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6화 〉2부 3장 11
<그 시각, 신서울 정부청사.>
"후우...."
선의철은 허브티의 향기를 맡으며 소파에 몸을 눕혔다. 매년 이맘때 즈음이면 항상 그렇지만, 흥분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서류판을 하나 집어들었다.
"설화공주가 무슨 의도로 참가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설화공주> 석하랑, 참전.
비록 컨디션 관리를 위해 정부 행사에는 모두 불참하겠다고 일방적 통보를 보내 행사는 모두 캔슬되었지만, 아무렴 한국에서 단 둘 뿐인 S급이 출정 전에 컨디션 관리를 하겠다는데 참가를 강요할 수는 없었다.
"크으...아쉬워. 조카 놈만 정상적이었으면 바로 결혼시켜 버리는데."
"꿈도 크십니다."
문신사가 조롱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설화공주가 뭘 보고 하반신 불구와 결혼하고자 하겠습니까?"
"진정한 사랑만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헛소리하지 마십시오. 따님이 어쩌다 태어났는지 제가 다 알고 있는데 그런 소리 하셔도 되는 겁니까?"
"쯧, 자네는 나에 대해 너무 잘 알아. 젊은 날의 혈기 정도로 생각해주면 안되나?"
"조금 역겹습니다만...."
문신사는 대놓고 선의철을 경멸했다. 선의철도 최소한 이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문신사의 조롱을 순수히 감내했다. 물론 속으로 조금 담아두는 건 잊지 않았지만.
"그래서 나의 사랑의 결정체, 겨울이는 어떻게 되었지?"
"자-알 설득했습니다. 아가씨께서는 신서울에 남을 겁니다. 애초에 사무원으로 취직했던 분이지, 서울같은 위험한 곳에 갈 이유가 없죠."
"후후, 그래. 만약 서울에 가겠다고 강짜를 부렸으면 내가 작전 자체를 뒤로 미뤄버렸을 것이야. 흐흐흐."
문신사는 침묵했다. 괜히 입을 놀릴 필요는 전혀 없었다.
"지금 겨울이는 어디에 있지?"
"집에 있습니다. 호국청년단이 감시중이니 염려 놓으셔도 됩니다."
"그래. 겨울이는 너무 위기감이 없어. 애초에...."
딸에 대한 선의철의 하소연이 시작됨과 동시에 문신사는 슬쩍 겨울이 마지막으로 남긴 문자를 확인했다.
- 서울수복작전을 막기 위해, 지휘관과 담판을 짓고 올게요.
"...아무리 직장이라고 한들 어딜 금발양아치 놈과 같은 공간에서...."
선겨울은 집에 있다.
그 금발양아치의 집에.
***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문을 열자마자 나타난 이는 내 예상을 깬 선겨울이었다. 밤색 코트를 입은 그녀는 볼이 살짝 상기된 채 나를 올려다봤다.
“사장님.”
“네.”
“저 잠깐 안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안 될 건 없죠.”
겨울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좁은 신서울의 원룸 건물이라 현관에 겨울이 들어오자마자 내 몸과 닿을 정도였다. 나는 그녀를 방 안으로 들였다.
“왠일이세요?”
“꼭 용건이 있어야만 와야하는 건가요?”
“네. 내일이 내일인만큼.”
“......그것 때문에 왔어요. 그런데….”
겨울은 방 안의 상태를 확인하고 애매하게 웃었다. 방은 침대하나와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람이 한 명 간신히 오다닐 수 있는 폭이었다.
“일단 앉죠.”
나는 겨울에게 의자를 권했다. 겨울은 방석깔린 의자에 다소곳이 앉았고, 나는 헝클어진 매트리스 위에 대충 걸터앉았다.
“그래서 이 야심한 시각에 20대 건장한 남자 집에 들어온 이유는?”
“...서울수복작전에 참가하는 걸 포기해주셨으면 해서요.”
“네, 기각.”
들을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본론부터 말해서 결론부터 냈다.
“네?”
“기각이라고요. 반려. 거절. 포기 안 함. 서울수복작전은 무조건 갑니다.”
내가 겨울의 말을 단호히 끊어낼 지 예상하지 못한 듯, 겨울의 눈동자는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불안감을 내비치는 모습에서 뭔가 낌새가 느껴졌다.
“왜, 왜 그렇게까지 강행을 하는 거죠?”
“그럼 겨울 양이야말로 왜 갑자기 서울수복작전에 가는 걸 포기하라고 하시는 거죠? 당장 내일 출발인데. 12시간 뒤면 서울에 있을텐데.”
“그야...엄청 위험하잖아요.”
겨울은 뭔가 숨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제대로 나와 시선을 마주하지 못했다.
“위험하기야 엄청 위험하죠. 근데 그거 아세요? 겨울 양이 여기 오는 바람에 제가 당장 위험해졌다는 거.”
“네?”
“서울수복작전을 앞에두고 선의철 딸이 20대 외국인 남자 집에 그냥 들어온다? 갑자기 문을 누가 박살내고 들어오는 건 아니겠죠? 후후.”
선겨울은 평범한 여자가 아니다.
"뒤에 보디가드를 붙인 것도 아닌 겨울 양이 이 시각에 여기에 혼자서 온다? 흐음, 그것 참 이상하네요."
누리나 가온 조차도 이 방에 내려오는 걸 상당히 조심해서 내려오는데 아무렴 선겨울이 그냥 무턱대고 찾아온다? 선의철이 바로 히트맨을 보내 내 머리를 날려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다.
"그렇다고 겨울 양이 보디가드들 눈을 피해서 온 것 같지는 않은데...만약 그렇다면 더더욱 의심스럽고."
"......."
“뭔가 상당히 의심스러운데요.”
“그러는 사장님이야말로 더 의심스러운 분이잖아요. 그 때 지하에서 있었던 일도 그렇고.”
겨울은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유성 매장의 일을 거론하니 조금 미안하면서도 불쾌했다. 감히 나를 의심하다니.
“제가 의심스럽다고 해서 겨울 양이 결백해지는 건 아닙니다? 서로 꿍꿍이를 가지고 있다는 거죠.”
"저는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니라…."
"제가 사람 한 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타인의 속내를 읽는 이능력은 없지만, 제가 사람 보는 눈은 제법 좋아서요."
내가 지휘관임을 숨기고 있듯이, 겨울도 뭔가를 숨기고 있다.
"뭔가 알고 있죠? 서울에 가지 말라고 하는 이유는...다른 것보다 '우리'가 위험해질까봐 걱정하는 것 같은데."
"......."
선겨울이라는 존재가 단순히 선의철의 딸인 동시에 주인공의 사망 플래그로서 역할을 하는 여자는 아닐 것이다.
“서로 솔직해집시다. 겨울 양은 혹시….”
“......딸로서 아버지의 치부를 알게 된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요.”
겨울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겨울이 선의철의 여러 가지 문제를 알고 있다는 것 만으로도 겨울에게는 큰 정신적 충격이 될 법 했다.
"서울에는-"
"지하에 서울탈출을 실패한 난민이 있고, 그들은 선의철에 의해 버려진 사람들이고, 괴수 시체 뜯어먹고 살고 있고, 그중에는 일부 괴인이 된 사람도 있고, 하지만 상황이 너무 열악해서 같이 살아가고 있고, 선의철은 그 치부를 숨기기 위해 지하 전체를 무너뜨리려고 한다?"
장황한 설명이 이어질 것 같아 단번에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모두 오픈했다. 겨울의 눈이 바로 경악과 의문으로 물들었다.
"어떻게...?"
"저니까요."
이 게임에서 주인공의 비상한 능력은 단 한 마디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지휘관(주인공)이니까.
"...네, 맞아요. 서울의 지하에는 거대한 왕국이 펼쳐져있죠. 그곳에는 수많은 이들이 살고 있고요. ...존재가 알려지면 안 될 이들이 그곳에 있어요."
"겨울 양은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대통령 딸이라는 위치에 있으면 알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알게 되는 것들이 조금 있어요. 단지...그뿐이에요."
"흐음."
뭔가 더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지만, 굳이 캐물었다가는 다 된 밥에 재뿌리는 격이라 참기로 했다.
"...그래서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서울 수복 작전을 막고 싶어요. 아버지가 서울을 되찾으면 그 뒤에 무슨 짓을 하려는 지 알고 있으니까.”
“평양까지 진격하려고 하겠죠. 서울을 발판으로, 전진기지 삼아. 이 기세를 몰아 옛 북한 땅까지 정벌하겠다고.”
선꼬삼 탈출에 대한 강력한 의지는 국회의사당 방문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하나의 큐브로 평균 사이즈를 갖추게 된다면, 두 개의 큐브로 자신을 거물로 만들 것이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으니까.
'대외적으로는 큐브가 아니라 그냥 땅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강하지만.'
“......역시. 모든 걸 알고 계시군요, <지휘관>.”
역시 겨울은 내가 지휘관인 걸 알고 있었다. 모르는 게 이상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죠? 대통령 딸이라서?”
“처음에는 몰랐어요. 그냥 포르노 배우 모집한다면서 온갖 변명거리를 일삼는구나 싶었죠. 그래서 한 달 일하고 그만두려고 했고. 그런데 유성에서의 일이 있고나서부터...많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죠.”
라스푸틴의 시녀들로 인한 습격 사건 때문에 겨울은 내 정체를 의심하게 된 듯 했다.
“그래서 결정적으로 확신하게 된 계기는?”
“유나랑 다른 팀원들이 사장님 대하는 태도요. 아무리 외국인이 상대라고 해도 한국 여자 넷이, 그것도 이능력자들이 단번에 한 남자를 두고 공유하듯 사이좋게 지내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요. 안 그래요?”
“......그런가?”
설마 하렘을 찔러올 줄이야. 보수적인 헬조선의 성문화와 지휘관과의 문화적 배치가 겨울이 내 정체를 의심케 하는 단초를 제공할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지휘관인 제게 참전을 그만둬달라고 하는 이유는?”
“...만약에 당신께서 참전하게 된다면 진짜로 서울을 공략할 것 같으니까요.”
“뭘 믿고?”
“당신의 뒤에 있는 그 정체불명의 S급 암살자. 강원도에서의 일을 두고 시치미 뗄 생각은 하지마요. 저도 보는 눈이 있고 듣는 귀가 있으니까.”
겨울의 정보력은 생각보다 높았다. 예상되는 경우의 수가 두 세 가지 있지만, 일단 지금 당장은 상황을 넘기는 게 중요했다.
“음...큰일인데요. 최소한의 자문은 하려고 했는데.”
“제가 뭐든지 해드릴게요. 정체를 밝히지 말아주세요. 아니, 지휘관인 걸 그냥 조용히 묻어주세요.”
“...거기까지 해야합니까?”
“아버지가 당신이 지휘관인 걸 알면, 그리고 지휘관이 한국에 정착하려는 걸 알면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당신의 힘을 이용하려고 들 거예요. 그러니까 제발 부탁드려요.”
겨울은 다소 절박해보였다. 자신의 선의철의 실체를 알고 있다는 것까지 밝히면서 나의 활약을 억제시키려고 했다.
"서울수복작전은 어차피 실패할 작전이에요. 항상 그랬듯이. 당신만 도와주지 않는다면, 무조건 실패할 거예요."
"하지만 작전에 참가하는 히어로들은? 분명 다치게 될텐데요?"
"...이 나라 히어로들은 말이에요, 이 맘 때쯤이면 다들 알아서 전력을 갈무리해요. 그냥 적당히 도시에 어슬렁거리는 괴수들 토벌하고 내려오는 거죠. 그게 벌써 몇 년이나 반복되었거든요."
"하는 시늉만 하다가 적당히 빠진다라. 흐음, 잘 알죠. 네."
모두가 활약하기를 꺼려한다. 만약 진짜로 서울이 수복된다고 한들, 이미 파괴될대로 파괴된 서울을 재건하기에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지금처럼 정기적인 코어 공급을 위한 사냥터로 활용하자. 그게 현재 신서울에서 인식하고 있는 서울의 실태였다.
‘애초에 활약할 생각도 없었지만.’
천가을의 가슴을 닮아서 그런지 몰라도, 분명 어디선가 첩보를 얻고 그걸 정리하는 과정에서 혼자 오해하여 자승자박하는 게 틀림없다.
'협회장이 정부측에 얘기 안 했네.'
내가 우리 팀원들만 이끌고 다른 곳은 그 어떤 지원도 하지 않겠다는 건 우리 팀원 이외에 단 한 명-설지영밖에 모르는 일이다.
“정말 제가 나서지 않으면 뭐든지 할 겁니까?”
“네. 서울은...지금 이 상태를 유지하는 게 훨씬 나아요.”
“그래요? 그러면 무릎꿇고 파이즈리 해봐요.”
"네, 무릎이라도 꿇.... 예?"
내 말에 겨울의 표정이 제대로 굳었다. 나는 침대에 엉덩이를 걸치듯 앉아 다리를 좌우로 벌렸다.
“뭐든지 한다고 했잖아요?”
“그, 그건…!”
“말도 안 되죠? 맞아요. 당신이 하는 말이 지금 이거랑 같은 말이에요.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 말씀.”
"......."
대의와 명분은 내게 있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 문제가 없다. 빨리 겨울을 보내고 하던 걸 마저 하고 싶은 생각에, 나는 다소 무리수를 던졌다.
"전라가 되어서, 팬티만 입고 어디 한 번 가슴으로 봉사해봐요. 히어로가 괴수들 물리치러 가는데 적당히 죽이고 빠져달라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하, 하면 되는 거죠?!"
"......네?"
스륵.
겨울은 코트를 벗으며 의자에 걸쳐 내 앞에 다소곳이 무릎을 꿇었다.
"저, 정말 이거면 활약하지 않는 거죠?"
"......."
수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올 줄이야. 혼자서 멋대로 오해하고 멋대로 상상하고 멋대로 폭주하고 있지만....
'개꿀.'
나는 바로 바지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