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0화 〉2부 3장 25
<3월 2일 오전 11시, 안양시 교도소.>
첩첩산중.
대량의 괴수 발생에 따른 불안에 또다른 불안을 더한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특히 기존에 살인, 강간, 방화 등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던 범죄자들이 신서울로 들어오게 된다면, 신서울의 사람들은 큰 반감을 가지게 될 것이다.
왜 하필이면 신서울에?
광검이라고 하는 존재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고 한들, 신서울의 사람들이 빌런과 범죄자들에 대해 바라보는 시각은 사회의 쓰레기이며 낙오되어야 할 존재 그 이하였다. 따라서 서울에서 체포한 대량의 빌런 및 범죄자들에 대해서도 좋은 시각은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빌런들이 임시로라도 갈 곳은 기존의 시설, 교도소 뿐이었다.
E급 잡범부터 시작하여 크게는 B급 억 단위 현상금이 걸린 현상수배범까지, 2만 좆바리들의 등장만 아니었으면 서울수복작전이 실패는 아니어도 소기의 성과는 내었다고 평가를 받을만한 전공이었다.
본래라면 협회의 조사를 받고 각 지역의 빌런 전용 교도소에 들어가야 할 그들은 임시로 안양 교도소에 계류중이었다. 얌전히 있어도 모자랄 상황에서, 죄수들은 폭동을 일으키기 직전에 몰려있었다.
"야, 문 열어!"
"내가 선의철 따까리 짓을 다시 할까보냐!"
"이래도 뒤지고 저래도 뒤지는 거, 그냥 탈옥하고 뒤져버리지!!"
낡은 쇠창살을 잡고 흔드는 빌런들은 옛 서울역 노숙자들보다 더한 이들을 긁어모았다 싶을 정도였다. 협회에서 나온 히어로들이 임시로 교도관 역할을 하며 죄수들을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소용은 없었다.
"저, 형님. 저희 이제 어떻게 합니까?"
"몰라. 나도 앞이 캄캄하다."
구로에서 잡혀온 빌런, <등대> 김지화는 한숨이 푹푹 새어나왔다. 마력을 발휘해 천리안의 힘을 발휘하려고 해도, 목에 채워진 빌런전용수감장치에 의해 이능력은 발현되지 않았다.
"형님 힘이면 탈출 루트 같은 거 보이지 않습니까?"
"그럴 수 있었다면 진작에 튀었지."
거짓말이다. 김지화는 이미 탈출 루트를 확보해두었다. 단지 지금 몸을 움직이면 다른 놈들도 함께 움직이느라 난리가 날 게 분명했기에, 김지화는 조용히 홀로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이 상황이면 좀있다가 대량으로 폭동 일어날 거다. 우리는 그 틈을 이용해 움직이면 돼."
"역시 형님이십니다. 크으...그 미친 년들만 아니었어도."
"...동배야, 너 늦게 잡혔다고 했지?"
김지화는 이를 갈며 낮게 속삭였다.
"그럼 천걸레는 어떻게 됐냐? 뒤졌어?"
"그, 그게. ...구로 애들 다 데리고 싸웠는데, 그 미친 년들이 천걸레보다 더 미친 년들이라 개발렸습니다."
"뭐? 천걸레 있었잖아?"
"그 걸레같은 년, 금발양아치 좆맛에 껄떡거리느라 아예 안 싸웠어요. 뭔가 포기한 듯한 얼굴이었고."
"아오, 씁."
무리를 해서라도 그 꼴을 봐야했는데. 김지화는 입술을 깨물며 주변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감옥안에 모인 이들은 대부분 구로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악질로 유명세를 날렸던 존재들 뿐이었다.
"씨발, 이대로 신서울로 가면 선의철 따까리 되겠지?"
"따까리나 되면 다행이죠. 그...어떤 놈들은 심장 적출당하고 광산이나 염전으로 팔려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시대가 어느 때인데 그런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안 그래도 지금 다들 왈왈 짖어대는데 너까지...."
김지화는 숨을 삼켰다. 그리고 재빨리 의식을 잃은 척 눈을 감고 뒤로 쓰러졌다. 부하도 눈치좋게 김지화의 옆에 눈을 감고 쓰러졌다.
잠시 뒤. 점차 죄수들의 소음은 잦아들었고, 하나 둘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방 안의 모든 이들이 기절하자, 벽쪽에서 그림자 하나가 일렁거리며 감옥 안으로 들어왔다.
"......많네. 이게 다 빌런이라니."
남자인지 여자인지 애매한 변조된 목소리의 주인공은 마치 유령이라도 되는 것 마냥 검은 로브를 입고 있었다. 눈을 감고도 눈꺼풀 너머를 볼 수 있는 이능력을 가진 김지화는 감옥에 나타난 괴한에 열심히 잠든 척을 했다.
"흐음, 이거 일일이 그리다가는 개고생하겠는 걸. 좋은 애들만 건져서 호구잡아야겠다."
유령은 팔을 걷어붙이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가느다란 손목은 남자라고 하기에는 얇았고, 장갑을 낀 손길은 정갈하여 여성의 그것 같았다.
"어디보자...얘는 E급이네? 흠, 그래도 얼굴은 반반하니까 패스."
유령 여인은 관악에서 잡힌 D급 빌런 남자의 쇄골에 붓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여인은 방안의 남자들에 하나 둘 O, 또는 X표시를 적어놓았다.
또각, 또각. 여인의 발걸음이 등대와 부하의 앞에서 멈췄다. 여인은 한참동안 등대의 부하를 내려다보다가-
"얘는 C급이야? 대박. ...아, 근데 머리카락이...음...탈락."
부하의 민머리에 큼지막한 X를 표시했다. 그에 부하의 민머리에 X자 옆으로 흐르는 핏줄에 힘이 들어갔다.
"이 쌍것이?!"
부하는 몸을 일으켜 여인의 멱살을 움켜쥐려고 했다. 놀란 여인은 붓펜의 끝을 앞으로 놓고 부하의 이마를 눌렀다.
"으으윽?!"
"펜은 칼보다 강하다. 미안하지만 내 붓을 이기려면 A급은 찍어야 할 걸? 그나저나 잠든 척이라니. 건방지네."
여인이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부하의 목에 걸려있던 목걸이가 강력한 전류를 내뿜으며 부하를 지져버렸다. 김지화는 눈을 감은 채, 부하가 전기에 목이 구워져 쇼크사하는 걸 이능력으로 똑똑히 목도했다.
"그럼 어디보자...얼굴은...어, 와! 네가 구로의 등대구나!!"
여인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김지화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마침 찾고있었는데 잘됐다. 야, 너 지금 깨어있지?"
"......누, 누구요?"
"나? <문신사>."
로브 아래에 가려진 여인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나랑 거래 맺은 분이 너를 찾고 있었거든. 잘됐다. 너는 내가 따로 빼내줄게."
"그, 그말은...?"
"일단 잠들어."
여인은 김지화의 눈꺼풀 위에 붓펜을 그어버렸다. 순식간에 세상이 검은색으로 물들었고, 목걸이가 달아오르는 듯한 열기와 함께 여인의 싸늘한 목소리가 김지화의 폐부를 찔렀다.
"내 거래처 분의 신세진 사람이 너한테 원한을 가져서 말이야."
"끄, 끄어, 으어어...."
"너는 잔대가리 좀 굴리는 놈이라고 했지? 그럼 이렇게 얘기해줄게."
여인은 지화의 귀에 대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탈락입니다. 당신은 호국청년단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크히힛!"
사락. 여인은 지화의 이마부터 턱까지 붓펜을 세로로 그었다. 옆으로 비스듬히 떨어지는 지화의 얼굴에 새겨진 붓글씨는 마치 X표시를 연상케했다.
"등대, 아웃."
잠시 뒤. 목덜미 뒤에 문신사의 문신이 박힌 이들이 하나 둘 감옥으로 들어와 죄수들의 옷을 벗겼다.
"O는 챙기고, X는 버려."
신서울에 남아있던 호국청년단 히어로들은 O 표시가 박힌 이들은 챙겨 감옥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구로의 빌런, <등대> 김지화를 비롯하여 몸 곳곳에 X표시가 박힌 죄수들은 더욱 철저한 구속구가 채워져 감옥에 버려졌다.
"이 놈들은 어디로 가나?"
"무인도."
"거기 뭐가 있는데?"
"쉿. 알아서 좋을 거 없다? 저기 미국가기 싫으면 계속 얘기하면 돼."
서울에서 잡혀온 죄수들.
절반은 어딘가로 잡혀갔고, 절반은 감옥에 남아 사회의 지탄을 받게 될 예정이었다.
* * *
<오전 11시 49분, 신서울 오라클 스튜디오.>
"그리고 여기 현지에서 나를 도와준 협력자이자 전직 빌런, <마스커레이드> 천가을이야."
나는 일행에게 천가을을 소개했다. 유나, 라온, 누리, 그리고 가온은 내 옆에 앉은 작은 체구의 여고생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실체에요?"
"풉. 거유 쭉빵 언니인 줄 알았는데 나랑 비슷한 거 아님? 큭크큭."
"아닌데? 그쪽이 본체고 이쪽이 변신한 거야."
"......세상 억울하다!"
김누리 패배. 유일하게 비벼볼 수 있는 존재가 그나마 라온이었지만, 라온조차도 한 수 접어줘야 할 정도로 천가을은 대단했다.
"대충 알겠어요. 사장님의 대계를 위해서는 빌런도 괜찮은 거죠?"
"유나가 잘 이해해줘서 고맙네. 맞아,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한 때 빌런이었던 존재라고 해도 손을 잡아야 하는 날이 있는 거지."
히로인 한정.
"질문있습니다. 그럼 천가을 양은 계속 그 모습으로 지내는 겁니까?"
"그런 셈이지. 근데 그 모습은 누구로 변신한 거야?"
"......아는 사람 여고생 시절."
천가을은 마스커레이드의 <변신> 이능력을 통해, 여고생 코스프레를 하는 걸로 정체를 숨기기로 결정했다.
"유나야, 근데 왜 그렇게 보는 거야?"
"아뇨. 그...누구랑 조금 닮은 듯...?"
"누군지는 죽어도 말 안 해. 비밀이야."
천가을은 묵비권을 행사했기에, 우리는 천가을이 변신한 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이걸로 천가을 양은 우리 팀원이 되겠지만, 8월까지는 숨죽이고 지내야 할 거야."
"뭐? 그럼 나는 뭐해?"
"뭘 하긴."
짝. 내 손뼉에 유나는 미리 준비한 제복을 들어올렸다.
"알바하면서 돈 벌어야지. 일하지 않는 자, 나를 먹지도 말라."
"......너랑 떡치고 싶으면 일해라는 거야?"
"정당한 노동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좋아, 어디서 일하면 되는데?"
나는 1층을 가리켰다.
"청화 군. 잠깐 가을 양과 이야기를 나눠봤는데 말일세, 약간 나랑 비슷한 세대인...?"
"그, 그럴 리가요!"
천가을, 나이 32세, 무직. 그녀는 신서울의 한 이름없는 카페의 알바생으로 다시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