을 추가한다거나, 누군가 봤을 때 '아, 그거?'할 정도로 적용하게 된다.
즉, 우리가 알던 흑염룡 곽용우는 DLC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흑화단의 마스코트는 누구란 말인가!
"흑염룡 곽영희래."
"세상에."
"흑염룡 여동생."
"...남매가 쌍으로 괴인이라니. 아니, 그 전에 곽영희라고 하면 그거잖아요. 피닉스의 육체와 똑같이 생긴 팔레트 스왑."
기억났다.
흑염룡 곽영희.
다른 이들보다 더 강한 힘을 추구하던 빌런 흑염룡은 진짜로 괴인의 힘을 받아들이고 괴수화되기도 했고, 추후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오다 그만 여자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게 바로 곽영희다.
무한의 굴레 속에서도 곽영희라는 사람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게 아무래도 DLC에서는 흑염룡의 유지와 의지를 이어받은 여동생이라는 형태로 등장하는 모양이다.
"다른 사람들은요? 설마 하늘성이랑 아키택트도 바뀐 건 아니죠? 등대는 그대로던데?"
"청화단 멤버들의 가족이나 동료, 지인 등으로 바뀌어있더라고. 전부…."
그는 회한에 찬 얼굴로 먼산을 바라보았다.
"여자로."
"......."
남자로서 알고 지내던 자들이 전부 여자가 되어 지휘관의 자지노예가 되어버렸다. 그는 어떤 기분일까.
"......걔들이랑은 하지마라."
"그건 당연히 안 하죠."
아무리 여캐라고 한들, TS설정이 가미되어 구현된 DLC의 여캐릭터들은 내가 바라지 않는다.
"제가 당신을 놔두고 왜 그런 짓을 저지르겠어요. 남자로서도 안 박아요."
"그런 것도 있는데, 걔들은 이미 엄청 불쌍한 애들이야."
"네? 왜요? 지하에서 원본들에게 박히기라도 해요?"
"그런 의미는 아니고, 새로 추가되었음에도 임팩트에서 밀려서 흑화단의 간손미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거든."
그는 상당히 창백한 표정으로 자료 하나를 띄웠다.
"DLC 난이도가 상승하면서 괴인도 몇몇 추가가 됐을 거 아냐. 이거 봐봐. 그 중 하나야. 흑화단의 원투펀치."
"...이 둘은…."
"하나는 S급 괴수 시청사의 뱀이 SS급 괴인이 된 경우.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촉수꺼비."
서울 국회의사당에 자리잡은 촉수괴물로, 촉수로 수많은 배드엔딩을 만든 신사들의 친구.
푸근한 인상의 그는 SS급 괴인이 되어 정장을 입은 채 미소짓고 있었다. 등에는 흐느적거리는 촉수를 달고.
"촉수꺼비는 진심으로 위험한 존재야. 그는…."
나는 그만 그 이야기를 듣고 정신이 나갈 뻔 했다.
* * *
<서울, 지하철 ?? 노선>.
서울에는 더이상 지하철이 움직이지 않는다.
정정.
서울에는 더이상 지하철이 기존 방식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타시죠."
크르르.
괴인들은 괴수들이 이끄는 마차를 가리켰다. 사족 보행의 괴수들에게는 목줄과 입마개가 채워져있었고, 괴수들은 마치 썰매견처럼 마차-처럼 꾸민 수레를 끌고 있었다.
"헤에. 재미있게 사네."
아지다하카는 조용히 수레 위에 올랐다. 수레에는 지하철에서 뜯어온 것처럼 보이는 좌석이 놓여있었다.
"지하에서는 이거 타고 다니는 거야?"
"철길로 움직이는 건 외부에서 귀빈이 올 때 뿐입니다. 경기 남부가 지상의 완충지대라고 한다면, 지하도는 지상과 지하의 완충지대라고 할 수 있죠."
두꺼비를 닮은 사내, '미스터 텐타클'은 수레를 끄는 괴수들을 가리켰다.
"저것들 모두 위에서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며 내려온 놈들입니다. 길들이느라 제법 고생을 했죠."
"괴수를 몽둥이로? 쉽지 않았을텐데."
"백번 시도하면 한 번 즈음은 성공하지 않습니까. 누가 말하기를...5성 가챠 뽑는다는 느낌으로 하니까 안 되는 것도 없더군요. 하하."
"흐응, 나머지는 전부 코어가 되었겠네."
끼이익.
괴수들이 수레를 끌기 시작했다. 그 속도는 지하철보다 다소 느렸지만, 걸어가는 것보다 훨씬 속도가 빨랐다.
무엇보다 분위기가 참으로 요사스러웠다. 마차 구석에 장식된 할로겐 등 덕분에 비밀리에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지다하카 님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공주님께 들었습니다. 다크레기온의 간부, 맞으시죠?"
"나에 대한 걸 알면서도 본거지에 초대를 하다니. 배짱 한 번 두둑한 걸."
"저희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미스터 텐타클은 지상을 가리켰다.
"아지다하카 님은 지휘관을 물리치기를 바라고, 저희는 지휘관이 저희의 사람이 되기를 바라죠."
"그럼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거 아냐?"
"간단합니다. 아지다하카 님께서는 지휘관을 괴인으로 만들어주시면 됩니다. 말하자면...육노예로."
"호오."
아지다하카는 눈을 빛내며 관심을 표했다.
"지휘관을 나의 전용 딜도로 만들라?"
"지휘관의 자지가 상당하다고 들었습니다. 아지다하카 님께서도 만족하실 겁니다. 저희는 그의 능력을 바탕으로...선의철에게 복수를 하고 싶을 뿐입니다."
"괴인들의 양산을 통한 국가 전복이라도 시도하는 거야?"
"비슷합니다. 공주님은 무력 시위를 통한 괴인들의 인권 보장까지 바라고 계시고, 저희도 이 나라 사람이니 딱히 국가 전복을 바라지는 않지만...."
쿵.
미스터 텐타클은 촉수를 번뜩이며 사납게 웃었다.
"선의철의 지옥불반도는 박살내버리고 싶습니다. 서울에 있는 모든 이들은 선의철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 뿐입니다."
"흐응, 그렇구나. 그래서 흑화단이야?"
"예. 복수를 위해 모든 걸 깊고 짙은 어둠에 내던진 자들.... 복수의 불꽃을 갈고 닦는 자들입니다. 후후."
"재미있네. 그럼 선의철을 잡아다가 어떻게 하려고 하는 거야? 뭐 중세 시대처럼 촉수로 사지를 잡아서 능지처참이라도 하려고?"
"후, 후후후...."
촉수꺼비는 그저 싱긋 웃기만 하며 촉수를 만지작거렸다. 그게 마치 애완동물을 쓰다듬는 것 같아 아지다하카 조차 잠시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촉수를 달고 능욕하지 않는다? 촉수 실격이죠."
"...혹시 게이세요?"
"저런. 저를 동성애자로 보시다니. 이래뵈도 처자식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둘 다 선의철, 그 개새끼에게 유린당했지만요. 뭐...지금은...."
미스터 텐타클은 불편한듯 셔츠 앞을 잡아끌었다. 그의 넥타이는 낡고 닳은 검은색이었다.
"......내가 이런 말하기는 그렇지만, 꼭 선의철이라는 놈에게 복수하기를 바랄게. 근데 게이도 아니면서 촉수로 능욕을 한다고? 아무리 그래도 찝찝하지 않아?"
"그건 지휘관을 붙잡으면 해결됩니다. 아지다하카 님과 힘을 합쳐 지휘관부터 괴인으로 만든 뒤에...그에게 걸린 저주를 선의철에게 넘길 겁니다."
"응?"
"간단히 말해서, 선의철을 암컷으로 만든다는 거죠."
미스터 텐타클의 눈은 사납게 빛나고 있었다.
"지휘관에게 걸린 성전환 증후군을 선의철에게 덧씌워, 여자가 된 선의철을 촉수로 능욕할 겁니다. 그리고...암캐로 만들 겁니다. 그것이 제 인생의 목표입니다."
"......."
아지다하카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인성 합격. 악의 조직 간부랑 손을 잡으려면 이 정도 악의는 있어야지."
아지다하카는 흑화단과 협력관계를 맺었다.
선의철을 암캐로 만들기 위하여.
"근데 공주님은 선의철 딸이라며. 공주님한테 복수는 안 해?
"선의철이 제 가족을 죽였지, 선의철의 따님이 제 가족을 죽인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미묘한데서 신사네."
"그래서."
그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
"미스터 텐타클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