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7화 〉2부 5장 11
애애애앵----
한 시간에 한 번씩, 피난 명령을 알리는 싸이렌이 울렸다. 마도기어의 마력을 차단하지 않으면 무조건 경보가 울리게 되어 있으나, 창고 안에 모인 이들의 마도기어는 경보가 전혀 울리지 않았다.
"흥, 짜증나게."
영국의 빌런 조직 <피쉬 앤 색스>의 대장, A급 빌런 <잭스 더 리퍼>는 초조함을 애써 진정시키며 담배를 태웠다. 정장을 입은 부하 빌런들은 잭스와 마찬가지로 긴장을 풀 수 없었다.
"하, 미친 놈들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야."
"대장, 저희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되는 겁니까?"
부하들은 불안감을 내비쳤다. 사제 마도기어를 사용하는 덕분에 마도기어를 켜놔도 경보가 울리지 않는 잭스와는 달리, 다른 부하들은 모두 마도기어를 망가뜨려 경보가 울리지 않게 만들었다.
"야, 걱정마. 아무 일 없어."
잭스는 실실거리며 담배를 마저 빨아당겼다.
"이거 다 개수작이라니까? 절풍 게이트? 그거 다 왕실이랑 협회에서 우리같은 빌런들 털어먹으려고 하는 조작이야. 우리가 겁쟁이처럼 도망가면 그 사이에 몰래 우리 재산들을 털어가려는 거라고."
잭스는 테이블 위에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더플백을 발로 걷어찼다. 지퍼가 느슨하게 열린 가방에서 투명한 구슬 하나가 툭 떨어졌다.
"흐흐흐."
잭스는 구슬을 집어들고 구슬에 씌워둔 탄성있는 물건을 만지작거렸다.
"세상 사람들 아무도 모를 걸? 콘돔이 코어의 마력을 차단한다는 걸. 그러니까 너희들은 걱정하지 마라. 우리 전재산, 절대 다른 놈들에게 걸릴 일 없어."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잭스는 콘돔의 끝을 잡고 빙글빙글 돌렸다. 안에 들어있는 D급 코어가 비록 코어 중 상용가치가 낮은 편에 속한다고 하지만, 낡은 가솔린 중고차 한 대 정도는 바꿀 수 있을만큼의 가치는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서 코어만 지키고 시간만 지나기를 바라면 된다는 말씀이야. 응? 이 혼란한 와중에 누가 우리 코어를 노리면 어쩌려고 그래?"
"올바른 말이야."
철컥!
낯선 여인의 목소리에 잭스와 빌런들은 일제히 마력을 끌어올리며 무기를 들었다. 코어웨폰으로 무장한 빌런들은 총과 칼을 들고 경계하며 주변을 살폈다.
"육성이었는데...?"
팟.
천장에 달린 전등이 깨졌다. 빌런들은 일제히 전등이 깨진 부분을 향해 총칼을 겨눴다.
"등신들아, 멀리서 깼잖아!"
잭스의 외침에 부하들은 다시 사주경계를 재개했다. 잭스 또한 코어를 움켜쥐며 주변을 경계했다.
"누구냐!"
"나?"
팟, 팟팟, 팟.
전등이 모두 망가졌다. 어디에서 날아온 지도 모를 칼바람은 전등을 자르고 부수며 불을 꺼뜨렸고, 남아있는 전등은 오직 한 방향만을 스포트라이트처럼 비추고 있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오우, 씨발 존나 새끈하네."
"......."
머리에 고양이 귀와 꼬리를 단 가면의 여인은 포즈를 취한 채 가만히 있었다. 잭스와 빌런들은 고양이와도 같은 무도회 가면을 쓴 여인을 향해 총칼을 겨누며 그녀의 몸을 위아래로 음미했다.
"와, 치녀다."
"걸어다니면서 아주 몸으로 섹스해달라고 외치는 데?"
"안 부끄럽나?"
아니, 시간했다. 빌런들은 여인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잭스를 제외하고.
"...미친 놈들아, 저거 S급이다."
"예?! 형님,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나도 어느 정도로 강한 지 모르겠는데 그럼 S급이지! S급이 아니면 저런 미친 복장이 말이나 돼?!"
"후후, 후후후."
여인은 느긋한 미소로 잭스를 향해 걸었다. 도도한 고양이와도 같은 걸음으로 걸을 때마다 어깨부터 가슴으로 내려가는 검은 선이 좌우로 흔들려 빌런들의 시선을 끌었다.
금속의 느낌이 나는 기이한 검은 갑옷 같은 물건은 고작 유륜만 아슬아슬 하게 세로로 가리며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최소한 D컵은 되어보이는 탐스러운 가슴을 훤히 드러낸 것에 빌런들은 마음속으로 감사하면서도, 상대의 정체를 도저히 가늠할 수 없어 계속 긴장해야만 했다.
"런던 빈민가 출신 <피쉬 앤 색스>, 맞지? 하나 물어볼게. 왜 대피를 안 해?"
"하, 다크 히어로 같은 놈이냐? 알게 뭐야! 우리가 대피를 안 한 이유를 묻지 말고, 네가 이곳에 온 이유를 밝혀!"
"내가 여기 온 이유? 정의를 위해서지."
여인은 손뼉을 가볍게 쳤다. 그러자 슬링샷 수영복에 준하는 갑옷의 외피를 중심으로 옥색으로 반짝이는 마력의 슈트가 전신의 피부를 가렸다.
"아...."
"뭘 아쉬워 해?! 젠장, 쏴!"
잭스는 절호의 찬스를 놓친 것에 분노하며 공격 명령을 내렸다. 빌런들의 코어웨폰이 여인을 향해 일제히 마력을 뿜어냈다.
"흥."
여인은 코웃음을 치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여인을 중심으로 강한 바람이 뿜어져나왔고, 빌런들은 모조리 바람에 휘말려 벽으로 날아가 부딪혔다.
"큭, 크으으...!!"
잭스는 자신의 코어 나이프를 바닥에 꽂으며 마력을 불어넣었다. 토네이도에 휘말린 것처럼 날아갈 것 같았지만, 그는 절벽에 매달린 심정으로 바닥에 꽂은 코어 나이프에 온 힘을 다했다.
"제법이네."
"아아악!"
여인은 잭스의 손목을 발로 짓밟았다. 높은 구두굽이 잭스의 손목을 마력의 보호막 째로 짖눌렀고, 여인은 가학적인 미소를 지으며 더플백의 무덤을 가리켰다.
"도둑질로 얻은 코어, 도둑질로 잃어버는 거야."
"아, 안 돼!"
더플백이 바람에 두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잭스는 나이프를 뽑아 여인을 향해 달려들려고 했지만, 여인은 검지를 겨누는 것 만으로도 잭스가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사락.
"움직이면 죽는다?"
청량한 바람은 서슬퍼런 칼날이 되어 잭스의 급소를 노렸다. 아주 조금만 반응이 늦었어도 목이 뎅겅 날아갔으리라.
"워, 원하는 게 뭐야...!"
"원하는 거? 저 코어들."
여인은 가볍게 윙크를 하며 더플백 한 무더기를 실은 토네이도의 위에 올라탔다.
"기대해. 너희가 챙긴 이 코어가 런던을 축제의 도가니로 만들 거니까."
"무, 무슨-"
위이이잉----!!
광풍과 함께 여인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바람처럼 사라진 것 뿐만 아니라, 대량의 코어와 함께 사라졌다.
와장창!
창고 안의 유리창은 광풍과 함께 박살이 났다. 동시에 주변의 마력 반응을 차단하던 마력파 차단기도 고장이 났다.
애애앵----
기절한 부하 빌런들의 몸에서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손목에는 싸구려 유성 제품을 부숴놓고 몰래 다른 마도기어를 숨겨놓았다. 분명 저게 최신형에 자신들이 쓰던 물건일테지.
"젠장...."
멀리서 날아오는 히어로 무리들을 보며, 잭스는 의식을 잃었다.
단지 마지막 순간.
“씨뻘...존나 새끈하네....”
의식을 잃기 전, 민트색 슈트로 선이 훤히 드러난 습격자의 가슴과 엉덩이만이 눈앞에 아른 거릴 뿐이었다.
* * *
쾅쾅쾅!
펜리스 박, 아니 박라온은 벽에 머리를 박으며 좌절했다.
“왜? 예쁘기만 한데.”
“이제 시집 못 갑니다....”
“나한테 오면 되잖아.”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게 어디있습니까.”
라온은 화를 풀었다. 펜릴에게도 큐브의 사용처를 말하는 것으로 호감도를 폭발시킨 만큼, 이렇게 자연스럽고도 무성의하게 호감도를 높이는 것이야말로 라온을 영국까지 데려온 가장 큰 이득이었다.
- 자연스럽게 프로포즈ㅋㅋㅋ
- 와 라온이한테 간부 스킨 입히고 고백하다니
- 저거 까딱 잘못하다가는 수치심으로 호감도 리버스 되는데 미쳤다!
속에서 여러 소리가 울리지만, 나는 그저 ‘그’가 내게 하던 것처럼 똑같이 했을 뿐이다. 라온에게 잠시 수치 타임을 준 펜릴은 라온의 몸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왜? 정의롭게 빌런 조직들 털어먹었는데.”
“A급 코어만 쏙 빼버리고 B급 이하 코어들은 전부 뿌려버리셨죠.”
“그리고 빌런들도 협회에 넘겨버리고 말이야.”
나는 펜리스의 힘을 이용해 런던의 여러 빌런 조직을 습격했다. 그들은 언제 자신들의 재물이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대량의 코어를 지키느라 애를 먹었고, 펜리스는 곳곳을 습격하여 코어를 털어먹었다.
절풍 게이트가 일어나기 수 시간 전만 아니었으면, 아마 지금쯤 영국 협회는 빌런 조직을 소탕하고 코어를 몰수한 실적으로 한 달 동안 국가적 축제가 벌어졌을 것이다. 빌런들이 모아둔 코어들만 계산해도 족히 조 단위의 재산적 가치를 가질 것이다.
“이걸로 영국에 대한 피해보상은 다 끝났어.”
“...하아, 알겠습니다. 이렇게라도 마음의 짐을 덜어서 다행입니다.”
라온은 우리의 트롤링에 심적 부담감을 크게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나름 영국에 부담이 덜하도록, 라온의 부담감도 덜기 위해 빌런 조직을 소탕했다.
“그러면 펜리스 양, 슬슬 우리 목적지로 가자고.”
“후훗, 이제 본격적인 쇼타임이군요?”
“물론.”
나는 펜리스의 꼬리에 몸을 맡기며,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
목적지는 대영 박물관.
휘이잉--
우리는 바람과 함께 대영박물관의 천장에 잠입했다. 영국 정부에서 고용한 헌터들이 밖을 지키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펜리스의 잠입을 눈치채지 못했다.
사락, 사락.
우리는 금방 로제타 석이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주변에는 마력 레이더가 가득했지만, 어차피 우리에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펜리스, 저거 보여?”
“잘보이네요. 페닉스.”
붉은 선으로 된 레이저 경보기는 메인이 아니었다. 진짜는 땅을 디디자마자 울리는 ‘마력의 파동’이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든 땅에 닿는 즉시, 바닥의 대리석이 튀어나와 발목을 붙잡으리라. 나는 펜리스의 도움으로 바람으로 이루어진 장화로 땅을 디뎠다.
스르르.
로제타 석 앞에 흙더미가 솟구쳤다. 금줄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인영은 흙으로 만든 골렘처럼 자신의 신체를 가리고 있었다.
[네놈들은 누구냐.]
음성변조된 목소리. 나는 그녀를 알고 있다.
“네 이름을 사칭하여 너를 초대한 장본인.”
전세계 모두가 이 여자의 정체를 궁금해하지만, 나는 누군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괴도 저지. 미안하다.”
나는 그녀를 향해 먼저 사과부터 했다.
“너 만나려고 어그로 끌었다.”
아르엘 공략의 정석, 첫번째.
영국 여왕이 아닌 괴도 저지와의 만남이 그녀를 공략하는 시발점이다.
"일단 옷부터 벗고 이야기 나눠볼까?"
사라락!
펜리스의 손에서 뿜어져나온 칼바람에 괴도 저지는 금방 무장해제되었다. 몸을 가리는 흙더미는 바람에 날려 흩어졌다.
"......!"
순식간에 골렘형 변장이 사라진 괴도 저지는 전신이 드러났다.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 슈트를 입은 여인은 용의주도하게 자신의 머리칼과 얼굴을 가리는 변장을 하고 있었다.
"여자야? 마침 이야기하기 편하게 됐네. 이봐, 저지. 우리 함께...."
나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히틀러의 유산을 훔쳐보지 않겠어?"
"......뭐?"
"말 그대로지. 히틀러의 유산 뿐만 아니야. 전 세계의 각종 보물을 훔치는 거지. 세계 평화를 위해."
"......."
괴도 저지는 순순히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애초에 처음부터 믿는 걸 바라지도 않았다.
어차피 그녀를 정식으로 영입할 수 있는 건 그녀가 방한하는 날 이후니까. 지금은 그냥 가벼운 인사일 뿐이다.
"한 번 생각해봐. 그러면 그 때 다시 찾아올테니."
"...네가 그럴 시간이 있을까?"
"왜 없겠어? 어디서 소리 안들려?"
애애앵-----
괴도 저지의 손목에서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괴수 경보! 괴수 경보! 버킹엄 궁전 인근에 A급 괴수 출현!]
"무, 무슨...?!"
"바쁘지 않아? 여기서 우리랑 드잡이질 할 시간 있어? 잘나신 원탁의 히어로도...지금 프랑스에 묶여있는데."
"!!"
괴도 저지는 망설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몰래 마도기어를 조작했다.
삐빅, 삐비빅, 삐비비빅.
이머전시 콜.
'지휘관'이 모든 히어로들에게 내리는 긴급명령에 괴도 저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나는 그녀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걱정마. 로제타 석 이외에는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을 테니까."
"...두고보자."
괴도 저지는 사라졌다. 펜리스는 나를 바닥에 내려놓았고, 주변에 무음의 결계를 펼쳤다.
"아아."
나는 마도기어를 향해 말했다. 목소리는 알아서 변조될테니, 주변 소리만 차단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모든 히어로들에게 알린다. 지금부터 지휘관의 지시에 따라, 절풍 게이트에 대처하도록."
나는 지휘관으로서 명령을 내렸다.
"펜리스, 괴수에게 지시를 내려줘. 내가 아까 준 지시대로."
나는 페닉스로서 명령을 내렸다.
그 누구도 우리를 건드리지 못하게 되었고, 나는 펜리스를 향해 로제타 석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이제 훔치자."
서걱!
펜리스는 바로 로제타 석을 향해 손톱을 휘갈겼다. 나는 느긋하게 레이저를 통과한 뒤, 로제타 석 안에 박힌 작은 조각을 꺼냈다.
"후후후."
"지휘관 그게...."
"그래. 이게 큐브지."
이계신의 마력이 깃든 큐브를 본 펜리스는 군침을 삼켰다. 형언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지는 물건을 두고, 그녀는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을 보는 것 마냥 숨을 헐떡였다.
"진정해. 돌아가면 마력공급해주면...."
나는 펜리스의 왼쪽 눈을 쓸었다.
"이거 네 몸에 넣어줄테니까."
"......!!"
펜리스의 눈에 민트색 하트 모양이 잠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녀는 나를 향해 입맛을 다셨다.
"페넥스...."
펜리스는 꼬리로 내 앞을 가볍게 쓸었다.
"이거 끝나면, 셋이서 큥큥하는 거다냥."
"......도전이라면 얼마든지 받아들이지."
펜릴, 라온, 그리고 나.
여기에 절풍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