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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695화 (695/1,497)

〈 695화 〉2부 4장 22

새로운 집단에 들어온 신입이 가장 당황스러울 때가 언제일까.

새 집단의 문화에 적응할 때? 자신이 알고 있던 상식과 상황이 서로 배치되어 혼란을 느낄 때?

'정답은 불합리한 상황에서 자신으로 인해 다른 선량한 이가 피해를 볼 때.'

니위내밑. 상명하복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꼰대 문화 중 하나. 이른바 내리갈굼으로 불리우는 행위는 슈리가 헬조선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반드시 알아야 할 안 좋은 문화였다.

그리고 길드 실습은 그런 악습을 배우는데 있어서 가장 훌륭한 교육의 장이기도 했다. 슈리는 우리 길드를 통해서 헬조선의 나쁜 모습을 익혀나갈 것이며, 이를 통해 이 나라에서 살아남기 위한 '사회생활'방법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우웁?!"

그걸 위한 내리갈굼이다. 나는 일부러 유나의 머리를 지긋이 눌렀고, 눈으로는 슈리를 노려봤다.

"앞으로 내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유나가 피해를 입을 거야."

"어, 어디서 이런 협박을...! 유나야, 정신차려!"

"이유나는 지금 제정신이다. 그리고 우리 팀원들 모두가 제정신이지."

짝.

내가 손뼉을 치기 무섭게 호텔방 곳곳에 숨어있던 여인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유나 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이 알몸에 가까운 모습으로 나타났다. 순수하게 알몸인 건 유나 한 명 뿐이었지만, 방 안에 가득한 살색의 향연에 슈리는 머리칼이 점점 붉은 기운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이, 이...."

"나는 평범한 인간이야. 히어로 지망생이 무고한 사람에게 이능력을 쓰면 어떻게 되는지 배우지 않았나? 모르면 알려줄게. 유나야, 어떻게 되지?"

"푸하. 바로 이능력자 전용 감옥에 갇혀요. 실형을 사게 되죠."

유나는 입술 주변을 닦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유나를 비롯한 나의 팀원들은 하나 둘 내 주변으로 다가와 내 몸에 살을 맞대었다.

"화마인 양, 여기서는 내가 법이고 내가 곧 규칙이야. 그러니까 내 말을 듣지 않고 분위기를 흐리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이걸 보고도 가만히 있으라고 지금?"

"그럼. 앞으로 실습 끝날 때까지 일주일 내내 이걸 보게 될 건데 그냥 익숙해지고 적응해."

슈리 한 명의 눈치를 보느라 마력공급을 몰래 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슈리의 앞에서도 대범하게 하는 것이 나나 다른 팀원들에게 훨씬 더 나았다.

남들의 앞에서 마력공급을 하는 것에 대한 저항력을 낮추는 것이야말로 슈리 공략을 위한 지름길. 동시에 야생마같은 슈리에게 조직에서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고삐와 안장을 채우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다.

"라온아. 내가 너한테 박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하지?"

"즉시 속옷을 벗습니다."

"밖에서 싸고 싶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남들 안 보이는 으슥한 곳에서 한 발 빼고 오는 거임. 넣는 곳은 당연히 여기."

라온과 누리의 지원사격에 슈리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와 유나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 조차도 성적으로 개방되다 못해 활짝 문이 열린 것처럼 행동하고 있으니, 기존에 알고 있던 상식이 붕괴되는 듯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슈리 양, 섹스하기 싫으면 그냥 가만히 있다가 가도 됩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의 길드 운영에 태클을 건다거나 방해를 한다거나, 남들에게 우리의 모습을 알리는 순간...."

찌걱. 나는 다시 유나의 얼굴을 내 고간에 문질렀다.

"네 건방진 입 대신에 유나의 입을 막아버릴 거야."

슈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짐을 챙겨 자신의 방으로 이동했다.

* * *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조금 과하게 저지른 것 같은 거임."

슈리가 내 방을 떠난 이후, 내 지시에 따라 나를 유혹하느라 안간힘을 쓰던 팀원들은 슈리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내가 자신들을 영입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강압적인 모습에 다소 꺼리는 기색도 내비쳤다.

- 오자마자 유나 범해지는 거 보여주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

- 이게 다른 길드 놈들 하는 거랑 뭐가 다름?

- 내리큥큥으로 슈리 양은 떠나게 되었습니다.

히로인 공략에 있어서 잘못된 선택지를 내린게 아닐까. 다들 나의 선택을 걱정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걱정마. 다 문제 없어. 내가 잘못된 선택을 내리는 거 봤어?"

하지만 나에게는 공략집이 있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대처 가능한 공략집이 하나 있고, 혹시나 잘못되었다 싶으면 사용할 수 있는 치트키도 있다.

"겨울아, 화마인에 대한 세간의 평은 어떻지?"

"음...자존심이 강하고 기가 센 여자?"

겨울이 말한 화마인에 대한 평가는 틀린 게 없었다. 기 센 외국 언니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슈리는 실제로도 자존심이 강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편이다. 자부심과 자만심은 거친 성질과 욕설이 나오기 십상이었고, 그걸 A급이라는 재능으로 유야무야 넘어갔다.

"슈리는 지금 자기가 1등이라고 착각하고 있어. 히어로 아카데미에서 자기보다 더 대단한 존재가 없었으니까, 자신이 최고인 줄 알아. 그나마 지적으로 견줄만한 게 유나라고 여기고 있는 거지."

"그러니까 사장님 말은 자뻑의 화신이다 이 거임?"

"그래. 전교 1등 학생의 흔한 착각이지."

우물 안 개구리는 세상을 넓게 바라볼 수 없다. 신서울 아카데미라는 좁은 곳에서 여왕처럼 지낸 슈리는 자신을 우러러보는-실제로는 질투하는-사람들은 많았어도,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친구가 유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단 하나.

재수없어서.

아카데미에서는 모든 길드의 1픽으로 유망주로 꼽히기는 하지만, 결국 지휘관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평생 A급에서 머무르게 될 운명이다. 그런 존재는 대부분 자신이 마주하는 새로운 환경에서 된통 당하기 마련이고, 새로운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게 된다.

"우리가 지금 하는 건 슈리의 개념찬 사회인 데뷔를 돕는 거야. 아카데미 안의 작은 새장에서 벗어나 세계를 가슴에 담는 거지. 푸흐흐."

"말은 되게 거창한데 실상은 안 대주면 학점 F라는거 아닌가요?"

"어허. F보다 무서운 게 D-란다. 그리고 슈리 같은 녀석한테는 C+가 제일 좋지."

A급 유망주의 성적이 애매한 B도 아니고 C가 나온다? 의아함을 가진 이들은 다들 궁금해 할 것이다. 도대체 무슨 사유로 C를 받은 건지. 그리고 그들은 실습 평가에서 낮은 점수를 받은 이유로 '지시불이행'을 보게 될 것이다.

"사회에서 윗사람의 정당한 지시를 따르지 않는 자. 과연 사회에서 얼마나 좋게 봐줄까?"

아무리 모셔가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고 한들, 제 가치를 과신하고 갑이 되려고 하는 유망주는 정신머리를 뜯어고쳐야한다. 슈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새롭게 가져야 한다. 나는 단지 그 방법을 마력공급으로 하려고 하는 것일 뿐.

"저희야 슈리 양 눈치 안 보고 마력공급 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만, 역시 불편한 건 불편합니다."

"이러다가 저 사람이 전부 다 까발리면 끝장 나는 거 아님?"

"그래요. 아무리 유나 친구라고 해도, 처음 보는 사람인데 어떻게 나올 지 모르잖아요."

슈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나와 슈리에 대해 귀동냥으로만 들은 사람들. 둘 사이의 간극을 없애려면 나는 슈리의 성향에 대해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까 유나를 내리갈구는 거지. 슈리는 모든게 유나가 우선인 사람이야. 얘기했지? 유나가 쟤를 2월에 데려왔으면 진작에 마력공급 하고 있었을 거라고."

슈리의 잘못은 유나의 잘못. 슈리가 진정으로 유나를 생각한다면, 나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는 못 베길 것이다.

"근데 사장님. 왜 유나만 갈구세요?"

"응?"

"...수, 순서 따지고 보면 유나가 최고 선임이고, 슈리 양이 막내 아니에요? 그러면 슈리 양 위로 집합하라고 하면 전부다 포함되는 거 아녜요?"

"유나가 자기 때문에 고통받는 것도 상당히 괴로울테지만, 생면부지의 사람이 자기 실수로 고통받는 것도 충분히 당혹스럽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장님. 우리도 갈굼 잘 받을 수 있는 거임."

팀원들의 은근한 눈빛에, 나는 절로 입안이 바싹 말랐다.

"모두 엎드려."

유나가 슈리를 잘 설득하는 동안, 나는 모두를 엎드리게 하여 갈궜다.

* * *

"경찰에 신고하자, 유나야."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아무튼 신고하자, 제발!"

슈리는 발을 동동 구르며 유나를 설득하려고 했다. 백청화가 슈리와 유나를 상대로 벌인 갑질은 명백히 신고감이었다. 하지만 신고의 주체인 유나가 가만히 있어서는 신고해도 역효과만 날 뿐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넌 지금 눈에 콩깍지가 씌여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거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이게 지금 말이나 되는 상황이니?"

"콩깍지가 씌였을 정도로 푹 빠졌다는 거지? 아, 좋아라."

"말 돌리지 마! 그게 아니잖아, 이 멍청아! 푹 빠진 걸로도 모자라 그 인간한테 물들면 어떡해?! 넌 지금 성적 착취를 당하고 있는 거라고! 알아?!"

슈리의 미묘한 단어 선택에 유나는 눈썹이 꿈틀거렸다. 법조항을 찾니 마니, 판례를 찾니 마니 하며 전전긍긍하는 슈리의 모습은 진짜 변호사를 찾아갈 것만 같았다.

"슈리야."

"왜? 드디어 신고할 마음이 생겼어? 역시 그런 성범죄자는-"

"슈리 너 예전에 나한테 지휘관 관련해서 했던 얘기 기억나?"

"......."

슈리는 침묵했다. 유나는 슈리를 소파 맞은편에 살포시 앉혀놓은 뒤, 그녀의 옆에 앉아 손을 꼭 잡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다독였다.

"섹스 한 번으로 마력이 오르면 씹이득이라며. 그 때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나."

"그, 그건 그냥 해본 소리고...."

"해본 소리가 아니잖아. 내가 너 1년 동안 봤는데 설마 네 속마음을 모르겠어? 사장님이 싫은 게 아니라, 지금 틱틱거리고 있는 거잖아."

"........"

슈리는 여전히 침묵했다. 유나는 슈리와 눈을 마주하며 등을 토닥였다.

"나한테만 말해봐. 뭐가 그렇게 걸리는 거야? 내가 거짓말해서 그래? 그건 미안해. 근데 진짜 어쩔 수 없었어. 사장님 정체를 숨기려면-"

"...악몽."

"응?"

"......보름달이 차는 날이면 밤마다 꿈을 꿔. 남자들에게 범해지는 꿈. 같은 꿈이 반복되기도 하고, 때로는 전혀 다른 꿈이 나타나기도 해. 한 명에게만 그렇게 당할 때도 있어."

슈리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유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 그, 그런 거 나한테 말 안 했잖아?"

"그런 걸 어떻게 얘기해?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얘기할 수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있는 거야. 네가 저 남자의 정체를 숨기려고 했던 것처럼."

"윽...."

슈리의 지적에 유나는 반론을 하지 못했다. 점점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하는 슈리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마지막은 매번 같은 꿈을 꿔. 금발의 남자에게 당하는 꿈을."

"앗."

"난, 꿈속에서 그 인간에게 맨날 처녀가...!"

"......."

유나는 슈리를 살포시 끌어안았다.

"나...씨발...주기 안 맞는 날은 한 달에 생리를 두 번 한다고...!"

유나는 그제서야 슈리가 그를 진정으로 싫어하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

* * *

잠시 뒤.

나는 엎드리게 한 여인들을 모두 침대 위에 재웠고, 유나의 호출을 받아 슈리와 단 둘이서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래서 생각은 좀 바뀌셨나? 내 지시에 절대적으로 복종할 자신 있어?"

"조건이 있어요."

"건방지게 그 쪽이 조건이 걸 상황은 아니기는 하지만, 들어는 줄게. 대신 말도 안 되는 말이면 내가 유나한테 말도 안 되는 짓을 시킬 거야."

"...아카데미를 그만두고싶지 않아요."

슈리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당찬 얼굴로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당신의 정체가 어떻든, 불확실한 미래에 도박을 할 만큼 저는 자신감이 없어요. 그러니까 저는 아카데미 졸업장을 꼭 가져야겠어요."

"그래야 신서울에서 성공할 수 있으니까?"

"네. 유명 길드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아카데미 졸업장이 꼭 필요해요. ...그리고 이번 실습에서 A+를 받지 못하면, 분명 수석 졸업에 불이익을 받겠죠."

"당연하지."

성적과 졸업을 두고 협박했다. 섹스를 하지 않으면 학점에 C를 남기겠다고.

"그러니까 조건이에요. 이건 A급 이능력자로서 가진 자존심이니까, 이것 만큼은 양보하지 못해요."

"들어나 보지."

"...설화공주, 그리고 저 없이 A급 괴수를 잡으면 인정해드릴게요."

A급 괴수를 토벌하라!

# 조건 : 정슈리, 석하랑 참전 불가.

# 달성보상 : 정슈리 정식 영입.

슈리의 조건은 간단했다. 우리가 가진 능력을 발휘하여 A급 괴수를 토벌하는 것.

'김펜릴 치트키 치면 바로 클리어가능하지만 그러면 분명 납득하지 못하겠죠.'

"좋아. 그 도전, 받아주지. 대신 이기면 네 처녀는 내 것이야."

"...얼마든지요."

슈리는 자신의 처녀를 걸고 일생일대의 도박을 걸었다. 만약 우리가 A급 괴수의 토벌에 실패한다면, 그녀는 자신의 분수도 모르고 내 정체를 세간에 퍼뜨릴 게 분명했다.

"그럼 가자. A급 괴수 잡으러. 우리가 왜 신안까지 내려왔겠어?"

신안에는 A급 괴수가 산다.

"혹시 대하 좋아해?"

염전 속에 파묻힌 거대 새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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