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674화 (674/1,497)

〈 674화 〉2부 4장 01

서울 수복 작전이 종료된 지도 어언 사흘이 지났다.

다른 나라라면 사흘이라는 시간은 상당히 짧은 시간이지만, 하루 사이에 스펙타클한 일이 많이 일어나는 이 나라는 사흘이면 천지가 바뀌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3월 2일.

한국전쟁을 방불케하는 대규모 괴수들이 북쪽에서 남하할 때만 하더라도 나라가 떠들썩했으나, 고작 하루만에 방어선이 구축된 것으로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3월 3일.

2만 마리의 괴수들이 서울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는 정찰 결과가 널리 퍼짐에 따라,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2만 마리 음충을 두고 경제적 가치를 논하기 시작했다.

3월 4일.

서울의 위기는 안중에도 없게 되었고, 광검이 최강이니 석하랑이 최강이니 논쟁이 시끄럽게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서열 세우기는 모든 히어로 팬들에게 상당히 중요했지만, 사제관계에서 이제는 정적이 되어버린 둘의 관계는 상당히 미묘했다.

단순히 사제와 정적을 떠나서, 한국의 자존심을 대표하는 히어로다. 그리고 그 중 한 명은 매년 한 거대한 행사의 주역으로 초청받아 연설을 해야만 했다.

신서울 히어로 아카데미 신입생 입학식의 축사.

새로운 학기의 시작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대한민국에는 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

<3월 5일, 오전 10시. 신서울 오라클 스튜디오 사무실.>

“봄이네요.”

“봄이지.”

나와 사무실에서 마주앉은 유나는 제법 씁쓸해보였다. 이유를 알고 있어서 조금 미안하기도 하고, 새삼스럽지만 조금 괘씸하기도 했다.

“유나야, 1년 전 이맘때 즈음에는 뭐했어?”

“윽.”

유나는 노골적으로 내가 던지는 화제를 꺼려했다. 유나를 괴롭히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나도 유나에게서 꺼내고자 하는 화제가 있었기에 대화를 이어나갔다.

“나는 1년 전이면 미국에 있는 연구실에서 괴수들 조사하고 있었을 때네. 어때?”

“연구실이요?”

“응. 여러 가지를 연구했던 곳이지.”

나는 코트 안주머니를 가리켰다. 사용은 그다지 자주 하지는 않았지만, 사냥을 나가면 항상 몇 번은 사용하며 그 위력을 과시한 마총이 내 코트 안주머니에 자리잡고 있었다.

“유나야, 혹시 뭐 필요한 거 있어? 내가 미국에 발주 넣으면 바로 보내줄 거야.”

“글쎄요. 장어 액기스 같은 거나 보내달라고 하는 건 어때요?”

“너 지금 나 무시하니?”

“아뇨. 원래도 강하신 분이 여기서 더 강해지면 어떻게 되나 궁금해서요. 마치 설화공주처럼.”

유나는 은근슬쩍 화제를 돌렸다. 내가 원하는 주제를 꺼내지 않으려고 내가 흥미를 가질만한 주제로 넘어가는 솜씨가 정말 일품이었다.

“그래, 석하랑이 분명 엄청 강해지기는 했지. 그래도 당분간은 힘을 숨겨야 할 거야. 안 그러면 선의철이 그걸 가지고 또 분탕을 칠 거거든.”

“SS급이 늘어나면 서울로 다시 진격하려고 할 것이다?”

“그래. 서울수복작전 수준이 아니라, 압록강까지 진격하려고 할 걸? 노르웨이 오슬로 게이트 발생했을 때, 런던에서 북해 위를 달려가서 차원문을 제압한 SS급 덕분에 아주 난리가 날 거야.”

“<성검> 가웨인 경을 말하시는 거죠? 저 알...흠흠.”

유나는 손뼉을 치며 반색했다가 급히 말을 마무리했다. 지금이야말로 말꼬리를 잡을 때.

“뭐야. 왜 말을 하다가 말아?”

“그, 그게. 제가 가웨인 경의 팬이거든요. 빛속성. 후후.”

“글쎄. 수능 차석으로 들어간 대학 때려치고 히어로 아카데미 원서 넣었을 때, 원서에 가웨인 경 어쩌고 한 것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윽. 오빠 뭐예요?! 어떻게 그런 것 까지 알고 있는 거죠?!”

“알고 있는 건 뭐든지 알고 있지.”

광검을 인생의 멘토로 삼겠다며 면접을 봤다가, 당연히 SS급인 가웨인을 최강으로 뽑아야지 하는 식으로 비난을 받았다. 유나는 단지 자신의 감을 바탕으로 광검을 최강으로 뒀을 뿐인데, 면접에서 최하점을 받고 말았다.

“오빠, 그런 의미에서 하나 궁금한 거 있어요. 가웨인 경이 더 강해요, 아니면 광검이 더 강해요?”

“...단적으로 얘기하기는 지금 많이 어려운데? 현 시점을 얘기하는 거야, 아니면 전성기를 얘기하는 거야? 그도 아니면 둘이 1:1로 붙었을 때 누가 살아남는 지 얘기하는 거야?”

“......이거 커뮤니티에 알려지면 한 달이 불탈 주제 같은데요. 갑자기 묻는 게 무서워졌어요. 왜 아는 것처럼 말씀하세요?”

“아니까. 현재, 가웨인 압승. 전성기, 무승부. 1:1, 광검 압승. 끝.”

나는 간단히 둘의 상하관계를 요약했다. 내가 말한 건 아니고, 내 옆에 나와 함께 플레이를 하는 그의 조언을 받았다.

[라, 8줄 이상 글은 3줄 요약이 국룰이다.]

어째서 가웨인이 현재는 더 강하고 전성기 시절의 누가 더 강하고 1:1은 왜 다른지 어쩌고 저쩌고 길게 설명할 수는 있었지만, 내 옆에서 나와 함께 하는 검고 작은 불사조가 간략하고 짧게 세 줄로 요약해버렸다.

“오, 오빠. 그러면 말이에요. 광검이랑 설화공주랑 비교하면 누가 이겨요?”

“너 누가 더 강한지 떡밥은 아카데미 입학식 축사 떡밥 때문에 별로 내키지 않던 거 아니었어?”

“윽.”

유나가 이야기를 하면서 굳이 아카데미와 관련된 화제를 피한 이유.

그건 유나가 정식으로 아카데미에 자퇴서를 내고 우리 팀의 직원으로 일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집에서 쫓겨나 가온누리의 101호에 독방을 쓰게 되었다.

“신입생 입학식에 축사해주러 오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게 광검인지 설화공주인지 궁금한 거지? 아카데미 화제가 찝찝해도 말이야.”

“네. 솔직히 히어로 중에, 아니 이 나라 사람들 중에 그거 궁금해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있겠어요?”

“지금 둘이 붙으면 광검 압승이고, 반 년 뒤에 둘이 붙으면 석하랑 압승.”

“......네?”

나는 그의 조언을 빌어 간단히 정리했다.

“지금은 석하랑이 경험부족으로 지지만, 경험만 쌓이면 광검을 충분히 이길 수 있지.”

“꼭 저랑 오빠의 섹스같네요.”

“그래, 섹스같…. 틀린 말은 아니니까 일단 넘어가줄게.”

이유나, 반 년 뒤에 나를 섹스로 이기겠다 선전포고를 날렸다. 나는 손을 뻗어 유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칭찬한 뒤, 다시 축사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화제로 돌아갔다.

“그래서 이번에는 광검이 나올 거야. 특별한 일이 없다면, 석하랑은 SS급인 걸 숨겨야 하니까.”

“그렇죠? 아쉽네요. 석하랑 님도 신서울에 오면 이야기 나누고 싶었는데.”

“...이야기?”

“네. 이야기요. 아주 진솔하고 중요한 이야기."

이야기가 그냥 이야기로 들리지 않는 건 어째서일까. 나는 괜히 두려움에 딸기라떼로 목을 축였다. 이번에는 내가 화제를 이끌어나갈 차례.

“유나야. 우리 빙빙 돌리지 말고 직설적으로 얘기하자.”

“.......”

이제는 묵비권을 행사한다. 그래서 나는 직설적으로 얘기하기로 했다.

“어제 온 그 친구.”

“윽.”

“이름이...쉐리?”

“정슈리에요. 개명했어요. 한국인이고, 이미 길드에 들어갈 생각 하고 있고, 아카데미 2학년이니까 오빠는 관심 끄세요!!”

“저런. 하지만 이미 관심이 생겨버렸는 걸.”

관심이 없을 수가 없다. 불행한 과거를 지닌 히로인을 큥큥으로 구원하여, 지구를 지킬 정의로운 마법소녀로 태어나게 하는 게 이 몸의 임무이니까.

“나의 매직스틱으로 찬란한 빛이 나게 하고 싶은 미인이었는데.”

“오빠, 설마 슈리까지 어떻게 해보려는 거 아니죠?”

“왜? 친구랑 같이 둘이서 내 자지 빨려고 하니까 어색해?”

“그런게 아니라! 아, 아니. 솔직히 그렇다고 쳐요. 그러면 추파 안 던질 거예요?”

“그건 아니지.”

히로인에게 추파를 던지지 않는다? 지휘관 자격이 없는 존재다. 더군다나 히로인 넘버 004, 정슈리는 나로서도 개인적으로 호감이 가는 존재다.

‘화속성 A급이 어디 뉘집 개이름도 아니고.’

최대 성장 가능한 화속성 레벨이 88.

마력을 2만 더 큥큥해주면 금방 S급을 찍는 건 기본이고, 애초에 귀족화속성인 이상 어딜 가든 모셔가지 못해 안달이 나있는 존재.

그리고 한국에서 보기 드문 외국인 히로인. 모델 체형에 적금발의 거유 태닝 미녀를 내가 어찌 가만히 두고 볼 수 있으랴.

“유나야. 솔직히 얘기할게. 동료로 맞이하는 겸사겸사 섹스도 하고 싶거든? 다리 좀 놔주라.”

“오빠, 그런 말을 하면 제가 도와줄 거라고 생각하세요?”

“대신에 어떻게 다리 놓아주면 하루 원하는 대로 쓰게 해줄게.”

“...뭘요?”

나는 엄지로 나를 가리켰다. 유나는 머리를 쥐어 뜯으며 고민에 빠졌다.

“으, 으으...아, 안 되는데….”

“유나야, 긍정적으로 생각해. 정슈리 양, 나한테 소개시켜주면 너는….”

나는 유나의 어깨를 잡고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나랑 친구를 동시에 따먹을 수 있어!”

“그게 저한테 할 소리예요?!”

혼났다.

***

<그 시각, 신서울 히어로 아카데미 학장실>.

“고, 곤란합니다. 축사를 하지 않을 계획이라니요.”

“많이 해먹었으니 이제는 그만둘 때도 됐지.”

광검은 여유롭게 차를 마셨지만, 그와 마주 앉은 아카데미 학장 원대학은 초조함에 몸이 달아올랐다.

“어르신, 부디 부탁드립니다. 축사,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광검의 개인적인 팬이기도 한 그는 입학식에 광검이 나타나주기를 학수고대했으나, 정작 광검 본인이 축사에 나서기를 원치 않았다. 모두가 광검에게 가르침 한 번 받기를 바라고 있으나, 감투도 본인이 싫다는 데 어쩌랴.

“이유라도 말씀해주십시오. 설마 설화공주 때문에 그렇습니까?”

“.......”

“광검 어르신. 설화공주 님을 아끼시는 마음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축사를 듣는 이들의 마음도 생각하셔야지요.”

“마음?”

“예. D급부터 수많은 사선을 넘어 S급까지 이른 전설적인 존재와 비하면 설화공주 님은 다소 초라합니다. 아니, 축사에서 신입생들에 역효과를 불러 일으킬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천재였던 이들과 만나면, 그들 중 일부는 분명 좌절하고 말 겁니다.”

원대학 학장의 말에 광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건 아닐세. 부러워하면 부러워했지, 질시를 하지는 않을텐데.”

“광검 님! 왜 어린 아이들의 마음을 모르시는 겁니까. 이제 막 대학생이 된 나이 대, 아주 예민할 때입니다. 더군다나 히어로로서 첫 발을 들인 이들이 아닙니까.”

“시대는 변하고 있네. 신세대의 선두에는 설화공주가 서있을 테지. 격차를 느낀다면 어떤가? 본인의 한계를 느끼고, 언젠가는 넘어야 할 목표로 삼으면 될 것을. 축사, 설화공주에게 요청하시게.”

학장과 광검은 대화의 평행선을 달렸다. 광검이 설화공주를 추천하는 양상에 학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광검 님의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설화공주와 잘 이야기 해보시게.”

둘 사이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문제가 해결되었다. 가벼운 안부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도중, 화제는 아카데미의 2학년 학부생으로 흘러들어갔다.

“올해 커리큘럼에는 길드 실습도 있다지?”

“예. 6월 즈음에 한 달 집중 실습을 하던 것을 매 주 2회 정도로 바꿨습니다. 그 이유는….”

“서울에서 실전 경험을 쌓게 하기 위함이군.”

“예, 그렇습니다. 지금처럼 히어로와 헌터들의 도움으로 안정적으로 전투 경험을 쌓을 기회는 흔치 않죠.”

원대학은 광검을 향해 홀로그램 데이터를 튕겼다. 아카데미의 2학년 학부생들의 데이터가 펼쳐진 가운데, 광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난 번에 봤을 때보다 수가 하나 모자란데?”

“아...그….”

“무슨 일이라도 있나?”

“한 학생이 자퇴했습니다. 아카데미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라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오히려 학생 입장에서는 잘 선택한 일이죠. 언제까지 안 될 일을 붙잡고 늘어질 수는 없으니.”

“이유나….”

아카데미 자퇴생.

그게 분명 시사하는 바가 평범하지는 않을텐데, 굳이 아카데미를 자퇴한 건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 광검은 여러 프로필을 확인하다 하나를 집어들었다.

“이 아이는?”

“아! 그 아이가 바로 유망주 중 한 명입니다. 외국에서 이민 온 학생으로, 여러모로 선전에 도움이 되고 있죠.”

“......수에리?”

“쉐리입니다. 한국 이름은 정슈리.”

“정수리?”

“...정슈리 학생 입니다. 마침 잘 됬군요. 슈리 학생, 인사를.”

둘의 사이에 찻잔을 내려놓은 금적발의 여인이 고개를 푹 숙였다. 광검은 그녀에게서 전해지는 기운에 속으로 제법 놀랐다. 여인의 몸 속에는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꺼지지 않고 타들어가고 있었다.

“정슈리라고 합니다. 주특기는 화염마법. 포지션은 후위 메이지 입니다.”

***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뭘까, 유나야.”

“글쎄요. 저희에게 부족한 건 알겠는데, 오빠까지 부족한 건 모르겠어요.”

“후방 원딜의 부재야. 유나는 토템같은 거고, 다른 둘이 다 딜을 넣어야 하니까 상황이 상당히 애로사항이 펼쳐지는 거지.”

“가온은요?”

“가온이는 안 돼. 세이렌은 우리 비밀병기야. 그리고 가온이는 우리가 부족한 걸 채워주기에는 살짝 부족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정답은 하나다.

"인종 간의 조화가 필요해."

동양인 밖에 없는 침대에는 새로운 서양인이 한 명 정도는 필요했다.

"금발태닝거유 화속성 마법사는 못 참지."

내 손에는 <[긴급]히어로 아카데미 학부생 실습 길드 모집 지원 신청>이라는 문구의 종이가 펄럭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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