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1화 〉2부 2장 31
A급 괴수 날뛴다고 하여, 그 A급 괴수 한 마리만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으아악!! 괴수들이다!!"
A급 괴수의 이동으로 인해 주변에 살고 있던 괴수들이 움직이는 건 당연지사. 특히 A급 괴수가 날아오는 방향에 있던 괴수들은 죽음의 공포로 인해 이성이 마비되어, 일단 괴수로부터 도망치기 일쑤다.
캬아아악!!
그 중 일부 괴수들이 인간들이 모여있는 강릉시로 뛰어들었다. 대부분 D, C급의 괴수로 도시 근처에는 얼씬도 거리지 않던 괴수들이지만, 그 수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이 강릉시가 당면한 문제였다.
"어우, 좆됐다."
동해대로 7번 국도를 따라 펼쳐진 방위라인에는 이미 긴급소집에 따라 히어로들과 예비군들이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B급 괴수들이 종종 출몰할 때마다 소집된 이들은 아주 신속하게 코어웨폰을 집어들었다.
"저기요, 분대장 아재. 이거 괜찮은 거 맞습니까?"
예비군 철모를 눌러쓴 남자가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마수의 시체로 가공된 탄환을 권총에 집어넣으며, 그는 총구를 긴장된 눈빛으로 유심히 바라봤다.
괴수를 죽이기 위한 총이지만, 마지막 한 발 만큼은 어디로 향할 지 모르는 일이다. 괴수에게 뜯어먹혀 죽는 것보다는 나을테니까.
"괜찮수. 히어로들 안 믿으면 우짤려고?"
예비군들-수비대의 분대장을 맡은 D급 히어로, 박평식은 벌목용 도끼를 움켜쥐었다. 21세기에 맞지 않는 그의 도끼는 시대에 뒤쳐져 있으나, 도끼에 박힌 코어는 반짝이며 도끼날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었다.
"우리 믿으쇼. A급은 A급 나으리들이 처리해주겠지."
"백표는 지금 떡치느라 늦게 온다던데요."
"아, 다 큰 성인이 남친이랑 해돋이 보러갈 수도 있는 거지! 아재들은 젊었을 때 안 그러셨소!"
"그래도 A급 히어로인데...."
"히어로는 뭐 도시에 짱박혀있어야 하나?! 강릉에서 속초까지 금방 올 거요! 우리는 그것만 기다리면 돼!"
박평식은 긴장한 수비대원에게 윽박을 질렀지만, 자신조차 긴장감을 낮출 수 없었다. 고작 D급인 그가 수비대의 분대장을 맡아야 할 정도로, 강릉의 환경은 열악했다.
"젠장...이런 상황에...으잉?"
박평식은 수비대의 앞에 도착한 코스프레 여인들에 기가막혔다. 마법소녀 복장을 한 세 여자는 각자 무기를 움켜쥐고 수비대를 향해 다가왔다. 그들은 전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세상이 아무리 미쳐도 그렇지 이런 시국에-"
"히어로입니다."
"이능력자에요."
"언니들은 D급이고 나는 C급인 거임."
"몰라뵈서 죄송합니다!"
박평식은 바로 허리를 숙였다. 위기 상황에 무슨 정신머리로 코스프레 복장으로 온 거냐고 따질 게 아니라, 코스프레 복장을 입고서도 갈아입을 새도 없이 현장에 달려온 것에 칭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U튜브 촬영중에 왔어요. 복장 이런 건 양해해주셔요."
"아, 예! 물론이죠!"
목숨이 달린 전투에 참여해주겠다는데 복장이 대수일까. 코스프레 섹스를 하다가 급히 달려왔다고 해도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었다.
"저기요. 여러분께 양해 구해도 될까요?"
마법소녀들의 리더로 보이는 아이보리 색의 여인의 고개를 숙이며 박평식과 수비대에 양해를 구했다.
"마도기어에 저희가 애드온 프로그램 하나 보내드릴 거예요. 여러분...저희 믿고 그거대로 따라주시겠어요?"
"분대장. 그...."
수비대원들은 분대장의 눈치를 봤다. 아무리 C급 마법소, 아니 히어로가 있다고 한들 현장의 분대장은 박평식이었다.
"...에이, 그러쇼! 나부터 깝시다!"
"분대장, 믿어도 되는 거요?"
"원래 빠요엔들은 복장 같은 거 신경 안 쓰는 거 모르쇼?!"
박평식이 스스럼없이 나서서 프로그램을 받자, 수비대원들도 하나 둘 프로그램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곧 그들의 마도기어에 홀로그램 디스플레이가 눈 근처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아, 마이크테스트. 마이크테스트. 오늘 날씨는 맑음. 간단하고 빠르게 말씀드립니다. 제 말대로 하시면 살고, 아니면 여기 뚫리고 다같이 죽는 겁니다.]
다소 강압적인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수비대원들이 불만을 드러낼 틈도 없이, 산을 타고 내려온 괴수들이 도로에 설치된 울타리로 달려오고 있었다.
[마법소녀들은 각자 위치로. 사수들은 목표 지점에 총구를 겨누고 사격 준비.]
세 마법소녀가 산개하자마자 수비대원들의 홀로그램에 붉은 원이 떠올랐다. 3, 2, 1 카운트까지 떠오르는 바람에, 수비대원들은 자신도 모르게 총을 들어올렸다.
[안 쏘면 퇴소입니다. 발사.]
타다다당---!!
수비대원들은 자신도 모르게 방아쇠를 당겼다. 홀로그램으로 전해진 목소리에는 따르지 않으면 큰일날 것만 같은 마력이 담겨있었고, 홀로그램이 지정한 장소를 향해 쏜 마탄이 허공을 갈랐다.
"어, 어어?!"
청록색 장신의 마법소녀와 흑색 단신의 마법소녀가 화망의 사이로 파고들었다. 마탄에 스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하기도 잠시, 마법소녀들을 가로지른 탄환의 앞에 괴수들이 나타났다.
투두두두!
마치 괴수들은 마탄에 일부러 맞으러 오기라도 한 듯, 전신에 마탄을 두드려맞았다. 가장 선두에 있던 몸 길이가 50cm나 되는 장수말벌 괴수는 아무렇게나 쏜 줄 알았던 K-2 마탄에 뿔이 부서졌다.
[<야황>이 날개를, <청운>이 코어를.]
흑색 마법소녀가 청록색 마법소녀의 어깨를 디디고 마력이 담긴 칼을 크게 휘둘렀다. 말벌의 날개가 싹둑 잘려나감과 동시에, 아래에 있던 청록색 마법소녀가 말벌의 몸통을 향해 창날을 찔렀다.
콰득!
창날의 끝에는 말벌의 심장과 함께 코어가 박혀있었다. 순식간에 두 마법소녀는 괴수를 죽이고 코어를 회수하여 자리를 벗어났다.
[원호사격 개시. 아래에서 한 놈 나옵니다. 4, 3, 2-]
구구구.
바닥에서 진동이 울려퍼졌다. 사수들은 재빨리 마탄을 장전하고 총구를 겨눴다. 눈앞의 홀로그램은 그들이 사격해야 할 곳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다.
두두두.
다시 마탄이 화망을 펼쳤다. 땅 위를 긁는듯한 탄환은 튕겨나가는 게 아닐까 싶었으나-
키에에엑!
막 바닥을 뚫고 뛰쳐나온 거대 지렁이 괴수의 입속을 정확히 타격했다. 호기롭게 튀어나온 괴수는 나오자마자 총알 세례를 받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성녀>, 포격개시.]
후방에 있던 아이보리색 마법소녀가 지팡이를 높이 치켜들었다. 지팡이 끝에 달린 코어가 금빛으로 반짝이기 무섭게 마력의 포탄이 하늘로 튀어올랐다.
휘이이---
투포환처럼 날아간 포탄은 포물선을 그리며 정확히 지렁이 괴수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괴수는 급히 입을 닫고 땅속으로 숨어들려고 했으나, 마탄에 금빛이 폭발하며 땅이 크게 울렸다.
푸쉬이.
땅속에서 흙먼지가 일었다. 박평식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전율했다.
"씨, 씨발 저거 C급...?"
[여러분.]
위압적인 청년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오더 들으면 살아남습니다.]
"......."
박평식은 자신의 눈앞에 씌워진 홀로그램 창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 * *
"이야, 게임 참 쉽다."
"당신은 이게 게임인가요?"
"지휘관들 모두가 게임하는 감각으로 이능을 사용하니까요. 뭐...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에 대한 방어기제 같은 거라고 해야하나."
나는 휴식을 위해 잠시 이능을 해제하고 위성 지도를 살폈다. 미니맵처럼 꾸며진 강원도의 위성 지도에는 괴수들의 움직임이 붉은 점으로 시시각각 움직이고 있었다.
"1분 뒤에 하나 오고...5분 쉬면 되겠네요."
"지휘관에 대한 환상이 이상하게 깨질 것 같네요. 하아."
유하는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나는 트럭 앞좌석에서 지휘관으로서의 지시를 숨김없이 전력으로 발휘했고, 덕분에 우리가 있는 라인의 괴수들을 아주 손쉽게 막아냈다.
"결과가 좋으면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이런 장비로 이런 전과를 내놓고는 뭐요? '눈에 안 뛰는 걸 목표로 한다?'"
"뭘요? C급 이하 이능력자 넷. 코어웨폰을 든 예비군 병사들. 그리고 위성지도만 있으면 누구든 할 수 있어요."
"사람들한테 일일이 사격지시까지 내렸잖아요. 어디어디로 쏴라고."
"그 정도는 다들 기본으로 하는 거 아닙니까?"
유하는 콧방귀를 뀌었지만 나는 전혀 대수롭지 않았다. 원래 지휘관은 단순히 7명의 소수 인원만 오더를 내리는 사람이 아니라, 전투 전체를 아우르는 총사령관의 역할도 겸해야한다.
'이 정도도 못하면 진엔딩 못 보지.'
나중에는 천, 만 마리를 상대로 해야하는데 어떻게 이 정도 실력도 없이 게임을 클리어할 수 있을까. 나는 텀블러에 든 딸기 에이드를 가볍게 홀짝이고 다시 <지휘관>의 이능을 발현시켰다.
"아아, <야황>은 여기에 칼질. 사수는 지정 위치에 사격."
잠시 소강상태에 이르렀던 수비대를 향해 공중에서 독수리 괴수가 습격했다. 누리가 뛰어올라 칼을 긋자 독수리 괴수의 발톱과 불똥이 튀었고, 사수들은 급히 괴수를 향해 마탄을 쏘았다.
끼이익.
독수리 괴수는 마탄에 벌집이 되어 고꾸라졌다. 나머지는 굳이 지시하지 않아도 알아서 갈무리를 할 터. 나는 위성지도를 확인하고 내 지시가 닿는 이들에게 오더를 내렸다.
"4분 정도 휴식. 다음 웨이브 도달까지 심호흡하세요."
나는 적들의 움직임을 읽고 홀로그램 창에 카운트다운을 남겼다. 정확히 4분에 이르기 전, 수비대의 시야에 한 무리의 괴수들이 보일 것이다.
"중앙에서의 움직임은 어떻게 됐죠?"
"A급 셋이 급히 강원도로 파견되었어요. 신서울에서 강릉까지 가려면...적어도 1시간은 걸릴 겁니다."
"그럼 한 시간 안에 인면조를 잡아야한다는 건데."
"그건 좀 자신감이 과한 거 아니신가요, 고객님."
유하는 자신의 마도기어를 통해 강릉 전선의 전황을 알렸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패닉에 빠졌고, 그들을 관리해야할 강릉 지부 히어로들도 패닉에 빠져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강릉에 있는 히어로의 수가 50명이 채 되지 않아요. 심지어 B급은 8명, A급은 단 2명. 이런데도 그...보디가드 분을 쓰지 않고 이길 수 있다고요?"
"물론."
나는 펜릴을 뒷자석으로 보내고 조수석 밖으로 나왔다. 유하 또한 운전석에서 내려 내 옆으로 다가왔다.
"왜 못 잡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A급 두 명이서 잡을 수 없을 만큼 강하니까요."
"그 이유는?"
"그야 그만큼 데미지가 안 나오니까!"
유하의 지적은 타당했다. RPG 게임에서 레벨이 깡패인 것처럼, A+급인 괴수에 대해서 딜을 넣으려면 최소 그에 준하는 수준의 힘이 필요했다.
"이능력자는 없어도 코어웨폰이 있잖아요. 예비군들 가지고 있는 K-2만 하더라도 최소 탄창 한 개 정도는 마탄이 지급되어 있을텐데."
"그건 C급에게나 간신히 통하는 거고, A급에게 통하려면 적어도 대물저격총 정도는 되어야-"
"짜잔."
나는 코트에서 유하가 언급한 대물저격총을 꺼냈다. 형태는 권총이기는 하지만, 파괴력만큼은 대포라고 해도 무방한 지휘관 전용 무기.
"저기요. 그 코트 안에서 어떻게 그런 총이 튀어나오는 거죠?"
"남자는 모두 이 정도 총기를 숨기는 주머니가 있기 마련입니다. 후후."
냐아.
나는 펜릴의 울음소리에 맞춰 총기 끝을 가볍게 튕겼다. 뚜껑이 열리자, 안에 들어있던 황색 마탄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유하 양, 인면조 마력 패턴 검사는 아직이에요?"
"제가 협회 사람도 아니고...중앙에서도 아직 파악 중이에요."
협회 사람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유하는 협회의 정보를 시시각각 내게 전했다. 협회 안에도 X로이드는 배치되어 있고, 협회의 지휘 본부에도 X로이드가 숨어들어있으니까.
"그보다 지...고객님은 저런 적 처음이에요?"
"제 데이터베이스에는 없는 적이네요. 정보를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니, 정보를 얻자고 그런 게 아니라! 고객님도 모르는 적이면 위험한 거 아니냐고요."
"에이, 위험하기는. 목숨이 위험할 일은 없어요. 이 싸움에서 '제'가 얼마나 드러나냐 하는 문제지."
마법소녀 코스프레를 한 평균 D급 이능력자 셋이 전선에서 활약한 건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날 것이다. 사람들의 이목은 A급 괴수가 쓰러진 것에 쏠리게 될 테니까.
"우리 애들은 그냥 경험만 쌓으면 됩니다. 코스프레가 취미인 히어로들이 현지에서 바로 싸운 것 정도는 이슈도 안 되요. 오히려 좋은 이미지가 생길 뿐."
"그건 그렇지만...."
"그리고 하나 더. 저희 애들만 지휘하는 걸고 제 능력이 끝이라고 생각했습니까?"
"......?"
나는 마도기어를 두드려 '한 여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나다. 지휘관."
"......!!"
경악하는 유하의 입술에 나는 검지를 붙였다.
"어디 한국 히어로들이 협회장 말 얼마나 잘 듣는지 볼까?"
[지, 지휘관 님!]
A급 히어로, <나이트메어> 설지영. 한국 히어로 협회 협회장.
이미 그녀는 내 정체를 알고 있는 이상, 굳이 내 정체를 숨길 필요는 없었다. 그녀에게는.
"나 이번 일로 서프라이즈 깨지는 거 싫어해. 내가 오더내리는 거 전부다 네가 지시하는 거다. 알겠지? 나머지는 문자로 보낼테니까 알아서 해라."
[네, 네! 저기, 지휘관님! 제가 모시러-]
뚝. 나는 설지영과의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었다.
"...그 사람, 어쩌면 저보다 더 높은 급이라는 거 아세요?"
"몰라요. 어차피 관심도 없으니까."
"왜요? 제법 예쁜 여자인데. 여자면 껌뻑 넘어가시는 거 아니었어요?"
"여자도 여자 나름이죠."
히로인 이외에는 관심없음. 히로인과 관계된 여자 이외에는 관심없음. 설지영과의 성행위는 이미 그의 데이터에 남아있다. 굳이 설지영에게까지 문어발을 뻗을 이유는 없다.
'설지영이랑 해서 그게 우리 애들한테 도움이 된다면 모를까.'
나는 속으로 웃으며 주머니에서 새로운 마탄을 꺼냈다. 태풍이 땅을 할퀴고 지나간 듯한 상처가 새겨진 녹색 마탄이었다.
"김펜릴, 이리와."
냐아아.
펜릴은 창문을 타고 넘어 내 앞에 섰다. 나는 그녀의 등에 총을 걸쳐놓았다.
"막타 알지?"
냐아아.
펜릴은 총을 등에 매고 숲속으로 사라졌다. 유하는 제 몸만한 총을 꼬리로 지탱하고 숲속으로 사라지는 펜릴을 유심히 지켜보다 손뼉을 쳤다.
"아하! 저 고양이가 뭐 사역마같은 거죠?! 보디가드 분에게 시킨 거예요."
"17점 만점에 16점."
고양이가 그 보디가드라는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어, 아닌가? 고양이가 보디가드인가요? 그럼...설마 고양이에다가 박-"
"그런 식으로 정보 캐낼려고 하는 거 다 안답니다."
"쳇."
속이 읽힌 유하는 진심으로 짜증을 부렸다. 나는 그녀를 향해 싱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17점 만점에 17점."
"...저, 저기요?"
유하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고객님, 진짜로 고양이에다가 마력공급을 하신 건...아니죠?"
"푸흐흐."
나는 그저 웃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