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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698화 (698/1,497)

〈 698화 〉2부 4장 25

지피지기면 백전불태.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는 옛 성현의 말씀은 슈리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적에 대한 정보를 확실히 알고, 내가 가진 능력을 십분 발휘하면 얼마든지 적을 쓰러뜨릴 수 있다.

적은 A급 괴수 하나, B급 괴인들 수 십, 그리고 C급 괴수 수 백.

그에 반해 아군은 A급 둘 이외에는 모두 C급일 뿐.

전력으로 따지면 분명한 열세였고,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전멸하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상황은 위험했다. 위험해야만 했다.

"라온이랑 누리는 왼쪽으로 피하면서 껍질 두드려. 하얀 부분은 다 소금으로 보호막 쳐둔 거야. 그거 깨야돼."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가만히 서서 말만 하고 있을 뿐인데, 마법소녀들은 명령을 입력받은 기계인형처럼 정확히 움직이며 적의 공격을 피했다. 피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정확히 자신이 낼 수 있는 전력만큼 적에게 상처를 입혔다.

"가온이는 바다 밑에서 오는 놈들 오지 못하게 만들고, 유나는 계속 광탄 날려. 솔트 페니어스가 접근하지 못하게 눈 앞에서 광탄을 터뜨려."

적에 대한 정보 하나, A급 괴수 솔트 페니어스는 시력이 좋지 않다. 그래서 눈 근처에서 광탄-플래시 뱅을 터뜨리면 순간적으로 표적을 잃고 방황한다.

키에에엑!

솔트 페니어스는 앞으로 미끄러지듯 육탄공격을 감행했다. 거대한 수염촉수를 사방으로 흩뿌리며 한 놈만 걸리라는 듯 휘둘렀다.

"온다. 슈리, 공격 준비."

정슈리는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스태프를 움켜쥐고 앞으로 내밀었다. 견습이나 마찬가지인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는 아주 쉽고 간단했다.

"아까 구워버린 왼쪽 말고, 오른쪽 부분을 맞추는 거야. 알았지?"

말은 쉽지, 라는 속내는 입속으로 쏙 들어갔다. 마도기어를 통해 전해진 궤적은 발사 타이밍, 발사 각도, 그리고 마력의 출력을 정확히 수치로 표현하고 있었다.

말은 간결하게. 하지만 홀로그램 콘솔을 통한 지휘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대로 싸우면 A급은 커녕 S급과도 견줄법한 엄청난 능력에 슈리는 침을 꼴깍 삼켰다.

"부담가지지말고, 여유있게 쏴. 시간 3초나 있으니까."

슈리는 마법사 이능력자들이 주로 하는 게임 시뮬레이터를 떠올렸다.

마력을 끌어올리고 발사타이밍을 재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마치 낚시 게임을 하듯 특정 게이지의 중간 즈음에 버튼을 누르면 물고기를 낚는 시뮬레이터였다. 지금 슈리의 눈앞에는 그것과 똑같은 게이지가 움직이고 있었다.

"3, 2, 1. 지금!"

"하아앗!"

슈리는 기합과 함께 마력을 폭발시켰다. 게이지 안에 들어간 바가 붉은 바탕의 한가운데에 들어간 순간, 슈리의 스태프에서 거대한 불기둥이 치솟아올랐다.

"파이어!"

기술명은 필요 없었다. 지정된 발사 궤적을 향해 스태프를 겨누고 쏘는 건 아카데미 신입생도 할 수 있을만큼 쉬웠다. 시뮬레이터와 달리 발사 궤적, 발사 타이밍 등 모든 지휘는 실시간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지만, 슈리는 바로 옆에 선 유나를 믿었다.

유나가 믿는 길드장, 지휘관을 믿었다.

키에에엑!!

솔트 페니어스의 몸에 불기둥이 스쳤다. 라온과 누리가 상처를 입혀 벗겨진 소금 보호막이 한순간에 떨어져나갔고, 불기둥은 솔트 페니어스의 몸에 달라붙어 서서히 괴수의 몸을 구워나가기 시작했다.

크엑, 크에엑!!

이미 반대편은 원래의 색을 잃고 붉은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소금 아래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껍질은 연신 붉은 기운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역시 새우는 구이가 제맛이지."

냐아앙.

청화는 괴수의 고통을 눈으로 즐기며 품안의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혼자서 마실을 나온 것처럼 유유자적한 모습이었지만, 고양이를 쓰다듬기 전까지 그의 두 손은 한쉬도 쉬지 않았다.

"우리 끝나면 해변에서 조개 까먹을까?"

"그 조개가 제가 아는 그 조개가 아니겠죠?"

"몸에 열나면 입 살살 벌리면서 해수 뿜어내는 조개 맞는데?"

"사장님. 조개는 입이 살짝 벌어지면 안의 살을 쪽 빨아먹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맛있다고 했습니다."

온갖 음담패설이 농담처럼 지나간다. 아직 몸에 불이 붙은 괴수는 괴로움에 비명을 지르고 있지만, 슈리는 절로 긴장감이 풀렸다.

전투 지휘 이외에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던 남자가 슬슬 성적 농담을 지껄이기 시작했다. 카리스마를 보이던 모습은 사라지고 유들유들한 장난기를 보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전황을 말하고 있었다.

키이익....

쿵.

A급 괴수, 소금으로 피부에 보호막을 두른 솔트 페니어스는 소금밭 위에 멈췄다. 슈리는 아직도 몸에 달라붙은 불길이 꺼지지 않는 것에 의아함을 느꼈다.

"도대체...?"

"몸안의 기름이야. 사장님 말씀으로는 네 덕분에 쉽게 잡은 거라고 하셨어. 축하해, 슈리야."

유나는 홀로그램을 톡톡 건드렸다. "승리!"라는 경쾌한 문구 아래, 여느 길드에서나 보이는 딜 미터기에는 각자의 점수가 등급과 함께 박혀있었다.

이유나, A.

박라온, A.

김누리, A.

김가온, A+.

하유은, A.

선겨울, B.

석하랑, S.

그리고 정슈리, S+.

"어...?"

숱한 감점이 있었는데도 왜 S+라는 평가를 받았는가? 무수히 많은 -표시 옆에, 감점된 점수를 모두 까먹는 +표시에 슈리는 울컥했다.

...감점 10점

...감점 50점

...감점 30점.

지휘대로 명령을 충실히 이행함. 10000점.

"이거, 도대체 어떻게 된...?"

"아, 그거? 별 거 없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유나는 확실한 미소와 함께 슈리와 팔짱을 꼈다.

"사장님 말씀하시는 게 틀릴 리가 없으니까. 느꼈지?"

"......유나야."

슈리는 무언가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주변에는 아직 괴인과 괴수가 널려있었지만 마법소녀들과 주인은 대수롭지 않게 저녁 파티 메뉴를 정하고 있었다.

"저거 가만히 내버려둬도 돼?"

"응. 사장님 말씀 빌리면, 보스 몹 잡으면 잡몹들은 일제히 죽는 게 국룰이랬어."

"이건 현실이잖아."

"맞아. 저기 봐봐."

유나는 죽은 솔트 페니어스를 가리켰다. 내부의 새우 기름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는 가운데, 대하 괴인과 괴수들이 불타는 몸에 파고들며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A급 괴수가 죽었어. 그럼 괴인이나 괴수들 대부분 죽은 괴수의 코어를 챙기려고 하느라 눈이 돌아간다고 하더라."

"그, 그런 거 들은 적 없어...."

"당연하지. 우리 팀만의 노하우...사장님이 알려주신 노하우 같은 거니까."

"부연설명을 하자면 놈들에게 이지선다를 거는 거야."

슈리는 남자의 피곤한 목소리에 몸이 쭈볏섰다. 어느새 저녁 메뉴를 다 정한 듯, 마법소녀들은 각자 무기를 챙겨 갑판 위에서 다시 전투 자세를 잡았다.

"목숨을 걸고 A급 코어를 탈취해서 더 강해질지, 아니면 우리랑 계속 목숨을 걸고 싸울 지. 시체 주변에 어슬렁거리는 스캐빈져 같은 거지."

"마, 만약에 쟤들이 코어를 훔쳐가면요?!"

"아, 그건 걱정마. B급 코어도 아니고 A급 코어인데 내가 놓칠 것 같아? 그랬다가는 누구한테 회칼로 칼침맞아 죽지."

갑판의 키를 잡고 있던 하유은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A급 괴수가 불타죽고 있다고 한들, 주변에 한 가득 쌓여있는 괴인과 괴수 무리에 슈리는 괜히 불안해졌다.

"우리는 이제 튀면 돼. 다시 항구로 돌아갈까?"

"저, 저것들 마무리는 안 해요?!"

"마무리 하려고 멀어지는 거 아냐."

백청화는 선미에 구둣발을 올리고 코트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바닷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파도로 튀는 물방울을 맞으며 그는 거대한 총을 들어올렸다.

"다들 고생했어. 이제 저것들 치워버리자. 내가 이걸 위해서 석하랑한테 좋은 걸 받아왔거든."

"총...?"

"빵!"

우레소리와 함께, 솔트 페니어스 근처에 몰려있던 괴수들이 일제히 얼어붙었다. 마탄이 날아간 바닷길은 꽁꽁 얼어붙어 빙판이 되었고, 괴수의 안에서 타오르던 불길마더 얼어붙어버렸다.

"이게 S급의 힘...!"

슈리는 다른 마법소녀들도 입을 쩍 벌리며 놀라는 것에 어안이 벙벙했다.

"이게...도대체...?"

"몸은 부산에 있지만 마음만이라도 같이 싸우는 거지. 어때, 설화공주 특제 마탄의 힘이."

백청화는 마탄의 궤적에 따라 얼어붙은 빙판에 뛰어내렸다.

"이름은 블루베리탄이야. 줄여서 BB탄이지. 푸흐흐."

"......."

슈리는 자신의 위에 '석하랑 S'라는 평가가 떠올라 소름이 돋았다.

* * *

A급 괴수의 등장은 분명 전국에 경보가 울려퍼질 일이다. 거기에 주변국에서도 제법 관심을 가질만한 일이다.

그런 와중에 신안에서 나온 염전 괴수 집단은 분명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 사안이었다. 그럼에도 신안 염전의 문제는 해당 지역을 다녀온 마법소녀 길드 이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괴수요? 신안에서? 아니 마도 레이더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는데 어떻게 압니까?"

신안에 협회의 실시간 관찰 시스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신안 인근에 사는 이들이 아무리 신고를 한들 소용이 없었다. 해안가에 나타나는 잔챙이 괴수는 일상이었으니까.

"뭐요? 괴수가 겁에 질려 도망치는 것 같다? 이상하네. 뭐가 두려워서 육지로 도망치지? 육지에는 광검님이 계신데?"

사뭇 논리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괴수의 동정은 분명 이상했다. 기본적으로 괴수는 야생동물의 습성을 무척이나 닮아있었고, 당연히 바다에 사는 괴수들이 광검의 영토인 육지로 올라오는 것 자체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당연히 괴수들은 하늘에거 떨어지는 금빛검에 꿰뚫려 사망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뻘에서 올라오는 심해 괴수들은 하나 둘 생명을 다하여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아니, 그래서 매지컬 큥큥스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인천에 있던 건 디코이였대! 젠장, 도대체 무슨 수로 위치를 숨긴 거지?"

"아카데미는 실습 장소를 공개하라! 아카데미는 실습 장소를 공개하라!"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진 길드원들이 마법소녀들의 행방을 찾아 전국을 들쑤시는 바람에, 전국에 있는 괴수들도 어느정도 날뛰기 시작하고 말았다. 결국 신안에서의 소동은 고요히 파도속에 가라앉았고, 그 누구도 신안을 찾지 않았다.

"하하하, 원대학 학장이 아무리 그래도 그곳을 후보지로 넣었겠소?"

"그러게 말입니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 동네에 학부생을, 그것도 정슈리를 보내지는 않았겠죠!"

언제나, 설마는 사람을 잡는다.

* * *

<목포항 인근, 유성 전용 크루즈 선 안 스위트룸.>

"나를 위해서 이런 배까지 끌고오다니, 몸둘 바를 모르겠는 걸."

"A급 코어 하나에 C급 코어 수백 개. 크루즈 선 닷새 정도야 얼마든지 빌려드릴 수 있죠."

하유은은 내 아래에 무릎을 꿇고 앉아 열심히 혀를 놀렸다.

자존심 센 그녀가 직접 펠라로 내게 봉사를 하는 것에 더불어, 일부러 목포항까지 크루즈 선을 몰고와 우리의 활동 거점으로 내어준 것은 분명 그녀가 이번 일로 상당히 기뻐한다는 증거였다.

"얼싸할 거예요?"

"아니. 안 쌀 건데. 이제 그만해도 돼. 근데 너 내 거 들고가서 연구하려고 그러지?"

"아뇨. 정자은행에 비싼 값에 팔 건데요."

"무정자증으로 분류되어서 팔리지도 않을텐데?"

"칫, 그러면 유나랑 애들한테 팔아버리면 그만이죠."

유하는 입술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내 자지에는 그녀의 붉은 립스틱 자국이 한가득 묻어있었고, 유하는 물티슈로 내 자지를 닦아냈다.

"친절하셔라. 이게 A급 코어의 위력인가?"

"에스급 코어 가져오시면 ASS 소리 나오게 해드릴게요."

"그래, 그래. 그것도 조만간이야. 그보다 이번 실습에서 얻은 나머지 코어...."

나는 유하와 우리의 사냥 결과에 따른 코어를 정산했다. 솔트 페니어스를 비롯한 첫날 신안 염전에서의 전투 결과는 당연히 '비공식' 전투였고, 그에 따른 모든 결과는 대외적으로 밝힐 만한 것이 아니었다.

'김펜릴 결계 치고 싸웠으니.'

SS+급 이능력자의 결계 속에서 우리는 염전을 불태우고 얼렸다. 은유하는 크루즈 선을 동원하여 괴수의 사체를 말끔하게 실었고, 안에 남은 괴수들의 코어를 싹 쓸어버렸다.

괴인? 흔적도 남기지 않고 소멸했다. 우리는 그들의 명복을 빌어주는 의미에서 하루 쉬며 기도했다. 그리고 그들의 복수 겸 우리의 실적을 쌓기 위해, 갯벌 곳곳을 돌아다니며 실적으로 내세우기 적당한 D~C급 괴수들을 사냥했다.

"...그러면 거기에 투자하는 거로 하죠. 그보다 슬슬 애들 이제 돌아올 때가 되지 않았어요?"

"그래. 드디어 그 날이지."

실습은 내일로 끝난다. 실적은 한가득 쌓였고, 실습 평가는 모두 끝났다. 이제 남은 건 뒷풀이 뿐.

"흐흐, 첫 경험을 크루즈 선에서 로맨틱하게 보내다니. 슈리도 정말 좋은 스폰서를 뒀다니까."

"화마인은 예전부터 제가 찜해둔 사람이었어요. 이 정도 투자는 기본이죠. A급 코어에 A급 이능력자까지 얻게 됐는데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그렇지? 그러니까 배틀슈트에 유성 마크 박는 대신에 20% 할인해주면 안 돼?"

"10%."

"깐깐하긴."

"15% 할인 해주면 남는 거 없어요. 최소한 B급 코어 들고오지 않는 이상."

유하는 거래를 확실히 하고자 했고, 나 또한 큰 문제없이 받아들였다. 마침 항구 근처에 유성의 자율주행택시 두 대가 도착했다.

"어이쿠, 그러면 이제 진짜 뒷풀이를 할 때군. 크으으, 오래 기다렸다."

"...하아. 적당히 하세요? 괜히 울리지 말고."

"울릴 일이 뭐 있어? 내가 뭘 할 줄 알고."

유하는 방을 떠났다. 나는 침대에 앉아 그녀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다른 이들에게도 미리 이야기가 된 상황이라, 나는 그녀를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실례합니다."

정중한 노크소리와 함께 <화마인> 정슈리가 들어왔다. 하얀 비키니 수영복에 속이 비치는 가디건을 걸친 그녀는 팔로 자신의 몸을 가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슈리 양, 일주일 동안 내 지시대로 움직여보니까 어때?"

"...청화 님 지시는 조금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현장에서 우수한 지휘관이 내리는 지시가 어디 부당했어?"

"전혀 그런 거 없었습니다. 그, 그런데...."

"그러면 명령이야."

나는 다리를 더 벌리고, 유하가 잔뜩 애를 태워놓고 떠난 나의 피닉스를 가리켰다.

"빨아."

불속성이면 내 명령을 따르는 게 당연지사. 슈리는 눈을 질끈 감으며 내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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