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8화 〉2부 5장 12
절풍 게이트.
흔하게들 차원문이라고 부르는 게이트의 발생 전조는 자연재해와 비슷하다.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 짐승들이 대피하는 것처럼, 게이트가 열리는 지역 근처의 모든 괴수들이 자리를 피하고 도망친다.
짐승들도 아는 것이다.
게이트가 열릴 장소는 위험하다는 걸. 게이트에서 뿜어져나오는 괴수들은 일반적인 괴수들과는 다른 살육의 광기에 물든 괴수들이라는 걸.
놈들에게는 이성이라고는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을 최우선적으로 잡아먹으려고 하지만 그렇다고 같은 괴수를 안 잡아먹는 게 아니라는 걸 본능으로 아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차원문 전조는 괴수들의 준동을 바탕으로 파악한다. 다른 지역으로 도망치는 괴수들을 대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인류의 고통은 차원문이 열리는 것을 계기로 더 심각해진다.
구구구구.
하지만 지금 런던 일대를 둘러싼 괴수들의 움직임은 사뭇 달랐다.
크르르....
거친 바람을 일으키며 돌아다니는 괴수들은 으르렁거리며 런던을 빠져나오려는 모든 것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E급 괴수부터 시작하여 이름난 A급 괴수까지, 괴수들은 마치 누군가의 지시를 받는 것처럼 런던을 포위하듯 대기하고 있었다.
“이, 이 움직임은....”
펜워드는 런던을 동그랗게 둘러싸는 붉은 점들에 땀을 삐질 흘렸다. 왠지 모르게 자신의 감은 ‘정답’을 외치고 있었지만, 자신의 판단에 대한 정답이 맞는 지에 대해서는 불안감이 자꾸 그를 엄습했다.
만약 판단이 틀렸다면? 자신이 설레발을 치는 거라면? 그로 인해 런던에, 영국에 큰 피해를 끼치게 된다면? 자신은 이전 대처부를 거쳐간 수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경질되고 쫓겨나는 것이 아닐까?
[협회장님! 이머전시 콜이 들어왔습니다! 코드 B.W.P!]
“!!”
펜워드는 비명을 지를 뻔 하다가 간신히 참았다. 역시 ‘그’는 영국을, 인류를 포기하지 않았다. 지난 몇 개월 동안 공식 활동이 없어 살해당했거나 살해당할 위기에 도망쳐 잠적했다고 소문이 무성했지만, 지휘관은 당당히 모습을 드러냈다!
“영국 내 히어로 및 헌터, 모든 이능력자에게 전한다!”
펜워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하고 신속하고 정확하며 올바른 선택을 내렸다.
“모든 지휘권을 지휘관에게 이양한다! 지금부터 모든 이능력자들은 코드 BWP, 지휘관의 지시에 따라 작전을 수행하라!!”
책임 떠넘기기.
펜워드의 우렁찬 함성과 함께 더디던 히어로들의 움직임이 서서히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자신과는 사뭇 다른 움직임에 질투심이 날 것 같았지만, 펜워드는 자신이 가진 능력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정치가이지 괴수를 전문적으로 대처하는 자가 아니다. 그의 정치력을 높이 산 사람들과 자신을 지지해주는 지지자들 덕분에 어쩌다보니 괴수를 대처하는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그에게는 괴수를 직접 사냥할 수 있는 이능력도 힘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가장 잘하는 전문분야의 선택을 내렸다.
적재적소에 사람을 배치하는 것.
지금 영국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힘은 이능력자들이 한 몸이 되어 하나로 움직일 수 있게 지휘하는 통솔력과 지휘능력을 가진 존재밖에 없다.
펜워드는 그래서 그에게 모든 권한을 넘겼다. 지금까지 수많은 지휘관들이 있었지만, 적어도 그 만큼은 믿고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었다.
“부디...이 곳을 지켜주시오.”
코드 BWP.
[준비 됐어?]
인류 최후의 지휘관의 지휘 하에, 이능력자들은 런던을 포위한 괴수들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
“차원문이 열리기까지 시간이 아직 남아있지. 후후.”
마력의 패턴과 흐름으로 보아 차원문이 열리는 시각은 대략 4시 11분. 아직 그 때까지 시간이 대략 한 시간 가량 남아있다.
그리고 이 시간은 히어로들이 런던을 봉쇄한 괴수들을 상대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풍마룡 레이드를 뛰기에 가장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아니, 정정. 절풍 레이드.
차원문을 통해 넘어올 풍마룡은 ‘절풍(切風, WindShear)’라는 이름으로 죽을 것이다.
“아, 명명 마렵다.”
지휘관에게는 코드네임을 붙일 권한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 권한을 이용해 나타나는 풍마룡에게 절풍이라는 이름을 붙여 살해할 것이다.
이건 내가 결코 절풍을 싫어해서 그런 건 아니다. 단지 히로인으로서의 매력이나, 다른 히로인들과 융화되는 관계성이나, 밝고 명랑한 성격과 어둡고 오만하고 음침하고 독선적이고 까탈스러운 성격의 차이에 대한 호불호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그저 펜릴이라는 존재가 지금의 내 플레이에 있어서 가장 효율적이기에 선택을 내린 것 뿐이다. 펜릴이 아니면 누가 펜리스라는 이름으로 이런 복장을 입겠는가!
“펜리스, 괴수들 상황은 어때?”
“지휘관이 너무 잘해서 힘들다냥.”
나와 펜리스는 서로 등을 맞대고 열심히 마력을 움직였다. 나는 마도기어를 통해 런던 일대 지휘관들에게 지휘를 내리고, 펜리스는 자신의 괴인 마력을 통해 괴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로제타 석을 부수고 큐브도 얻었겠다, 어차피 시간도 남은 김에 나는 펜리스와 지휘력 대결을 벌였다. 일종의 RTS를 현실의 존재들을 이용하여 즐기는 셈이었다.
물론 나는 이능력자들의 인명피해를 낼 생각이 없다. 펜리스도 그걸 알고 있기에 더 적극적으로 괴수들을 조종하여 이능력자들을 습격했다.
“아, 아깝다냥. 방금 죽일 수 있었는데.”
“푸흐흐, 그건 안 되지. 내가 지휘하는데 어떻게 죽일 수 있겠어?”
“그럼 더 투입해도 되냥?”
“얼마든지.”
펜리스는 런던 밖에 있는 괴수들을 하나 둘 불러오기 시작했다. 런던을 중심으로 펼쳐진 전선의 붉은 점들은 더욱 두터워졌고, 이능력자들의 사기는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히어로들의 피로도 누적이 장난 아니었다. 시민들을 대피시키느라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은 것도 그렇지만, 최대 A급 괴수를 상대하는 것 자체가 체력의 소모도 심했다.
그리고 이들은 체력과 마력을 ‘온전히’ 유지해야 이기는 셈이었다. 괴수들은 이른바 1차 웨이브로, 진짜는 4시 11분에 시작하는 풍마 게이트다.
“풍마룡 나오기 전에 이러다가 체력이랑 마력이랑 전부 다 떨어져 죽을 것 같다냥. 슬슬 패배를 시인하면 봐줄 수 있다냥.”
펜리스는 꼬리를 이용해 내 바지 앞을 쓸었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꼬리임에도 실체를 가진 꼬리는 손가락처럼 나를 자극했다.
“싫은데. 내가 지면 너희 마음대로 할 거 아냐.”
“후훗, 당연한 거 아니냥? 라온이랑 같이 합의봐서 지휘관 자지 마음껏 가지고 놀 거다냥.”
“그건 안 되지.”
마음대로 즐기는 건 나다. 그러므로 이 싸움은 질 수 없다.
“이제 치트 써야겠다.”
“냥?”
나는 소극적으로 나서는 헌터들에게 일제히 지시를 전달했다. 고작 한 문장 뿐이었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히어로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괴수 소탕에 나서기 시작했다.
“허, 헌터들 공격이 매서워졌다냥.”
“돈 좀 챙겨주려고.”
- 딜 미터기의 지표에 따라 코어 배당금을 수령할 것이다.
나는 헌터들에게 수당을 지불하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저히 검증된 지표가 필요했고, 영국 협회는 당연히 이걸 확인할 방법이 없었지만....
[괴수 '템페스트 라이온' 공략 기여도]
1. <퀸> 42%
2. <공허공> 13%
3. <블라스터> 12%
...
'게임 시스템 꿀이죠?'
모든 이능력자가 내 지휘하에 들어왔기에 나는 모든 지표를 데이터로 볼 수 있었다. 전장의 상황이 정리 된 이후, 내가 이 딜 지표를 수치화하여 협회에 보내기만 하면 만사형통이다.
"으으, 괴수들이 밀리기 시작한다냥."
"애초에 런던에 모인 이능력자들 수가 괴수들보다 많은데 어쩔 수 없지. 펜리스, 슬슬 정리하자."
"알았다냥. 내 패배다냥."
펜리스는 패배를 인정했다. 애초에 이건 내 승리가 확정된 대결이었다.
히로인이 주인공을 상대로 이길 수 없는 종목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침대 위에서 싸우는 전투고, 하나는 지휘 대결이다.
미연시적으로도, 시뮬레이션 RPG적으로도 나는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를 이길 수 있다.
키에엑!!
괴수들이 하나 둘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런던의 중심에 생기기 시작하는 균열에 결계 속으로 몸을 숨겼다.
"펜리스. 내가 왜 빅 벤에서 마력공급을 했는지 알아?"
"왜 그러냥?"
"거기를 좌표로 삼았기 때문이지."
현재.
빅 벤의 꼭대기에는 펜릴이 절정하며 흘린 조수가 사방에 뿌려져있다. 애초에 땀과 같은 체액이니 자연히 마를 것으로 생각했으니, 일일이 닦아놓지도 않았다.
"슬슬 나온다."
펜릴의 체향, 민트초코 향을 쫓아 오는 존재가 하나 있다.
"풍마룡, 등장."
갸오오오오------!
세계의 틈을 부수고 나타난 풍마룡은 빅 벤 위에 안착하여 포효를 내질렀다.
"...그러니까 내가 저기서 뷰릇뷰릇 해서 쟤가 나타났다는 거냥?"
"그렇지. 물론 거기에...."
나는 내 아래를 가리켰다.
"나도 뷰릇뷰릇해서, 그 냄새 맡고 온 거야."
지휘관의 체액.
펜리스의 체액.
"왜 차원문이 런던, 빅 벤 바로 위에 열리냐. 간단해."
우리가, 그곳에서 섹스를 했기 때문이다.
애애애앵--------
풍마 게이트, 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