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2화 〉2부 4장 19
"정신이 들어?"
슈리는 눈을 떴다. 눈앞에는 걱정 반 미안함 반으로 가득한 유나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자신은 얼음으로 된 침대 위에 반듯하게 누워있었다.
"나...."
"유나한테 뒷치기 당해서 기절했습니다."
한창 열을 내며 싸우던 상대, 설화공주 석하랑은 손가락을 흔들어 마력을 해제했다. 슈리는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와 대자로 누웠다.
"...내가 살다살다 유나 너한테 뒷통수를 맞을 줄은 몰랐는데."
"미, 미안. 그치만 사장님이 이게 네 약점이라고 하더라고."
"사장님? 약점?"
잠시 기절했다 눈을 떠서 그런걸까. 슈리는 유나의 말에 잠시 귀가 쫑긋했다. 무엇이 자신의 약점이라고 말하는 건지는 몰라도, 사장님이라는 존재가 말했다는 것에 잠시 흥미가 들었다.
"히어로는 언제 어디서든 자기 몸을 신경써야합니다. 세상에는 둘도 없는 친구를 세뇌해서 뒷통수를 치는 빌런도 있기 마련이죠."
"그걸 지금 조언이라고 하는 겁니까?"
"살이 되고 뼈가 되는 꼰대의 조언입니다. 새겨들으세요."
"......."
슈리는 하랑의 씁쓸한 표정에 침묵했다. 그리고 왜 석하랑 주변에 친구가 없는지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왜 석하랑이라는 존재가 유나와 '팀'을 맺었다고 말하는 지 알 수 있었다.
"유나랑 같이 밤을 지새웠다는 거, 진짜로 둘이 같은 길드 소속이라서 그런 거예요?"
"예. 일단 이름은 오라클 스튜디오로 칭하고 있습니다. 공식적으로 저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협회 소속의 히어로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길드 소속으로 공식적으로 알려지게 될 겁니다."
"실화냐...."
한국에서 둘밖에 없는 S급이 길드에 등록되다니. 그리고 그걸 자신에게 말하다니. 슈리는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진짜로 저를 길드로 영입하려고 하는 건가요?"
"예. 슈리 양이라면 충분히 저희 팀에 들어올만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잠재력? 능력이 아니고요?"
"훗."
석하랑은 자신감 넘치는 미소와 함께 얼음으로 된 나비 한 마리를 만들어냈다. 공격의 의도가 담기지 않은 얼음나비는 나풀거리며 슈리의 근처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아까랑 다르죠?"
"네? 뭐가 다르다는...."
"슈리야. 한 번 겉을 녹여봐."
유나의 말에 슈리는 찝찝해하면서도 불꽃을 일으켰다. 슈리의 붉은 불꽃에 직격으로 얻어맞은 얼음나비는 겉면이 무참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
불길이 사그라들자, 슈리는 불기둥의 안쪽에서 유유히 헤엄치고 있는 나비의 존재에 화들짝 놀랐다. 나비는 얼음으로 된 껍질을 깨고 다시 태어난 것처럼, 증류수가 나비가 되어 날아드는 것 마냥 움직이고 있었다.
"빙결술사가...아니야...?"
"'그'의 도움으로 새롭게 깨달은 능력입니다."
"그?"
"예. 유나가 당신에게 임신당했다고 거짓말을 한 대상 말입니다."
"......헤헷."
하랑의 핀잔에 유나는 볼을 긁적이며 고개를 돌렸다. 슈리는 입을 쩍 벌리며 유나와 하랑을 번갈아가리켰다.
"아니, 그걸 어떻게...? 그보다 당신이 어떻게 그걸...?"
"같은 팀이라고 했잖습니까. 상황은 전부 들었어요. 나참...그 사람도 그런 장난이나 치고."
"장난...? 서, 설마."
"네. 임신 안했어요. 쟤가 계속 임신하고 싶어서 노리고는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 사람은 씨없는 수박이라서."
"......."
슈리는 한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남은 한 손으로는 슬쩍 옆으로 도망치려는 유나의 허리를 휘감았다.
"슈, 슈리야?"
"야, 이유나 썅년아."
다짜고짜 내뱉은 쌍욕에 기분이 나쁠 법도 했지만, 유나는 슈리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떻게 나한테 그런 거짓말을 해?"
"그, 그치만. 안 그랬으면 나 자퇴하는 거 이해 못 했을 거 아냐...."
"그냥 좋아하는 사람 생겨서 그 사람 곁에서 있고 싶다고 얘기했으면 끝날 일 아니야!!!!"
슈리는 머리끝까지 붉어진 얼굴로 기함을 내질렀다. 유나는 화들짝 놀랐다가 울먹거리는 슈리의 눈에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네가 그렇게 마음고생 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
"씨발, 나만 병신되고, 이게 뭐야...! 그 새끼는 왜 지 멋대로 유나가 강간했다느니 뭐니...!"
"아, 그건 사실인데. 자는 중에 몇 번 덮쳤어. 실은 오늘 아침도 오빠 자고 있는 중에 모닝펠라로 아침에 일으켜줬거든."
"......."
슈리는 유나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순진무구했던 소녀는 어느새 남자를 자는 사이에 수면간을 할 정도로 요사스러워졌다.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는 순박한 입술에 남자의 물건이 드나들었다는 것을 생각하니, 슈리는 온몸이 수치심과 부끄러움으로 불타버릴 지경이었다.
"뒷통수를 맞는다는 게...이런 느낌인가?"
"그것 뿐만이 아니랍니다. 화마인 정슈리 양, 그 사람이 여자 하나로 만족할 사람처럼 보였어요?"
"......."
슈리는 삐거덕거리는 고개를 석하랑에게 돌렸다. 하랑과 유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말해줘도 돼요?"
"그 이한테 허락은 받았으니까 전부 다 오픈해도 딱히 나쁠 건 없어보이는데? 괜찮지 않아?"
"하랑 언니만 괜찮다면야.... 아, 근데 그이라고 부르는 거 조금 불편한데요."
"뭐래. 너는 오빠지만 나는 같은 나이라고."
슈리는 두 여자가 같은 대상을 부르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둘이 나눴던 이전의 대화를 떠올렸다.
"둘이, 어제 같이 잤다고 하지 않았...?"
"응, 둘이서 어제 걔랑 같이 잤어."
"결과적으로 셋이서 같이 잔 셈이네. 슈리야."
유나는 슈리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이전에는 자신이 먼저 덥썩 잡았던 손이건만, 갑자기 유나가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그...나 혼자서는 오빠 감당하기 힘들거든? 그러니까 나랑 같이 하자."
"뭐, 뭘...?"
"너도 우리 팀에 들어와줘."
"도, 도대체 그 사람이 뭔데?!"
유나는 슈리의 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 누구도 듣지 못할 낮은 목소리에, 슈리는 그만 정신이 혼미해졌다.
"나...그...너 임신시켰다는 소리 듣고 그 사람 죽이려고 했...."
슈리는 충격과 함께 뒤로 넘어갔다.
* * *
<그 시각, 호텔방.>
"지금쯤 결과 나왔겠네."
"......."
나는 겨울과 함께 호텔방으로 돌아왔다. 찜질방에서의 정사 이후, 겨울은 찜질방에서 목욕을 하기 부끄러워해서 바로 옷을 입고 호텔로 돌아오고 싶어 했다. 덕분에 그녀의 팬티는 끈적하게 젖어있었고, 호텔방에서 따로 샤워를 해야만 했다.
"으으으...누구 때문에 좁은 곳에 있느라 근육이 다 뭉쳤잖아요. 마사지하세요."
"예, 예. 공주님."
함께. 나는 드넓은 샤워실에서 손에 거품을 잔뜩 묻힌 채, 물침대 위에 누워있는 겨울을 위해 거품으로 마사지를 하며 그녀를 씻겼다.
"남들 있을 때는 토굴에서 옷 입은 채로 섹스할 때는 부끄럽다고 뭐라고 하더니, 샤워실에 둘이서 들어오는 건 또 괜찮아?"
"뭐래요. 이미 볼짱 다 볼 사이끼리. 꼬우면 엉덩이에 끼워둔 좆 빼시던가요."
"그래, 그래. 느긋하게 하고 싶어서 호텔로 온 거잖아."
나는 겨울의 뒤에서 천천히 안으로 자지를 집어넣으며, 그녀의 앞에 마도기어로 화상 스크린을 열었다. 토굴 안에서 남들에게 들킬 수 있다는 스릴 때문에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불과 얼음이 부딪히는 전투를 우리는 느긋하게 다시 돌려봤다.
토굴에서 있던 자세와 똑같은 자세로, 남들이 보지 못하는 우리 둘 만의 공간에서 애널섹스를 하면서.
"그거 알아? 중세 시대 수녀님들은 순결을 유지하기 위해 애널섹스를 했다는 걸."
"알아요. 그것 때문에 뒤로 대준 거 아녜요."
"와. 겨울이 음탕해."
남자와 한 번 해보고 싶어하는 건 지난 번 허벅지 플레이에서 느꼈지만, 설마 처녀를 아끼기 위해 후장을 대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기고만장하지 마세요. 이번만 해드린 거니까."
"다음에는 앞으로 해주는 거지? 잘 알아."
"윽...."
겨울은 부끄러워하지만 부정하지는 않았다. 역시 천가을의 몸을 쏙 빼닮은 여자답게 색을 상당히 밝히는 타입이었다. 위치가 위치다보니 나름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지만.
'역시 선의철 딸내미.'
큐브의 힘으로 자지가 두 자리 수에 진입하는 순간, 온갖 변태적 욕정을 폭발시키는 것이 선의철이다. 그 딸내미인 만큼 색을 밝히는 것이 확실히 부친을 빼다박았다.
"그래서 결과는 어떻게 됐어요? 당연히 설화공주 님이 이기셨겠죠?"
"물론. 당연하지. 레벨 차이가 얼마나 많이 나는데."
"그렇네요. 아, 유나가 진짜 뒤통수를 때리고 끝나네요. 이러면 사실상 들키는 거 아녜요? 같은 팀이라는 거."
"전부 알았을 걸? 설화공주도 우리 팀의 일원이라는 걸 말이야."
"...둘 다 당신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도요?"
"물론. 쟤도 나랑 이런 사이가 될텐데, 알아둬야하지 않겠어?"
"흐읏...!"
겨울은 물침대에 고개를 쳐박았다. 찜질방에서와는 달리, 물기 덕분에 더욱 참방거리는 살결의 느낌이 애널 속 내 자지를 더욱 뜨겁게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치골에 닿는 엉덩이도, 손이 다 파묻히는 가슴도 빠져버릴 것만 같았다.
"도대체 이런 바람둥이의 뭐에 빠진 건지...."
"몰라서 물어? 너도 지금 빠진 거 아냐?"
"저, 저는 어디까지나 엔조이라고요. 섹파 몰라요, 섹파?"
"떡정이 얼마나 무서운 지 모르는 구나. ...근데 정말 애들이 나랑 섹파만으로 끝난다고 생각해?"
".......흥."
서울수복작전 이후, 선겨울은 사실상 내가 '지휘관'이라는 것을 제외하고 우리 팀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사실 이미 내가 지휘관이라는 걸 어렴풋이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아니,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 하고 있다.
'애들 마력이 나날이 늘어나는데 모르면 멍청이지.'
허구한날 훈련과 섹스만 반복하는데 마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간다? 세상에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사람은 지휘관 뿐이다. 겨울은 내가 지휘관인 걸 부친이 알면 다시 나라가 전쟁의 도가니에 끌려갈 것 같다는 생각으로 나를 옆에서 감시하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겨울아, 너도 이능력자잖아. 혹시 마력이 더 늘어났으면 하는 생각 없어?"
"개수작부리지 마요. 질내사정하면 뭐 마력이 더 늘어난다느니 그런 개짓거리가 저한테 통할 거라면 오산이에요. 전 처녀 결혼하는 사람한테 줄 거라고요."
"응, 그래, 그래. 애널섹스하면서 참 순진한 처녀같은 말은 다하고. 근데 다 알면서 하는 말이지?"
"......모, 모르는 데요. 흥, 자기가 무슨 지휘관인 줄 알아."
역시 알고 있다. 알면서도 모른척하는 그녀의 배려심에 나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뒤로도 마력공급은 가능한데.'
엉덩이 한가득 집어넣은 정액이 <마력공급>의 기능을 켜고 싼 정액이었다면, 지금쯤 그녀는 마력이 1 오른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겨울과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미약한 향수에 왠지 모를 배덕감을 느꼈다.
'몸은 가을인데 하는 짓은 유하랑 희아, 아르엘을 섞어놨네.'
네 히로인의 단점을 빼고 장점만 섞어놓은 것 마냥 앙큼한 짓만 골라서 하고 있다.
"겨울아. 혹시 내가 진짜로 지휘관이면 말이야, 어떻게 할 거야?"
"......."
겨울은 한참동안 침묵했다. 전투 영상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 반복재생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나는 그녀의 뒤를 탐하며 대답을 기다렸다.
"저기요. 정말로 괴인이 나쁜 사람들만 있다고 생각하세요?"
"응?"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걸까. 괴인은 악의로 만들어지는 존재인데.
"괴, 괴인 중에는 정말 어쩔 수 없이 괴인이 된, 그러니까 불합리하고 억울한 이유로 괴인이 된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세요? 그, 그러니까 괴인이라고 꼭 나쁘지만은 않은.... 누군가의 음모와 잘못으로 인해 괴인이 되어버려야만 하는...그런...."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싶기도 했지만, 나는 이런 대화야말로 미연시 RPG에서 으레 있는 선택지라는 것을 깨달았다. 겨울은 부끄러워하면서도 내게 진지한 답을 원하고 있었다.
"괴인은 당연히-"
[세상에는 착한 괴인도 있다는 것이야.]
순간. 내 속에서 나의 작은 피닉스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착한 괴인?'
거근 선의철이라는 말과 비슷한 느낌이 들 정도로 어울리지 않았다. 세상에 착한 괴인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나는 내 심장에서 울려퍼지는 고동을 믿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게. 이런 세상에 나쁘지 않은 괴인이 있다니. 괴인이 되었지만 사람들 살려주는 괴인도 있을까?"
"이, 있다면요?"
"......글쎄."
나는 그의 선택을 기다렸다. 장고끝에 악수라고 하지만, 적어도 그는 이런 방면에서 나보다는 더 나은 선택지를 내릴 수 있었다.
- 착하든 나쁘든 내 앞길을 가로막는 자, 전부 태워버릴 것이야.
나라면 전부 태워 죽여버린다는 선택지를 골랐을테니.
[뒤에서 백허그하면서, 속삭이듯이 키스.]
나는 그의 지시대로 겨울의 몸을 끌어안으며 볼에 키스했다.
"착한 괴인이라는 건 말이야, ......하는 거야."
뷰르르릇.
"......그 말 꼭 기억해둘 거예요."
겨울은 소리없이 절정에 몸을 떨었다.
"오빠! 샤워하고있...섹스하고 있네요?"
"얘기했잖아. 마력으로 만든 물침대 자꾸 출렁인다고. 마, 니 누구랑 또...워메 씨벌. 선겨울이네?"
"어, 왔어? 지금 사정 중이니까 잠깐만 기다려줄래?"
"에, 으, 꺄아아아아악!!"
결계를 치지 않았으니 들키는 건 당연한 게 아닐까. 나는 선겨울에게 팔꿈치로 가슴을 얻어맞은 것이 너무나도 억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