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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639화 (639/1,497)

〈 639화 〉2부 3장 04

펜릴을 미국으로 보낸 나는 아주 특별한 이의 초대를 받았다.

"안대를."

"얼마든지요."

갑자기 다가온 이가 내 얼굴에 안대를 씌웠다. 나는 순순히 안대를 썼고, 요원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 움직였다.

누군지도 모르는 이가 인도하는 것은 아니다. 나와 팔짱을 낀 이는 분명 히어로 협회의 비밀 요원. 남자였으면 바로 떨쳐냈겠지만, 설지영도 나를 어느정도 파악했는지 여자를 보냈다.

"C...."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후후."

팔꿈치에 닿는 감촉 만으로도 충분히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있었다. 여인은 그걸 눈치채고 몸을 움찔거렸지만, 내 정체를 아는 만큼 오히려 가슴을 붙이며 자신을 어필했다.

"하아, 하아."

물론 그녀가 자율주행차에 나를 태워 이동하는 동안, 나는 그저 그녀의 어필을 즐길 뿐 건드리지는 않았다.

약 두 시간.

제법 빠른 속도로 달린 자율주행차는 분명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방향을 일부러 빙빙 꼬아 시간을 끄는 듯 하기는 했지만, 나는 목적지를 잘 알고 있다.

'이거 유성 차량이잖아.'

협회의 관용차는 모두 유성의 차량이다. 때문에 나는 시야가 가려졌다고 한들, 마도기어를 통해 나의 동료가 보내는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받을 수 있었다.

신서울 내부를 뺑뺑이 돌다가 도착한 곳은 분명, 협회일 것이다. 협회는 협회지만 외부에서 온 히어로들이 숙박하는 장소.

유성 호텔 신서울 본점.

"...도착했습니다."

퉁명스러운 여인의 목소리에 나는 그녀의 등을 가볍게 토닥인 뒤 차에서 내렸다.

"고마워요, 화령."

"...?!"

"모를 줄 알았어요? 푸흐흐."

안대는 여전히 착용하고 있다. 여인은 목소리를 깔고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금방 그녀의 정체를 알아챘다.

'모르면 바보지.'

히로인이 아니라고 한들, 화속성인 이능력자들은 왠만하면 얼추 다 파악하고 있다. 나는 벙찐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든 다음 안대를 벗었다.

"아, 지금은?!"

"역시."

내가 도착한 곳은 지하주차장 엘레베이터 앞이었다. 화령은 아차싶은 얼굴로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고, 나는 엘레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시말서 안 쓰게 잘 말씀드릴게요."

"...감사합니다?"

"흐흐."

분명 그녀는 끝까지 안대를 씌운 상태에서 나를 인도하도록 지시를 받았을 것이다. 그걸 당황하는 나머지 내가 멋대로 행동하게 했으니 혼이 날 게 분명하다.

하지만 과연 설지영이 그걸 신경쓸 겨를이 있을까? 지금부터 내가 '그녀'와 만나는 것에 촌각을 세우고 있을텐데.

삑. 삑삑.

나는 엘레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최상층을 향해 올라간 엘레베이터의 문이 열렸고, 나는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설화공주 님."

백발의 여인, <설화공주> 석하랑이 정장 차림으로 나를 복도에서 맞이했다.

* * *

<잠시 뒤. 유성 호텔 펜트하우스.>

"과년한 처자가 밤에 남자를 부르면 추문이 일 겁니다?"

"알게 뭐예요. 빨리 결혼해서 S급 이능력자 아기 낳으라고 난리 피우는 놈들이 태반인데."

"...그 정도는 아니지 싶은데."

"농담입니다. 그쪽에서 그렇게 장난을 치려고 하니까 그런 거죠."

석하랑은 내게 차를 건넸다. 나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던 건 틀림없는지, 딸기 케이크부터 딸기 라떼까지 내 앞은 온통 분홍색으로 물들어있었다.

"반 할 뻔 했습니다."

"...상대의 기호에 맞춰서 대접하는 건 기본이죠. 불쾌하지는 않나요? 저희가 감시하고 있다는 걸 넌지시 전한 건데."

"그걸 사실대로 말하다니, 설화공주 님은 정말 착한 아이로군요."

내 맞은 편 좌석에 앉으려던 석하랑이 움찔거렸다. 나는 그저 싱글벙글 웃으며 컵을 들어올렸다.

"딱히 불쾌한 건 없습니다. 주변의 시선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건 일상같은 거라서. 오히려 한국에서는 더 편하게 다닐 수 있죠. 주변에 감시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적으니까요."

"무척 긍정적이십니다?"

"태양처럼 밝고 활기찬 사람이라서요. 그래서 저를 부른 이유가 뭐죠? 설마 데이트를 신청하는 건 아닐테고."

"......."

석하랑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꾸벅 숙였다.

"한국 히어로 협회 부산 지부 대표. <설화공주> 석하랑이라고 합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지휘관>님."

"<지휘관>입니다. 그런데 그런 딱딱한 인사는 싫어요. 저를 '백청화'라고 불러주시겠어요?"

또 움찔. 석하랑은 허리를 들지 못했다. 내가 컵을 두드려 불쾌감을 드러내자, 그녀는 그제서야 마지못해 허리를 펴고 자리에 앉았다.

"그...백청화라는 성함은...?"

"시안 화이트 히비스커스. 푸르고, 하얀, 꽃. 한국에서 활동하는 만큼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한국식 이름을 만들어봤습니다."

"...알겠습니다."

석하랑은 긴가민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빙빙 돌리는 건 그녀에게 딱히 좋지 않지만, 이 건에 대해서는 석하랑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 훨씬 좋다.

"SS급으로 오른 것, 축하드립니다."

"역시 일부러 그러셨던 겁니까? 그런 저질스러운 장난까지 치면서?"

"장난이라뇨. 효과가 분명 있었을텐데요? 풍유환은 풍유환입니다. 단지...부작용으로 마력이 늘어난다거나 하는 효과가 있을 뿐."

"말장난이 심하시군요."

석하랑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빈정거렸다. 하지만 나는 정장 아래에 가려진 그녀의 가슴이 조금은 성장했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다.

석하랑. 그녀는 SS가 되면서 B가 되었다. 경사로세.

"설화공주 님께서 조금 불쾌하셨을 지도 모르지만, 그건 저만의 접근 방식이기도 합니다. 상대가 필요할 것 같은 물건을 매개체로 접근하는 것. 실제로 효과가 있었잖아요?"

"...그렇긴 하죠."

"설화공주 님도 풍유환으로 사고 보니 '마력이 늘어서' 제 정체를 깨달았던 거 아닙니까?"

"......그, 그렇죠."

아, 깨달았다. 얘 설지영이랑 교차검증하고 나서야 내 정체를 파악했구나. 긴가민가하다가 설지영과 정보를 주고받은 뒤에야 내가 어떤 존재인지 깨달은 듯 했다.

"후후.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서울수복작전도 그렇지만, 앞으로 제가 한국에서 지내게 될 것 같아서요."

"그건 무슨 이유입니까? 이 나라에...왜 오신 겁니까?"

"......."

석하랑의 눈빛은 진지했다. 나는 그녀와 눈을 마주하며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예?"

"...뭐, 아주 어렸을 때의 장난같은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후후후."

의미심장한 뉘앙스를 풍기며 차로 시선을 돌린다. 석하랑의 뜨거운 눈길에 케이크가 다 얼어붙을 것 같았지만, 나는 입안에 퍼지는 딸기의 향과 맛으로 정신을 가다듬은 뒤 다시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냥 한 이야기입니다. 사실은 매력적인 여성분들이 너무 많이 계셔서. 설화공주 님도 그렇지만, 어째 한국에는 매력적인 여성분들이 정말 많더라고요."

"취향이 동양인 취향이라 그런 게 아니고요?"

"설마요. 저는 인종을 따지는 사람이 아닙니다."

남녀를 따질 뿐이다.

"지휘관으로서 세계의 평화에 이바지하기 위해...저는 매일매일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그건 그거잖아요."

"섹스요?"

"......지휘관 님, 제가 당신과 같은 나이의 여인이라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석하랑은 창백한 얼굴로 내게 경고했다. 하지만 나는 저게 부끄러워질 때 나오는 반응인 걸 잘 알고 있다.

"좋습니다. <마력공급>이라고 말을 바꾸죠. 설화공주 님께서 아시다시피 제가 가진 유일한 이능의 힘으로 마력을 늘리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진짜로 궁금한 건."

탕.

석하랑은 기다렸다는 듯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이미 내용물이 비어버린 풍유환의 케이스였다.

"이건 무엇으로 만드셨습니까?"

"뭘로 만들었을 것 같습니까?"

"말을 돌리지 마십시오."

"......들으면 상당히 불쾌하실텐데?"

석하랑의 눈이 살짝 가라앉았다. 여기서 더 건드리면 지휘관이고 뭐고 진짜로 싸울 기세기에, 나는 순순히 양손을 들어올리며 항복했다.

"후우. 피를 좀 섞었습니다."

"...정말요?"

"예. 한국에는 선지국밥이라는 것도 있다고 하던데요? 그래서 피를 먹는 것에 그리 거부감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왜, 한국에서는 다들 말하기를 배고프면 국밥 뜨끈하게 한 입 먹는다고...."

"달라요. 그거랑 다르다고요. ......."

석하랑은 눈을 감으며 마력을 갈무리했다. 펜트 하우스 유리창에 낀 살얼음이 물방울이 되어 녹아내렸다.

"...만약에 다음에도 그럴 경우가 있다면 피는 지양해 주십시오. 불쾌감을 느끼는 이도 있을 수 있으니."

"예? 피가 제일 깔끔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뭘로 한다고요."

"......그걸 제 입으로 말하라고요?"

"설마 설화공주 님. 제가 상상하는 그런 역겨운 상상은 아니리라 믿습니다. 저도 상식이란게 있는 사람입니다."

침을 섞다니, 그 얼마나 역겨울 수 있단 말인가! 누군가는 포상이라면서 마음껏 받겠지만.

"설화공주 님께서 피를 매개체로 마력공급 받기를 원치 않으신다면 다른 방법으로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오늘 저를 부른 이유도...그것 때문 아닙니까?"

"맞습니다. 이것 보시겠어요?"

석하랑은 내게 검사지 하나를 건넸다. 협회의 공인 마크가 박혀있지는 않지만, 협회에서 사용하는 검사지였다.

"석하랑. 00년생, 부산 출생 추정."

비공식적으로 검사한 듯한 그녀의 프로필에는 그녀의 다양한 신체 스펙이 적혀있었다.

"위에서부터 8-"

"그걸 보라는 게 아니라."

"SS급 98. 축하합니다. 비공식 세계 공동 2등이 된 것을."

1등과 다른 2등이 누구인지는 비밀. 석하랑은 복잡한 얼굴로 늘어난 자신의 마력 수치를 가리켰다.

"예. 인류 최강이라고 불리우는 99까지...앞으로 딱 1이 남았죠."

"예."

일부러 맞췄다. 나는 그녀에게 풍유환을 세 개 팔았고, 세 개를 전부 복용했다면 95에서 3이 오른 98이 된 게 맞다.

"질문있습니다. 풍유환을 제게 더이상 팔지 않은 이유가 있죠?"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당신의 주변을 감시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푸흐흐."

살짝 녹아내린 케이크가 다시 얼어붙기 시작한다. 유리창에는 성에가 끼어 바깥과 안이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S급들 모두가 기본적으로 결계를 활용할 수 있죠. SS급에 이르면 그보다 훨씬 단단하고 은밀한 공간을 만들 수 있고."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아십니까? 당신이 이 장소에 갇혔다는 의미입니다."

"설화공주 님께서는 설마 인류 마지막 지휘관을 두고 협박할 셈입니까?"

"질문에 순순히 답한다면 그냥 보내줄 겁니다."

내 손등에 얼음 결정으로 반짝이는 나비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 유리 세공과도 같이 섬세하고 아름다운 나비는 강대한 마력을 담고 있었다.

- 화려하지만 실속은 없다.

동시에 그녀가 허송세월로 보낸 반편생의 흔적을 담고 있었다. 본래라면 속이 텅 비어있어야 할 내부가 지금은 SS급의 마력으로 꽉 차있었다.

"솔직하게 말씀해주십시오. 당신이 남겨둔 1...그건 어떤 이유입니까?"

"진짜 솔직하게 말해요?"

"네."

"설화공주 님과 섹스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움찔. 석하랑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제 주변을 보고 계신다면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어떤 방식으로 제가 스카우트한 팀원들의 재능을 향상시키고 있는지."

"......."

"마력공급입니다. 남자라면 다들 하나씩 가지고 있는 큰 주사기로 마력을 주입하는 것이죠. 설화공주 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지휘관이 주는 감각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지휘관과 했던 여인이...다시 지휘관과의 감각을 느끼고 싶어서 괴인으로 전락했을 정도로 말이죠."

"......."

석하랑은 계속 침묵했다. 우물쭈물하며 흔들리는 눈동자가 숫처녀인양 부끄러워했다.

"저도 설화공주 님처럼 매력적인 분을 그냥 놓치고 싶은 생각이 없지만...설마 설화공주 님. ......한 번도?"

"......."

나는 그 침묵에 쐐기를 박았다.

"저런. 제가 큰 실례를 했군요. 설화공주 님께서 아직도 그런 쪽으로 경험이 없으셨을 줄이야. 왜죠? 광검 님 때문입니까? 그 분이 제자분의 근처에 누구도 오지 못하게 막던가요?"

"......."

"그도 아니면...."

나는 한 팔을 턱에 괸 채, 은근한 눈빛으로 석하랑에게 빈정거렸다.

"아직도 첫사랑을 잊지 못해서, 처녀를 첫사랑에게 주겠다고 한다거나?"

"......지휘관. 정말로 실례지만, 하나 물어보겠습니다."

석하랑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주먹을 꽉 쥐며 내게 물었다.

"당신, 정말 미국인 맞아요? 당신의 이름이...정말 시안.w.히비스커스가 맞습니까?"

"후, 후후후, 후후후...."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거 아시나요? 히비스커스라는 건 무궁화의 친척뻘인 꽃이지만, 무궁화의 학명은 히비스커스 시리아쿠스죠."

"...니, 니 설마...?"

"부끄러운 과거기도 하고...괜히 흑역사 꺼내는 건 선호하지 않아서 별로 말하고 싶지 않기는 합니다만."

턱.

나는 허리를 뒤로 당겨, 테이블 위에 두 다리를 꼬며 올렸다.

"'백설공주'를 너무 감명깊게 읽어서 자기 이명을 <설화공주>로 하겠다고 떼쓴 꼬맹이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데."

와락.

석하랑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끌어안았다.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 같았다.

"내, 니, 뒤진 줄 알고...!"

'계획대로.'

무엇을 숨기랴.

석하랑.

그녀는 으레 있는 소꿉친구 포지션의 히로인으로, 12살에 헤어지기 전까지 주인공과 한 침대에서 자고 일어났을 정도로 친했던 사이다.

"내가 죽을 리가 없잖냐."

다회차만 가능한 석하랑 속성 공략 방법.

"무궁화보이가 언제 지는 거 봤어?"

무밍아웃.

백청화.

주인공은 석하랑의 첫사랑이다.

"공략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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