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2화 〉2부 5장 16
다크 레기온의 간부, 절풍의 펜릴 사망.
맨체스터에서 발생한 차원문을 통해 절풍의 펜릴은 그 모습을 드러냈다. 25년 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으나, 그 흉포함과 '절풍'의 특성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모두가 다시금 알게 되었다.
1999년 세계 인구의 앞자리를 바꿔놓았던 일곱 재앙은 다크 레기온의 간부들이었다는 것을.
절풍의 펜릴을 시작으로 한 여섯 간부의 정체는 그저 괴인의 모습으로 의태한 것이라는 것을.
세계를 부순 괴수들은 괴인이라는 이름으로, 간부라는 이름으로 정체를 숨기고 활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 괴인은 어디에도 있다.
당장 이웃집에 괴인이 살 수도 있는 것이고,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히어로가 사실은 다크 레기온에 지배를 받는 괴인일 수 있다.
기존 히어로들에 대한 신뢰조차 무너지게 된 시점에서, 당장 언제 어디서든 다크 레기온의 간부들에게 습격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하지만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 지휘관! 지휘관! 지휘관!
그리고 그들을 꺾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지휘관이며, 지휘관은 그들에게 대항하기 위한 히어로를 육성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류는 깨달았다.
SS급 히어로, <바나르간드>.
민트색 고양이 귀에 민트색 꼬리를 단 하얀 정장의 여인은 절풍의 펜릴은 가볍게 가지고 놀았다. 절풍조차 손가락 하나로 막아내는 그녀의 힘에 인류는 경탄했고, 괴수-절풍의 펜릴은 힘없이 쓰러졌다.
전 인류는 깨달았다.
바나르간드야말로 진정한 인류 최강의 존재라는 것을. 지휘관이 비밀리에 만들어낸 비밀병기는 어지간한 전술핵 이상의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바나르간드를 키운 지휘관이야말로 인류에게 있어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을 인류는 다시금 깨달았다.
- 지휘관이 1년 동안 한 명만 키워도 10년이면 바나르간드가 10명이나 나오겠는데?
- 언제부터 키운 건지도 모르는데 1년이라니, 억측이 심한 거 아니냐?
- 혹시 아냐, S급을 일주일 만에 SS급으로 만들었을 지도.
지금까지 바나르간드라는 존재가 대외적으로 알려진 적이 있던가? 아니다!
바나르간드는 절풍의 펜릴을 쓰러드리기 위해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풍마룡이라는 모습으로 자신의 정체를 숨겼던 절풍의 펜릴을 손쉽게 쓰러뜨린 그녀는 지금까지 그 어떤 전장에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새로운 마력 패턴과 완전히 새로운 이능력자의 등장에 협회도 침묵했다. 아무리 지휘관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해도 협회 또한 바나르간드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코드 BWP.
‘B’lue flame ‘W’hite ‘P’hoenix.
다른 누구도 아닌 지휘관이 직접 등록한 히어로였다. 지금까지 그녀가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밖으로 드러난 일이 없었다.
그리고 처음 모습을 드러낸 지휘관이 '직접' 기른 히어로는, 기존의 SS급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힘을 보유하고 있었다.
- 이 정도면 사실상 원탁급 아니냐!
- 원탁보다 더하지. 지금 마력 패턴 분석하는 사람들 말로는 농도가 가웨인 경 이상이라는데?
사실상 혼자서 절풍의 펜릴을 쓰러뜨리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강력했다.
- 이 사람은 SS급으로 부를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나르간드에게 새로운 등급을 부여하고자 했다.
Extra. 등급 외.
기존 인류의 분류로는 구분할 수 없는 새로운 등급의 존재로.
그리고 사람들은 지휘관이 직접 기른 특별한 존재라는 의미와 존경을 담아 바나르간드를 이렇게 불렀다.
Special Extra Class.
줄여서, S-Ex 등급.
속칭, 스엑스급 히어로.
결코, 성행위를 의미하는 SEX가 아니다.
스페셜 EX급 히어로일 뿐이다.
라고, 전 세계 사람들은 그녀를 스엑스급 이라고 칭송했다.
* * *
"어이, 섹스급 히어로."
"죽인다냥."
김펜릴은 나를 향해 손톱을 세워 할퀴려고 들었다. 코어 웨폰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날카롭게 기르고 붉게 물들인 손톱은 A급 배틀슈트도 쉽게 갈라버릴 만큼 예리했다.
"나를 왜 죽이려고해? 자기가 자기를 죽였으면서."
"오픈 채널로 넘어갔으면 이야기를 해줘야 할 거 아니냥!!"
그렇다.
김펜릴은 딱히 의도를 가지고 한 말이 아니다. 그저 기쁜 마음을 다잡으며 혼잣말을 했을 뿐이다.
그저 혼잣말이 모두에게 들리는 공개 채널, 심지어 절풍의 펜릴이 죽으면서 주변의 마력이 안정화 된 순간 말해버린 탓에 전세계로 퍼져나갔을 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
그리고 실수의 경중에 따라 다른 사람들의 대처도 달라지게 된다.
펜릴의 실수는 제법 귀여운 실수에 속한다. S-Ex급 히어로가 전투가 끝난 뒤에 포상으로 지휘관과의 관계를 원한다?
"걱정마. 다들 귀엽게 생각해줄 거야."
밝은 면만 보자면, 사람들은 펜릴의 실수에 대해 너그러이 용서해 줄 수 있다.
- 지휘관이랑 마력 공급하는 건 킹정이지
- 서로 서로 포상 아니냐 ㅗㅜㅑ
- 이 싸움이 끝나면 스엑스 할 거야(큥큥)
"이미 역사적으로 수많은 지휘관 직속 히어로들이 그랬어. 네가 한 정도는 가볍다니까? 어떤 히어로는 지휘관이랑 하는 거에 중독되어서 글쎄...."
나는 무서운 분위기를 조성했다. 펜릴은 침을 꿀꺽 삼키며 내 목소리에 집중했다.
"침대에 지휘관을 묶어놓고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다음, 지휘관은 여기서 가만히 좆이나 세우고 기다리라고 하더라. 그리고 자기가 나가서 다 때려잡고 다녔다니까?"
"세상에. 그런 짓을 누가 하냥?"
절풍이.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 하는 비유야, 비유. 실제로야 뭐...이보다 더 심했던 경우도 있고 덜한 경우는 수두룩하고."
정령으로 각성한다고 해서 얀진소리가 울리지 않는 건 아니다. 이 게임의 배드엔딩은 언제 어디에서 튀어나올 지 모른다.
주인공 이전의 지휘관(男)이 납치감금착정을 당하거나 지휘관(女)가 수면마취윤간을 당하거나 하는 게임 내의 역사는 플레이어에게 '이런 일도 당할 수 있음'을 알리는 일종의 복선이다.
주로 히로인들에게, 그리고 정령들에게도 당하기 일쑤다.
"그런데 지휘관, 좋게 봐주는 사람은 몇이나 되냥?"
"...3할?"
"그럼 7할은 지금 나를 마력공급에 미친 여자로 볼 거 아니냥!!"
펜릴은 침대에 고개를 처박고 절규했다. 뒷치기를 해달라는 건지 엉덩이를 씰룩거리는 모습에 나는 아랫도리에서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 큥큥
- 큥큥
- 뒷치기 큥큥 가즈아아아아
'참아, 내 안의 미니 피닉스.'
펜릴'이랑'하는 건 안 된다. 펜릴'도' 하기로 약속한 만큼, 나는 건전한 대화를 위해 수많은 큥큥단의 아우성을 억눌렀다.
"나머지 4할은 바나르간드에 대한 분석 중이야. 섹스에 대해 시선을 두는 게 아니라, 스엑스 등급이라는 것에 시선을 두는 거지."
객관적인 관점에서 바나르간드라는 풍속성 히어로의 존재 가치를 분석하는 것이다.
가령, 그녀가 사용한 이능력은 어떠한 방식으로 발현되는가.
가령, 그녀가 민트색의 고양이귀와 꼬리를 만들어낸 이유는 무엇인가.
가령, 풍속성 이외의 마력도 사용할 수 있는가.
가령, 진정한 '전력'을 낸다면 그녀는 어느정도까지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
가령, 민트색 꼬리는 마력으로 만들어낸 허상인가 아니면 애널 플래그인가.
"최초로 모습을 드러내서 절풍의 펜릴을 죽인 히어로! 새로운 영웅은 언제나 환영이라잖아. 그만큼 너에 대한 기대가 지금 높은 거지."
"그럼 다행인데...나머지 3할은?"
펜릴은 울상을 지으며 물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향한 발언을 그대로 읊었다.
"바나르간드 침대에 묶어둔 다음 꼬리 애널에 박아두고 뷰지에 민트초코 넘칠 때까지 넣어주고 싶다?"
"......와오."
스엑스 한 여인. 정숙하고 엄숙한 정령이 아닌 간부 펜릴이기에, 그녀는 기본적으로 색기가 넘친다.
펜릴 만으로도 색기발랄한데, 박라온의 참된 D컵 여인의 타이트한 흰색 정장 핏 몸매까지 더해진다?
"펜릴아, 축하해. 너 오늘 최소 이천억의 생명을 죽였어."
"그건 또 뭔 소리냥."
"너 보고 딸친 남자들이 오늘만 이천명이 된다는 말이지."
바나르간드는 절풍의 펜릴을 죽였지만, 동시에 이천억에 이르는 정자들도 죽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펜릴아, 네가 나와 하고싶다고 말한 게 꼭 나쁜 건 아니라는 거지."
나쁘기는 커녕 오히려 좋다. 바나르간드가 지휘관의 것이라는 것을 전 지구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지휘관의 주가가 더 높게 올라갈 것이다.
'간부들에게도.'
다크 레기온의 간부들은 모두가 적극적으로 인류 멸망에 힘쓰는 건 아니다. 김펜릴이 지휘관의 편을 든 것을 계기로 심경의 변화가 생기는 이들이 있다면, 우리는 그녀를 적절한 방법으로 영입하면 된다.
"그리고 지휘관이랑 마력공급하는 게 뭐가 나빠?"
"그렇...지?"
"그래. 그런 의미에서 펜릴아, 포상이야."
나는 펜릴이 사온 민트초코 아이스크림 통을 꺼내들었다. 아이스크림 냄새에 벌써부터 군침을 흘리던 펜릴은 통 안을 보고 표정이 굳었다.
"...이게 뭐냥?"
"포상."
아이스크림 통 안은 민트색 액체가 흥건하게 찰랑거렸다. 아이스크림은 모두 녹아있었고, 펜릴은 절풍을 죽일 때보다 더 표정이 사나워졌다.
"지금 이거 뭐하자는 거냥?"
"마력공급하기 전에 의식을 치르는 거지."
나는 통을 들어올렸고.
'이건 딸기맛이다.'
꿀꺽, 꿀꺽, 꿀꺽.
하프 갤런 통을 싹다 비워버렸다. 펜릴은 나를 한참동안 멍하니 바라보다가 목줄을 움켜쥐었다.
"......포상, 진짜 주려고?"
"물론이지. 나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야."
나는 펜릴을 침대에 내던졌다. 그녀는 꼬리를 살랑살랑 거렸다.
"펜릴아. 하기 전에 하나 부탁이 있어."
"뭔데?"
"같이 해야겠지?"
"......."
펜릴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펜릴의 몸에서 민트색 액체같은 마력이 흘러나와 또다른 펜릴이 되었다.
"......아."
머리색이 다시 검은색으로 돌아오고 꼬리가 사라진 라온은 나를 보며 멍하니 웃었다. 그녀의 옆에는 라온의 몸을 쏙 빼닮은 민트색 라온이 누워있었다.
"박라온, 김펜릴."
나는 옷을 훌러덩 벗어던졌다.
"오늘 너희 침대에서 같이 팀 맺을 줄 알아라."
제작사가 공인하는 풍속성 베스트 매치.
"더블 큥큥이다."
마력공급의 쿨타임이 방금 막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