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5화 〉2부 5장 18
라온과 펜릴, 두 명과 함께 밤을 지새운 아침.
뷰르를비르비르르.
나는 미니피닉스의 울음소리를 형상화한 알람소리와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내 양 옆에는 라온과 펜릴이 내 어깨에 기댄 채 깊게 잠들어있었다.
끝내주는 밤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다소 사람을 놀라게 하는 밤이었다.
‘간부와 인간이 싱크로 할 리가 없는데.’
펜리스 박으로서 한 몸이 된 둘을 취하던 순간, 나는 둘의 눈동자가 각각 인간과 간부의 색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머임? 각성임?
-지휘관에 대한 사랑으로 오버레이…!
-아아, 이것은 큥크로라고 하는 것이야.
처음에는 나도 정령각성인 줄 알았다. 그의 기억 속 바람의 여신을 취하던 순간의 느낌이 아닐까 나는 기시감을 느꼈다.
[박라온] 풍속성 88.
[김펜릴] 풍속성 99.
하지만 정령각성은 아니었다. 라온의 몸속에 마력공급을 하며 김펜릴에게도 함께 마력이 공급된 건지, 제작자 공인 풍속성 정석 조합의 둘은 3P 속에서 서로 마음이 동화되었다.
‘정령각성만 빼면 사실상 싱크로한 셈이네.’
시스템적으로 정령각성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히로인적인 호감도로서는 둘 다 마음이 하나가 되었다.
어느정도냐 하면, 라온도 펜릴도 서로가 상대라면 합동결혼식을 맺는 것으로도 모자라 서로가 서로의 자식에 대한 또다른 친어머니가 되어 줄 수도 있을 정도로, 둘은 마음이 통했다.
-어머니가 둘이라 좋으시겠어요
-무슨 소리임? 하렘이니까 16명이지
-16명이게?
...물론 어머니가 될 후보는 아직도 차고 넘쳤지만, 아무튼 나는 둘의 마음을 동화시킨 덕분에 3P의 가능성을 뚫어냈다.
<알림> 지금부터 [라온]x[펜릴] 조합에 대한 동시 마력공급이 가능합니다. (3P한정)
하루에 한 번이지만, 한 번의 섹스에서 둘에게 동시에 극상의 쾌락을 줄 수 있게 되었다.
‘이제 펜릴은 영영 벗어나지 못해.’
이번처럼 라온에게 마력공급을 해야하니 너랑은 큥큥하지 못한다는 양해도 통하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각개격파라 이 말씀.’
라온의 안에 마력공급을 하고 난 뒤, 펜릴에게도 마력공급의 쾌락을 안겨줄 수 있게 되었다. 이게 바로 슈리를 영입하면서 열린 새로운 기능의 진가다.
“후냐앙….”
펜릴은 내 어깨에 얼굴을 문지르며 갸르릉거렸다. 라온의 몸이 아닌 디폴트 몸으로 돌아가 가슴이 절반가량 줄어든 건 아쉽지만, 그래도 누구처럼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펜릴. 안 자는 거 다 안다.”
“......히힛.”
펜릴은 한쪽 눈을 뜨며 혀를 내밀었다.
“오빠...어제 너무 쩔었어요...저 진짜 한 방에 임신하는 줄 알았어요.”
“그건 또 뭐냐.”
“라온이 본심.”
“.......”
라온이 자고 있어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펜릴은 아침부터 라온에게 목이 졸렸을 것이다.
‘준 싱크로 된 거 맞네.’
펜릴은 라온의 마음을 읽어냈다. 그리고 라온도 펜릴의 마음을 읽어냈을 것이다. 과연 간부의 속내를 읽어낸 라온은 어떨 지 궁금하기는 하지만, 지금은 펜릴과의 대담을 끝내야 했다.
“펜릴아.”
“응?”
“은근슬쩍 꼬리로 내 자지 애무하지마라.”
“...아침부터 세운 건 해달라는 거 아니냥?”
펜릴은 가느다랗게 손가락 두께만큼 줄인 꼬리로 내 자지를 휘감아 애무하고 있었다. 물론 기분이야 좋기는 하지만, 여기서 더 했다가는 아침부터 또다시 어젯밤의 연장전을 하게 될까봐 자제가 필요했다.
“김펜릴, 하나만 물어볼게. 너 지금 상태 어때?”
“상태? 나쁘지 않다냥.”
“...그럼 그거 지금 하자.”
나는 옷걸이에 걸린 내 코트를 가리켰다. 펜릴은 코트를 마력으로 당겨 가져왔고, 나는 코트 안에서 마력에 밀봉된 물건을 꺼냈다.
“아….”
“큐브.”
펜리스 박이 아닌 김펜릴로 따로 나와있는 지금이야말로 적기다. 나는 펜릴의 왼쪽 눈꺼풀을 닫게 한 다음, 그녀의 눈 위에 큐브를 올렸다.
-큐브를 간부강화용으로 쓴다고? 그럼 종장에서 이계신한테 흡수당하지 않나?
-펜릴 버리는 거임? 창염으로 정화 안하면 막판에 난리날텐데.
-먹버 ㅗㅜㅑ
먹버가 아니다. 나는 펜릴을 믿기에 큐브를 지금 사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 이계의 아득한 힘이 느껴진다. 펜릴에게 깃들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용하시겠습니까?
시스템의 알림부터 불길하다. 하지만 나는 큐브의 힘과 사용방법, 그리고 큐브로 인한 위험을 모두 아는 입장으로서 사용에 아무런 부담감이 없었다.
“나에게는 소원이 있다.”
고오오오.
펜릴의 눈 위에 올려둔 큐브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인간의 뒤틀린 욕망을 무엇이든지 이루어지는 악의어린 소원의 램프는 내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소원은 한 가지.”
두루뭉술한 소원일수록 위험하다. 선을 바라는 소원일수록 위험하다.
큐브를 이용해 ‘세계정복’을 희망하면, 전세계의 핵미사일이 오작동을 일으켜 자폭하고 그 원흉이 소원을 빈 당사자로 적용되도록 하는 짙은 악의가 담겨있다.
물론 지휘관이 사용하면 당장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저 종장에서의 전투에서 괴수과 괴인들과 테라리스트들이 사용한 갯수만큼 배로 쏟아질 뿐이다.
‘그 정도야.’
내가 지금 빌 이 소원에 비교하면 중요치 않다. 나는 펜릴을 위한 소원을-
“잠깐만, 지휘관.”
펜릴은 내 손을 붙잡았다. 오른쪽 눈만 뜬 그녀의 눈동자에는 불안감이 엿보였다.
“...정말 이걸로 괜찮겠냥?”
라온과 동화되면서 인간의 마음을 조금 알아버렸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의 원판인 절풍의 흔적이 본능적인 경고를 내보내고 있는 걸까.
“이거, 쓰면 안 되는 거 아니냥…?”
펜릴은 큐브의 사용을 경계하고 있었다. 큐브를 모으는 것이 다크 레기온 간부의 사명이었으면서, 큐브를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쪽.
“걱정마. 원래 물건은 쓰라고 있는 거니까.”
나는 그녀의 입술 위에 입을 덮으며 불만을 잠재웠다.
"내 소원은 말이야…."
소곤소곤.
내가 소원을 읊자, 큐브는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는 곧 큐브의 안에서 검고 불길한 마력의 바람이 아닌, 왠지 모르게 시원한 황색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흐, 흐냐앙?!"
큐브를 정화없이 바르게 사용하는 법.
"이, 이거 도대체 뭐냥?!"
"악의."
그건 바로 '악의'를 담아 사용하는 것이다. 하등한 지상의 생명체에 대한 상위 존재로서의 조롱을 담아, 나는 감히 금단의 소원을 빌었다.
"김펜릴에게 아주 '특별한 힘'을."
큐브는 서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황색 폭풍이 빠져나가며 맑고 투명한 청정수와도 같이 변한 큐브는 펜릴의 눈에 성수처럼 내려앉았다.
"......."
펜릴은 가만히 왼쪽 눈에 깃드는 큐브의 흔적을 받아들였다.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올린 그녀의 눈동자는 여전히 민트색으로 반짝이고 있었지만, 자세히 보면 눈동자 안에서 당장이라도 뿜어져나올 거센 질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뭔가 힘이 생긴 건 알겠는데, 이건 무슨 힘이냥?"
"간단해."
나는 펜릴의 눈꺼풀 위에 키스했다.
"민초빔. 질풍같은 레이저에 맞은 대상에게 민트초코를 좋아한다는 특성을 새겨넣는 힘이지."
앞으로 펜릴의 민초빔을 받는 자, 민초를 옹호하게 되리라.
"한 마디로, 민트초코는 치약이라고 혐오하는 사람도 강제로 열혈민초파로 만드는 힘이야."
* * *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인간보다 더 뛰어난, 인간은 비교도 할 수 없는 신적인 존재가 인간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면 과연 어떤 방식으로 소원을 들어줄 것인가.
"악의가 넘치죠."
지니의 요술램프나 일곱 개가 모이면 소원을 들어주는 공처럼 직관적이지 않다.
예를 들어 한 여인의 사랑을 얻고 싶다는 소원을 빌 경우, 최소한 세 가지 방향으로 소원이 이루어진다.
'자기야, 왜 다른 여자랑 이야기를 나눠? 그 년 누구야? 뭐? 여동생? 지금 자기 나한테 거짓말 하는 거야?'
사랑에 미친 얀데레를 만들어놓거나.
'어흐흑, 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 사고로 죽어버리는 거야! 왜!'
사랑이 이루어질때까지 여인이 사랑을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조건으로 만들거나.
'아아악! 몸이 멋대로 움직여! 그, 그만둬 이 미친 새끼야! 이거 강간이라고, 강간!'
정신적 사랑은 전혀 없이, 육체적 사랑만 이루어지도록 한다거나.
"그래서 창염으로 정화하지 않은 큐브를 쓸 때는 역으로 이용해야하는 것이에요."
"정화한 뒤라면 단순한 SSS급 깡통 코어지만, 정화하기 전이라면 이계신의 마력이 담겨있으니."
성주에 의해 오염된 이계의 마력까지 있으니, 당연히 소원은 잘 정제하여 골라서 말해야한다.
그리고 이 소원은 인간의 사상을 강제로 바꿀수록, 세상을 혼돈에 빠뜨릴 수록, 혐오를 부추겨 세상을 어지럽고 혼돈에 빠뜨릴 수록 위력이 강해진다.
즉, 요령만 알면 힘이 발현되는 방향을 조정할 수 있다는 말.
민초빔.
우리는 펜릴이 다크 레기온의 간부라는 과거의 정체성을 잊지 않도록, 그녀에게 힘을 부여했다.
간부로서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는 힘이 부여된 이상, 그녀는 '민초괴인'을 만드는 경우에 있어서만큼은 신에 가깝다.
바야흐로, 민초의 왕.
민초를 혐오하던 자들조차 민초 없이는 못사는 몸으로 만들어버리는, 성주와 이계신이 가장 좋아하는 '인간의 사상을 바꾸어 세계에 혼란을 야기하는' 소원이 완성된 것이다.
아무 부작용 없이.
"다음에 큐브 구하면 모든 맛을 딸기맛으로 바꿔버리는 건 어때요?"
"...음식 상한 것도 딸기 맛이라고 느끼면 사람들이 딸기맛 자체를 싫어하게 되지 않을까?"
"아, 그건 안 되죠. 음...그러면 다음 큐브는 탈모빔이라도 진짜로 만들어볼까요?"
"......."
그저, 민초빔을 맞게 될 이들에게 애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