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8화 〉2부 5장 02
영국, 다름아닌 원탁에서 지휘관의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지휘관과 관련된 주요 인사들은 급히 회의에 들어갔다. 신서울에 모일 틈도 없이 화상 카메라를 통해 모인 이들은 협회를 통해 날아온 공문에 몹시 난감해졌다.
공식적으로 그들은 '오라클 스튜디오'의 시안을 요구하고 있었다.
발송인은 영국 히어로 협회이며, 공문의 내용은 평범한 강연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뒷 채널을 통해 들어온 정보는 당연히 발송인과 목적이 달랐다.
[책임 회피성 공문이군요.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저희에게 뒤집어 씌우려고 하는 겁니다.]
[이래서 섬나라 새끼들이란.]
[말을 삼가하세요. 비공식이지만 누가 들을 수 있습니다.]
화상으로 모인 이들은 하나같이 심각한 얼굴로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들에게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정부에 알릴 것인가'하는 안건이었다.
과연 선의철이 지휘관의 존재를 알았을 때, 뒷감당을 할 수 있을까?
자유로운 활동을 위해 정체를 숨기고 입국한 자에게 괜히 올가미를 씌웠다가 일본이나 중국으로 터를 옮기지 않을까?
이미 그가 발굴한 이능력자들에 대해서는 특A급 기밀로 분류되어 있으며, 아는 사람들 중에서도 정말 손에 꼽을 정도의 극소수만 오라클 스튜디오의 성장치를 알고 있다.
이유나, C+.
박라온, C+.
김누리, C++.
김가온, A+.
그리고 정슈리, A+.
하나같이 바닥을 치던 능력치가 고작 2~3달만에 C급을 넘어갈 정도로 빠른 성장을 보이는 건 물론이거니와, A급에 정체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던 이들도 모두 A에 '+'가 붙을 정도로 마력이 빠르게 성장했다.
[미스 블루베리, 혹시 이에 관해 아는 바가 있습니까?]
[이상한 코드 네임 붙이지 마세요.]
심지어 회의에 참여한 모 S급 히어로의 경우, 비비비공식에 따르면 S+를 넘어 SS+에 이르렀다.
아직 한국은 이 엄청난 성장의 향연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구국의 영웅에 대한 사람들의 갈망은 광기라고 표현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고, 고작 희망과 열정과 의지 만으로 60억 분의 1에 해당하는 남자를 한국에 남기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크으...애국심을 자극하는 방법은 없나? 영국에 간 사이 한국에 무슨 일이 일어나면 어쩔 거냐고 말이야.]
[백청화라고 이름을 부르지만 금발백인인데요. 미국인입니다.]
[퍼킹 아메리카! 이 새끼들은 히어로도 존나게 많은 놈들이 지휘관 한 명 정도는 우리나라 줘도 되잖아!]
이미 회의는 삼천포로 빠지고 있었다. 미스 블루베리, 아니 SS+급 히어로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자신에게 몰래 전해진 메세지를 확인했다.
[아니, 이 씹빠빠 새끼가?]
[.......]
모두가 침묵한 사이, Ms.BB는 헛기침을 하며 자신의 욕설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방금 전에 저한테 보낸 사진인데...이미 비행기 탔네요.]
[씨발!!]
모두가 쌍욕을 내뱉었다.
그렇다.
이 회의, 지휘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정작 지휘관은 참여하지도 않는 회의였다.
[이게 바로 탁상공론이지.]
긴 시간이 쓰레기처럼 허비되고 말았다.
* * *
<러시아 상공.>
"누가 내 욕을 하나?"
나는 자꾸만 귀가 간지러운 것에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오라클 스튜디오의 팀원들은 하룻밤 내내 진득하게 위로해줬고, 3월 한국의 중요 이벤트는 모두 해결해놓고 비행기에 올랐다.
"글쎄요. 워낙에 욕 먹을 곳이 많아서 그런 게 아닐까요?"
내 옆에는 흑발에 선글라스를 낀 정장의 여인이 앉아있었다. 모델처럼 긴 체구에 어깨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 그리고 송곳니가 매력적인 그녀의 눈동자는 선글라스로도 가릴 수 없는 옥색이었다.
"스튜디오 사람들한테만 얘기하고 그냥 도망 나오듯 떠나왔잖아요."
"고작 일주일 잠깐 다녀오는 건데 너무 걱정들이 많아서 그렇지."
"해외 나가는데 걱정 안하면 이상한 거 아닌가요?"
"최고의 보디가드가 있는데 걱정할 이유가 없잔아."
나는 그녀에게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갸르릉 소리를 내며 내 손길을 만끽했고, 새하얀 송곳니를 드러내며 카탈로그를 뒤졌다.
"기내식이나 봐요. 일등석인데 설...."
그녀는 표정이 굳었다. 나는 카탈로그에 붙은 스티커에 등허리에 식은 땀이 흘렀다.
"민초가...없어?"
그녀는 카탈로그를 몇 번이고 다시금 눈으로 확인했다. 하지만 없는 걸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미 지상을 떠난 허공에서 민트초코를 공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회항시킬까요?"
"참아."
나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진정시켰다. 마치 담배를 한 대 태우려다가 돗대가 이미 사라진 빈갑이라는 걸 발견한 것 처럼, 그녀는 민트초코를 먹을 수 없다는 것에 몹시 불안감을 내비쳤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본고장에 가서 먹을 수 있어. 그러니까 지금은 인내심을 발휘하고 참아보는 건 어때?"
"...그러면 대신 다른 거로 대체해야겠네요."
그녀는 내 고개를 잡아당기며 강제로 입을 맞췄다. 주변에 소리가 날 정도로 격한 키스에 스튜어디스 들이 붉어진 얼굴로 우리를 쳐다봤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입에 고인 침을 모조리 빨아당겼다.
"이거로 세 시간은 더 버틸 수 있어요, 하아."
그녀는 진심으로 만족한 얼굴로 일등석에 몸을 눕혔다. 스튜어디스는 나를 제지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몹시 고민하고 있었다.
'키스로 끝났으니 다행이지.'
내 옆의 여자를 빨리 진정시키려면 조금이라도 비행기가 일찍 영국에 도착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나는 불안해하는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펜리스 박. 내리자마자 일단 호텔부터 체크인하자고."
"......."
딱.
그녀, '펜리스 박'은 손가락을 튕기며 내게 윙크했다. 사냥감이 먹이를 눈앞에 둔 것처럼, 그녀는 혀로 입술을 핥으며 입맛을 다셨다.
"그럼 가는 동안 딸기 먹지마세요. 맛을 그대로 간직하고 계시란 말입니다, 사장님?"
"......화장실 잠깐 다녀올까?"
결국 나는 그녀를 화장실에 한 번 데려간 뒤, 물을 빼고 나서야 딸기를 먹을 수 있었다.
펜리스 박.
무엇을 숨기랴.
"...라온 박 님. 당사의 미흡한 서비스 제공에 사과드립니다. 민트초코가 아닌 다른 거라면 얼마든지 준비되어있으니-"
"괜찮아요. 방금 마시고 왔으니까."
그녀는 펜릴이 빙의한 박라온이다.
싱크로는 아닌, '강제빙의'.
* * *
"안 가면 안 되겠죠?"
"원탁에서 부른 거니까."
나는 팀원들을 모아 내게 전해진 공문에 대해 밝혔다. 원탁, 다름아닌 SS급 히어로 <가웨인 경>이 직접 보낸 지원 요청이었다.
즉, 내가 거부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게임으로 치면 강제 이벤트이며, 주인공이 한국 이외의 장소에서 이렇게 잘나가고 있는데 한국만 오면 천대받는다는 대비를 극명하게 보여주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물론 지금은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 애물단지에 불과하다.
"오빠, 이거 갈 필요 없는 거 아님?"
"그렇습니다. 사장님이 직접 가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팀원들은 내가 해외로 나가는 것을 한사코 반대했다. 그들이 걱정하는 건 역시 '나의 안전'이었다.
"사장님, 비행기 여행 중 괴수나 빌런의 습격으로 인해 사고를 당하거나 테러에 휘말리는 경우가 무려 18%라고 해요."
"괜찮아. 82%만큼 안전하다는 얘기니까."
"오빠, 18%면 더럽게 높은 거거든?"
"괜찮다니까. 내가 타는 비행기는 절대 사고가 안 나."
굳이 따지자면 내가 사고를 일으키는 편이다. 그러므로 사고가 일어날 확률은 무지 낮다.
"갑자기 미친 테러범들이 비행기를 납치하면 어떻게 해요?"
또한 항공기 납치와 같은 테러에 관해서는 아주 간단한 해결 방법이 있다.
"이건 꼼수인데, 나 빼고 다 X로이드로 채워서 타면 돼."
"...그건 거의 전세기 아닙니까?"
"돈 엄청 깨지는 거 아님?"
"괜찮아. 돈만큼 우리에게 의미없는 게 또 어디있겠니."
비행기가 터져도 물어줄만큼의 돈이 넘쳐난다. 내 말에 팀원들은 조금 기세가 누그러졌다.
"그리고 나 혼자 가는 것도 아니야. 나도 보디가드 데리고 가야지."
보디가드라는 말에 모두의 표정이 굳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를 일제히 말리려던 팀원들은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
팀원들은 내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는 이미 한 명 확고하게 마음을 정했다.
"라온아, 너 영국 가본 적 없지?"
"네."
"그럼 나랑 이번에 영국가자."
"감사합니다."
박라온은 활짝 미소지으며 나와의 영국행을 반겼다. 다른 팀원들은 저마다 불만을 드러냈으나, 한 번 침대 위를 다녀오고 난 뒤로 불만은 마력과 함께 뱃속에 고이 집어넣었다.
"비행기 예매를 하면 되는 겁니까? 뭐든지 시켜달라는 겁니다."
"그런데 라온아, 그냥 갈 수는 없어. 이건 네가 양해를 해줘야 해."
"...무슨 말씀이신지?"
"네 '몸'을 좀 빌리고 싶거든. 라온이는 전적으로 나를 믿지? 이번 여행이 끝나면 라온이 급격하게 성장할 지 몰라."
나는 박라온에게 몸을 빌려달라고 요청했고, 박라온은 눈을 질끈 감으며 침대에 누웠다.
"마음껏 몸을 쓰십시오!"
"그래. 라온아, 일단 벗고 얘기하자."
찌걱.
나는 박라온을 마력공급 절정으로 보내버렸다. 그리고 그녀가 의식을 잃은 사이....
"빙의다냥!"
다크 레기온의 간부, 김펜릴은 박라온의 몸에 깃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