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8화 〉2부 2장 13
"응, 유나야. 별 일 아니야. 그냥 앞으로 자주 겪게 될 소동 같은 거니까 너무 신경쓰지마."
지휘관의 일상은 습격당하는 것.
오히려 습격이 지금까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 이상한 감이 없잖아있다. 비록 내가 최선을 다해 요주의 인물들을 피해다녔을 지언정, 분명 습격은 사흘에 한 번 꼴로 이루어지는 게 기본이었다.
'첫 스타트가 라스푸틴이라니. 이거 의외로 기분 좋게 시작하는데.'
대외적으로는 그저 외국인 괴인이 난동을 부린 것으로 될 것이다. 심지어 그것도 관계자만 아는 걸로 끝날 것이며, 은유하는 유성 매장 내에서 벌어진 사태에 대하여 간단한 해프닝 정도로 여론을 속일 것이다.
[사장님, 혹시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하세요! 구하러 갈게요.]
"응, 그래. 고마워. 조사 끝나면 바로 연락 넣을게."
나는 유나와 대화를 마쳤다. 내 앞에는 나를 심문하기 위해 온 세 명의 여자가 나를 눈으로 압박하고 있었다.
시설 책임자이자 유성의 관계자로 나온 X로이드-유하D.
한국 히어로 협회 협회장, 나이트메어 설지영.
그리고 대괴수대책부 차관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는 강소연.
'마지막이 청송이지.'
<문신사>라는 이명이 더 익숙한 그녀는 협회에서 나와 정부의 주요 요직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는 괴인도 괴인이지만, 괴인의 습격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한 여인 때문이었다.
"유성의 X로이드가 비상통로로 안내를 했지만 적 괴인이 쫓아왔고, 자신은 그저 선겨울 씨를 데리고 도망쳤을 뿐이다?"
"예. 괴인이 누구를 노리든 간에 여자 분을 혼자 내버려두고 도망칠 수는 없잖아요."
"그럼 다음 질문. 괴인은 어떻게 소멸한 겁니까?"
"그건 저도 모릅니다. 뭔가 쿠아아앙----하는 소리가 울리는 바람에 정신을 잃었고, 눈을 떠보니 이렇게 되었을 뿐입니다."
나는 손을 들어올리며 내 손목에 채워진 수갑을 어필했다. 설지영은 다소 불편한 눈빛을 보냈지만, 곧 표정을 굳건히 하며 나를 추궁했다.
"정말 그것이 사실입니까?"
"제가 뭐라고 거짓말을."
"...뭐라도 되니까 거짓말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후후, 그럴리가요. 저는 그저 한국에 새로운 인재를 발굴하기 위해 미국에서 날아온 스카우터일 뿐입니다. 인류 역사상 둘도 없을 프리 마돈나를 찾으러 온 프로듀서기도 하죠."
셋은 어렴풋이 내 정체를 알고 있다.
은유하는 애초에 내가 노골적으로 정보를 알렸고, 설지영 또한 협회장인 만큼 미국 협회로부터 들은 정보가 있다. 강소연은 직접적으로 정보를 듣지는 못했을테지만, 우회적으로 내 존재를 알아챘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자리 말고 둘이서 오붓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장소가 좋을 것 같습니다만...."
"하, 지금 추파를 던지는 거예요? 누구한테?"
"세 분 다요. 매력적인 여성을 두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나는 어이없어하는 강소연에게 윙크를 날렸다.
무엇을 숨기랴. 문신사도 동료로 영입은 할 수 있다. 단지 히로인이 아니라서 그렇지, 일단 스토리 상 보스급에 해당하는 메인 빌런이더라도 영입은 가능하다. 조건이 몹시 까다롭고 후폭풍이 장난 아니어서 다들 영입을 꺼릴 뿐.
"그보다 선겨울 양은 괜찮습니까?"
"당신의 등은 괜찮을 것 같습니까?"
"아, 이거요? 조금 욱씬거리기는 한데 괜찮습니다. 포션 좀 바르고 힐링 마법 받으면 괜찮아지니까요. 이미 조치를 받았지 않습니까?"
나는 등에 기다란 자상을 입었다. 그건 괴인 즈메이로부터 얻은 상처가 아니라, 내가 펜릴에게 부탁하여 일부러 맞은 상처였다.
"어쩌다가 입은 상처입니까?"
"음...선겨울 양 지키려다가 저도 모르게 그만. 하하, 생각해보니 엄청 위험했네요. 그래도 살아남았으니 다행입니다. 선겨울 양은 괜찮으시죠?"
"물론입니다. 지금 병원에서 요양중입니다. ......다만."
설지영이 복잡한 얼굴로 내게 동영상 하나를 건넸다.
그곳에는 좌우로 코트가 벌려져, 알몸이 된 선겨울의 위에 내가 가슴에 얼굴을 박고 엎어진 모습이 담겨있었다. 선겨울은 의식을 차리자마자 설지영의 앞에서 어쩔줄 몰라하며, 내 등에 난 상처를 가리키며 119를 외치고 있었다.
"손은 가슴을 움켜쥐고 있고, 얼굴은 가슴골 사이에 엎어져 있고. 이런 자세가 정말 그녀를 구하려고 하는 자세인지?"
"우연입니다. ...아니죠, 어쩌면 필연일지도 모르겠네요. 생물로서 당연한 반응일 겁니다. 만약 제가 그 때 제정신이었더라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
내 말에 세 여자들의 표정이 기괴해졌다.
"죽기전에 여자 구하는 목숨값으로 가슴 한 번 만지고 가는 정도는 괜찮지 않겠습니까? 하하, 그래도 어쩌다보니 살았네요."
"......당신은 선겨울 양이 누구인지 알면서 그런 얘기를 하는 겁니까?"
강소연이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정부 측 인사로서 선겨울의 배경이 누구인지 추궁하는 눈빛이었다.
"예, 잘 압니다. 덕분에 더욱 잘 알게 되었죠."
"무엇을요?"
"겨울 양의 마음씨가 상냥하다는 것? 영상 보세요. 지금 의식을 차린 것 같은데 저를 내팽겨치지 않고 제 상처부터 보고 계시잖아요. 진짜 천사인 줄. 역시 마음이 넓어서 그런가?"
"...큿."
A듀오는 입술을 깨물며 나를 노려봤다. 이 자리에서만큼은 당당한 유하'D'는 고개를 치켜들며 내게 새로운 서류를 꺼내들었다.
"이번 일로 인한 유성의 피해 액수입니다."
"......2천억?"
시설 보수비, 파괴된 X로이드, 기타 등등 모든 것을 포함한 피해액은 얼추 2천억에 육박했다. 나는 마치 일부러 노린듯한-아니 노렸다. 유하D는 나를 또렷하게 노려보며 내게 거래를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유인지는 저희도 모르겠지만, 고객님으로 인해 벌어진 소동이라는 건 확실합니다. 맞습니까?"
"그건 부정할 수 없죠."
나는 피해자일 뿐이지만, 소동이 일어난 장소가 유성의 시설이 된 원인은 분명 내게 있다.
하필이면 내가 가온을 데리고 유성의 슈트 매장을 찾은 이 날, 괴인들이 우리를 습격했으니.
"이번 사태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정부 측에서는 당연히 거절, 협회 측에서도 2천억이라는 어마어마한 손실에 대해서는 5할 정도밖에 변제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
설지영이 입술을 깨물며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양 옆으로 짜증을 마구 내며 분을 삭히고 있었다. 아마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지금 지휘관 님을 상대로 무슨 짓을 저지르냐고.
"과연. 협회에서 1000억이나 지원해주신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아, 네! 저희 협회에서 당장은 동원 가능한 최대 자금이...그렇습니다."
"멋지군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이건 저로 인해서 벌어진 일이니까요."
천억이라는 거금에도 불구하고, 나는 협회의 지원을 거절했다.
말이 협회의 지원이지, 저 천 억은 사실상 설지영을 비롯한 호구같은 히어로들이 불쌍한 외국인을 위해 십시일반하여 모은 돈이 틀림없었다.
'내가 이래서 한국 히어로들 모질게 대하지를 못하겠다니까.'
석하랑도 그렇고 협회에 소속되어있는 한국 히어로들은 헬조선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해외로 빠져나가지 않은 착한 호구들이다. 그런 호구들의 눈물 젖은 돈을 저 자본의 망령을 위해 갖다 바칠 수는 없다.
"2천억이라고는 해도 저로 인해 벌어진 문제. 제 몸으로 갚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그건. 잠시만요. 이건 어디까지나 러시아 측으로 인해 벌어진 문제입니다. 그걸 개인이 변상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괜찮습니다, 협회장 님. 이런 일에는 익숙하니까요."
셀프 호구 인증을 통해 협회장과 은유하의 호감을 따낸다. 그리고 문신사가 가진 경계심을 낮춘다.
자신으로 인해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어떤 책임이든 지려는 자.
그 이미지를 심어줌으로써 앞으로 있을 1년이 조금이나마 편해진다면, 2천억이 아니라 조 단위의 자금이라도 나는 동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만큼 돈이 없습니다. 본사에서도 지원 가능한 자금에는 한계가 있고요. 그러니까 유성 측에 제안합니다."
나는 2천억을 변제하기 위해, 은유하에게 딜을 걸었다.
"회장님을 뵙고 싶습니다. 유성의 회장님을."
* * *
<잠시 뒤, 대전 모 연구단지 지하실.>
"와, 소름돋아. 나 거기서 한 마디도 제대로 못하고 나온 거 알아요? 나한테 어떻게 말할 기회도 안 주더라니까. 은근슬쩍 양쪽에서 막 견제하고 차단하고."
"어쩌라고요."
선겨울을 날선 목소리로 답하며 커피를 홀짝였다. 달짝지근한 캬라멜의 향기가 연구실을 가득 채웠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라에서 아무것도 지원하지 않냐고 투정 정도는 부릴 수 있는 거 아니에요?"
"헬조선에서 무슨. 애초에 정부 측에서는 아무 것도 지원하지 않겠다고 강짜를 부린 게 잘못이죠. 우리는 괴수대책부니까 괴인이 부린 난동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겠다?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뭐...저는 알 바 아니고."
강소연은 손을 흔들며 커피를 들이켰다. 선겨울의 것과는 다른 진한 블랙의 향기가 그녀의 폐부를 찔렀다.
"그래서 오늘 직접 뵈니까 어떤 기분이에요?"
"...글쎄요. 종잡을 수 없는 사람?"
"어떤 의미에서?"
"예상을 벗어나는 행동이 한 둘이 아니에요. 괴인이 습격을 한 것도 예상외인데, 거기서 저지른 행동들이...하아."
선겨울을 강소연이 얻어 온 영상을 살피며 인상을 찌푸렸다. 남자, 지휘관은 말그대로 은근슬젖 자신의 가슴을 움켜쥔 채 기절해있었다.
"저거 다 개구라에요. 갑자기 나한테 입혔던 코트에서 총을 꺼내더니 그걸로 괴인을 일격에 날려버렸다니까요? 물론 그 전에 괴인이 상처를 입기는 했는데, 바로 '컷' 하더니 괴인이 잘려나갔다고요. 곁에 S급 수준인 것 같은 보디가드를 데리고 다니는 게 틀림없어요."
"아뇨, 제 말은 그렇게 남자에게 덮쳐진 게 어떤 기분이냐는 겁니다. 나체가 되어 남자에게 덮쳐진...후후후."
"......농담이라도 그런 말 하지 마요. 총소리 울리자마자 기절했는데, 일어나보니까 등에 상처를 입고 저를 덮치고 있었으니까. 일부러 그렇게 꾸민게 틀림없어요. 그 인간."
"말은 그렇게 하셔도 숨겨주시지 않았습니까?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하시면서."
강소연의 말에 선겨울은 침묵했다. 실제로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난 뒤, 영상의 모습대로 협회장에게 자신이 본 일에 대해 '못 본 척'을 했다.
"됐으니까 어떻게 유성의 회장이랑 무슨 거래를 하려고 하는 지 알아보세요. 2천억이나 되는 물건이면 어지간한 수준을 넘을 테니까. 전략물자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최첨단 기술이 될수도 있어요. 유성이 성장하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게 우리에게도 도움이 되어야 해요."
"음...사실 그런 거 아녜요?"
강소연은 주먹에 손바닥을 부딪히며 비릿하게 웃었다.
"거기 막내딸 이능력자로 각성시켜준다거나."
"언니, 미쳤어요?"
"왜요? 유럽에서 경매나왔던 지휘관 정액 1ml, 조 단위로 팔렸던 거 잊었어요?"
겨울은 잠시 침묵했다. 지휘관이라는 존재의 가치는 그만큼 대단했기 때문이다.
"그건 구매자가 돈지랄하던 부자라서 그런 거고요. 회장이 다른 건 몰라도 그 개망나니에 대한 사랑 만큼은 확실하잖아요."
"그 개망나니가 이능력자가 되어 돌아다닌다고 생각해봐요. 끔찍해서 미쳐버릴 것 같은데?"
"의외로 가능성 있는 말이죠. 회장이 먼저 제안하면 그 남자는 덥썩 받아들일 것 같고, 남자가 먼저 제안해도 회장이 고심끝에 받아들일 것 같고. 아니면 회장이 엉덩이 대주려나? 자기 이능력자가 되어서 영생하고 싶다면서. 깔깔깔."
"......에휴, 내가 진짜 말을 말아야지."
자식만 일곱 명 있는 양반이 설마 그런 짓을 저지를까. 겨울은 컵에 담긴 캬라멜 마키아또를 한 번에 들이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이만 올라갈게요. 다른 건 언니랑 상의하세요."
"벌써 가시게요? 좀 더 계시지."
"바빠요. 아빠가 또 삼일절에 개짓거리 하는 거 막으려면 계획 짜야한 단 말이에요."
"흐흐, 고생하십니다. 아가씨."
강소연은 마스크를 쓰고 다시 문신사로 위장했다. 오직 겨울의 앞에서만 본모습을 보이는 그녀는 겨울의 손을 잡고 그림자 속으로 그녀를 끌어들였다.
위이잉.
그림자 속을 통해 공간을 이동한 둘은 연구실과 똑같은 장소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들이 선 연구실은 이전의 연구실이 아닌, 전혀 다른 공간에 만들어진 완전히 다른 공간이었다.
"후우. 잠시...."
삐빅. 삐비빅.
겨울은 마도기어를 눌러 누군가를 호출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겨울과 너무나도 비슷하게 생긴 흑발의 여인이 급히 연구실로 내려왔다.
"와, 왔어?!"
"언니, 또 여자애들 괴롭히고 있었죠?"
"아, 아니야. 괴롭히는 건...."
"신서울 가서는 그러지 마요. 언니 연기력 믿고 저 언니한테 맡기는 거니까."
겨울은 진심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서울에서의 활동을 위해 발굴한 인재는 분명 엄청난 재능과 이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성적 취향이나 여러 방면에서 유감스러운 부분이 한 둘이 아니었다.
"생긴 건 똑같은 분들이 왜 이리 다른 건지...후훗."
"시, 시끄러워."
문신사는 여인을 비웃으며 그림자를 열었다. 여인은 겨울로부터 마도기어의 데이터를 건네받고 급히 그림자 속으로 뛰어들었다.
"금발 양아치 조심하세요, 가을 언니."
겨울은 저 허당같은 여자가 진심으로 함락되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아빠를 어떻게 엿먹일 지 생각해볼까."
겨울은 연구실에 걸린 코트를 걸쳤다. 코트의 뒤에는 <서울해방전선>이라는 문구가 큼지막하게 적혀있었다.
그리고.
"......왜 하필 같은 곳에 넣어서 사람을 이상하게 만들고 난리야."
겨울은 코트 안주머니에서 목걸이를 꺼내 목에 걸었다. 육감적인 가슴골 사이에는 기하학적 문양의 정육면체 물체가 안으로 쏙 들어갔다.
"내가 진짜 얼굴 때문에 봐준다. 에휴."
연구실 밖.
겨울은 인기척이 없는 지하도 아래를 홀로 걸으며 궁시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