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5화 〉2부 4장 02
히어로 아카데미.
정규교육과정을 마친 이들 중 이능력자의 재능을 가진 이들을 위하여, 대학이 아닌 고등교육의 현장을 마련하여 사회에 조금 더 빠르게 기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대학형 아카데미를 의미하는 말이다.
"누리야, 히어로 아카데미의 제일 큰 장점이 뭐게?"
"월 300씩 따박따박 들어오는 장학금? 서울에 있던 대학들 유명 교수들이 강의하는 거? 그것도 아니면 졸업만 하면 바로 국가 공무원이나 대기업 길드 신입사원이 될 수 있다는 거?"
정답이다. 히어로 아카데미는 사실상 '신서울대학 이능력학과'라고 봐도 무방한 곳으로, 한국의 많은 인프라가 아카데미에 밀집되어있다.
"접수 끝났습니다. 이제 가셔도 좋습니다."
"고마워요,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번호 좀 주시겠어요?"
"왜요, 마법소녀 옷 입히시게요? 사양할게요."
접수를 맡은 교직원은 나를 혐오스러운 무언가를 바라보는 눈빛으로 경멸했다. 확실히 신청 서류에 대놓고 <마법소녀 매지컬 큥큥스>는 조금 그렇기는 했다.
"아쉽네요. 누리야, 가자."
"응. ...사장님은 부끄러움에 대해 알 필요가 있음."
"부끄러워할 이유가 있을까? 모두가 나를 보고 있을텐데."
부끄러움을 느끼기에는 주변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시각이 너무나도 많다. 그러므로 나는 오히려 더 당당히 나서야했다.
"누리야, 저거봐. 아카데미 제복이야. 입고싶지 않아?"
"담임이 저 제복이 성공의 증거라고 씨부리기는 했지."
아카데미 제복은 곧 성공으로의 지름길. 1학년에 입학하는 즉시 인생의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하는 곳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다.
"아까 질문 이어서. 그럼 히어로 아카데미가 만들어진 배경은 뭐게?"
"급변하는 현대사회에 적응하는 미래 이능력 인재를 육성하는 것?"
"땡. 높으신 분들 자녀의 병역비리 때문이랍니다."
"...헐."
아카데미가 만들어지기 이전, 아직 히어로가 군대를 가야했던 시절. 한 높으신 분의 자녀가 히어로로 각성하면서, 이 자는 한 가지 꾀를 내게 된다.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2년을 군대에서 뺑이칠 게 아니라, 학업에도 열중하고 이능력도 기르고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사관학교를 만들자. 예전부터 비슷한 정책이 있었지만, 아카데미는 사실상 이능력자를 위한 특혜 시설이 되었지."
"근데 사장님, 그거라도 안 하면 다 국외로 도망가잖아. C급만 되어도 연간 50억은 넘게 벌텐데, 그거 다 토해내고 2년동안 총들라고? 내가 남자라도 억울하겠다."
"그래. 미필 20대 남자 히어로들을 붙잡으려고 만들어진 시설이 의외로 큰 지지를 받게 됐어. 아들이 해외도피라도 하면 자기 정치 인생이 끝날 뻔 했던 한 정치인의 발버둥이 매년 100명 가까이 정예 히어로를 양성하는 대한민국 히어로 육성 시스템을 만들어낸 거지."
"삐뚤어진 교육열이라 이거네."
그렇게 만들어진 아카데미는 한국의 모든 교육 시스템이 압축되어있는 이능력자 육성의 최전선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리고 아카데미를 수료했다는 증서를 가진 이능력자들은 '정예병'이나 마찬가지인 존재였다.
"헌터 길드에서 졸업생들 득달같이 모집하고 홍보들 하잖아? 우리 길드에는 아카데미 졸업생이 있습니다! 히어로 협회든 헌터 길드든 아카데미 학생들에 대한 수요는 엄청 높아. 왜 그럴까?"
"돈 안들이고 아카데미에서 베테랑 이능력자로 양성해주니까?"
"그래. 아카데미 졸업하면 다들 한 가닥 하도록 만들어지거든. 그렇게 만드는 곳이 아카데미고. 1학년 때부터 괴수와의 전쟁에 학부생을 동원하는 곳 아니겠어. 흐흐."
서울수복작전에는 참가한 이들이 없었지만, 신서울을 중심으로 아카데미 학부생들은 주기적으로 괴수 퇴치 실습이라는 명목으로 현장 경험을 쌓는다. 아카데미 2년 동안 쌓인 전투경험을 바탕으로, 아카데미를 졸업한 학생은 즉시 투입 가능한 정예병이 되는 것이다.
"길드에서는 자기들이 직접 이능력자를 바닥부터 양성할 필요가 없어서 좋고, 학부생들은 미리 자기가 들어가고 싶은 길드에 눈도장을 찍어서 좋지. 그게 바로 학부생들의 메인 이벤트, [실습]이야."
현장에서 괴수 퇴치를 직접 경험하는 것.
목숨이 오가는 현장에서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소꿉놀이를 하는 것 처럼 보인다 하여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실습을 거친 학부생과 그렇지 않은 학부생의 현장 생환률은 극명하게 차이가 났다.
"그리고 길드는 실습생을 받기 위해 매번 아카데미에 신청서를 내지. 우리 길드를 선택해달라는 지원서 말이야."
"그래, 그건 알겠어. 근데 사장님, 이건 아니지 않음?"
누리는 신청서 전체에 적힌 문구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우리 입사 지원서와 비슷한, 노골적이고 편파적인 조건이 가득 담긴 악의적인 문구가 적혀있었다.
[마법소녀 매지컬 큥큥스]
[우리 회사와 계약해서 마법소녀가 되어줘!]
"이게 학부생들한테 통한다고 생각함?"
"에이, 누리야. 이건 형식이야, 형식. 어차피 본인이 지원서를 내고 희망순위를 적는다고 해도, 나중가면 결국에는 아카데미측에서 랜덤으로 배정하게 되어 있거든."
랜덤 배정으로 우리 길드가 걸리는 자가 있다면 정말 난감할 테지만, 어차피 우리 길드에 배정될 존재는 단 한 명 뿐이다.
"내가 픽할 마법소녀는 한 명 뿐이야."
많고 많은 학부생 중에, 가장 잘난 재능을 가진 화속성 마법사. 한국이라는 땅에서 보기 힘든, 해외 이민자. 금발거유태닝 마법사로, 붉은 색이 가장 잘 어울리는 적마법사.
"<화마인> 슈리 정."
화속성 A급 이능력자로, 많은 길드에서 이미 여러가지 이유로 러브콜을 보내고 있는 유망주.
"이번에 영입하지 못하면 아마 영영 놓치게 될 걸?"
주인공이 영입하지 않을 경우, 그녀는 다른 길드와 함께 실습을 가게 된다. 그리고 4월 4일, 그녀는 괴인화로 성욕에 미쳐버린 길드원들에 의해 윤간 간살당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니까 누리야, 이건 사람 살리는 거라고."
"살리는 셈 치고 떡도 좀 치고?"
"당연하지."
정강이를 얻어맞았다.
* * *
"꼭 가고싶습니다!"
"...참고하겠습니다."
아카데미 초대 학장, 원대학은 방을 다녀간 아카데미 2학년 학부생들의 뜨거운 열정과 의지에 머리가 타들어갈 뻔 했다.
"후우. 어디 뭐 열렬히 사랑에 빠진 것도 아니고."
남녀를 불문하고 다들 좋은 기회라면서 때이른 '실습 참가'에 강렬한 의지를 보이는 바람에, 원대학은 제대로 혼쭐이 났다. 아카데미별로 반이 있고, 반마다 배치되어있는 담당 교수가 있었지만, 적어도 실습에 대해서만큼은 학장인 원대학이 직접 나서야만 했다.
가장 공정하게 학부생들을 길드 실습에 배치할 수 있는 자. 그게 아카데미에서 원대학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었다.
"하나같이 죄다 로비질이니...."
테이블 아래에 있는 비타민음료 박스는 새 발의 피다. 학장실 옆 창고에는 아카데미를 다녀간 수많은 이들의 성의 표시가 현물로 먼지만 쌓이고 있었다.
A학생은 B길드에 자신을 실습생으로 배치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그 길드의 고위급 임원이니까.
A길드는 B학생이 우리 길드에 실습생으로 왔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B학생을 영입한다면 계약이 끝나는 원거리 딜러의 후임으로 영입할 수 있기 때문에.
각양각색의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그 중심에 선 원대학은 그나마 로비의 파도 속에서 아카데미의 운영이라는 키를 꽉 붙잡고는 있을 수 있었다.
그의 아들이 아카데미 출신 1기 졸업생으로서 히어로 협회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기에, 원대학은 최소한 '공정'하게는 실습생을 배치할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다음 학...하, 씨발."
원대학은 프로필을 보자마자 쌍욕을 내뱉었다. 우수한 인재는 나라의 흥복이기는 하지만, 너무나도 우수한 바람에 너도나도 데려가려고 하는 에이스였다.
"안녕하십니까, 학장님."
아카데미 제복을 입고 들어온 2학년 학부생, 정슈리는 학장과 마주 앉았다. 움직임 하나하나에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철철 흘러넘쳤다. 원대학은 정슈리의 프로필을 위에서부터 천천히 읽어내렸다.
"정슈리. 나이 22세. 여성. 키 175cm. 화염술사의 이능을 보유하여, 화염마법을 사용하여 <화마인>이라는 칭호를 받은 자. ...아카데미 유일의 현역 A급 이능력자."
"맞습니다."
겸양을 떨지 않는다. 사실상 아카데미를 자퇴하더라도 모든 길드에서 당장 영입을 하려고 혀를 내밀고 있을만큼 우수한 인재였다.
비록 1학년 때는 커리큘럼의 영향으로 모의 훈련만 했을 뿐 실제 현장에서의 전투 경험은 없지만, 그건 얼마든지 본인의 실력과 베테랑들의 도움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원대학은 정슈리의 바디 프로필을 눈으로 훑고, 곧장 정슈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네는 어디로 가고 싶은가?"
"어디든 좋습니다."
"어디서나 자네를 원해서 말이야. 혹시 희망하는 곳이라도 있나?"
"딱히 없습니다. 아카데미의 방침에 따르겠습니다."
차라리 언질이라도 주거나 했으면 좋으련만. 원대학은 자신을 너무나도 순수하고 올곧은 눈으로 바라보는 정슈리의 눈빛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10억 뒷돈을 받고 유성 산하 길드에 배정을 할까.
아니면 아들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히어로 협회 산하 길드에 배정을 할까.
아니면 아내의 시댁에서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D 헌터 길드에 배정을 할까.
'너무나도 매력적이군.'
곳곳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는 게 부러울 따름이었다. 나이만 조금 더 많고 출신만 확실했다면, 며느리 감으로 삼고 싶을 정도였다.
"혹시 좋아하는 스포츠 있나?"
"야구를 좋아합니다."
"오, 야구. 좋지. 혹시 좋아하는 팀이 있나?"
"MLB의 라스베가스 피닉스를 좋아합니다."
"...그, 그래. 혹시 한국야구는...."
"유성 스타즈가 다 이겨서 딱히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그건 그렇지."
망했다. [좋아하는 야구 팀의 연고지 기업을 선호하더라]라는 식으로 변명 거리를 만들려고 했으나 그 마저도 실패하고 말았다. 원대학은 이 반듯하면서도 까다로운 보배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알겠네. 그럼 자네가 따로 바라는 길드는 없는 걸로 알지."
"......그, 학장님."
처음으로 정슈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정말 자퇴하면 다시 못 돌아옵니까?"
"음? 그건 왜? 설마 벌써 러브콜을-"
"아, 아닙니다. 제가 아니라, 그 제 친구...."
"아, 이유나."
원대학은 듣기만 해도 짜증나는 이름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 참. 아무리 이능력이 낮아도 그렇지, 설마 계속 E급에서 머무르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설마 자퇴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
"학장님, 혹시 서울의 일을 모르시는...."
"음? 서울의 일? 아하, 장비의 힘으로 서울에서 탈출했던 거 말인가? 참 어이가 없었지. 누가봐도 속보이는 의도가 가득한 길드에 들어가서 야시시한 옷을 입고 하는 일이라고는.... 쯧쯧."
정슈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1학년 차석으로 학기를 마무리했으니, 제게 길드 선택권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나중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슈, 슈리 학생?!"
정슈리는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원대학은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실수에 입을 손바닥으로 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젠장.... 룸메이트였다고 설마 챙겨줄려고 했던 건가? 미치겠군."
원대학은 마도기어를 통해 학부생의 실습 대상 길드로 신청한 이들의 목록을 살폈다.
당연히 그도 이유나에 관한 정보는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금발서양남의 마누라처럼 달라붙어서 돌아다니고 있는 바람에, <자퇴의 이유는 사랑?!>이라는 낯뜨거운 가십 때문에 얼마나 골머리를 썩혔는 지 모른다.
"그래도 이런 곳에 들어가려고 하겠어?"
원대학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유나가 소속된 길드는 파렴치하게도 지원 신청서를 들이밀었고, 실습생을 받는 조건으로 <마법소녀 복장 필히 착용하고 근무>라는 정체불명의 조건이 달려있었다.
"아니지, 아니겠지."
원대학은 이유모를 끈적한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 * *
<잠시 뒤, 신서울 유성 배틀 슈트 매장.>
"아직 영입도 안 한 사람 옷부터 제작하는 거, 한국에서는 뭐라고 부르는 지 아세요?"
"떡 칠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
"한국말 잘 하시네요, 고객님. 일부러 말 바꿔서 속담쓰는 거."
"들켰는 걸."
나는 잠시 비밀리에 슈트 매장을 찾았다. 유하는 언제나처럼 X로이드로 나를 맞이해 제품을 소개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배틀 슈트 맞춤 주문이 끝이죠? 마법소녀 컨셉에 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응. 이번에 실적 때문에 코어 좀 파밍하러 갈 거거든? 그 때 옷 좀 새로 하나 맞춰보려고."
"......뭔데요?"
"정슈리 양이 우리 팀이랑 같이 움직일 때 입을 제복."
유하의 표정이 썩었다.
"아카데미 제복 비슷하게 입혀서, 부담스럽지 않게 하려고. 그거 알아? 아카데미의 제복은 마린룩이랑 거의 비슷한 거."
나는 고등학교의 교복과 비즈니스 슈트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갓 성인이 된 이들이 입는 아카데미 제복을 가리켰다.
"그런데 큰 문제가 있어. 너무나도 큰 문제야."
"그러시겠죠."
"핫팬츠 타입의 반바지로 할까, 아니면 미니스커트로 할까?"
우리가 갈 곳은 바다.
그러므로 당연히 짧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