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1화 〉2부 3장 26
<3월 2일 오후 3시 33분, 카페 Padre Juan.>
"실례합니다...?"
코트 차림에 썬글라스로 정체를 숨긴 여인, 선겨울은 조심스레 카페의 문을 열었다. 백청화로부터 3일부터 다시 출근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팀원들이 구로에서 어떤 난관을 겪었는 지 아는 이상 찾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음? 겨울 양 아닌가. 오늘 쉬는 날 아닌지?"
"아, 안녕하세요. 혹시 위에 사장님 계셔요? 그, 계시면 생환 기념 서프라이즈로 케이크랑 차 좀 들고 올라가려고 하는데...."
"있지. 지금 백청화 군 혼자 사무실에 있다네. 다른 이들은 모두 잠깐 볼일을 보러 나간 걸로 알고 있어."
"...그렇군요."
마침 잘됐다. 겨울은 적당한 양-백청화를 위해 준비해놓은 듯한 딸기 전용 메뉴판 전체 항목-을 주문한 뒤, 카운터 근처 의자에 앉아 후안과 얼굴을 마주했다.
"사장님은 혼자 하시면 안 바쁘신가요?"
"안 그래도 바빠서 알바를 구할 참이었는데, 청화 군이 한 명 소개시켜줬지."
"아, 진짜요? 언제부터 일해요?"
"내일부터. 지금 위에 일하는 친구들, 그 친구 옷 사주러 떠났다네. 가출 여고생이라고 하더군. 조금 날티가 나던데...쯧쯧."
빠직. 겨울은 이를 갈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후안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커피를 들이키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어려서부터 고생한 티가 나더라고. 청화 군이 그냥 데려와서 알바를 시키는 건 아닌 것 같고...분명 뭔가 이유가 있으니까 데려온 아이겠지. 성인이 되어 자립할 때까지, 여기서 알바를 하면서 일하기로 했네."
"그건, 참, 다행이네요...하하. ...그런데 날티요?"
"저런. 남에게 뭐라 할 만한 말은 아니었나. 실언이었군."
갑자기, 후안이 겨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자네...조금 닮은 것 같기도 하고?"
"흔한 얼굴이잖아요. 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겨울은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엄포를 놓았다.
"이거 성형한 얼굴 절대 아니에요. 원래 이렇게 생겼다고요."
"그런가? ...아, 그렇군. 오해를 자주 샀겠어. 자네랑 비슷한 얼굴을 두고 <강남미인>이라고 부른다지?"
겨울은 속이 다 뒤틀렸다.
* * *
<그 시각, 유성 백화점 의류매장>.
"이거 어떻습니까?"
"지르자."
"이건 어때요, 언니?"
"질러."
"언니, 거기에 이거 추가하는 건 어떰?"
"일단 지르고 나서 생각하는 건 어때?"
네 명의 여인은 빛처럼 빠른 속도로 매장을 돌아다니며 옷을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백청화의 허락 하에 매장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드는 옷을 고르고, 해당 의류를 X로이드 점원들이 따라다니며 수거하기 시작했다.
"......저기, 일단 주니까 받는데 나 옷 그렇게 많이 필요 없는데?"
가을은 시시각각으로 쌓이는 지출에 얼떨떨했다. 라온, 누리, 가온 셋은 매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평상복부터 속옷, 계절별 외출 복까지 두루 섭렵하며 카드를 긁었다.
"이거 다 살 수나 있어? 지금...천 만원 넘어가지 않았니?"
"유성이 원래 제품 상태에 비해 메이커 거품이 많이 껴있습니다. 이건 약과입니다."
"우리는 허락받은 예산대로 쓰는 거임!"
라온과 누리는 자신들이 집은 옷을 가을과 비교하며 구매 리스트에 올렸다. X로이드 점원이 하나 둘 옷을 챙겨갈 때마다 올라가는 지출에 가을은 너무나도 두려워졌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이러다 나한테 옷만 억소리나게 사주겠네."
"억소리만 나면 다행이죠. 익숙해지면 편해요."
가온은 허탈한 미소로 속옷 매장으로 들어가는 라온과 누리를 가리켰다. 키 차이만 30cm 가량 나는 둘은 얼굴을 맞대고 가을의 몸을 위아래로 스캔했다.
"A컵 같지 않습니까?"
"아님. 내가 잘 알음. 저거 AAA임."
"저기...."
다른 건 참아도 이건 참을 수 없다. 가을은 입술을 깨물며 둘을 노려봤다.
"나 원래는 G거든?"
"하지만 약속된 8월까지는 그 몸으로 사셔야 하지 않습니까?"
"언니 잘 때도 그 몸으로 지내야 하는 거 잊었음?"
"참나. 그 놈의 감시가 뭐라고-"
"가을 씨?"
옆에서 가온이 웃으며 가을의 옆구리를 찔렀다. 라온과 누리와는 다른, A급 히어로의 압박에 가을은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잊지마세요. 제가 당신의 감시라는 걸."
"...예, 예. 알겠습니다. 어디 빌런 따위가 A급 히어로 앞에서 건방을 떨겠어요. ...씨발."
"욕도 자제하세요. 사장님 싫어하세요."
"어느 사장님? 하아. 장단 맞추기도 어렵네, 진짜."
가을은 두 손을 들며 속옷 매장으로 들어갔다. 신체 스캔 기계 위에 오른 가을의 체형이 금방 마도기어의 아바타로 데이터화 되었고, 라온과 누리는 가을의 수치를 바탕으로 온갖 속옷을 쓸어담았다.
"그런데 가을 씨, 진짜 누구로 변신한 거예요?"
"말 못 한다고 했을텐데."
"아뇨. 진짜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이라서 그래요."
"전형적인 강남미인 상이지. 얼굴에 칼은 안 댔어. 놀랍게도."
자꾸 놀림을 받았기 때문일까. 가을의 목소리에는 다소 빈정거림이 묻어있었다.
"그래. 수술은 안 했지."
"......?"
"이능력 만만세. 이 정도면 만족해?"
"......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알 것 같네요."
가온은 라온과 누리가 가져오는 옷들을 보며 확신했다.
"사장님은 가을 씨가 크든 작든, 어느쪽이든 놓치지 않을 거라는 것."
"...허억."
매장 끝에 다다른 순간, 가온의 마도기어에 나온 총 구매액을 본 가을은 입이 떡 벌어졌다.
"미친. 진짜로 억을 넘겼어? 미친 거 아니야?!"
"우리 싸장님 클라스 인 거임. 언니, 지금은 알바생이니까 그렇지만...."
누리는 자신의 외투 아래, 몸에 착 달라붙는 타이즈를 가리키며 싱긋 웃었다. 평상복과는 다른, 겉면에 마력이 흐르는 최고급 배틀 슈트였다.
"정직원 되서 제복 받으면 아파트 한 채는 입고 다닐 수 있는 거임. 히힛."
"직원 복지를 가장 많이 신경쓰시는 분이니까요. 라온 언니, 한 바퀴 다 돌았죠?"
"그렇습니다. 그럼 다시 거꾸로 돌아봅시다. 사는 김에 저희 것도 조금 사고. 예산이...."
"......20억?"
서울에서 있었던 그 고난의 날은 이 날을 위해서였을까. 가을은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 * *
<오후 4시, 오라클 스튜디오.>
"유나야, 허락은 받았어?"
"네. 조금 힘들기는 했지만...생환 기념 파자마 파티라고 하니까 허락해주셨어요. 저 오늘 외박 가능해요."
나는 유나의 말에 발깃했다.
"오늘...그거 하는 거죠?"
"당연하지."
고등학교 때까지, 심지어 아카데미 1학년 2학기가 끝날 때까지도 공부한다고 과팅같은 것에도 참가하지 않았을 순진했던 아이가 부모님께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외박의 기회를 얻어냈다.
"라온이랑 누리는?"
"중간에 가온 씨에게 맡기고 따로 빠져나오기로 했어요. 그런데 사장님, 가을 언니 말이에요.... 겨울 씨랑 조금 닮지 않았어요?"
"많이 닮았지."
약간 미묘하게 다른 유두 각도를 제외하고 얼굴과 몸이 정말 비슷했다. 천가을을 새롭게 모델링하여 만들어낸 캐릭터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둘은 닮았다.
"도플갱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야."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요."
"뭐가?"
"가을 언니가 변신한 모습이 꼭 겨울 씨 같지 않아요?"
"......유나가 그런 거라면 그런 거겠지."
농담하거나 비꼬는 것이 아니다. 여신의 말씀은 그대로 따라야 하는 법. 유나의 의심은 충분히 의심스러울 수 있지만, 나는 딱히 신경쓰지 않았다.
"뭐 어때? 본인이 그 모습을 취하기로 한 건데. 60살 할머니가 30대 초반 코스프레도 하는 세상인데, 30대 초반이 여고생인 척 하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
"하지만 사장님. 가슴 차이가...."
"유나야. 나는 가슴 때문에 천가을을 영입한 게 아니야. 그 가슴 속에 담겨진 뜨거운 의지, 그리고 세계 평화를 위한 희망을 봤기 때문에 영입한 거지."
"그런가요...."
띵-동. 초인종이 울렸다. 유나가 사무실의 문을 여니, 마침 화제의 대상이기도 한 겨울이 상자를 한아름 들고 들어왔다.
"오늘 쉬라고 했는데 어쩐 일이에요?"
"살아돌아오신 걸 축하드리려고요. ...유나 씨 있었네요?"
"네. 왜요?"
"그, 사장님만 계신 줄 알고...."
겨울은 멎쩍은 얼굴로 테이블에 케이크와 차를 내려놓았다. 오직 딸기만 가득한 메뉴가 테이블 전체에 펼쳐졌다. 그리고 음료는 딸기라떼와 캬라멜마키아또 뿐.
"후안 사장님 신메뉴죠? 잘 먹을게요, 겨울 양."
나는 딸기라떼를 한 입 마시고 포크를 들었다. 달콤한 딸기크림이 얹져진 조각 케이크가 나를 반기고 있었다. 서울수복작전에서 무사히 생환한 우리를 위한 후안 사장의 축하가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 죄송해요. 유나 양 있는 줄 알았으면 하나 더 주문하는 건데."
"에이, 괜찮아요. 저야...."
호록. 유나는 내가 마신 컵을 들어올려 딸기라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포크를 들어 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와, 와...."
겨울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유나를 쳐다봤고, 유나는 눈을 멀뚱멀둥거리며 포크를 입에 물었다. 나는 잠시 어이가 없었지만 모른척 넘어갔다.
"그래서 겨울 양. 굳이 내일 출근인데 오늘 나와서 하고 싶은 말은 뭐죠?"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요. 서울수복작전에 열심히 하지 않아주셔서 감사해요."
"그게 감사를 받아야 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니에요. 만약 사장님께서 전력을 다하셨으면...분명 더 큰 피해가 일어났을 거예요. 혹시나 히어로들이 한강을 넘어가기라도 했다면...."
지휘관의 큰 활약으로 인해 서울수복작전 참가자들이 한강을 넘어가는 경우, 게임오버 플래그가 족히 열 개는 늘어날 정도로 상황은 악화된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구로의 천가을만 제압하는 정도로 만족했지만, 그걸 모르는 선겨울로서는 그저 고마워 할 뿐이었다.
"...분명 히어로들은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고, 그럼 모두가 큰 피해를 입으셨을 거예요."
"그런데 겨울 양, 이번 일로 아버님이 제일 많은 피해를 입었는데 괜찮아요?"
"네. ...솔직히 당해도 싸니까요. 어디가서 얘기하지 말아주세요."
"물론. 누가 어디서 듣고 있을 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호국청년단의 수가 얼마나 줄었는 지는 아직 모르지만 신서울을 여전히 선의철의 제국이다. 기존에 있던 자들의 수가 40명 조금 안되게 줄었을 지언정, 어차피 서울에서 사로잡은 빌런들이 그 자리를 다시 채울 것이기에 조심해야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사장님. 여기서부터가 본론인데요...."
겨울은 어물쩡거리며 유나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나는 유나의 허리를 잡아당기며, 내게 더욱 붙였다.
"유나가 들으면 안 될 일이라면 듣지 않겠습니다, 겨울 양."
"...저 아직 말도 안 꺼냈는데요?"
"무슨 말을 하려고 왔는지는 들어올 때부터 알았는데요."
"......하아. 알겠어요. 으으...."
겨울은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좌절했다가, 케이크를 한 입 크게 베어물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저희 거래에 따라서, 원하는 소원 하나를 들어드릴게요."
"소원? 그건 지난 번에-"
"막대한 부귀영화를 원하세요? 아니면 나라 전체를 원하세요? 그 어떤 소원이라도 들어드릴게요."
"......."
겨울의 눈에서 조금 광기같은 것이 엿보였다. 유나는 불안감에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고, 나는 허리를 휘감은 손을 유나와 꼭 붙잡으며 겨울에게 물었다.
"세계 평화를 위해 선의철을 암살해달라고 하면, 그것도 들어줄 겁니까?"
"......그것이 당신의 소원이라면."
명백히 선을 넘는 질문임에도 겨울은 담담했다. 마치 초월적인 존재가 제안을 하는 것처럼, 겨울은 우리를 내려다보며 담담히 질문했다.
"...허. 어떻게 소원을 들어준다는 거죠?"
"우주의 기운으로 들어드리겠습니다. 농담하는 건 아녜요. 진심입니다. 어떤 소원이라도, 저는 들어줄 수 있어요."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어떤 소원이라도 들어준다라...그럼 정답은 하나죠. 유나야, 내 대신 말해줄래?"
"백청화는 선겨울과 섹스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예, 소원 접수했...뭐요?"
겨울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그녀의 눈동자에 씌인듯한 불길한 기운이 사라지고, 얼굴에 당황과 초조함이 보이기 시작했다.
"유나야, 못 들은 것 같아. 한 번 더 얘기해줘."
"백청화 님께서는 선겨울 양과 노콘섹스를 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될까요?"
"아, 아니!!!"
선겨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다, 당신! 사장님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요?! 근데 어떻게 다른 여자랑 섹스하는 걸 태연하게 말할 수 있어요?!"
"뭘 새삼스럽게."
콧방귀를 뀌는 유나의 목소리에는 뭔가 해탈이 느껴졌다. 깍지낀 손이 조금 아파오기 시작했다.
"선겨울 양이 무슨 소원이든 들어준다면서요. 사장님, 사장님 소원이 뭐예요?"
"나는 유나가 바라는 걸 이루는 게 소원이야."
"그럼 제가 소원 빌어도 돼요? 알겠어요. 그럼 이렇게 하죠. 이유나와 선겨울이 같은 침대에 알몸으로 누워, 백청화 님과 3P를 하는 거예요."
"이, 이...!"
선겨울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게 익었다. 유나는 여전히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겨울에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사실 겨울 씨도 사장님이랑 하고 싶은 거죠? 다 알아요."
"내,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겨울은 코트를 챙겨 부리나케 사무실을 떠났다. 유나는 태연한 얼굴로 겨울이 앉았던 자리로 옮겨, 나와 마주 앉은 채 포크를 집어들었다.
"내일 다시 온다고 했어요. 아예 생각이 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요."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은 져야지. ...유나 덕분에 살았네."
"그러게요. 워낙에 의미심장하게 말하느라, 진짜로 그런 건 줄 알았잖아요."
"그러니까."
큐브라도 가지고 있는 줄 알았다.
"누가 들으면 램프의 요정이라도 사귀고 있는 줄 알겠어."
"...그런데 사장님, 만약에 진짜로 그런 게 있다면 말이에요."
유나는 게슴츠레 웃으며 내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저도...가을 언니나 겨울 씨처럼 커질 수 있을까요?"
"...안 될 건 없지?"
큐브가 있다면 선꼬삼도 18cm가 될 수 있다. AAA가 G가 되는 것도 불가능 한 건 아닌-
"......에이, 설마."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가정을 지워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