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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644화 (644/1,497)

〈 644화 〉2부 3장 09

<그 시각, 신서울 히어로 협회 특실.>

술 냄새가 진동을 한다. 바닥에는 녹색 소주병이 나뒹굴고 있고, 방 한 가운데에 금발의 소녀가 소주병을 양손에 쥔채 멍하니 누워있었다.

“이제는 세 궤짝을 들이부어도 소용이 없는 건가.”

소녀는 차가운 소주병을 머리에 붙이며 중얼거렸다. 숙취 따위는 없다. 하지만 술기운 때문인지 머릿속에 자꾸 맴도는 이상한 목소리만이 그를 괴롭힐 뿐이다.

<이 답답한 쓰레기야아아아!! 네 딸이 지금 금발 양아치랑 떡치고 있다고오오오!>

“하랑이가 그럴 리 없지. 썩 꺼져라, 이 망령.”

와장창!

소녀는 소주병으로 자신의 머리를 내리쳤다. 피대신 톡쏘는 알코올의 향기가 소녀의 전신을 적셨다.

“하랑이가 누구 딸인데. 암, 그렇고 말고.”

<이 등신아! 쪼다야! 답답해 뒤지겠네! 야! 그냥 나랑 바꿔! 내가 씨발 답답해서 못 살겠다!>

“내 몸을 차지해서 세계를 멸망시키려고? 어림도 없다.”

<아아아악!!>

머릿속의 망령은 자꾸만 이상한 말로 소녀를 현혹시키려했다. 소녀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마나를 갈무리했다.

“나의 추억을 멋대로 이용하지마라, 망령.”

<내가 루살카라고오오오오!>

“헛소리. 나는 안다. 너는 내가 사랑했던 그녀가 아니야.”

소녀는 단호한 목소리와 함께 감았던 눈을 떴다. 소녀의 눈에서 금빛의 안광이 터져나왔다.

“너는 그녀를 사칭하는 괴인일 뿐이다.”

위이이잉. 소녀의 몸이 금빛으로 물들었다.

“오늘따라 유독 이상하게 더 말이 많군.”

그리고 눈 깜짝할 새, 머리가 물에 젖은 흑발의 중년 남성으로 변했다.

“.......”

광검 허윤환. 불과 3초 전까지만해도 허윤’화’였던 그는 일어나자마자 마도기어를 두드렸다. 자신의 발작 증세를 유일하게 알고있는 이에게 자신의 상황을 전했다.

“다시 돌아왔소, 협회장.”

<나이트메어>는 광검의 현상을 알고 있다.

[다행입니다곧다시연락하겠습니다]

진실에 대해서는 일절 알지 못하지만, 누군가의 저주로 인해 때때로 소녀로 변한다는 저주가 걸렸다고 알고있다.

“...그런데 지금 바쁜가?”

시간은 오전 9시. 한창 업무를 시작할 때의 시각이었다. 광검은 떡진 머리를 긁적거리며 주변에 널브러진 소주병을 정리했다.

“내일까지는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서울수복작전. 부디 공식석상에서 자신의 딸 앞에서 소녀로 변하는 일이 없기를. 광검은 속으로 몇 번을 되뇌이며 샤워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야야야야답답아아아아 네 딸 지금 금발양아치랑 떡치려고 발정나있다고오오오오!!>

“갈!”

광검은 마력을 끌어올려 기합을 내질렀다.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거울 속에는 여전히 수염이 제멋대로 자란 중년 남성이 서있었다.

“루살카 일 리가 없지.”

만약 진짜로 루살카라면 ‘우리 딸’이라고 했을 것이다. 광검은 유리에 이마를 대고 찬물에 온몸을 맡겼다.

“루살카….”

샤워호스에서 뿌려진 물이 광검의 눈을 타고 아래로 뚝뚝 흘러내렸다.

<나 불렀어?>

“꺼져라, 이 년!”

샤워를 하고 나온 순간, 광검은 다시 금빛의 소녀가 되었다.

***

“아무튼 협회장 님, 저는 서울수복작전을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단호한 내 거절에 설지영은 아쉬워하며 고개를 떨궜다. 석하랑은 내가 몰래 전한 말에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대신 오라클 스튜디오의 일원으로서 도와드릴 수는 있습니다.”

“그 말은…?”

“이곳으로 저희 팀을 배정해주시길.”

나는 협회장에게 내가 원하는 장소를 지정했다. 협회장은 미묘한 얼굴로 나와 지도를 번갈아봤다.

“구로…?”

“최전방은 너무 위험하고, 후미는 너무 약하고. 적당히 팀원들이 성장할 수 있는 장소가 구로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런데 왜 하필 구로죠? 강남 쪽도 크게 다를 건 없는데.”

“구로에 꺼지지 않는 등대가 있다고 하는 걸 들어서요. 뭔가 재미있을 것 같아서. 푸흐흐.”

별다른 이유는 없다. 그저 3월 1일 서울수복작전의 최종전이 구로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서울수복작전을 히어로들의 성장 발판으로 삼는 건 조금 그렇지만...알겠습니다. 지휘관 님의 뜻이 그러하다면 따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협회장. 그럼 슬슬 준비를 해야하니까, 저희 다시 올라가봐도 될까요?"

"네? 무슨 준비요?"

"하랑이도 저희 팀이니까, 저희 팀 복색을 맞춰야하지 않을까요?"

석하랑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설지영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협회장인 그녀는 우리 팀원들의 복장이 어떤 스타일인지 알고 있다.

"잠시만요, 진심이십니까? 진심으로 설화공주 님께 그런 옷을 입히려고 하시는 겁니까?"

"공주님 스타일로!"

"아니!"

"왜 그러세요?"

설지영이 내게 달려들려고하자 석하랑이 앞을 막아섰다.

"진정하세요, 협회장."

"설화공주 님! 이거 보시고 그런 말을 하세요!"

"이게 무슨...."

석하랑은 설지영이 보낸 영상을 잠시 살피더니.

"이 쓰블럼이?"

바로 내 멱살을 움켜쥐었다.

"마! 니 똘개이가?!"

"아, 이거 진짜 오랜만에 듣는다."

"닥치라! 이 변태새끼, 내한테 이딴 거 입힐 생각이었나?!"

"아니."

나는 석하랑의 손목을 잡아내렸다.

"더 예쁜 걸로 입혀줄 생각이었는데. 하얗고 치렁치렁한 드레스."

"읏-"

"어머어머-"

"이런 거 어때?"

직접 보여준 석하랑의 마법소녀 코스튬은 내가 보기에도 괜찮다 싶었지만, 본인과 협회장의 격한 반대에 부딪혀 통과되지 못했다.

'역시 광검이 죽어야만 완전히 오픈되는 건가.'

설화공주 석하랑이 정식으로 팀에 들어오는 건 광검의 사망 이후.

언젠가 석하랑이 자기 마력으로 만든 옷들을 하나하나 벗으며 나와 마력공급을 하는 그 날까지, 나는 광검이 빨리 폭주하기를 기원하기로 마음먹었다.

* * *

<그 시각, 미국 워싱턴 H호텔.>

"......그래서 이게 '그'의 총이다?"

"그렇다냥."

소파에 앉은 푸른 머리칼의 소녀는 자신의 앞에 놓인 홀로그램 데이터를 찬찬히 살폈다. 소녀의 앞에 마주선 김펜릴은 언제든 도망갈 준비를 하며 소녀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흥미롭네요. 무척이나 흥미로워요. 개인적으로 총이라는 것에 상당히 관심이 깊어서."

소녀가 손가락에서 불꽃을 튕겼다. 펜릴은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지만, 소녀는 펜릴을 위협하는 게 아니라 불꽃으로 지휘관의 것과 똑같은 총을 만들었을 뿐이다.

"흐흥, 그립감도 좋고...파괴력도 좋고...단 발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건 그거대로 로망이 있어서 좋고."

"저, 저기? 우리 아직 이야기 안 끝났지 않냥?"

딴 세계로 빠져들 것만 같은 소녀의 상태에 펜릴은 화제를 원래대로 돌렸다. 소녀는 자신이 만든 총을 허벅지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예, 하세요. 마음대로."

"마음대로...?"

"어차피 몸도 마음도 지휘관 암캐가 다 되셨는데, 제가 여기서 뭘 더 설득해요?"

움찔. 펜릴은 곧장 마력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소녀는 펜릴에 대한 적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싸울 생각 없어요. 당신 잡으러 다니는 것도 귀찮고. 싸우고 싶으면 때려죽여주겠지만, 자신있어요?"

"......."

펜릴은 도망칠 자신은 있다. 하지만 싸워서 이길 자신은 없다. 소녀의 뒤에 아지랑이처럼 나타난 검은 괴인의 형상에 펜릴은 바로 겁을 먹어버렸다.

"어떻게 알았냥?"

"몸에서 냄새가 나잖아요, 냄새가."

"......?"

"지휘관에게 마력공급을 받아서 마력 늘어난 거 훤히 보이는데 설마 몰랐어요?"

"아."

펜릴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소녀가 적의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상, 싸울 이유는 없었다.

"...미, 미안하다냥."

"괜찮아요. 자지에 진 건 어쩔 수 없죠."

"자, 자지에 진 게 아니다냥!"

"뭐래,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질펀하게 떡치고 온 것 같은데. 푸흐흐."

소녀의 페이스에 말려버렸다. 펜릴은 머리를 쥐어뜯다가 빽 소리를 질렀다.

"너 뭐야!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네가 이러면 안 되지!!"

"이번에는 또 뭐 때문에 지랄이세요?"

"내가 얼마나 맘고생했는데! 한 달 동안 줄타기 어떻게 하면 될까 고뇌하고 또 고뇌하다가 배신하기로 정했는데, 너는 왜 이렇게 쉽게 받아들이는 거냐고!!"

"아."

소녀는 총기를 쓰다듬으며 피식 웃었다.

"상관없지 않아요? 뭘 어떻게하든."

"무슨 소리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이 행성을 박살낼 수 있는데, 간부 한 명이 배신해서 지휘관에게 들러붙었다고 한들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너...설마?"

소녀는 체념한 얼굴로 총기를 연신 쓰다듬었다.

"당신은 즐겁게 지내요. 남은 시간동안 하고 싶은대로. 저는 그러지 못하니까."

"......어쩌다 이렇게 됐냥?"

"인간들 하는 말이 있잖아요. 사람은 다 변하게 된다고. ...너무 오랫동안 인간 세상에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저도 조금은 물든 모양이네요."

펜릴은 직감했다. 소녀가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는 것은 자신이 처음이라는 걸.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예요."

지휘관의 편을 들기로 하여, 자아가 더욱 강고해져, 다크 레기온의 울타리에서 한 발자국 밖으로 내딛었기에 펜릴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너...진짜로?"

"거기까지. 지금 그런 이야기하면 '관측' 당할 거예요. 설마 벌써 행복한 꿈같은 시간을 끝내고 싶은 건 아니죠?"

펜릴은 입을 꾹 닫아버렸다. 그리고 왜 지휘관이 소녀를 상대로 무슨 이야기를 해도 통할 것이라고 했는지 직감했다.

"그 녀석, 네가 무서워서 도망친 게 아니었다냥."

"정답이에요."

"너는...이미 이겼다고 판단해서 한국으로 온 거다냥."

아무리 최강이라고 한들.

아무리 홀로 세계를 부술 수 있을 거라고 한들.

마음이 꺾여있는 이상, 큰 위협이 될 리가 없다.

"도대체 뭐가 너를 이렇게 만들었냥?"

"...푸흐흐, 흐흐흐."

소녀는 실성한 사람처럼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몸이 순식간에 불꽃에 휩싸이며, 한순간에 괴인으로 변한 존재는 눈깜짝할 새 펜릴의 어깨를 붙잡았다.

[우리의 진실. 그리고 세계의 진실.]

"......!!"

반응하지 못했다. 분명 자신이 있었건만, 펜릴은 눈앞의 괴인이 움직이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뭐...이렇게 거창하게 얘기해봐야.]

"어차피 이해하지 못할테고. 걱정하지마요. 저는 정해진 날까지 여기에 있을테니까."

다시 소녀로 돌아온 존재는 펜릴의 어깨를 토닥이며 테이블로 돌아갔다.

"그나저나 무슨 선물이에요? 당신이 선물 싸들고 올만큼 정신머리가 박혀있다고는 생각 안 하는데."

"......지휘관이 너한테 주는 선물이다냥."

"그 사람이? 흐음."

소녀는 입꼬리를 비틀며 포장지를 벗겼다.

"S급 코어 같은 걸로 저를 꼬드기려고 하는 거라면 큰 오산이라고...."

스읍. 상자 안에 있는 물건의 모습에 소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펜릴은 슬쩍 옆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 상자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아이스크림...?"

"몽블랑이에요."

각각 케이스에 담긴 일곱 가지 색의 몽블랑에 소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가운데 하나를 빼고 나머지는 그녀가 아닌 다른 이들을 저격한 듯한 색상이었다.

"이게 선물...."

"밑에 한 층 더 있는 거 아니냥?"

"...어, 진짜다."

소녀는 조심스레 윗층의 케이크들을 꺼냈다. 그리고 종이판으로 가려진 아랫층을 눈으로 확인했다.

"......서프라이즈?"

아랫층에는 몽블랑이 똑같이 일곱 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겉면만 봐서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분명 겉이 연분홍색 크림인 것이 딸기맛으로 일곱 개가 자리잡은 게 분명했다.

"아, 이거 민트초코다냥. ...나 이거 먹어도 되냥?"

"나눠먹으라고 보내준 것 같은데...흠."

피식. 윗층의 몽블랑을 정리하던 소녀는 입꼬리가 비틀렸다.

"역시 지휘관."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회색'의 존재까지 알고 있다.

"하지만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것 같네요."

"뭐가 말이냥?"

"아무것도 아녜요."

소녀는 블루베리가 섞인 몽블랑과 함께 나머지를 상자안에 다시 넣었다.

"오랜만에 만났고...앞으로 만날 일이 거의 없을테니 이야기나 하죠. 당신은 그거, 나는 이거 먹으면서."

"무, 무슨 이야기가 듣고 싶은 거냥?"

"지휘관이랑 섹스한 거."

"풉."

펜릴은 진심으로 당황했다. 손으로 턱을 받치며 은근한 눈빛을 보내는 소녀의 표정은 진짜로 '소녀'같았다.

"얼마나 좋았어요? 다크 레기온 배신할 만큼?"

"......."

"아주 전세계 대기를 요동치게 만들 정도로 앙앙거리던데. 꼬리 애널에 박히니까 아주 자지러지시던데."

"어, 어떻게 안 거냥?!"

"뭐...별 건 아니고."

소녀는 싱긋 웃으며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하얀 검지 위에 앙증맞은 파란 카나리아가 내려앉았다.

- 전부 다 지켜보고 있었다는 거시야.

"미국에서 떠나기 전부터."

"도대체 어떻게...?"

소녀는 싱긋 웃으며 자신의 심장을 가리켰다.

"심장에 폭탄을 박아넣어놨어요. 몰래."

"아 참. 감각도 공유 할 수 있답니다. 그러니까 좀 더 잘 조여봐요. 당신 진짜 맛있으니까."

"푸우우웁!"

김펜릴은 소녀가 지휘관을 가만히 내버려두는 근본적인 이유를 깨닫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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