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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637화 (637/1,497)

〈 637화 〉2부 3장 02

세상을 멈췄다. 시스템을 통한 일시정지로 나는 회색으로 물든 세계에서 자유를 얻었다. 그리고 VR기기를 벗어 잠시 카메라에 직접 얼굴을 들이밀었다.

"미리 예고합니다. 스포일러 당하기 싫으면 나가요. 푸흐흐."

나는 미리 경고했다. 석하랑 일가에 관한 이야기는 전체 스토리부터 개인 루트까지 아주 스포일러로 점철되어 있기에, 나는 현 상황에서 나와 마주쳤던 자에 대한 정보를 풀었다.

광검 허윤환. 대한민국 유이의 S급 이능력자.

그는 석하랑의 부친이며, 석하랑의 모친이자 다크 레기온의 간부인 <설야의 루살카>를 죽이고 그 힘을 자신의 심장에 가뒀다.

그리고 2025년이 된 현재, 허윤환은 마력오염으로 죽어가고 있다. 나이를 먹고 점점 몸이 노쇠해짐에 따라 실시간으로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질문. 왜 광검은 갑자기 죽어가게 된 걸까요?"

- 더 오를 수 없어서ㅋ

- 포화상태

- 마력 오염 아닌가요?

메인 이벤트 중 하나가 광검의 자결인지라 모두가 알고 있다.

"정답입니다. 간부 루살카의 힘을 가지고 있기에, <괴인화>가 진행되는 거죠."

주인공과 한국의 위기에도 직접 나서지 않은 S급 히어로에 대한 불평불만이 쌓이던 찰나, 주인공 일행이 혼돈환룡을 구하고 평양을 경유하여 신서울로 돌아온 이후로 그는 괴인이 되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저건 괴인화의 현상 중 일부에요."

나는 금발 소녀를 다시 한 번 더 가리켰다.

"실은 몸의 절반이 괴사했는데, 그걸 마력으로 이어붙여서 숨기는 거예요."

누리와 엇비슷하거나 그보다 작은 140cm 이하의 키를 가진 소녀는 석하랑을 닮은 듯 닮지 않은 듯한 이국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미인인 건 당연지사.

"일단 저 금발 꼬맹이가 광검 맞아요. 저 여자애."

광검 허윤환. 대한민국 유이의 S급 이능력자.

"간부 루살카의 힘을 억제하기 위해 힘을 잠시 해방하는 거죠. 그러니까 님들은 지금 <설야의 루살카>, 석하랑이 아닌 진짜 간부 루살카의 모습을 보고 있는 거예요."

- ???

- 광검 ts가...아니었다고?

- ㅁㅊ

"심장에 간부 루살카의 힘이 깃들어있고, 괴인화의 현상으로 40대 아재가 저런 소녀로 변하게 되는 겁니다. 마력을 쓸 때 몸이 변하게 되는 거죠."

마법소녀 설야의 루살카. 그 정체는 사실 40대 아저씨 히어로, 광검!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광검은 아예 두문불출하기로 작정했어요. 공식 석상에는 원래 모습으로 나오지만, 그건 마력을 사용하지 않을 때."

그냥 가만히 있으면 루살카가 끊임없이 파괴와 살육을 속삭인다.

마력을 사용하면 몸이 소녀의-루살카의 몸으로 변하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 몸이 완벽하게 소녀의 몸으로, 파괴와 살육만을 위해 살아가는 타락한 마녀가 되기 전에 인간 허윤환으로 죽는다.

즉, 광검 여체화는 DLC가 아니다.

광검이 자신이 소녀가 된 걸 숨기기 위해 대외적으로 나오지 않아서 그렇지, 이런 식으로 마주칠 기회는 많다.

'공략 대상이기도 하고.'

무엇을 숨기랴. 광검 허윤환-아니 허윤화는 공략 가능한 동료다. 죽어버리지만 섹스는 가능한 동료다.

공략하기 위해서는 40대 남자를 암컷으로 만들 정도의 노오오오력이 필요하지만, 공략 자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왜 광검이 여체가 되는 지에 대해 자세한 스토리가 궁금하신 분은 석하랑 루트 다시 한 번 복습하고 오시고."

- 이건 킹갓위키 켜야함ㅋㅋㅋ

- 석하랑 루트 진입 못하면 못 얻는 정보도 있고

- 안 됨 DLC 스포도 있어서ㅋㅋㅋ

'DLC 스포라고 해봐야 대충 예상은 가지만.'

나는 턱아래까지 차오른 말을 간신히 삼켰다. 그와 사흘간 대화를 나누며, 나는 석하랑에 관한 DLC 요소가 무엇이 있을까 추측했다. 그리고 아주 쉽게 결론이 나왔다.

아나스타샤.

<운디네>라는 이명을 가져야 할 김가온이 새롭게 <세이렌>이라는 이명을 가지게 된 것.

거기에는 내가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했지만, 히어로의 이명에는 정말 큰 의미가 담겨져있다. 아무리 지휘관이라고 한들 쉽게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대충 예상은 가니까 한마디만 할게요. 크흠."

그런 이명이 아주 쉽게 변했다. 마치 '원래 그 이름의 주인이 있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광검 일가에 관한 DLC를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살아카님이 루살계신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나는 내 예상이 맞는 것에 절로 입꼬리가 비틀렸다.

<설야의 루살카>. 내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그녀가, DLC 없데이트를 통해 '죽었던 역사'가 없어진 것이다.

"님들 왜 라스푸틴이 원탁의 히어로가 되었는 지 모르죠? 푸흐흐."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이세계의 비사. 왜 러시아의 원탁 히어로가 라스푸틴이 되었는지는 오직 나만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나만 알고 있던 내용이 게임 속 DLC에 반영된 것이다.

러시아 원탁 잡아먹은 적 있냐고? 사람을 뭘로보고. 나는 사람을 잡아먹지 않는다냥!

아무도 몰래 김펜릴에게 확인했다. 그녀는 살아있다. 그게 아마도 DLC로 추가된 요소 중 하나.

"뭐, 설야의 루살카가 살아있기는 하잖아요?"

- 그 그렇지?

- 아 씨바 죄다 스포덩어리라 어디까지 말해야하지??

-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은데...ㅎㅎ

"글쎄요? 후후, 어느 루살카가 살아있을까요? 아, 이렇게 말하는 것도 스포인가?"

10을 알고, 50을 알고, 100을 알고 있는 이들끼리 서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50을 아는 이들은 10을 아는 이들에게 '석하랑 광검 딸이에요'를 시전하고, 100을 알고 있는 이들은 50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 '석하랑 반인반령'을 시전하고 있다.

'석하랑 엄마 루살카는 아나스타샤에 빙의해서 펜릴에게 잡아먹히지만 게임에서는 그런 일 없이 잘 살아 있는 것으로 추정됨. 나중에 러시아 가면 공략할 예정임.'

루살카를 공략하는 것에 대해서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다. 허락을 구하면 허락해주겠지만, '히로인'을 공략한다는 내 대의명분에 어긋나지 않는다.

"여러분께 약속드립니다. 13번 히로인, <설야의 루살카>를 보란듯이 침대에 눕히겠습니다. 푸흐흐."

- 아 그러니까 누구ㅋㅋㅋ

- 아 그러니까 누구ㅡㅡ

- 아무튼 설야의 루살카인 거임ㅋㅋㅋ

[건어물히로인서카랑쨩] : 방장님 방장님

[건어물히로인서카랑쨩] : 그냥 시원하게 말해주면 안될까요?

[건어물히로인서카랑쨩] : 저 지금 미쳐버리기 일보직전인데

"음...."

과연 말해도 되는 걸까. 나는 잠시 고민했지만, 딱히 방송에 제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분명 '보고' 있을텐데 이쪽에 특별히 터치를 하지 않는 걸 봐선 알려져도 상관 없다는 걸까.

"잠깐만 그러면 히어로 위키 뒤져보고요."

나는 게임 속 히어로 위키에 접속했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고 있는 이름의 여인이 살아있는 걸 확인했다. 큰 상처를 입고 요양 중이라는 걸로 라스푸틴에게 원탁의 자리를 넘겨준 백금발의 여인에 대한 정보가 남아있다.

블라디미르.R.아나스타샤.

게임 속 위키에서 확인 가능한 정보이니, 스포일러해도 괜찮을 것 같다.

"푸흐흐. 님들, 석하랑 엄마 공략하는 거 보고싶어요?"

- ㅖ

- ㅖ

- ㅖㅖㅖㅖ

"흠...그럼."

목표가 하나 생겼다.

"석하랑 엄마, 진짜 설야의 루살카도 같이 공략하죠. 모녀덮밥 콜?"

- \[+]/

- \[+]/

- \[+]/\[+]/

그 누가 감히 거부할 수 있겠는가. 나는 다시 VR기기를 장착했다.

"나중에 하렘루트 밟아서 모녀덮밥 할 거니까 광검은 죽일게요. 아니, 죽도록 내버려둘게요."

- ??

- ???

- ????

"부녀덮밥보다는 모녀덮밥이 더 나으니까요. 어차피 살릴 생각도 없었고."

사실 다른 이유가 있기는 하지만, 그건 굳이 이들에게 말할 이유는 없다.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본인은 아니지만, 쓰레기 주제에 나의 태양에게 쓰레기 운운하던 건 참을 수 없다.

"아무리 몸이 여자라고 한들 제가 외간남자를 건드릴 것 같아요?"

내가 시스템의 일시정지를 해제하자, 세계가 다시 색을 되찾아갔다. 나는 눈앞에 놓인 딸기파르페를 한 숟갈 크게 퍼올렸다. 아이스크림을 퍼올리기 직전 금속 스푼의 안에 비친 모습에 나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푸흐흐."

그, 아니 그녀가 그냥 나왔을 리가 없다. 금발의 소녀는 카페의 음료를 주문하는 척, 나를 눈으로 흘기고 있다.

'딴에 자기 딸 건드리지 않을까 신경쓰는 거죠.'

광검이니 당연히 서울 수복 작전에 딸내미가 누구의 팀으로 등록되었는지 분명 확인했을 것이다. 그리고 예의주시하고 있는, 지휘관일지도 모르는 자의 팀이 된 것에 알게 모르게 신경쓰고 있으리라.

혹시나 지휘관이 석하랑에게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닌지. 미안하지만 이미 수작은 커녕 물밑작업은 끝내놓은지 오래다.

"실례합니다."

"응?"

금발의 소녀는 카페에서 주문한 쌍화차를 든 채 우리에게 다가왔다. 누리는 자신보다 어린 금발 소녀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

"저, 저는 이런 사람인데요."

소녀는 품안에서 명찰을 꺼냈다. 히어로 협회 직원증에는 그녀의 얼굴과 이름 허윤화 석 자가 박혀있었다. 나는 그의 연기에 절로 웃음이 나왔지만 애써 모른척했다.

"무슨 용무시죠?"

"그, 협회에 등록되는 명단에 오류가 있어서요. 다시 확인하고자 왔는데...."

"사장님."

셋의 표정이 잠시 심각해졌다. 우리가 있는 공간이 카페인 만큼, 주변은 탁 트여 다른 사람들도 드나들 수 있는 곳이다. 여기서 허윤화가 '석하랑이요오오?!'라고 외치는 순간, 우리는 엄청난 이목을 끌게 된다.

"예. 확인하시죠."

나는 마도기어를 통해 명단을 전송했다. 허윤화의 마도기어가 반짝이기 무섭게, 그녀의 앞에 홀로그램으로 우리가 등록한 명단이 떠올랐다.

"이상 있습니까?"

"......?"

허윤화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 다른 사람이 등재되어 있는 것에 당황한 티가 역력하다.

"이, 이럴 리가 없는데...?"

감정의 컨트롤조차 속에 들끓는 마력을 억누르는데 집중하고 있기에, 허윤화는 역설적으로 상당히 표정이 풍부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편이었다. 나는 허공에 뜬 명단을 손으로 흐트렸다.

"이상이 없으면 저희 팀원들끼리 이야기를 좀 나눴으면 하는데요."

"아, 네. ......??"

허윤화의 눈은 마지막, 명단의 7번째에 등재되어있는 남자에 고정되어있었다. 애초에 내가 그에게 넘긴 명단은 협회에 들어오면서 제출한 명단이라 오류가 없다.

다른 셋이 아는 것과 다른 게 있다면, 7번째의 '남자'. C급 이능력자. <협상가> 하유준.

"제법 유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혹시 모르시나요?"

"아, 아뇨. 네고시에이터. 잘 알죠. 잘...."

분명 허윤화는 S급 백발 여인을 생각했겠지만 유감이다.

"...실례했습니다."

허윤화는 급히 쌍화차를 들고 사라졌다. 그녀는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순간 마저도 우리를 눈으로 흘기며 의아해했다.

"사장님, 어케 된 거임?"

"여러분이 당황하면 안 되죠...."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셋은 7번째가 바뀐 것에 상당히 당황했다.

"왜 우리가 아는 거랑 다른 거임?"

"그야...."

이런 상황을 예상했으니까. 나는 명단의 일곱번째에 적힌 조폭처럼 생긴 떡대, 하유준을 가리키며 손가락으로 X자를 그렸다.

"7번을 꼭 챙겨야 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7월 7일에 태어난 그녀가 7번의 번호를 받기를 원했다.

* * *

"설화공주 님, 받은 명단 제가 수정하려고 하는데...5번이네요?"

"뭐라고요? ...7번이 아니고 5번? 왜 애매하게 5번으로 배치한 거죠?"

"제가 어떻게 알아요...저도 아직 직접 대화해보지 못했는데."

* * *

"5번으로 등록한 X로이드 유은하. 7번으로 등록한 X로이드 하유준. 그것도 나다."

금발의 망나니는 조용히 커피를 홀짝이며 만족하는 미소를 지었다.

"

* * *

잠시 뒤.

설지영이 직접 명단을 수정하고 난 걸 확인한 나는 일행을 데리고 협회 본부를 빠져나왔다.

"내일은 자유시간이야. 3월 1일에 새벽부터 바쁘게 움직일테니까 다들 하루 쉬고."

"그럼 사장님은 뭐하실 거예요?"

"나? 음...."

혹시나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두 명 중 한 명을 강화시켜놓아야 한다.

"마법소녀 슈트 맞추러 갈 건데?"

"누구요?"

"누구긴 누구야. 당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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