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676화 (676/1,497)

〈 676화 〉2부 4장 03

신서울 히어로 아카데미에 실습 길드 신청서를 낸 지도 어언 이틀이 지났다.

- 이런 이름으로 신청하면 다음에는 도와드리지 못 합니다.

협회장, <나이트메어> 설지영의 압박으로 우리는 <마법소녀 매지컬 큥큥스>라는 이름을 정식으로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덕분에 나는 새로운 이름을 설지영에게 알려줬고, 팀원들과 함께 실습 지원 길드 발표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 축하드립니다, <청화단>은 본교의 실습 길드로 선정되었습니다.

"한국 히어로 협회 협회장 로비를 받았는데 당연히 실습 길드로 통과되지. 푸흐흐."

대신 설지영에게 영종도 인근에 숨어있는 A급 괴수에 대해 알려줬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A급 괴수에 대한 정보조차도 우리 청화단이 실습 길드로 정해지는 것이 한계였다.

"청화, 어차피 신청 길드가 100개가 넘는데 딱히 의미 없는 거 아닙니까? 5인 이하 소규모 길드도 다 통과되었는데."

우리 길드를 통과시켜주다보니까 생긴 불상사였다.

"우리가 대외적으로 이미지가 좀 안 좋기는 하지."

"B급 잡은 실적 하나만 올랐어도 기준 점수는 통과했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그거 올려봐야 괜히 어그로만 끌리고 탈락해. 아예 1차부터 탈락해서, 설지영이 신경쓰게 만드는 쪽이 훨씬 낫지."

실적도 딱히 좋다고는 할 수 없고-B급 이상 괴수들은 사냥해놓고 일절 신고하지 않았다-, 외국계 자본이고, 괴수 사냥을 하기는 커녕 매일같이 섹스만 한다는 음해로 인해 우리 길드는 심사에서 제외 대상에 오르고 말았다.

"그냥 이번 기회에 일부러 생색내게 하는 거지. 우리가 그만큼 누군가를 얻고 싶어서 안달이 나있다. 나이트메어한테 하는 어필이야."

"화마인을 침대에 눕히고 싶어서 안달난 분의 의견 아닙니까?"

"너희들 유나부터 누리까지 나를 섹스에 미친 것처럼 봐서 그런데, 이게 다 화마인 살리는 길이거든?"

"살리는 김에 침대에서 인사도 나누고 하려는 거 아닙니까."

반박하지 못했다. 유나도, 누리도 내게 정말 많은 불만을 토해냈지만, 막상 이 타이밍에 라온에게까지 불만을 들은 건 여러모로 아니꼬왔다.

"안되겠다. 마침 아카데미에서 조건 하나 달았거든? 너로 정했어."

"......조건?"

"어. 기존에 쌓여있던 실적들 말고, 일주일 내로 실적 하나 내라는 조건이야. 지정된 등급의 괴수를 잡아도 좋고, 괴인을 발견하면 체포해도 좋고, 아니면 아카데미에 있는 교직원 이능력자랑 붙어서 기준을 통과해도 좋고."

"어느쪽이든 저희를 떨어뜨리겠다는 악의가 느껴지는 조건입니다."

#<퀘스트>

1. 일주일 이내에 B급 괴수 이상을 사냥.

2. 일주일 이내에 C급 이상 괴인을 체포.

3. A급에 해당하는 아카데미 교수 <레이틀>에게서 대련으로 승리.

"라온아, 꼭 게임 퀘스트 같지 않아?"

"어찌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도 다행인 게 셋 중 하나만 달성해도 2차 심사에서는 통과할 수 있으니, 다행입니다. 정말."

화마인을 영입하기 위한 이벤트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셋 중 하나라도 조건을 달성해야한다. 그리고 으레 게임이 그렇듯, 하나 이상의 조건을 달성하라고 하면 딱 하나만 달성하기 마련.

'이 놈들이 그렇게 허술하지는 않지.'

플레이어에 대한 악의가 철철 넘치는 제작사에서 그런 바보같은 배치를 했을 리가 없다. 두 개 조건을 달성하면 화마인이 '확정'으로 영입되고, 세 개 조건을 달성하게 되면 '특별한 이벤트'가 보상으로 제공된다.

"그러게. 우리가 세 개 다 달성하면 아마 깜짝 놀라겠지?"

"...일주일 내에 이 세 개를 전부다?"

"응. 세 개를 전부 클리어해야지. 언제까지 C급따리라고 놀림 받고 살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우리 큥큥단이 말이야."

"청화단입니다. 그래서 사장님, 일주일 내로 셋을 전부 달성할 수 있습니까? 가온을 겉에 낼 생각은 없으시지 않습니까."

서울에서 생환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셋의 전력은 크게 높아지지는 않았다. 따라서 실적을 쌓으려면 A급 이능력자인 김가온을 동원하지 않고는 상당히 어려워보였다.

"아닌데? 가온이 C급으로 힘을 쓰게 만들 거야. 마침 두 명이서 잡을 수 있는 B급 괴수가 있거든. 내가 아까 얘기했지? 너로 정했다고."

"......설마."

"그래."

나는 유성백화점 마크가 박힌 쇼핑백에서 물건을 꺼내들었다. 라온은 내 손에 들린 물건을 보자마자 표정이 대놓고 일그러졌다.

"핫팬츠 입어라, 라온아."

치마였다면 누리를 데려갔을텐데.

* * *

<세 시간 뒤, 오후 4시 통영-대전 고속도로 위.>

트레일러는 도로를 달리고 있다. 나는 언제나처럼 앞좌석의 조수석에 앉아, 우리가 갈 지역 인근에서 사냥할 계획과 동선을 짜고 있었다.

"변태."

"새삼스럽게."

흑발 금안의 여비서, 하유은(유하)은 내가 보고 있는 걸 보며 내게 빈정거렸다. 내가 마도기어로 띄운 스크린에는 상반신을 노출한 인어 괴수가 사람들을 습격하는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가서 나가족 괴수들이랑 마력공급하실 건 아니죠? 그도 아니라면 갑자기 나가족 공주가 고객님한테 사랑에 빠져서 막 퓻퓻뷰릇뷰릇한다거나."

"나를 도대체 뭘로 생각하는 거야. 내가 괴수한테 박을 사람처럼 보여?"

"그런 분별이 있는 분이라면 다행이구요."

유하는 트레일러의 핸들을 거칠게 꺾었다. 신서울을 조금만 벗어나도 도로에 즐비하게 늘어진, 로드킬을 당한 E급 괴수들의 시체는 밟는 것보다 피해가는 것이 상책이었다.

"유하야, 저것봐. 저런 짐승에 어떻게 박겠어?"

"그렇죠?"

"최소한 사람 모습은 갖추고 있어야지. 아, 내가 그렇다고 나가 괴수에게 박겠다는 건 아니야. 아니, 박을 거기는 한데 자지가 아니라 총탄을 박을 거다?"

나는 코트 안주머니에서 총을 꺼내 가볍게 흔들었다. 유하는 한참동안 나를 어이없는 눈빛으로 바라보며-차는 자율주행 상태라 사고는 없었다-경멸하다가, 허탈하게 웃으며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믿기는 어렵지만 일단은 그렇게 알아는 둘게요. 혹시 알아요, 나중에는 그 크고 우람한 총을 거기다가 박을 지."

흐냣?!

내 허벅지 위에 누워있던 김펜릴이 꼬리를 쫑긋 세우며 화들짝 놀랐다. 나는 행여나 어디선가 갑자기 생성된 S급 DLC 괴수나 차원문이 나타났을까 재빨리 시스템창을 열었다.

"...없는데?"

냐, 냐아, 냐아아....

고양이 상태의 김펜릴은 어색한 자세로 기지개를 켰다. 미국에서 살아돌아온 이후 고양이 상태로 내 주변에 찰싹 달라붙어있는 건 좋았지만, 그래도 슬슬 인간 상태로 움직여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4월 1일.

3월 동안 김펜릴은 우리 팀과 고양이 상태로 함께 움직이며 진정으로 동료가 되어도 좋은지 간을 보기 시작한다. 이른바 챕터 2의 시작이고, 자연히 챕터 2의 보스는 <절풍의 펜릴>이다.

'화마인 정슈리를 3월 초에 영입하고, 4월 1일에 절풍의 펜릴과 싸우는 데 동원하는 것이 국룰.'

화속성 A급의 히로인.

그리고 풍속성 S급의 빌런이지만, 모종의 이유로 B급-난이도에 따라선 A급까지밖에 힘을 내지 못하는 빌런.

새로운 동료를 영입하면 그가 활약할 장소가 있어야 하는 것이 RPG 게임의 기본인 만큼, 정슈리를 영입하면 자연스레 펜릴을 공략하기도 몹시 쉬워진다. 그 전까지 고양이 상태로 호감도를 계속 쌓아놓는 것이 중요. 나는 긴장한 펜릴의 엉덩이를 받쳐들었다.

"왜 그렇게 놀랐어? 총 때문에 그런가?"

냐, 냐아아....

"고양이 앞에서 그런 무식하게 큰 총을 들고 위협하니까 그렇죠."

"그런가? 아."

김펜릴은 내 품에서 벗어나 가운데 좌석 뒤로 난 작은 통로로 쏙 사라졌다. 트레일러 뒤쪽과 연결된 통로를 통해, 김펜릴은 유나와 라온, 그리고 가온이 있는 곳으로 떠나버렸다.

"녀석. 부끄러워하기는."

"그래도 고양이치고는 제법 순하지 않아요? 막 할퀴거나 깨물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이름이 살벌한 것 치고는."

"개냥이라서 그래."

늑대다.

"하여튼 이 총으로는 괴수들을 공격하는데 사용할 거야. 그러려고 세 명을 데려온 거니까."

"누리 양이 조금 불쌍하게 됐네요. 고작 그런 변태같은 이유로 선겨울 감시를 해야한다니."

"사무실을 지키는 사람은 한 명 있어야 하니까."

핫팬츠를 입히면 꼴릴 것 같은 라온을 데려가느냐.

아니면 치마를 입혔을 때 기묘한 배덕감을 느끼게 하는 누리를 데려가느냐.

<현재 스쿼드>

1. 이유나, C, 빛 30

2. 박라온, C, 풍 31

3. 김가온, A, 수 86

4. 하유은, C, 광 35 [X로이드]

5. 절풍의 펜릴, SS, 풍 99

...퀘스트를 위한 소규모 원정에는 고작 다섯 명밖에 데려갈 수 없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누리를 누락해야만 했다. 유하를 빼자니 트레일러 운전이나 잡일을 처리해 줄 사람이 없었고, 김펜릴을 빼자니 그건 또 호감도 이벤트 진입을 위한 플래그 손실이 심했다.

"누리 혼자 있으면 쓸쓸해하니까, 빨리 정리하고 올라가자. 어차피 여기서 사흘 이상 있을 생각 없어."

도착하면 저녁이 될테고, 짐을 푼 뒤에 내일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여 'B급 괴수'를 처치할 것이다. 그리고 늦은 저녁에 신서울로 올라가거나, 아니면 그 다음날 아침에 올라가거나.

"누리 양을 여기로 내려오게 하는 건 어때요?"

"뭐야, 너 혹시 여수에 함정 파놨어?"

"으...그런 게 아니라, 저도 누리 양 대충 상황 알게 됐다고요. 여수에 있는 호텔 방 하나 정도 더 수배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요."

"그렇기는 하지. 근데 누리는 따로 할 일이 있어서 그래."

미래에 <야황>이라 불리게 될 여자, 김누리. 타인의 악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지금이야말로, 누리의 마력적 '재능'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때인 것이다.

"누리 괴인 잡느라 바빠."

타인의 악의, 즉 암속성 마력에 친화력이 깊은 자들을 잡는데 최적화 되어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 * *

<그 시각, 신서울 모 호텔 건물 환풍구.>

"푸흐흐."

C급, 수속성, Lv.38의 김누리는 누군가의 웃음소리를 따라하며 지도를 펼쳤다. 홀로그램으로 펼쳐진 호텔 건물 내부의 배치도에는 수많은 것들이 시시각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흐흥, 역시 오빠가 사람 볼 줄 안다니까. 나한테 이런 걸 맡기고."

누리는 마도기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살피며 슬며시 미소지었다. 얼굴을 가린 마스크부터 시작하여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색 일색인 누리의 복장은 전체적으로 '괴도'를 연상케하는 복장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음, 언니?"

"몰라."

누리의 뒤에는 누리와 똑같이 생긴, 쌍둥이라고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존재가 똑같은 옷을 입고 누리를 뒤따르고 있었다. 생김새는 누리와 쏙 닮았지만, 목소리는 김가온이 아니었다.

단 하나. 마스크만 달랐다. 흑과백이 양쪽으로 나뉜 마스크-<마스커레이드>의 것.

"애초에 나한테 이런 일을 시키는 이유가 뭔지...."

[불만있으십니까? 사법거래를 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죠.]

"하씨...."

천가을은 짜증을 부리며 고개를 떨궜다. 마도기어를 통해 전해진 기밀 통신은 나긋나긋하면서도 다그치는 듯한 젊은 여인의 목소리였다.

"저기요, <나이트메어>님. 저도 나이 찰만큼 찼거든요? 계란 한 판 지났다고요."

[......풉, 아, 그러세요. 언니. 미안합니다. 하지만 절차가 그런 걸 어떻게 해요? 호호.]

"일부러 나이들어보이려고 웃을 필요도 없거든요? 나 참."

[아하하하하!!]

나이트메어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소리가 워낙에 시끄러워서 밖에 들리지 않는 다는 걸 아는데도 누리와 가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갑자기 뭐임? 그게 그렇게 웃기나?"

"......씁, 뭔가 이거 느낌이."

"느낌이 왜? ...어, 여기인 거 같은데?"

[그대로 있어보세요. 지금 마력감청을...맞습니다. 그 근방입니다.]

나이트메어가 말하기 무섭게, 둘은 환풍구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덕트를 발견했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인 뒤, 천장에서 조심스럽게 뛰어내렸다.

"일빠."

"이.... 흠흠."

두 괴도가 도착한 곳은 수많은 CCTV들이 깔려있는 관제실. 모니터에는 히어로들과 격벽을 사이에 두고 대치중인 빌런들이 한창 날뛰고 있는 가운데, 관제실 한 가운데에는 헤드기어를 쓴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남자가 있었다.

"뭐하는 거야! 히어로 새끼들 당장 막지 못해?! 그러라고 월급 주는 줄 알아, 이 멍청이들아! 쯧쯧, 이래서 헬조선 새끼들은-"

"지옥참마도!"

퍼----억. 누리는 옆에 있던 무선키보드를 들어 남자의 헤드기어 위를 내리쳤다.

"커흑!"

남자는 입에서 실핏줄이 터져나오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무선키보드는 누리의 마력에 의해 물이 휘감겨, 물배트가 되어있었다.

"또 하찮은 것을 베어버린 거임. 후우, 나란 여자. 무섭다."

누리는 잽싸게 남자를 구속한 뒤, 가을에게 눈짓했다.

"언니, 이거 카피."

"카피라니. 그런 거 아니거든?"

가을은 남자의 등을 마력이 깃든 발로 대충 밀어 걷어찼다. 마력에 의한 접촉으로, 가을은 금방 남자로 변신하여 마이크를 붙잡았다.

"아아, 잠시 소란이 있었다. 이 멍청이들! 여기까지 침입자가 들어올 때까지 뭐했어! 당장 나가서 싸워, 이 멍청이들아! 내 말대로 하면 다 해결된다!"

가을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가을이 명령을 내릴때마다, 부하들은 오히려 히어로들에게 제압당했다.

"뭐?! 나 때문에 잡혔어? 트롤하지마?! 개소리 집어치워!"

"......아, 망했다."

한창 가을이 성을 부리는 사이, 누리는 남자의 신상을 파악하고 울상을 지었다.

"C급 빌런이었음...."

헤드기어를 벗긴 남자의 눈은 괴인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만큼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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