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0화 〉2부 4장 07
여수 A플래닛에서 B급 괴수가 출현했다.
전조도 없이 갑작스레 나타난 B급 괴수의 등장에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고, B급 괴수가 큰 상처를 입고 난동을 부리다가 유성 그룹 산하 길드에 의해 처치된 것을 보고 경악했다.
갑작스레 나타난 B급 괴수도 B급 괴수지만, 괴수를 죽기 직전까지 몰고간 자들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사람들은 위성 중계 영상 주변을 살피며, A플래닛 내부에서 뛰쳐나온 이들에 주목했다.
[여기 하얗고 끈적한 점액 뒤집어 쓴 여자애들 아님?]
- 레이더 초기 위기랑 애들 표정, 딜링 지분 보니까 얘들 맞는 거 같은데.
- 하얗고 끈적한 정액 ㅗㅜㅑ
- 미친 놈아 실존 인물이야
똑같은 제복을 입고, 마도소총을 든 채 옥상문을 박차고 뛰어온 이들의 정체는 금방 드러났다.
[나 쟤네들 누군지 안다. 서울 구로에서 살아돌아온 미친 놈들임.]
- 구로에서 살아돌아왔다고? 실력 좀 쩌는데?
- 길드장이 개씹호로변태새끼만 아니었으면 석하랑도 가입했음.
- 실력은...하아...내가 긴 말은 못한다.
<오라클 스튜디오>라는 이름을 내건 길드는 영화찰영 배우를 모집한다는 말도 안 되는 선전으로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그러던 도중에 여수의 A 플래닛에서 B급 괴수를 발견하고 싸우게 된 것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쓰바 괴수를 돈으로ㅋㅋ]
- 저렇게 잡아도 본전인데 막타 스틸당해서 적자ㅋㅋㅋ
- 인터뷰 봤음? 탄창 10개 썼는데 한 푼도 이득 못 보게 됐네요...ㅎㅎ꼬시당
- 점액샤워를 한 미소녀들을 봤으니 우리는 이득 아닐까요...^^;
압도적인 자본력을 이용한 괴수 사냥에 딱히 불만을 드러내거나 하는 이들은 없었다.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과 기쁨이라고, 하필 옥상으로 나오는 바람에 막타를 다른 길드에 빼앗겨 허탈해하는 표정은 나라를 잃은 것같은 얼굴이라 금방 커뮤니티를 달구었다.
[미인들이 저러니까 되게 불쌍해보이네요.]
- 예쁘니까 다음에는 A급 코어 스틸 당했으면.
- 저 얼굴들 왠지 낯익은데
- 금발양아치 옆에 미인만 네 명...츄릅...
사람들은 일차적으로 그들의 표정과 상황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한국 안에서도 눈에 띄는 외모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몇 이들이 점액에 절여진 여인들이 누군지 알아냈다.
[이유나 아님? 수능차석으로 아카데미 들어갔다가 퇴학당한 년]
- 아 쟤가 걔야? ㅋㅋ 자퇴했다고 하더니 퇴학ㅋㅋㅋ
- 마력이 없어서 돈빨로 잡았죠?
- ㄹㅇ퇴학시킴? 얼굴마담이라도 세워두지.
아카데미의 학부생들을 위주로 퍼져나간 루머가 확산되는 가운데, 원대학 아카데미 총장은 공식적으로 나서서 사전에 화재를 진압했다.
"아카데미에는 퇴학이 없습니다. 그건 1기 졸업생부터 지금까지 내려온 변하지 않는 전통이며, 저희 아카데미의 자랑입니다. 논란의 대상, 이유나 학생은 <현장견학>이라는 이유로 휴학계를 낸 상황입니다. 부디 억측은 삼가해주십시오."
공식적으로는 1학년 학부생이 끝나자마자 휴학계를 제출한 것으로 '처리'된 E급 이능력자 이유나.
악의와 조롱만이 가득한 가운데, 사람들의 눈이 잘 닿지 않는 곳에서부터 서서히 이유나에 대한 이야기들이 하나 둘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 유일하게 오라클 스튜디오의 여인들을 대상으로 그나마 호의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있다.
[구로의 마법소녀님들 사진 떴다. 오늘은 마린룩이시다.]
남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 아는 사람들만 아는 작은 네트워크 카페에는 구로-동작-관악으로 이어지는 곳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회원으로 모여있었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작은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 인터넷 카페에 모였다.
[역시 P님. 라온 누님에게 핫팬츠 입힌 거 보고 한 발 빼고 갑니다.]
- 저거 점액 아닌 것 같은데. P정액 아님? ㅋㅋㅋ
- 다들 마법소녀들을 찬양하지만 한 남자의 여자들이라는 모순에 눈물...ㅠ
- 그걸 알면서도 행복을 바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거시야.
그들의 이름은 길드의 이명, 마법소녀 매지컬 큥큥스의 이름을 본딴 <큥큥단>. 오라클 스튜디오에 대하여 99.99%의 사람들이 악평을 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0.01%의 지분으로 호의적으로 바라보는 자들이 모인 곳이었다.
[근데 이상하네. B급 정도면 놓치실 리가 없는데 왜 놓쳤지?]
- 그게 다 계획이 있어서 그러신 거다.
- 몰라. 큥큥하다가 놓쳤을 지도 모르지~
- 다 잡아놓고 옆에서 큥큥하다 놓쳤을 가능성이 있다.
...유일하게 호의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조차도 우스갯소리로 넘어가는 가운데, 큥큥단 카페를 비롯한 커뮤니티 전역에서 갑자기 이상한 여론이 돌기 시작했다.
쟤네들 헬조선 맛 뜨겁게 보고 한국 뜨겠네.
그럼 오라클 스튜디오도 한국에서 철수하는 건가?
저 놈들이 유성그룹 통해서 산 물건이 2천억은 훨씬 넘는다는데?
......
일본이나 중국으로 이전한다고 하면 어쩌지?
모처럼 나타난 SSS급 호구의 등장에, 사람들은 오라클 스튜디오가 떠날 지 말 지를 두고 갑론을박하기 시작했다.
* * *
<오후 8시, 여수 유성호텔 스위트룸>.
"한국 뜰 생각 전혀 없는데 다들 상상력이 풍부하시네."
"걱정되는 거죠. 외국계 자본을 보유한 이들이 이 정도로 호구맞는 건 처음이니까요. 유성이 갑질한 게 착한 갑질이라고 불리기는 처음이네요."
스위트룸에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하유은유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외국계 길드 상대로 이렇게 멕여본 적은 처음이라서 그런지 다들 잘 한다, 더 해라, 우리 쓰레기 파이팅 이러고 있네요. 미국이랑 관계 여기서 더 악화시킬 일 있냐고, 덕분에 원래 안 먹어도 될 욕도 엄청나게 먹고 있고요."
"유성으로 들어가는 3할 지분은 네 몫이야."
"저도 한 발 빨아드릴까요?"
"X로이드 펠라가 B급 코어 대금의 3할은 너무 비싼 거 아니야?"
족히 억소리는 넘어갈 가격인데 고작 입으로 대딸 한 번에 퉁치려고 하다니. 나는 유하의 괘씸함에 어이가 없었다. 유하는 X로이드 앞에 홀로그램 화상으로 나를 비웃으며 커피를 마셨다.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이런 촌극을 꾸민 게 마음에 안 들어서 그렇죠. 이미지랑 브랜드 값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아세요? 오라클 스튜디오는 이미 호구로 낙인이 찍혀버렸어요."
"세계를 구할 영웅이 호구면 뭐 어때?"
"영웅? 허, 영웅이니까 삼처사첩은 기본이다? 호색한이다?"
"몰랐어? 사실 나 여자 여럿 안으려는 정당성을 얻으려고 세계를 구하려는 거야. 지구를 구한 남자. 여신급 미인들을 축첩하는 것 정도는 다들 봐주지 않겠어?"
퉷. 유하는 홀로그램으로 내 얼굴에 침을 뱉는 시늉을 했다. 홀로그램의 마력이 내 얼굴에 스치며 사라졌다. 확실히 유성가 개망나니의 악명이 괜히 있는 건 아니다 싶었다.
"그래서 하렘 차리려고 지구를 지키려는 히어로 님, 유나에 대한 일은 어떻게 하실 거죠?"
"지구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히어로한테 갑질한 악덕 회장님은 몰라도 돼."
"...제가 왜 몰라도 되죠? 저, 신서울 아카데미 이사진 중 한 명이에요. 유나 양 자퇴서를 휴학계로 바꾸느라 얼마나 개고생을 한 줄 알아요?"
휴학생 이유나. 나는 본래 유나를 퇴학시키려고 했지만, 어떤 '특정 플래그'의 발생으로 유나는 휴학생으로 처리되었다.
"유나가 퇴학하면 아카데미의 브랜드 가치가 떨어진다고요. 입학자는 취업률 100%. 유나가 자퇴하는 바람에 전통이 무너져내리는 거죠."
"어차피 만들어진 지 10년도 안 된 학교인데 전통이 뭐가 중요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퇴든 퇴학이든 아카데미를 중간에 그만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아카데미에서는 유나를 휴학을 묶어두려고 했다. 그리고 그건 내가 '유나의 복학' 플래그를 발생시켰다는 말이기도 했다.
"다들 쉬쉬거리지만 조만간 궁금해 할 거예요.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런 보잘 것 없는 길드에 아카데미 자퇴까지하고 들어간 걸까."
"한국에서 탄탄대로가 약속된 황금빛 미래를 걷어차고 시궁창으로 기어들어 간 이유가 궁금하다?"
"그렇죠. ...지금 얼마나 유나에 대한 안 좋은 말들이 돌아다니고 있는지 알기나 해요?"
"알다마다."
온갖 악성 루머를 진실로 철떡같이 믿고 있을 히로인이 바로 내가 지금 공략하려고 하는 대상인데. 나는 딸기라떼로 목을 축인 뒤 마도기어를 두드렸다.
[이유나 휴학, 사실은 임신 때문?!]
* * *
<그 시각, 유나의 방.>
"응, 응. 나 괜찮아. 전혀 그런 거 아니라니까."
유나는 마도기어 맞은편에서 씩씩거리는 금발태닝녀를 진정시키느라 진을 빼고 있었다.
[뭐? 구라치지마! 그 새끼가 분명 너한테 해코지 한 게 틀림없어!]
"오빠 그런 사람 아니야."
[이거 봐. 눈에 콩깍지가 씌워져서 지금 그 새끼 편 들잖아.]
"그런 거 아니라니까. 오해야, 오해."
유나는 변명을 하면 할수록 더 수렁에 말려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럼 이참에 설명해봐. 퇴학시키겠다고 길길이 날뛰던 학장 새끼는 왜 너를 휴학이라고 커버치고 있고, 너는 왜 나한테 말도 없이 아카데미를 때려치운 건데?]
"......세계 평화를 위해서?"
궁극적으로 말하면 그렇다. 하지만 그 중간 과정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장난해? 안 되겠어. 내가 역시 그 새끼랑 담판을 지어야겠어.]
"안 그래도 돼! 그건 내가 더 부담스러워!"
[너 진짜 이상하다? 내가 너 서울 간다고 했을 때도 같이 가겠다고 한 거 일부러 씹었잖아.]
"그, 그건...."
유나는 말하기 어려웠다.
자신이 반한 남자가 인류 마지막 지휘관이고, 지휘관이 슈리를 노리고 있고, 유나는 슈리를 지휘관의 자지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슈리를 떼어놓고 있다는 것을.
[넌 지금 눈에 뭐가 씌인 거야.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봤겠어? 그런 새끼들 다 먹버충이라니까!]
"......."
유나는 알고 있다. 저 사람들을 만나봤다는 말은 처녀가 자신이 처녀가 아니라는 걸 어필하기 위해 교묘히 오해하도록 말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누가 들으면 너 남자 사귄 적 있는 줄 알겠어...."
[그, 그 얘기가 아니잖아, 이 멍청아!!]
슈리는 얼굴을 붉히며 빽 소리를 질렀다. 한 남자를 통해 얻은 숱한 경험을 통해, 유나는 친구의 허세를 단번에 파악했다. 그래서 슈리를 지휘관과, 백청화와 만나게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오빠 먹버충 아니야. 굳이 따지자면 미식가야."
[...유나 너 은근히 섹드립 늘었다? 그거 네가 맛있다고 하는 거면 진짜 지랄이야, 지랄.]
"흥, 뭐래. 오빠는 나 맛있다고 매일매일 먹고 있거든?"
[그러니까 그게 미친 거라고...!!]
이미 쾌감을 알아버린 여자와 그렇지 않은 여자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맹렬히 충돌하고 있다. 유나는 한숨을 내쉬며 홀로그램 연락을 끊으려했다. 슬슬 라온이 방으로 돌아올 시간이었다.
"미안해. 내일 다시 전화하자."
[이유나, 마지막으로 두 개만 묻자.]
"응, 말해봐."
[......너 휴학한 이유, 왜 나한테 아직까지 말하지 않아? 자꾸 사람들이 얘기하잖아. 이유나가 왜 휴학을 했는지.]
"......."
자신이 반한 남자가 지휘관이고, 자신을 지금 C급으로 키워준 사람이다. 유일한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슈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지켜야만 했다.
"그게...."
[너...혹시...진짜 임신한 거야?]
"이, 임신...?"
내가, 청화의 아이를? 유나는 연기를 해야한다는 생각도 잊어버린 채, 발그레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건 슈리에게 확신이라는 오해를 심어주고 말았다.
[그 씨발 새끼가!!!]
"아, 아니야!!"
* * *
이유나 임신 휴학설.
이 플래그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3월 이전에 이루어져야만 한다.
하나, 히로인 공략의 난이도가 올라가는 조건인 5명 이상 영입.
둘, 그에 따라 이유나가 유일한 친구인 정슈리에게 '거짓말'을 한 경우.
"이게 괜히 없는 말이 떠도는 게 아니지."
이유나.
히로인 정슈리가 서울 수복 작전 전에 나의 멤버로 들어오는 것을 방해하고자, 휴학의 이유를 나와의 만남으로 둘러대고 거짓말을 하며 정슈리를 견제한 것이다. 당연히 소중한 친구가 휴학의 이유를 말하지 않기에, 정슈리는 나와 유나의 관계에 대해 오해를 하게 된다.
"유하야. 한국에서 유일한 친구를 임신시켜서 휴학하게 만든 남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개좆같은 씨발놈?"
"정답!"
유나의 질투심으로부터 시작된 스노우볼로 인해, 정슈리 영입의 난이도는 불지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