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655화 (655/1,497)

〈 655화 〉2부 3장 20

<오후 10시 22분, 구로 디지털단지 YEE-마트 1층, 등대지기의 소굴 입구.>

이유나, 박라온, 김누리, 김가온. 넷은 목적지인 등대지기의 소굴에 도착했다. 본래는 SSM이었을 곳은 윗부분이 무너져내려 형체조차 확인할 수 없었고, 입구로 들어가는 길만 을씨년스럽게 남아있었다.

"정말 이곳이 맞는 거죠?"

[예. 등대의 말에 따르면 이곳이 맞습니다.]

백청화가 유성과의 거래를 통해 지원을 받은 동료, 하유은은 트레일러에서 연락을 넣었다. 유성의 두 직원은 트레일러에서 대기하며 베이스캠프를 지키며, 빌런 중 <등대>로부터 얻어낸 정보를 실시간으로 전송했다.

[지하 1층 식료품 매장까지는 폐허입니다. 하지만 지하 4층 지하 주차장부터 본격적으로 그들의 영역이라고 하더군요.]

"아, 나 알 것 같음. 보통 아포칼립스 물 보면 식료품 있는 곳만 다 털고 나간 거 아님?"

"굳이 일부러 지하주차장까지 확인하러 내려가지는 않는 게 상식이긴 합니다. 아래에 무언가가 있다고 확신을 하고 내려가지 않는 이상."

넷은 긴장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등대가 말한 잔악무도한 빌런-<마스커레이드>가 있는 동시에, 백청화로 추정되는 금발 서양남이 잡혀있는 장소도 이 곳이리라.

"사장님 분명 괜찮겠죠?"

"보디가드가 붙어있으니 분명 괜찮을 겁니다."

"...이제와서 생각하는 건데, 오빠 옆에 보디가드 없는 거 아님? 그냥 허세였으면? 보디가드가 실은 저기 베이스캠프에 있는 둘이었으면?"

"불길한 소리는 하지마, 김누리."

마법소녀들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밤이 되어 본격적으로 괴수들이 날뛰기 시작하면서, 마도기어를 통한 연락도 어느순간 뚝 끊겨버리고 말았다. 유나가 계속 연락을 넣었지만, 주변에 팽배한 괴수들의 오염된 마력으로 인해 연락은 잘 닿지 않았다.

"아니, 생각해 보셈. 사장님이 괜찮으면 괜찮다 얘기할 사람아님? 진짜 무슨 일 생긴 거 아님...?"

"그럴 리가...."

누리를 나무라려던 가온이 순간 흠칫거렸다.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녀는 이를 악 물고 몸을 돌렸다.

"모두 안으로 들어가! 그리고 빨리 사장님 찾아!"

"어, 언니!?!"

"A급 괴수 온다!"

"...!!"

김가온, 세이렌이 급히 마력을 퍼뜨려 물의 장막을 펼쳤다. 입구를 중심으로 펼쳐진 물의 결계 위에 가온이 올라가자마자, 맞은편 옥상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도로에 뛰어내렸다.

그르르.

"물고기?!"

"어인입니다! 등급은...A급!"

<구로배스>.

심해에서 사는 괴물이 팔 다리가 달린 채 올라온 것만 같은 이형의 괴물은 몸집이 4m는 훨씬 넘어보였다. 베이스는 해양생물 주제에 구로의 건물 사이에 숨어든 괴수는 콘크리트 조차 씹어먹을 정도였다.

딱딱딱! 뒤틀린 이빨과 강력한 턱에 잡아먹힌 히어로의 수만 무려 10.

대외적으로 C+급이 최고 능력자인 마법소녀 팀이 조우한 이상 몰살이 확정이었으나, 원래는 A급인 김가온이 있다.

"빨리 안으로 들어가! 그리고 사장님 구해! 사장님 지시 없으면 상대하기 힘들어!"

세이렌의 냉철한 외침에 셋은 입술을 깨물며 마트의 안으로 달렸다.

작은 소녀에게 맡기기에는 괴수가 너무나도 거대했지만, 셋은 강릉에서 인면조 사태를 겪으면서 자신들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언니, 다치면 죽는다?!"

"너 나 잘해!"

자매는 마지막으로 서로를 지긋이 쳐다본 뒤 고개를 돌렸다. 괴수의 포효가 울려퍼짐과 동시에, 거대한 물줄기가 사방으로 터졌다.

"꺄아악!"

세 마법소녀는 맨땅에서 솟아나는 물줄기에 1층의 중간까지 밀렸다. 배틀슈트의 겉에 물기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으으으...."

"여기는 가온에게 맡깁시다. 누리, 정신차리시길."

"정신은 차렸는데...언니 괜찮겠지?"

"가온이 괜찮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빨리 사장님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그치."

라온의 격려에 누리는 정신을 다잡고 무기를 꺼냈다.

"내가 앞에 설게."

한손에는 1m가 채 되지 않는 검을, 그리고 다른 손에는 모델건처럼 생긴 권총을 들었다. 둘 다 '流星'이라는 마크가 큼지막하게 박힌, 유성 테크놀러지의 코어웨폰이었다.

"그럼 제가 중간에 설게요."

"제가 후방을 맡도록 하겠습니다."

전위에 누리, 중위에 유나, 후방에 라온. 키대로 선 것 같은 배열이었으나, 그들은 백청화가 가르쳐준대로 진영을 갖췄다.

"팀 SDF, 탐색을 시작합니다."

유나는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스태프를 높이 치켜들었다. 형광등 하나 멀쩡하지 않은 어두운 폐허가 마력의 빛에 어둠이 걷혔다. 백청화라는 지휘자가 없는 이상, 팀의 리더는 언제나 유나였다.

"지하 1층은 아무것도 없는 공간. 지하 2층은 망가진 통로지만, 정해진 길을 따라가면 아래로 내려갈 수 있음. 지하 3층이 소굴의 앞마당 같은 곳이고, 지하 4층부터가...."

"적의 본거지."

구로의 <등대>는 이명과는 달리, 지하에서 사방으로 시야를 뿌리며 구로 전체를 관음했다. 덕분에 유성의 파견 동료 둘은 등대에게서 지하 7층까지의 전체 구조에 대해 정보를 캐낼 수 있었다.

지하 7층.

그곳에 지휘관을 납치한 구로의 빌런, <마스커레이드>가 있다.

"...왜 이 여자가 딸기마크인지는 모르겠지만...!"

셋은 전의를 불태우며 지하 2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들의 방문을 알아채기라도 한듯, 지하 2층에 배회하던 E급 괴수들이 셋을 마지하며 아가리를 벌렸다.

"기다리세요, 사장님! 저희가 구해드릴게요!"

마법소녀들은 저마다 마력을 끌어올리며 지하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 * *

"...라고 말하면서 보내기는 했는데."

<세이렌>, 김가온은 물이 흥건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주저앉았다.

건물 1층을 물로 쓸어서 셋을 안쪽으로 밀어버린 이유는 구로배스가 지하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안의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함'에 있었다. 세이렌은 처참하게 '얼음조각'으로 찢겨진 괴수를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응, 나 혼자서 이거 절대 못 잡지."

세이렌은 처참하게 부숴진 구로배스의 흔적을 보며 오한이 들었다. 세 마법소녀가 들어간지 불과 1분도 지나지 않아, 구로배스는 사망했다.

"지휘관 님 지시 없었으면 큰일날 뻔 했어, 후우."

세이렌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혼자서는 잡지 못하기에, 지휘관 백청화의 지시가 필요했다.

- 셋과 떨어진 다음 1분만 버텨라.

그게 백청화가 전한 지시였다. 구로배스가 등장하기도 전에 구로배스의 출현을 예고한 지휘관은 세이렌에게만 지휘를 내렸다. 다른 셋에게는 비밀로 한 채.

- 셋에게는 비밀로 해라. 나는 안전하다.

마치 백청화와 연락이 끊어진 상황에서 위기가 닥친 것처럼, 지휘관을 빨리 구출해야한다는 동기를 부여하게 만들었다.

- 1분안에 지원이 갈 것이다.

세이렌은 지휘관을 믿었다. 괴수는 자신보다 강했고, 스치면 사망이었다. 하지만 1분은, 1분만큼은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1분간 괴수의 공격을 피하고 또 피한 결과,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왔다.

"괜찮으십니까?"

쩌적, 쩍.

지원군이 도착했다. 너무나도 강한 지원군이 도착했다. 가온이 입은 보급용 배틀 슈트와는 다른, 전장에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정장 차림의 백발 여인이 나타나 A급 괴수를 손짓 한 번에 얼려버렸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S급 히어로, <설화공주> 석하랑입니다."

1분은 커녕 30초만에 하늘을 날아온 S급 히어로, <설화공주> 석하랑은 온화한 미소로 가온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온은 멎쩍은 얼굴로 석하랑이 내미는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흠칫.

둘이 손을 맞잡은 순간, 서로 뭔가를 느꼈다. 눈이 마주친 둘은 서로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기, 당신 혹시...."

"......설화공주 님, 실례인 건 알지만, 그...."

미심쩍어하는 가온이 손바닥을 두어번 부딪히며 물었다.

"...큥큥?"

"...큥큥."

단 두 마디로 둘은 서로에 대해 이해했다. 악수한 손을 더 강하게 맞잡으며, 서로의 흉부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 친하게 지내죠."

"예, 잘 부탁드립니다. 설화공주 님."

말은 더 필요없었다. 만약 멀리서 누군가가 달려오는 기척이 없었더라면, 분명 둘은 포옹까지하며 전우애를 다졌을 것이다. 석하랑은 혀를 차며 수면 위를 툭툭 구둣발로 건드렸다.

"칫, 벌써 왔나...."

"협회의 히어로?"

"히어로는 히어로인데, 보좌를 빙자한 감시입니다. 그, 호국 청년단에서 협회에 파견나온 사람이에요. 그 녀석 지시대로 동작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동작에 있기로 한 제가 갑자기 구로로 오니까 쫓아온 겁니다. ...그럼 잠시."

석하랑은 수 백의 얼음조각으로 쪼개진 괴수의 몸에서 작은 조각을 하나 꺼냈다. 주먹보다는 큰 정육면체의 얼음조각에 석하랑은 자신의 마력을 불어넣었다.

"여기있습니다. 이거 걔가 챙기라고 했으니까, 잘 보관하고 계시길."

통. 석하랑은 수면을 가볍게 차고 하늘로 높이 뛰어올랐다. 가온은 등에 펼쳐진 얼음의 날개를 멍하니 올려다보며, 구로배스의 A급 코어를 꽉 움켜쥐었다.

"나도 저 정도로 강해진다면...."

뭔가 방법이 없을까. 가온은 베이스캠프로 급히 달려가며, 어떻게 하면 강해질 수 있을 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 괴수의 코어를 챙겨서 즉시 하유은에게 줘라. 그리고 차에 시동을 걸고 목적지에 가서 대기하고 있어라.

백청화가 내린 마지막 명령.

- 서울수복작전은 무조건 실패하니, 퇴각할 것이다.

빤스런.

- S급 괴수가 움직일 예정이라서...푸흐흐.

순간.

가온은 북쪽에서 불어오는 시린 바람에 오한이 들었다.

* * *

"하아, 하아."

마법소녀들은 지친 호흡을 갈무리하며 지하 7층으로 내려가는 입구에 도착했다.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치직...출...히어...대비....]

워낙 지하로 깊숙히 내려왔기 때문일까. 마도기어는 먹통이 되어버렸다. 바깥과의 연락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고, 간간히 전해지는 노이즈 낀 음성에 기대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전...히어...당장...서울을...벗어....]

"퇴각하라는 신호일 겁니다. 서울 수복 작전은 늘 이랬습니다."

라온은 쓰게 웃으며 창을 움켜쥐었다.

"히어로들이 현장에서 싸우고 있는 것과 별개로, 지휘하는 자들은 항상 현장의 상황도 보지 않고 무턱대고 지시를 내립니다. 지금도 분명 아무것도 모르면서 퇴각하라고 하는 걸 겁니다."

"안 될 말이지. 오빠 구해야지."

"...당연하죠. 저희는 지시를 받았잖아요."

마지막 지휘. 자신이 연락이 끊기게 된다면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가는 것이니 구하러 와달라. 셋은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한 가지 확신도 가지고 있었다.

"아직 안 죽었을 거예요."

"고작 이 정도로 죽을 사람이 아닙니다."

"여기 오기 전에 한 약속 지키고는 죽어야 하지 않겠음?"

셋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수복작전이 있기 한참 전부터 몇 번을 벼르고 벼렸던 그 일. 이미 사이가 돈독해진 팀원들이 더욱 우애를 다지고 화목을 다질 수 있는 계기.

- 이 싸움이 끝나면, 4P할 거야.

남아일언중천금. 백청화 스스로 말했던 것인 만큼, 셋은 여기서 아무 성과도 없이 후퇴할 수 없었다. 바로 지하에 적들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도망칠 사람들이 아니었다.

빌런에게 붙잡힌 시민이 있는데, 그걸 구하지 않고 제 목숨 살겠다고 도망치는 이가 아니다. 셋은 비록 등급은 낮지만, 모두가 '히어로'였다.

끼이익.

셋은 계단을 조심히 내려가 문을 열었다. 이전 층과 달리 전기가 들어오는 지하 7층은 전등이 불길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어서와, 서울은 처음이지?"

어둠속에서 가면 하나가 떠올랐다. 가운데를 기점으로 흰색과 검은색이 반씩 칠해진 가면은 세 마법소녀를 향해 환영하는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여긴 무슨 일이야?"

"우리 사장님 구하러 왔어요. 여기 있는 거 다 알아요."

"흐흥, 사장님? 그런 사람 모르겠는데."

탕! 총성이 울렸다. 누리가 겨눈 마도권총의 총구에서 김이 새어나왔다.

"흐음, 인사가 거친데?"

"시끄럽고, 빨리 우리 사장님 내놓으셈."

"어머나, 맡겨놨니? 서울에서 물건 잃어버리면 주운 사람이 임자란다. 여긴 대한민국이 아니라 버림받은 헬조선의 수도라서, 힘이 곧 법이거든."

짝. 손뼉소리와 함께 지하 주차장 전체가 환하게 빛났다. 주차장 곳곳에 자리잡은 빌런들은 저마다 쇠꼬챙이와 날붙이를 든 채,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사납게 웃고 있었다.

"혹시 너희가 찾는 사장님이란 게, 이 자지니?"

"저, 저?!"

가면의 빌런, <마스커레이드>는 시멘트 옥좌 아래에 깔고 앉은 금발의 남자 위에서 다리를 꼬았다. 얼핏 스친 허벅지 안쪽에는 익숙한 자지가 하얀 거품과 함께 껄떡거리고 있었다.

"어쩌니? 이미 내가 먹어버렸는데."

"사, 사장님한테서 떨어져!!"

"얘기했잖니, 서울에서는 힘이 곧 법이라고. 꼬우면...힘으로 뺏어야겠지?"

딱.

마스커레이드가 손가락을 튕기자, 빌런들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지하와 잘 어울리는 '야시경'이었다.

"우리 주특기가 어둠 속에서 싸우는 거라서 말이야. 어디 한 번 내 부하들이랑 잘 놀아봐. 부하들한테 만져져도 나는 모르는...흐끅, 하아."

마스커레이드는 말을 다 하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파직.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지하 주차장의 불빛이 모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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