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626화 (626/1,497)

〈 626화 〉2부 2장 26

<그 시각, 신서울 오라클 스튜디오.>

"마법소녀...."

선겨울은 절망했다. PC에 저장된 수십가지 시나리오는 스튜디오에서 촬영할 온갖 주제를 담고 있었다.

그 중에서 선겨울은 두 가지의 시나리오를 제안했다.

하나는 한국에서 촬영을 하니 한국적인 색체가 들어간 고대 무사 시나리오. 화랑이나 조의선인 등을 모티프로 삼은 여성용 배틀 슈트는 제법 그럴듯 해보이기도 했다.

또 하나는 세기말 아포칼립스를 배경으로 하는 생존물 시나리오. 오염된 마력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한 배틀 슈트는 군대를 연상케하는 느낌이 강했다.

선겨울은 최소한 둘 중 하나가 될 줄 알았다.

- 시대는 마법소녀를 원하고 있다.

하지만 백청화는 선겨울이 전혀 예상치도 않았던, 답정너에 가까운 말로 마법소녀 이야기를 선택했다. 특정 취향의 이들에게 강력하게 어필하는 느낌이 강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마법소녀 옷을 입혀놓고 하고 싶은 건가...."

"맞을 걸요?"

"힉."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혼잣말에 답이 돌아왔다. 사무실에 다른 이도 있다는 걸 까먹은 선겨울은 가온의 눈치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아, 제, 제 말은 그러니까 영화 촬영을...."

"영화 촬영 내용 중에 그거 하는 것도 있는 걸요. 괜찮아요. 저도 같은 생각이니까."

"...역시 그렇죠?"

김가온은 다소 씁쓸한 얼굴로 소파에 쭈구려 앉아있었다. 백청화와 둘이서 따로 움직이며 코어를 벌어들일 때는 기분이 좋았지만, 이렇게 혼자 낙오되는 느낌이 드니 기분이 다운된 것이다.

"저, 가온 씨. 네 분은 괜찮을까요?"

"네. 사장님이 자기 몸보다 자기 여자들 잘 챙기니까요. 적어도 셋이서 감당하지 못할 괴수는 상대 안 할 거예요."

"그렇다면 다행이기는 한데...."

선겨울은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떠올렸다. 백청화 나름 지휘를 내리며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세 명의 이능력자. 그리고 그들의 나풀거리는 마법소녀 복장....

"......쓰읍."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왜 하필 마법소녀란 말인가. 정말로 마법소녀로 분한 그들에게 박고 싶어서 그런걸까?

"세 명이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앞으로 마법소녀 복장을 입고 사람들 앞에 서야하는 거잖아요."

"...? 겨울 씨도 마찬가지 아녜요?"

"네?"

선겨울의 손이 잠시 멈췄다가, 마도기어를 두드려 가온이 백청화와 함께 코어를 벌러갔던 사진을 꺼냈다.

"가온 씨는 군복 타입이잖아요?"

김가온, <세이렌>의 배틀슈트는 자신이 원래 사용하던 디자인과 가장 비슷한 유성의 기성품이었다. 140cm의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백청을 기조로 한 군복은 A급 이능력자의 카리스마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저도 분명 기성품...."

"아뇨. 겨울 씨는 사장님이 특제품으로 주문했어요."

"......."

"조금 부럽네요. 겨울 씨도 이걸로 마법소녀에요."

"......."

때려칠까.

선겨울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좌절했다.

* * *

“모두 진정해. 이게 다 외부의 이목을 숨기기 위함이니까.”

나는 일단 셋을 캡슐 옆에 앉혀놓았다. 한 차례 실랑이를 벌일 뻔 했지만 갑은 나다. 그리고 이런 불만을 다스릴 줄 알아야 진정한 지휘관이다.

“일단 우리는 어떤 명목으로 여기에 왔지?”

“괴수 잡으러 왔죠.”

“그래. 하지만 우린 정식으로 등록된 헌터 길드나 히어로들이 아니야. 협회에 협조 요청은 받았지만, 아직까지는 그렇지. 설령 내가 지휘관인 걸 협회 전체가 알게 되더라도 마찬가지야.”

3월 1일 이후로 지휘관이 한국에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지휘관이라고 대놓고 광고하고 다니지는 않는다.

“지금도 내가 정체 숨기고 다니느라 급급한데, 지나가는 사람들까지 내 정체를 알면 어떻게 되겠어?”

중요 인사들에게만 내 정체가 드러날 뿐, 일반 대중을 상대로는 여전히 나는 오라클 스튜디오의 일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어차피 나중에는 정체가 밝혀질 거야.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본격적으로 정체가 드러나는 건 혼돈환룡 챕터의 만리행, 그리고 설야의 루살카 챕터의 부산 학살. 최소한 8월은 되어야 내 정체가 민간에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정체를 숨기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달려들 거야. 나랑 섹스하려고 들 거라고.”

“그건 안 되죠.”

“거기에는 공감합니다. 하지만.”

“그게 왜 초딩들 애니에나 나올 법한 거임?”

셋은 각자 자신들의 옆에 놓인 배틀슈트(ver.마법소녀)를 가리켰다.

파스텔 톤을 기조로 한 마법소녀 코스튬은 유나의 경우 아이보리, 라온의 경우 청록, 그리고 누리의 경우 검정을 베이스로 디자인이 되어있었다. 셔츠는 하얀 와이셔츠 타입에 각자의 색에 맞는 스타킹과 가터벨트는 덤.

“누리야, 바로 그거야. 우리는 오라클 ‘스튜디오’니까!”

“......이런 미친.”

셋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리고 내가 하려는 말을 바로 깨달았다.

“우리 영화 그런 장르였음?”

“리리컬 매지컬한 세계라는 거지.”

나중에 가면 택티컬도 추가될 수 있겠지만, 당장 우리가 대외적으로 촬영하고자 하는 영화는 마법소녀 물이다.

“<마법소녀 매지컬 큥큥스>. 일단 이건 가제니까 그렇게 알아둬. 주연 배우는 당연히 너희야. 어느날 생긴 마법의 힘으로 마법소녀가 된 너희가 지구의 위협이 되는 괴수들을 물리치러 다니는 거지.”

“...환상으로 싸우는 게 아니라 실제로 싸우는 거잖아요.”

“그래. 근데 그걸로 부담은 가지지마. 싸울 때는 현실적으로 싸우고, 나중에 후시 녹음하면 되니까.”

현장에서는 ‘딜! 딜! 언니, 그쪽으로 괴수 빠져요!’라고 외칠지 몰라도, 영화 속에서는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를 외치게 될 것이다.

“그럼 사장님은 무슨 역할을 하시는 겁니까?”

“너희들의 딜도 토템? 버프를 걸어주는 역이지.”

실제로는 내가 지휘를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영화 속 주인공인 백청화는 ‘힘내! 나는 널 믿어!’와 같은 응원단장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영화 촬영의 로케로 괴수 잡으러 다니는 줄 알 거야. 흐흐흐.”

완벽한 작전이다. 셋은 복잡한 얼굴로 슈트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원래는 A급 배틀슈트라는 거 아님?”

“응. 개조비용까지 벌당 500억이야.”

“500억짜리 마법소녀 옷….”

라온은 이미 해탈했다. 다른 둘보다 훨씬 연ㅂ-

“입도록 하죠.”

라온은 나를 슬쩍 눈으로 흘긴 뒤 솔선수범하여 캡슐을 열었다. 안에 그녀의 신체 사이즈에 정확히 맞춰 제작된 배틀 슈트가 드디어 주인의 손에 들렸다.

“사장님. 일단 갈아입어야하니 나가주시겠습니까.”

“물론.”

나는 트럭에서 빠져나와 문을 잠궜다. 들어갈 때는 츄리닝이지만 나올 때는 마법소녀가 되리라.

“겉을 호박마차로 칠해버릴까?”

“그건 그다지 추천하지 않는데요.”

은근슬쩍 다가온 유하X는 금빛의 안광을 흩뿌리며 낮게 말을 걸었다. 셋이 옷을 갈아입고 있는 동안, 나는 유하와 가벼운 이야기를 나눴다.

“저는 동료가 되더라도 싸우지는 않을 거예요. 저런 거 입고 싸울 거면 차라리 다른 거 하고 말지.”

“악의 조직 간부 컨셉은 어때? 검은색이랑 자주색을 베이스로 한 섹시 컨셉.”

이유나부터 백희아까지. 다크 레기온의 간부 컨셉으로 다들 스킨이 하나씩 있다.

심지어 괴인화 모드를 가정한 풀플레이트 갑옷 식 배틀슈트도 있다. 당연히 나는 그들에게 택티걸한 섹시 코만도 ‘간부’ 슈트를 입힐 것이다.

“세상 사람들한테 당신이 지휘관인 걸 무조건 숨겨야겠네요. 이런 개변태인 걸 알면 분명 실망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겁니다.”

“실망했어? 걱정마. 돈 좀 모이면 컨셉별로 한 벌씩 새로 주문할 거니까. 이번에 돈 더 벌면 A급 나이트드레스 슈트는 어때?”

“사랑합니다, 고객님.”

수요가 있으면 공급도 있는 법. 돈만 주면 뭐든지 해주는 유하는 마법소녀 컨셉의 배틀슈트도 얼마든지 만들어줬다. 다른 슈트, 스킨도 얼마든지 만들어 줄 것이다.

“그럼 고객님, 질문있습니다. 마스코트는 누가 합니까?”

“마스코트?”

“마법소녀들 보면 보통은 다 작은 짐승들 데리고 다니잖아요.”

“흐흐, 그렇지.”

짝.

나는 손뼉을 쳤다. 그러자 숲속에서 상쾌하고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고양이면 괜찮지 않을까?”

늑대지만.

***

DLC.

풀프라이스로 게임을 샀음에도 불구하고 추가로 돈을 주고 게임에 필요한 요소를 구입하게 만드는 만악의 근원.

게임사 입장에서는 수익창출모델 중 하나지만, 거지같은 DLC를 판매하는 건 그야말로 돈독이 오른 행위나 마찬가지다.

<푸른 하늘의 데스디나스>는 이런 수익창출 모델에서 상당히 특이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상대적으로 능력치가 떨어지는 히어로, 이능력자들에 대한 보정 아이템-전용장비의 추가, 비 히로인 엑스트라 동료 추가, 다회차 전용 난이도 추가, 히로인 별 이벤트 추가, 히로인 후일담 추가.

돈을 받고 팔아도 몇 배는 벌었을만한 요소들을 무료로 업데이트했다. 거기에 화룡정점으로, 2.0이라고 할만한 없데이트는 뭔가 요상한 가격 책정인 2000원으로 판매가 이루어졌다.

피닉스 루트가 사라졌기에 개쓰레기 없데이트라고 사람들은 평가하지만, 게임의 확장팩 수준에 이르는 없데이트를 고작 2000원에 판매하는 가격정책에 플레이어들은 놀랐다.

동종 게임업계에서는 제작사에 대해 상도덕도 없는 놈들이라며 비판하지만, 제작사도 다른 업계 못지 않은 확실한 수익 창출 모델을 가지고 있다.

스킨(Skin).

동료 캐릭터들에게 입혀주는 옷.

스킨을 입는다고 하여 방어력이 늘어나거나 마력이 상승하거나 하는 일은 일절 없이, 오직 눈요기만을 위한 아이템.

그 아이템을 통해 제작사는 막대한 수익을 얻어냈다. 애초에 수익이 많을 수밖에 없다.

-히로인 16명인데 이 중에 한 명은 스킨 사게 되어있다ㅋㅋㅋ

히로인만 16명-사실은 17명이지만-에 해당하는 만큼, 히로인별로 한 벌씩 스킨이 나와도 16벌이나 나오게 된다. 심지어 그걸 컨셉별로 몇 벌이고 찍어내니, 플레이어들은 구입을 하지 않을래야 구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앜ㅋㅋ 라온이 여고생 교복은 못 참지.

-19금 미연시 게임에 코스프레 섹스를 돈주고 사게 하는 개 악랄한 새끼들.

-히드라 밀프 스킨 ㅗㅜㅑ

코스프레 섹스. 본편에서 제공하는 온갖 종류의 의복 이외에 제작사 측에서 추가로 찍어내는 의복들은 당연히 플레이어들의 구매욕구를 불태웠다.

그리고 그는, 피닉스는 모든 스킨을 가지고 있었다.

혹시나 스킨을 모두 구입하는 것이 피닉스 루트를 개방하는 조건이 아닐까하는 생각에 구입했다고 했고, 당연히 내가 이어받은 세이브데이터에도 DLC로 구입한 스킨들이 남아있다.

“예. 올스킨인 것이에요."

그중에서 나는 외계의 존재로부터 세계를 구할 이들에게 가장 걸맞는 스킨을 방어구에 덮어씌웠다.

유성의 커스터마이징이라는 명목으로 구현되는 스킨은 인게임의 방어구와 똑같은 능력치를 가지고 있으나, 외형만큼은 말 그대로 스킨이었다.

“히로인 16명 전부 1차 복장은 마법소녀로 달립니다.”

처음부터 충격과 공포의 의복을 입어야 나중에 더한 복장에도 익숙해질 수 있다. 마법소녀 컨셉의 복장은 약과 중의 약과일뿐.

마법소녀 매지컬 큥큥스.

“가터밸트 채운 하얀 스타킹 위에 프릴 치마 위로 살짝 들쳐올리고, 흰장갑으로 부끄러워하는 얼굴을 가리고 있는 히로인 애들의 안에 박고 싶은 것이에요.”

그런 의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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