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5화 〉2부 3장 10
석하랑의 완전 영입에는 실패했지만 마력공급은 성공했다.
석하랑도 석하랑 나름의 스케쥴이 있고 나도 마지막 준비를 마쳐야 했기에 우리는 이별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헤어지리고 했다.
"이, 이번 일 끝나면 부산으로 내려온나. 내가 한 번 풀코스로 대접해줄게."
"마법소녀 코스튬 입어주면 간다."
"이 씨부럴 새-끼가."
"와, 하랑이 화났다-"
끝까지 석하랑에게 마법소녀 설야의 루살카를 주입한 나는 호텔을 빠져나왔다. 이미 나를 기다리고 있던 자율주행차에 잽싸게 뛰어올라 사무실로 돌아왔다.
"다들 쉬라고 했더니 나왔네?"
"아, 사장님."
사무실에는 유나를 비롯한 팀원들 모두가 모여있었다. 그들은 사무실 한 켠에 놓인 못 보던 마네킹을 보며 난감해하고 있었다.
"이건 뭐야? 제복이네?"
"이번 서울수복작전에 참가하는 이들을 위해 지급된 제복입니다. 복장을 통일하려는 겁니다."
라온은 담담히 말했지만 복장에 대해 상당히 꺼려하고 있었다. 확실히 꺼려할만한 복장이기는 했다.
"우리가 코스프레 대회나가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야?"
복장은 하나같이 야했다. 몸에 착 달라붙는 라택스 재질의 바디슈트는 여성진의 몸매를 대놓고 관람하겠다는 누군가의 음란한 욕구가 담겨있었다.
"누가 이거 보냈어?"
"정부에서요."
"대통령 특별 지시사항이라는데? 선의철 대통령이 이거 안 입으면 참가 못한다고 발표 때렸음."
"......."
역시 선의철. 큐브를 얻고자 하는 이유조차 성적인 욕망에서 비롯된 자 답게, 그는 서울수복작전에 참가하는 히어로들에게 모두 딱 달라붙는 옷을 입혔다.
'이래서 사고가 터지지.'
서울에 자리잡은 빌런과 괴인들이 이걸 보고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오랫동안 매번 하던 사람과 하던 이들이-오죽하면 남자들끼리도 하던 이들이 몸매를 쫙 드러내는 여성 히어로들을 발견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석하랑도 이걸 입을까?"
"아닐...걸요? A급 이상은 자기 코스튬 인정해주잖아요."
"...A급 이상은 개인 코스튬 인정해주면서 B급 이하는 복장 통일을 시킨다고? 좀 그런데."
말이 나온다. 안 나올 리가 없다. 서울수복작전이 왜 자꾸 실패하는지 새삼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음...사장님, 그러면 저는 제 코스튬 입고 가도 되는 건가요?"
"가온아, 너 공식적으로는 C급으로 등록되어있다?"
"......."
김가온, 격침. 타이즈를 피하고 무난한 군용 슈트 타입의 코스튬을 유지하려던 김가온도 결국 슈트를 입게 되었다.
"그럼 다들 이거 한 번 씩 입어봐. 안 입을 수는 없으니까."
"저는요?"
"선겨울 양은...."
선겨울에게도 옷이 오기는 왔다. 하지만 누가봐도 다른 이들처럼 야시시한 스타일의 복장은 아니었다. 오히려 노출도를 최대한 줄인 수녀복 타입이었다.
"...그냥 편하신대로 하시면 될 것 같네요."
"그래도 될까요?"
"출발하기 전에 분명 누군가가 보고할 거니까, 괜히 책잡히고 싶지는 않아서요. 그럼 다들 갈아입어봐요. 나는 잠깐 또 나갔다 올테니까."
괜히 게임오버 당할 껀덕지를 주고 싶지는 않다. 나는 텀블러를 집어들고 사무실을 나왔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끝."
모든 준비는 끝났다. 그동안 시간만 적당히 보내면 된다. 나는 팀원들이 환복하는 동안 1층에 내려와 딸기 몽블랑을 주문했다.
"음? 자네 이전에도 엄청나게 주문하지 않았나? 벌써 다 먹었어?"
"그거 아는 지인 선물해줬어요."
"지인? 여자지?"
"......어떻게 아셨어요?"
"자네가 여자 말고 다른 이에게 선물할 것 같지는 않으니까."
정곡을 찔렸다. 하지만 평범한 여자가 아니다. 나는 후안이 미리 만들어놓은 몽블랑의 크림을 스푼으로 떠냈다.
"그리 좋은 사이는 아니에요. 지금은."
"화해의 선물이라는 건가?"
"그렇다기보다는...좋게 봐달라는 뇌물?"
지휘관은 그녀에게 있어서 손바닥 위에 놓고 가지고 노는 인형같은 존재다. 그건 다른 루트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정보지만, 피닉스 루트에서만큼은 확인 가능한 극비 사항이다.
'심장의 창염.'
지휘관의 심장에는 P가 심어놓은 푸른 불꽃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P는 지휘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미국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다.
"언제든지 저를 암살할 수 있는 존재한테 제발 좀 더 살게 해달라고 아양을 떠는 셈이죠."
즉, 지휘관은 게임 시작 전부터 언제든지 피닉스에게 살해당할 수 있는 상태로 움직이게 된다.
- 푸흐흐. 지금까지 발버둥 수고했어요. 파-앙!
그게 피닉스가 지휘관이 미국에서 한국으로 가는 걸 알면서도 가만히 내버려둔 궁극적인 이유였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심장을 불태워버릴 수 있으니까.
"......나중에 윗층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건 아니겠지? 사인은 복상사고 말이야."
"에이, 설마요. 제가 그 정도로 약한 사람은 아니에요. 저는 제 약점을 잘 알고 있는 걸요."
혹시나 오게 된다면 목숨을 걸고 역으로 공략하리라. 하지만 P도 디데이가 오기 전까지는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둘 것이다.
"여자를 그렇게 좋아한다는 약점?"
"여자가 저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지게 만들어서 정조의 위협을 받게 되는 이 몸이 약점이죠. 마치 사장님 젊은 시절처럼?"
"...미친 놈."
후안은 인상을 찌푸리며 허리를 숙였다. 그는 구석에 집어넣어둔 와인잔을 내게 건넸다. 그리고 찬장에 숨겨둔 와인병을 꺼내들어 코르크 마개를 열었다.
"자네,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걸 천만다행으로 여기시게. 그랬으면 내가 나이고 뭐고 후려버렸어."
"아쉽네요. 사장님이 여성분이었으면 바로...푸흐흐."
서로 남자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나와 후안은 글라스를 부딪혔다.
"그래서 어젯밤에는 누구랑 또 데이트를 하느라 밤늦게까지 지새우셨는가?"
"석하랑이요."
푸우웁.
케이크가 와인으로 더렵혀졌다.
몹시...유감이었다.
* * *
<그 시각, 서울 지하도.>
저벅, 저벅.
여인은 손전등에 의지한 채 캄캄한 굴속을 걸었다. 아래에는 선로가 깔려있는 낡은 콘크리트의 벽이 깔린 굴은 과거 하루에도 수 만명이 오다니던 지하철 노선이었다.
크르르.
하지만 이제는 걸핏하면 괴수가 출몰하는 곳이 되었다. 여인은 손전등에 비친 괴수 무리에 한숨을 내쉬며 손뼉을 쳤다.
"입구까지 괴수가 나오는 동안 뭘 한 거예요?"
"크흐흐, 죄송!"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있던 남자가 손을 아래로 뻗었다. 그러자 바닥에서 콘크리트의 가시창이 튀어나와 괴수들을 일격에 죽여버렸다.
"이야, 공주님. 오랜만입니다."
"공주 아녜요."
"신서울의 공주님 맞잖아요? 아니면 서울 지하의 여왕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21세기 민주주의 시대에 여왕은 무슨. 길이나 열어요, 땅개."
"...<그라운드 독>!"
땅개는 투덜거리며 벽에 손을 짚었다. 콘크리트 벽이 좌우로 허물어지자 아래로 향하는 통로가 나타났다.
구구구.
여인이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문이 닫혔다. 손전등에 의지하여 계단을 따라 쭉 내려갈 때마다 천장의 전등이 켜지기 시작했다.
"......하아."
지하 특유의 냄새가 여인을 반겼다. 토굴을 내려온 여인은 지하에 펼쳐진 거대 공동에 괜히 씁쓸했다.
"오셨습니까."
낡은 중절모를 쓴 거한이 여인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상의는 없고 구두조차 없었지만, 아래 정장 바지 만큼은 고수하고 있는 그는 '괴인'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예. 사람들한테 주의는 다 줬죠?"
"물론입니다. 라디오로 다들 소식 들었습니다. ...삽질 작전에 이번에는 부산의 공주님이 출전한다고."
"맞아요. 블러핑이 아니더라고요. 후우...진짜 그 년은 왜 갑자기 참전한다고 나선 건지."
여인은 예상치 못한 변수에 짜증을 부렸다. 원래라면 그냥 내버려둬도 큰 문제가 없었지만, 괜히 누구 하나라도 꼬투리가 잡히면 지하 전체가 들킬 염려가 있었다.
"문은 다 막아뒀죠?"
"예. ...하지만 그런다고 어디 들을 새끼들입니까? 분명 누구 하나는 참지 못하고 튀어나갈 겁니다."
"그렇긴 하죠."
애초에 누구의 말을 듣는 이들이 모인 곳이 아니다. 여인이 도착한 장소-여의도도 곳곳으로 통하는 길이 이어져 있을 뿐, 기본적으로 서울의 지하는 일종의 거대한 부족연합일 뿐이었다.
"그래도 다들 연락은 한 번씩 넣어주세요. 괜히 깝치다가 히어로들한테 잡히지 않도록. 잡히면 어떻게 되는 지 알잖아요?"
"당연히 알지요. 문신 새겨지면 꼼짝도 못하고 선의철 노예가 되지 않습니까."
"예. 괜히 잡혀서 여기 상황이 알려지는 일이 없게 부탁드려요."
"노력은 하겠습니다. 적어도 이 여의도가 걸리지는 않게끔."
각 행정구역을 중심으로 뭉친 빌런과 괴인 무리의 집합체. 여인, 선겨울은 여의도를 본거지로 삼은 '빌런'이다.
"...그런데 아저씨. 왜 여기를 위 처럼 꾸며뒀어요?"
"하하, 아가씨께서 제 취향대로 꾸미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괴인은 천장을 가리키며 싱긋 웃었다. 천장에는 감히 여의도를 건드리러 온 빌런들이 '어떤 것'에 의해 천장에 매장되어 있었다.
뚝.
끈적한 점액같은 것이 선겨울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괴인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 미안합니다?"
"됐어요. 우리 아빠가 아저씨한테 한 짓 생각하면 이건 약과죠."
선겨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서울수복작전은 조심한다 치고, 한강 넘어가는 건은 어떻게 됐죠? 특히...종로."
"그건 무리입니다. 저희 전력으로는 놈을 이길 수 없습니다. 저도 생리적으로 무리인지라."
"예. 강남에 있는 그 자가 괜히 깝치다가 뱀한테 잡아먹히지 않게 부탁드려요. 후우. ...아빠는 왜 삼일절에 서울수복작전 같은 걸 계획해가지고."
"핏줄이라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가씨도 일부러 삼일절에 시청 탈환 계획을 짜셨잖아요? 하하하."
"...시끄러워요. 애초에 전-"
구구구.
지하에 거대한 진동이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선겨울은 굳은 표정으로 북쪽에 난 토굴로 눈을 돌렸다.
"뱀이 또 새끼를 낳은 것 같은데요."
"새끼들은 얼마든지 잡을 수 있습니다. 아가씨, 그보다 이번에 마석을 블랙마켓에 팔고나면 그것 좀 사주실 수 있습니까?"
"광검 굿즈요? 아저씨, 전생에 광검 팬이었어요?"
"하하하. 뭐...."
괴인은, 두꺼비같은 얼굴로 샐쭉 웃었다.
"노후자금이나 좀 벌게 해주는 거죠. 흐흐흐."
캬아아악!!
토굴 너머, 벽에서 수 백마리의 뱀들이 뛰쳐나왔다. 하나같이 몸길이만 3m가 넘는, 최소 C급 괴수들이었다.
"또 어떤 멍청이들이 종로에 가서 먹힌 건지...쯧."
"모르죠. 강북 지하에는 진짜로 이북에서 넘어온 이들이 뱀의 노예로 살고 있다거나. 푸하하!"
"아저씨 진짜 색깔은 확실하네요."
"예, 선명하지 않습니까?"
괴인은 붉고 선명한 혀를 할짝거리며 뱀들을 향해 뛰어올랐다.
"......아저씨, 죽이지는 말고 제압 가능해요? 혹시나 모르니까 저것들로 실험 좀 하게."
"응? 오호. 혹시...?"
"네."
겨울은 자신의 가슴골에 손을 집어넣고 무언가를 꺼냈다. 그녀의 손에는 기하학적 무늬의 큐브가 들려있었다.
"이걸로 병력 좀 늘리게요."
* * *
"전력을 늘릴 필요는 없겠네요."
나는 가온누리에 돌아와 최종 점검을 마쳤다.
"김가온이 있으니까 유사시 대처도 가능하고."
A급 히어로가 있는 이상 어지간하면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유사시에는 내가 마탄을 날리면 된다.
"적정 공략 평균 전투력 30. D+."
쉽다 못해 떡을 치고도 남을 전력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마력공급을 했기에 그 누구도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
- 하지만 인면조가 출동하면 어떨까?
- 인!
- 면!
- 조!
"DLC? 들어올 테면 얼마든지 들어오라지."
- 석하랑 믿고 그러기엔 위험하지 않나?ㅋ
- 구로 상황에 개입하지 못할텐데~
- 김펜릴은 미국 가있어!
SS급 조력자들은 어디까지나 조력자일 뿐이다. 우리는 무조건 '구로에 고립'되게 되어있다.
"하지만 걔들 없어도 충분히 이길 수 있어요. 통곡의 벽은 누리나 느끼게 될 거고."
- 앗
- 앗
- 가온이도ㅋㅋㅋ
1챕터 최종보스, <마스커레이드>.
질래야 질 수 없다. 나는 이미 우리 팀원들에게 한 가지 '장치'를 해뒀다.
"누가 가짜로 바뀌든 금방 알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 방법은?
"안 알려줌. 방송 꺼놓고 미리 작업해둘 거 임."
- 분명 또라이 같은 방법이 틀림없을 듯
- 지휘관...개씹변태
- 천가을 오열 예정
"아니 뭐, 다들 마스커레이드 정도는 눈감고도 공략하잖아요?"
1회차에서나 당하는 게 마스커레이드의 전술이다. 2회차부터는 눈감고 지시를 해도 이길 수 있다.
"그러니까 지금은-"
띵동.
초인종이 울렸다. 시스템창을 내린 나는 누가 왔는지 확인했다.
"어라?"
이 시간에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