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9화 〉2부 4장 06
“촉수만 보면 말이지, 왠지 모르게 저거에 범해질 것 같다니까.”
“갑자기 그런 말씀은 왜 하시는 거예요?!”
“그게 이 세계의 룰 같은 거니까.”
무언가 불쾌한 괴전파를 받은 느낌이다.
여기서 패배하여 게임오버를 당하면 평생 해파리 촉수에 붙잡혀 알만 낳는 인생을 살게 될 것만 같은 느낌적인 느낌에 나는 괜히 불쾌해졌다.
“쏴버릴까.”
안 돼, 참아. 내 안의 미니 피닉스.
나는 방아쇠를 검지로 만지작거리며 기회를 엿봤다.
콰앙, 콰앙!!
적 해파리 괴수는 괴전파의 내용을 현실로 만들려고 하는 것처럼 촉수로 가온이 만든 물방울을 두드렸다.
“가온아. 중간에 실드에 힘 빼면 안 돼.”
“당연하죠. 저도 저런 거에 당하는 건 싫어요. ...그.”
가온이 내게 눈빛을 보냈다.
"그러니까 그냥 제가...?"
이런 밀폐된 공간에서, 부패했다고는 하지만 물이 충만한 공간에서 굳이 이렇게 시간을 끌 이유가 없지 않냐는 눈빛이었다.
가온의 눈빛이 담은 의미대로, 가온은 아주 쉽게 괴수를 죽일 수 있었다.
‘B급 괴수는 레벨로 따지면 평균 60 정도니까.’
86레벨 수준인 가온 혼자서도 충분히 잡아낼 수 있는 괴수였다.
그런 가온이 물방울 방어막을 만들어, 촉수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수비만 견고히 다지고 있었다. 내가 그냥 수비만 하라고 지시를 내렸기 때문에.
“가온아.”
“네.”
“원래 경험치 효율 생각하면 네가 잡으면 안 돼. 그럼 경험치 손실나.”
고레벨이 상대적으로 낮은 괴수를 사냥하면 당연히 그만큼 경험치가 적게 들어올 수밖에 없다.
그에 비해 괴수보다 훨씬 낮은 단계의 이능력자들이 괴수를 잡으면 아무 손실 없이 전투 경험치를 쌓을 수 있다.
"경험치 먹어야 하는 건 다른 둘이잖니."
유나, 라온.
가온의 절대방벽에 숨어있는 사이, 사실상 모든 딜은 유나와 라온이 도맡아야했다. 둘은 힘겹기는 하지만 물방울 겉을 때리는 촉수들을 하나하나 확실히 줄여나가고 있었다.
두두두두.
둘이 쥐고 있는 마도소총 K-2의 총구가 황색빛으로 반짝였다. 지속성 코어를 갈아만든 마탄은 물방울 보호막을 통과하여 촉수다발을 정확히 타격했다.
"역시 물속성 상대로는 지속성 탄환이 제격이지."
"그런 게 어디있어요?"
"거기 U튜브 보면 마법천사 히카리쨩 채널 봐봐. 마력의 칠속성에 관한 상관관계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니까."
수속성을 잡는 건 지속성이다. SS급 석하랑도 S+급 히드라에게 불리한 것처럼, 이 세계가 게임에 기반을 두고 있는 이상 속성의 위력은 무시하지 못한다.
끼에에엑!!
실제로 해파리 괴수, 오션팬텀의 촉수는 마도소총의 마탄에 펑펑 터져나갔다. 물방울을 두드리던 촉수 다발은 마탄에 닿자마자 터졌고, 지금은 마탄을 피해 자꾸만 도망치고 있었다.
"가온아, 차 핸들 돌려!"
"이거 자동차 아니거든요?!"
물방울의 핸들을 잡고 있던 가온이 거칠게 키를 움직였다. 잠수함처럼 움직이는 물방울은 좁은 아쿠아리움 안을 도망치는 오션팬텀의 뒤를 쫓았다.
"유나야, 라온이 쪽으로 붙어! 우현에서 사격해!"
유나와 라온은 물방울이 전진하는 오른쪽에서 마탄을 연사했다.
힐러와 탱커인 둘의 자체 공격력은 오션팬텀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을 수준이었지만, 오션팬텀은 둘의 공격을 피해 열심히 도망다니고 있었다.
'힐러랑 탱커한테 딜을 맡기면 딜러만큼 데미지 입힐 수단이 있어야지.'
힐러라고 스태프를 휘두르며 광탄을 뿌릴 이유는 없다. 탱커라고 창을 휘둘러 촉수를 때릴 이유는 없다.
코어웨폰이라는 훌륭한 대화 수단이 있는데, 촉수 괴수와 정중하게 인사를 나눌 이유는 하등 없는 것이다.
"역시 게임은 템빨이지."
1레벨이라도 99레벨 무기를 착용하고 있다는 가정하에, 평균을 내도 최소한 50레벨에 준하는 공격력을 가지고 있다.
유나와 라온이 쥔 마도소총은 내가 유하에게 특별히 엄선하여 주문한 코어웨폰으로,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긁어모은 C급 괴수들의 코어로 만들어낸 걸작 중의 걸작이었다.
자금은 엄청나게 깨졌지만.
끄엑, 크에에엑!
어느새 촉수가 7할 가량이 터진 오션팬텀은 안쓰러운 비명을 지르며 구석으로 도망쳤다.
워낙 강하게 몸부림을 치는 바람에 수족관 전체가 흔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 말은 곧 오션팬텀의 체력이 3할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나 마찬가지.
'촉수 괴물이 촉수가 전부 터진다?'
여성 캐릭터 촉수 능욕을 위해 태어난 괴수는 기본적으로 촉수가 모두 파괴되면 그로기 상태에 빠진다. 능욕할 수단을 잃은 괴수에 대해 세계의 악의는 한 번 더 기회를 줄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오빠, 저희 계속 이렇게 하면 돼요?"
"응. 긁어. 계속. 죽을 때 까지."
코어웨폰을 쓰는 건 상당히 많은 자금이 소모된다.
마탄 한 발에 최소 5만원이라고 가정한다고 해도, 이미 유나와 라온이 긁은 탄창만 서로 두 개가 넘었다. 따로 마탄을 만들어내지 않는 이상 코어웨폰은 돈 먹는 하마나 마찬가지.
"돈으로 죽이는 거야. 어차피 B급 코어 팔면 그만큼 돈 나오잖아?"
대외적으로, 공식적으로는 아직도 'E급'인 유나와 라온이 B급 괴수를 쓰러뜨렸다는 실적을 내기 위해서는 그만큼 합당한 근거가 필요했다.
그들이 입고 있는 A급 슈트와 C급 마도소총이야말로 심사관들을 납득하게 만들 명백한 근거였다.
"공략하기 어려운 적은 원래 템빨로 깨는 거야."
실습 대상 길드로 선정되기 위한 조건은 B급 괴수를 토벌하는 것이지, B급 괴수를 어떻게 토벌했느냐는 따지지 않는다. 막말로 A급 한 명 데려다가 괴수를 죽여도 구색은 갖출 수 있었다.
"당연히 아카데미에서는 별로 안 좋아하겠지. 자금력으로 괴수를 잡는다는 건 너무 많은 돈이 나가는 거니까. 근데 자금력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큰 힘이잖아?"
헐리우드 자본가가 뒤에 떡하니 버티고 있다.
이 나라 경제의 실세가 우리를 암암리에 지원하고 있다. 아직은 부족한 전력을 자금력으로 커버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팀의 전략이며 전술이다.
"돈으로 괴수를 죽인다고 욕하면 어때. 돈만큼 사람을 끌어모으는 좋은 수단이 또 어디있겠어?"
"자본력으로 괴수를 죽인다는 건 그만큼 길드의 재정건전성이 높다는 말이기도 하죠."
"유나가 잘 아네. 그럼 유나야, 자본력 빵빵한 길드라면 이제 준 S급이라고 불리우는 유망주가 들어올 만큼 대단하겠지?"
"그, 그게...."
유나는 방아쇠에서 손가락을 빼며 머뭇거렸다. 순간적으로 화망이 약해졌고,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촉수 한 가닥이 그만 살아남고 말았다.
"청화! 지휘관이 부하를 당황하게 만들면 어떻게 합니까?!"
"라온아, 내가 하는 말들은 전부 멘탈 트레이닝을 위한 거야.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을 가지라 이거지."
좋아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를, 그것도 자신의 친구를 침대에 들이겠다는 말을 하는 것에도 당황하지 않아야 한다. 결코 내가 일부러 트롤링을 한 게 아니다.
쾅, 콰앙!!
오션팬텀은 마지막으로 남은 촉수로 벽을 두드렸다. 어디를 그리 급하게 두드리나 싶더니, 수족관 유리벽이 깨지며 자동으로 내려온 방화셔터를 두드리고 있었다.
"아...! 저거 넘어가면 레이더에 분명 걸릴텐데!!"
"괜찮아. 걸리라고 살려준 거니까."
콰아아앙!
방화셔터가 무너져내렸다. 동시에 물방울 속에 함께 있던 하유은이 마도기어를 두드렸다.
애애앵-----!!
"원래부터 저거 막타 우리가 칠 생각은 없었어."
"네...?"
"불합리한 외부 요인으로 인해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거, 착한 주인공들의 운명같은 거잖아?"
B급 괴수의 출현과 함께, 사방에서 승냥이들이 죽어가는 괴수의 냄새를 맡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여수 인근에서 E, D급 괴수들을 사냥하던 헌터들이 돈냄새를 맡았다.
"가온아, 한국에서 헌터들이 왜 이미지가 나쁜 지 알지?"
"마격충, 막타충, 빨때충이잖아요."
"그래."
헬조선식 사냥법에 따라, 괴수 사냥에 대한 지분의 최소 3할은 '마지막 일격'을 넣은 자가 차지하게 된다.
"D급 헌터들이 하는 행동들이 대부분 그런 일이지."
우리가 오션 팬텀의 촉수 오백 가닥을 터뜨렸어도, 지나가던 승냥이 한 마리가 마지막 남은 촉수를 톡 하고 치면 코어 판매 대금의 지분 중 3할이 승냥이에게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누리가 없어서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그거 쓰레기같은 짓인 거 아님?!'하면서 셀프 패드립 했을텐데."
"......저는 아무 말도 안 할게요."
누가 그 짓을 하는가. 누리와 가온의 부모가 그 짓을 한다.
고작 C급인 두 부부가 신서울에서 막대한 돈을 벌었던 기반은 욕을 먹으면서까지 막타를 넣어 코어 판매 대금의 3할을 챙겨간 지독함에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냥 여기서 물 흘러가는대로 있으면 돼."
쏴아아.
방화셔터가 부서지고 오션팬텀이 바깥으로 탈출함에 따라, 가온의 물방울 또한 물의 흐름에 이끌려 바깥으로 흘러내려갔다.
유리창 밖, A플래닛의 주차장에는 오션팬텀이 남은 촉수 한가닥을 보호하며 달려들려는 D급 헌터들을 향해 몸통박치기를 하고 있었다.
오션팬텀에 대한 레이드는 사실상 끝났다. A급의 실드와 템빨의 위대한 승리였다.
"우리는 여기서 그냥 구경이나 하면 돼."
가온은 비상계단에서 물방울을 해제했다. 부패한 썩은 물이 가온의 물줄기에 의해 계단 아래로 떠내려갔고, 우리는 조금은 퀴퀴한 공기와 함께 비상계단을 따라 옥상으로 올라갔다.
"사장님이 선택하신 거니까 틀린 일은 아니겠지만, 조금 아쉽습니다. 그래도 3할인데."
라온은 마도기어를 통해 보이는 해파리 레이드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돈의 소중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그녀인만큼, 머리속으로 B급 코어 가격의 3할을 잃어버린 것처럼 여기고 있었다.
"내버려둬. 어차피 7할은 우리가 먹고, 나머지 3할도 우리가 먹을테니까."
"네?"
"유성의 헌터들이 대기중입니다. 마격을 넣어서 코어를 빼앗는 갑질은 유성의 전문이니까요."
하유은은 빈정거리는 듯한 말투로 라온을 조롱했다. 라온은 나와 하유은을 번갈아보다가 허탈하게 웃었다.
"지금...갑질하는 척 쇼를 하자는...?"
"그래. B급 괴수를 잡기는 했지만, 대기업의 횡포로 당하게 되는 불쌍한 중소기업인 척 하는 거지."
그렇게 얻은 동정 여론을 바탕으로, 나는 각종 위협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정슈리 영입 플래그를 하나 얻어낼 수 있다. 바로 헬조선에서 억압받는 외국인이라는 공감대를.
"이제 남은 건 하나야, 얘들아."
옥상 비상문을 열기 전. 나는 바지를 벗었다. 갑작스레 바지를 벗은 내 행동에 마법소녀들은 흠칫 놀라면서도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촉수괴물에게 점액으로 호되게 당한 '티'를 내야하는데, 누가 한 발 빼줄래?"
유나와 라온, 가온은 서로 사이좋게 비상계단에 쪼그려 앉았다.
"으으...."
X로이드는 금빛 안광을 흩뿌리며 입맛만 다시고 있었다.
* * *
<그 시각, 신서울 히어로 아카데미 여자기숙사>.
"같은 방이 되어서 영광이에요, 화마인 언니!"
"...그래."
<화마인>의 이명을 가진 여인, 정슈리는 자신의 룸메이트가 된 갈색 단발의 여인을 보며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겨울방학 전까지만 하더라도 흑발 스트레이트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마치 일부러 그러기라도 한 듯 룸메이트는 머리를 '누군가'처럼 바꿨다.
"언니, 그런데 여기 예전에 쓰던 분은 어떻게 됐어요? 혹시 들은 거 있어요?"
"......."
들었지만 말해줄 수 없다. 룸메이트이자 친구를 위해 슈리는 묵비권으로 일관했으나, 그게 오히려 동기의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진짜 퇴학이에요?"
"아니야! 휴학이야!"
"네? 하지만 이유가 없잖아요. 신서울 아카데미에서 휴학하는 경우가. 그것도 여자가."
"......너 지금 나한테서 남의 개인사정 캐내려고 하는 거니?"
슈리는 인상을 찡그리며 마력을 주변에 뿌렸다. 화속성들이 기본적으로 가진 다혈질의 열기에 동기는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말할 수 없는 사정이라는 게 있으면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야지 어디서 다른 사람 뒷조사나 해대고 있어?"
"그, 그치만 궁금하잖아요. 언니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데.... 이유나 집 잘 사니까 가정형편으로 휴학한 것도 아닐테고...."
"좀 닥쳐, 씨발!"
슈리가 쌍욕을 내뱉고 나서야 동기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슈리의 머리칼에서는 붉은 불꽃이 타닥타닥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너도 그렇고 어떻게 죄다 남의 가정사에 그렇게 관심을-"
[알립니다. 여수에 B급 괴수 <오션팬텀>이 출몰하였습니다. 알립니다. 여수에-]
삐비빅!
슈리는 급히 마도기어를 두드려 괴수 알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수. 분명 '유나'가 어젯밤 자신과 톡으로 이야기를 하다가 자신이 있던 곳이라고 알렸다.
"이런...!"
달려갈까. 급히 유나에게 연락을 넣었지만 연락은 없었다. 슈리는 초조한 눈빛으로 위성 중계 영상을 살폈다.
"와...해파리 점액이 사방에...."
"아!"
슈리는 중계영상 중 A플래닛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옥상 문을 박차고 나타난 이들은 전신에 붉은 손자국이 가득했고, 차려입은 마린룩 제복 곳곳이 찢어져 있었다.
심지어 물에 젖은 머리칼부터 로퍼까지, 하얗고 끈적한 점액으로 진하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와. 저분들이 사냥하다가 놓쳤나봐요. 쯧쯧, 괴수는 주차장으로 갔는데 옥상으로 쫓아다니. 막타 스틸 당하겠는데요?"
옆에서 빈정거리듯 말하는 동기의 조롱은 들어오지 않았다. 슈리는 사나운 도끼눈으로 유나의 옆에서 홀딱 젖은 코트를 털며 헤실거리는 금발 서양남을 보며 이를 갈았다.
"저 씨발 개좆같은 새끼."
슈리의 시선은 유나의 젖은 치마, 하복부를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