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0화 〉2부 3장 05
"야~! 알비노 토깽이!"
"......."
백발의 소녀는 자신을 둘러싼 소년들의 놀림에 비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뭐, 뭘 그렇게 쳐다봐!"
"엄마아빠도 없는게!"
"고아원 꼬맹이!"
"......하아."
소녀는 한숨을 내쉬며 그네에서 일어났다. 고작 자신들이 놀 그네를 빼앗기 위해, 소년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자신을 압박했다.
"......."
아직 시간은 남았지만 소녀는 순순히 물러나기로 정했다. 괜히 트러블을 일으키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이가 피해를 입는다.
"와, 와아! 백발 마녀를 물리쳤다!"
"얼라들 재밌게 노네."
공원을 빠져나온 소녀는 소년들을 비웃으며 후드를 뒤집어썼다. 허름하고 낡은 후드지만 이게 아니면 자신의 특이한 외형을 숨길 방법이 없었다.
"......."
하교길. 혼자 집으로 털레털레 걸어가는 소녀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무거웠다. 낡은 가방끈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았다.
"......."
"뭔교?"
소녀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남자에 인상을 지푸렸다.
"금발? 양아친가?"
"...그런 말 하면 못 써."
"으데 부산에서 머리 샛노랗게 물들여가꼬 길쳐막고 있는교? 퍼뜩 나오이소."
소녀는 짜증을 부리며 옆으로 비켜 걸었다. 금발의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서있다가 사라졌다.
"재수가 없어려니...응?"
소녀는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확인했다. 검은 지갑은 제법 두툼해보였고, 안에 현금이 엄청나게 많이 들어있었다.
"히익, 오만원...?"
소녀로서는 만져본 적도 없는 거금.
"공책이 100권...!"
소녀는 자신의 똑똑한 머리로 계산을 마치자마자 지갑을 품에 넣었다. 경찰서에 가져다줘야 한다는 생각이 우선 들었지만, 소녀가 거기까지 생각하기에는 소녀의 환경이 너무 열악했다.
"오, 오만원이면 큰 돈 아닐...."
"뭐하냐, 빙구야."
빠악.
누군가가 소녀의 뒷통수를 때렸다. 소녀는 말그대로 뒷통수가 얼얼했지만, 가슴 안쪽으로 불쑥 들어오는 손길에 기겁을 했다.
"미친 놈아!"
"남의 지갑 주워다가 한다는 얘기가 공책 100권? 어이가 없어서."
흑발의 소년은 소녀에게서 빼앗은 지갑을 한손에 움켜쥐고, 다른 손은 소녀의 손을 붙잡아 당겼다.
"따라와."
"어, 어디가려고 하는데?!"
"주인 찾아줘야지."
소녀는 순순히 소년이 이끄는 곳까지 따라 움직였다. 그곳은 파출소였다.
"......니 빙시가? 언제는 니 내보고 주운 사람이 임자라며?"
"지갑이잖아. 너 그러다가 절도죄로 감옥 간다? 괜히 또 사고치다가 원장님한테 또 혼나고 싶어?"
"...지는 맨날 밤늦게 들어와서 혼나는 주제에."
소녀는 소년의 손등을 찰싹 때리며 소리쳤다.
"빙시야! 사람이 호구처럼 착하게 살아봐야 뒤통수 쌔리맞는 거 모르나!"
"뭐래. 호구라서 착한게 아니야, 이 멍청아."
소년은 한심한 얼굴로 소녀의 이마를 때렸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하는 거야."
"......."
소년과 소녀는 지갑을 파출소에 제출하고 떠났다.
일주일 뒤. 해당 파출소에 비리 경찰이 괴인이 되었다는 흉흉한 소문이 들려왔지만, 소년과 소녀는 보육원에 기부된 피자빵을 두고 싸우느라 전혀 알지 못했다.
* * *
그리고 언젠가, 늦은 밤.
어느덧 키가 자란 소녀는 밤늦게까지 홀로 눈을 뜬 채 침대에 누워있었다. 창문이 드르륵 하는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소녀는 몸을 일으키며 쌍욕을 퍼부었다.
"...빙시가 지금 몇 시인데 이제 기어들어오고-"
"......후우."
소년은 창문을 넘어오자마자 바닥에 엎어졌다. 소녀는 소년에게서 느껴지는 비릿한 냄새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니, 니?!"
"소리지르지마. 동생들 깨."
소년은 지친 얼굴로 벽에 기대어 앉았다. 전신에 상처를 입은 소년은 옷만 깨끗하게 갈아입은 듯 했다.
"뭐하고 싸돌아댕기길래 이 꼬라지가 된 긴데?!"
"...세계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푸흐흐."
소년은 실소하며 몸을 일으켰다. 소녀는 언제나처럼 소년을 부축하며 침대에 앉혔다.
"걱정마. 네가 생각하는 그런 위험한 일은 하지 않으니까."
"뭐 괴수라도 때려잡고 그러는 것도 아니면서 허구한날 치고박고 싸우고 다니니까 그러제! 니 또 내보고 알비노니 엄마아빠 없다고 하는 놈들이랑 싸우고 온 거 아니제?!"
"......풉. 아, 들켰네. 우리 하랑이 똑똑해."
소년은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옅게 웃었다. 소녀는 무릎 위에 올린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중얼거렸다.
"내가 얼라도 아니고...!"
"키는 나보다 훨씬 작은 걸?"
"니가 멀대같이 커서 그런 기다!"
분명 동갑인데, 분명 똑같은 초등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중학생들과 엇비슷할 정도로 키가 컸다. 덕분에 소녀는 소년을 한참 올려다봐야 했다.
"...밤에 괜히 싸돌아댕기지 마라. 원장님 안 카드나. 요즘 서울 쪽에 괴수들 막 쏟아진다고. 여도 언제 괴수 튀어나올 지 모르는 기다."
"걱정마. 괴수가 나타나도 히어로들이 있잖아? 우리 하랑이가 제일 좋아하는...무궁화 보이도 있고."
"지럴."
소녀는 쑥쓰러운 마음에 욕지기로 속내를 숨겼다. 소년은 계속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금 피곤하네. 내일 토요일이지? 하랑이는 좋겠다. 후견인 남자 분 오시잖아. 되게 유명한 분이라고 들었는데."
"...니는 내랑 떨어지고 싶나?"
"......글쎄."
소년의 손이 멈췄다.
"걱정되기는 하지. 우리 부산 가시내, 서울에 올라가서 괜히 사투리 쓴다고 놀림받는 건 아냐?"
"그게 문제가? 내는 니 친구 사라지면 혼자 될까봐 걱정되는데."
"그러는 너도 나 말고는 친구 없...아야."
소녀는 소년을 침대에 밀쳤다. 낡은 매트리스 위에 소년은 엎어졌고, 소녀는 소년의 위에 올라탔다.
"하, 하랑아?"
"학교에서 배운 거 복습해야겠다. 니 오늘 결석했다 아이가? 내가 가르쳐 줄게."
"보, 복습이라니?"
"보건 수업."
소녀는 붉어진 얼굴로 소년을 향해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붉은 입술을 뻐끔거리며 다가오는 소녀의 모습에, 소년은 그만 온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할짝.
소녀는 소년의 볼에 난 상처를 혀로 핥았다. 그리고 머리 끝까지 붉어진 얼굴로 빽 소리를 질렀다.
"......사, 상처는 침바르면 낫는다 안 카드나!"
"...그게 되는 건가?"
"입 닥치라!"
"자꾸 험한 말 하는 건 요 입인가?"
소년은 소녀의 입술을 잡고 흔들었다. 삐죽 내밀고 있던 소녀는 입술이 잡히자, 인상을 찡그리며 소년과 다시 얼굴을 붙였다.
"니, 내랑 얼마나 오래 지냈는 지 알제?"
"......."
"그라믄...내가 어떤 생각 하는지 안다 아이가."
"하랑아. 그건-"
"싸물어라."
소녀는 소년의 얼굴을 붙잡았다. 잠시 방에 정적이 내려앉았고, 소녀는 천천히 얼굴을 들어올렸다.
"내도 처음이지만...니도 내가 처음이제. 도장 찍었대이."
"......학교에서 도대체 뭘 가르친 거야."
소년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돌리려했다. 하지만 소녀는 소년의 얼굴을 정면으로 되돌리며 싱긋 웃었다.
"아기는 어떻게 태어나는 지?"
"야, 야...!"
"......내는 니라면 괜찮은데."
"...하랑아."
소년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똑바로 내려다보는 소녀의 눈동자는 직시하지 못했다.
"그건 어, 어른이 되고 난 다음에라는 건...안 될까?"
"흐흐."
소녀는 싱긋 웃으며 다시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럼...얼라들끼리 뽀뽀 정도는 괜찮은 거제?"
"......혀를 섞는 게 얼라들끼리는, 읍."
밤이 깊어졌다.
"하아, 하아. 사람들 2차성징 하고 나면 이능력자 된다 카던데...히힛."
"야. 겨우 이걸로 이능력자가 된다고? 어림도 없지."
"니 내가 이능력자 되면 어쩔 건데? 그러면 성인이 아니라 고딩때 하는 기다?"
"아으...진짜. 왜 그렇게 발랑 까졌어?"
"뭐래. 지가 까졌으면서. 히히."
소년은 창백해진 얼굴로 소녀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과연 이건 소녀도 할 말이 없는지 순순히 얻어맞았다.
"이히히. 내는 다 알고 있지롱-"
"에휴. 그럼 이명은 뭘로 정할 건데?"
"......."
소녀는 소년의 눈동자에 담긴 자신을 한참동안 바라보며, 부끄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백설공주>."
"미쳤네."
"왜! 내 이명에 니 성을 넣어준 걸 영광으로 알아라!"
"사람들 앞에서는 어떻게 얘기하려고?"
"...백설공주를 감명 깊게 읽어서 그랬다고 하면 되지!"
소녀는 빽 소리를 지르며 소년의 입을 막아버렸다. 잠시 시간이 흘러, 소녀와 소년은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여, 역시 부끄럽나? 그럼 조금 바꿀까?"
"음...."
소년은 싱긋 웃으며, 소녀를 끌어안았다.
"<설화공주>."
"...지가 더 부끄러운 말을. 야, 자냐? 자냐?"
"......."
소년은 소녀를 끌어안은 채 새근새근 잠에 빠졌다. 소녀는 소년의 잠든 얼굴을 쓰다듬으며, 소년의 얼굴을 옆으로 눕혔다.
"어른까지 8년 어떻게 기다리지...?"
소녀는 소년과 얼굴을 마주하며, 소년의 위에서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열병을 앓은 소녀는 병원에 실려갔고, S급 히어로로 각성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전세계 최연소 S급 히어로.
<설화공주> 석하랑.
그녀가 후견인인 <광검>의 지도를 받아 보육원에 돌아갔을 때는, 이미 보육원이 누군가의 습격에 의해 파괴되고 난 다음이었다.
소녀의 첫사랑은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 * *
"세상에서 가장 공략하기 쉬운 히로인이 뭔 줄 아십니까? 이미 게임 시작도 전에 공략이 끝나있는 히로인입니다."
가령, 본편 스토리 이전에 교통사고가 나기 전에 구해준 소녀라거나.
가령, 주인공을 보자마자 첫눈에 반한 히로인이라거나.
가령, 주인공과 오래 전부터 서로 알고 지내던 소꿉친구라거나.
뭇 히로인들이 가지고 있는 설정이 각각 개성이 있고 다르듯, 석하랑이 보유한 설정은 <알고보니 소꿉친구>같은 포지션의 여인이다.
고아원에서 함께 자랐던 첫사랑 소년.
그 소년을 습격한 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힘을 기른 이능력자.
소년의 마음가짐을 이어받아, 세계 평화를 위해 힘쓰기로 마음먹은 정의의 히어로.
그리고 26살이나 되는 현재까지도 첫사랑을 잊지 못해 마음속에 고이 품고 있는 풋풋한 처녀.
"소꿉친구인 걸 밝히는 순간, 이미 게임은 끝나는 겁니다."
광검 사망 이후 폭주하는 석하랑을 잠재우기 위한 방법이 바로 주인공이 소꿉친구-백청화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의지하고 있던 스승이 죽고 간부 루살카의 힘에 먹혀버린 석하랑은 그리도 찾던 첫사랑과 300만 부산 시민을 학살한 곳에서 처음 마주치게 된다.
그야말로 최악의 재회라고 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1회차에서 석하랑 루트를 밟아놓지 않으면 석하랑은 자괴감에 정령의 힘을 내어놓고 스스로의 자아를 소멸시켜 버린다.
당연히 2회차부터는 석하랑 살리기에 전력을 쏟는다. 그러면서 석하랑이 은근히 주인공의 주변을 거닐며 정보를 확인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시안(Cyan). 푸를 '청'.
화이트(White). 흰 '백'.
히비스커스(Hibiscus). 무궁'화'.
자신이 알고있던 첫사랑의 이름과 연관성을 가진 남자가, 자신과 동갑에,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 비슷한 성격을 보이는 것에 의심을 하며 접근하는 것이다.
"그걸 백밍아웃으로 다 스킵한 겁니다."
나는 공공연히 백청화임을 밝히고 다녔다.
그리고 1:1로 마주한 자리에서, 나는 석하랑 루트에서만 알 수 있는 주인공과 그녀와의 일화를 언급했다.
"2회차 이후부터 가능한 속성 공략이죠."
새삼스럽지만 굳이 한 번 더 말하자면.
"정령은 금방 사랑에 빠지는 녀석들입니다."
석하랑은 주인공에게 게임 시작하기 15년도 전부터 사랑에 빠져있었다.
* * *
츄릅.
기나긴 시간끝에, 바닥에 눕혀져 설육을 섞던 인고의 시간이 끝났다. 우리는 (설정상) 어렸을 때 처럼, 똑같은 자세로 서로를 안고 서로를 탐했다.
"......변태새끼. 12살 때 했던 키스를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네?"
"첫 키스를 잊을 리가."
(설정상) 블루베리 맛 키스였으니 당연히 잊을 수 있을까.
"그건 내도 마찬가지다. 히힛."
키스를 오랫동안 하게 되면 군침의 냄새 때문에 다소 역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서로서로 느끼는 타액의 향과 구취가 커스터드 크림 치즈와 블루베리의 향이라, 제법 오랫동안 키스를 나눌 수 있었다.
"지금까지 어디서 뭐한건데? 아니, 그보다 니가 왜 지휘관인...."
"누구 덕분에 그런 이능력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해?"
석하랑은 침묵했다. 안그래도 하얀 피부가 더욱 창백해졌다.
"내, 내 때문이가...?"
"그런 셈이지. 그런데 하랑아."
나는 하랑의 허리를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SS급 이능력자라는 말이 무색하게, 그녀는 내가 이끄는 대로 침대에 몸을 눕혔다.
"이제 우리 서로서로 성인이지?"
"아."
하랑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나는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얼굴을 가까이 하며 낮게 속삭였다.
"8년 하고도 몇 년 더 지났는데...그 때 하던 거 이어서 마저 할래?"
"......."
하랑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세하게-
끄덕.
고개를 까닥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