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617화 (617/1,497)

〈 617화 〉2부 2장 12

상대는 대략 A급 요원들로 추정된다.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가온이가 A급인데 가온이 잡으려면 A급이 와야지.'

이 세계에서는 지휘관 이외에도 이능력자의 한계를 강화시킬 수 있는 수단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게 다크 레기온에 의한 괴인화가 대표적인 게 문제고, 우리를 쫓아오는 적은 괴인이 분명했다.

"겨울 양만 알고 있어요. <라스푸틴>은 괴인이고, 저들은 라스푸틴이 우리 가온 양을 잡기 위해 보낸 부하 괴인들이에요."

"예?! 가온 양을 왜요?!"

"그거야 라스푸틴이 가온 양을 큥큥하려는 아동성애자기 때문입니다!"

피슝. 귓불에 무언가가 스쳤다. 코트 아래로 붉은 피가 떨어지는 걸로 보아 원거리 공격이 스친 듯 했다.

"직원 분, 이 통로로 계속 도망치면 되는 겁니까?!"

"치직, 치지직...."

내 옆에서 함께 달리던 유하C가 당했다. 머리통이 정확히 저격당한 X로이드는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진 채 기름을 피처럼 흘리고 있었다.

"쥐새끼같은 놈들."

멀리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목소리에 깔린 마력에는 괴인의 흔적이 엿보였다.

"저렇게 목소리 긁는 게 괴인들 특징이에요. 참 성질 더러운 것 같죠?"

"...번역기가 이상한 건가? 나를 눈앞에 두고 그런 말을 하다니. 하지만 이걸로 확실하군. 네놈이 우리 <운디네>에게 헛바람을 넣은 게 분명해."

"어디보자...저 사람은 <즈메이>같네요. 러시아 정보부 소속 A급 이능력자. 실제로는 마트료시카 소속의 괴인이죠. 라스푸틴의 부하."

"......이거 김가온이 문제가 아니었어. 아무래도 네놈은 여기서 꼭 죽여야 할 것 같군."

위잉. 정장 차림의 금발 여성은 금빛의 손톱을 세우며 우리를 향해 겨눴다. 마치 짐승처럼 커다래진 그녀의 손은 괴수의 것처럼 날카로워 보였다.

"신체변형. 원래는 짐승의 형태를 마력으로 바꾸었군요.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다른 여자를 남자에게 강간당하게 만들려고 납치하려는 게."

"어리석은 것. 그 분의 은총을 받으면 그런 생각 따위 들지 않아. 그래, 그 분의 사랑을 받으면 말이지."

즈메이는 손톱으로 입술을 긁으며 비릿하게 웃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보라색 안광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어차피 여자는 자지에 박히기 위해 태어난 생물이다. 그분의 자지에 박히고 나면 강간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게 될 거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겨울 양, 지금은 조용."

나는 겨울의 입을 손으로 막아버렸다. 괜히 말을 해서 소란을 일으키는 것 보다는 내가 대화를 주도하면서 틈을 만드는 것이 훨씬 유리했다.

'지금 엄청 위험한데.'

여유를 가장하고 있지만 상대는 A급 괴인이다. 그에 반해 내 옆에는 알몸의 거유 D급 이능력자 한 명 뿐.

"그런데 겨울 양, 어쩌다가 알몸이 되셨어요?"

"옷 갈아입다가 사장님이 갑자기 들어오는 바람에 이렇게 되었잖아요!"

"아, 그렇구나. 타이밍 참 공교롭네요. 저기요, 잠깐 타임."

나는 즈메이에게 손을 뻗었다.

"일단 겨울 양에게 코트라도 입히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흥, 꼴에 배려를 하는 건가? 어차피 그 년도 같이 그분에게 바칠 것이다."

"바치고 나발이고 일단 몸은 가려야 할 것 아닙니까."

"좋다. 뭐 시간을 끌려는 것 같은데...내가 다가가면 그만이니까."

저벅, 저벅. 즈메이는 느긋한 발걸음으로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나는 코트를 벗어 선겨울에게 넘긴 뒤 즈메이와 마주 섰다.

"설마 이런 식으로 싸우게 될 줄은 몰랐는데."

"싸울 생각인가? 훗, 척봐도 무능력자처럼 보이는데 괜히 허튼 수작 부리지 마라. 너는 이 자리에서 무조건 죽인다."

"한 가지 질문. 라스푸틴은 다크 레기온의 하수인인가?"

"......이 건방진 새끼! 어디서 그딴 망발을 지껄이느냐!"

"아, 그래? 컷."

서걱. 나를 향해 휘두르려던 즈메이의 손이 잘렸다. 본체로부터 떨어진 마력의 결합은 허공에 허망하게 흩어졌다.

"신체 변형이 아니라 마력 결집을 통한 무기는 이게 문제죠. 본체로부터 연결이 끊어지면 바로 마력으로 흩날린다는 거."

나는 손부채로 내 앞에 반짝이는 금빛 가루를 털어냈다. 즈메이는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며 비명을 질렀다.

"으, 아아악!!"

즈메이의 손목은 잘려있었다. 괴인이 되는 바람에 탁해진 피가 아래로 뚝뚝 끈적하게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너, 너 이 새끼! 무슨 짓을 한 거야!!"

"설마 그냥 아무런 대책도 없이 깝쳤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A급 괴인을 앞에 두고?"

나는 속으로 절로 웃음이 나왔다.

"유감이네요. 라스푸틴에게 큥큥당하더니 뇌까지 강간당했습니까? 판단이 고작 그것밖에 안 되나요?"

"이, 이 개새끼! 빨리 말 해! 으아아악!!"

즈메이는 손을 향해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물처럼 뻗어진 피가 갈퀴처럼 튀어나왔고, 곧 즈메이의 손은 피비린내 나는 덩어리가 간신히 손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뭘 말하라는 겁니까. 저는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으아아악!!"

괴인은 이성을 잃고 나를 향해 피로 만들어진 손톱을 휘두르려 했다. 나는 손날을 세워 가볍게 목을 그었다.

"내가 아니라 다른 존재가 있는지 생각했어야죠."

사아아아---

무색무취의 칼날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즈메이는 믹서기에 갈리는 것 마냥 몸이 으스러졌고, 나는 손을 뻗어 선겨울의 눈을 가로막았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즈메이의 전신이 칼바람에 잘게 갈려나갔다. 팔과 다리는 모두 입자 단위로 끊어졌고, 마치 토르소마냥 머리와 몸통만 남아 뒤뚱뒤둥 거리고 있었다. 나는 앞으로 나아가 그녀의 머리를 발로 밟았다.

"마력을 다시 일으키려고 해도 소용없을 겁니다. 절단면이 공기중에 노출되어 있는 이상, 소용 없어요."

"......키아아악!!"

즈메이는 입을 벌려 침을 뱉었다. 척 보기에도 독극물같은 액체가 내 구두에 닿을 뻔 했다.

위이이잉--!!

지하통로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강대한 바람이 불었다. 즈메이가 뱉은 침은 180도 유턴하여 즈메이의 안면을 강타했다.

치지지직.

즈메이의 얼굴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즈메이의 머리를 좌우로 가볍게 짓밟은 다음,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아, 코트 줬지. 선겨울 양, 잠시만요."

나는 선겨울에게 다가가 코트를 열어젖혔다. 어둠속에서도 형태가 훤한 가슴이 한 눈에 들어왔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게 그녀가 입은 내 코트 안주머니를 눌렀다.

철커덕.

"이거 비밀이에요."

나는 코트의 안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들었다. 묵직한 그립감이 제법 마음에 들기는 하지만, 단발 권총이라는 게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중에 바꿔야지.'

그는 주력으로 사용했을지 몰라도, 나는 이것보다는 다른 게 손에 더 익숙하다. 하지만 당장은 쓸만한 것이 이것뿐이니, 나는 즈메이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철컥, 철컥.

"아, 마탄도 까먹었네. 겨울 양, 실례."

"히이익!!"

나는 다시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제법 안쪽까지 들어가있는 바람에 손을 쑤셔넣어야했고, 간신히 마탄 하나를 집어들 수 있었다.

"오, 회색. 환속성이네요."

나는 총구끝의 덮개를 열어 마탄을 장전했다. 그리고 겨울을 향해 귀를 톡톡 건드렸다.

"귀 안 막으면 고막 터집니다? 이게 이 몸 사이즈마냥 쓸데없이 길고 커서, 소리도 엄청 시끄럽거든요."

철컥.

천둥소리와 함께, 즈메이의 육편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 * *

유성의 X로이드 판매 매장에서 긴급 출동 요청이 울렸다.

괴인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에 인근에 있던 히어로, 협회의 요인들, 호국청년단 대원들, 그리고 유나 일행 또한 급히 X로이드 판매관 근처로 모여들었다.

"상대는 지하 1층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습니다! A급 괴인이 최소한 다섯은 넘는 것 같습니다!"

"칫, 하필 이런 시기에 괴인이 신서울에서...!"

인근에 있던 히어로 협회장, 설지영은 하늘을 슬쩍 올려다봤다. 지하에서 싸우고 있는 덕분에 하늘에서의 지원은 사실상 불가능했고, A급 괴인들을 때려잡으려면 최소한 A급들을 배는 투입해야 했다.

하지만 그런 A급이 즉각적으로 동원될 리가 만무. 설지영은 전전긍긍하며 히어로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안되겠습니다, 나라도 먼저 돌입합니다!"

"예?! 안 됩니다! 협회자님께서 잘못되면 진짜 모든게 끝장입니다!"

"저 건물이 무너져도 끝장입니다!"

유성은 비록 사기업이나, 배틀 슈트를 관리하는 분야에 있어서는 사실상 국가적인 기관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만약 건물 전체가 무너진다면, 수 십 조에 해당하는 경제적 손실이 발생할게 분명했다.

"유성에서의 연락은?!"

"내부에 있는 상품들과 고객들의 물건이 파괴되지 않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달라고...!"

"미치겠네요, 젠장!"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설지영의 머릿속에는 고가 슈트 때문에 전력을 다하지 못하게 될 히어로들의 고전이 그려졌다. 전력이 약하다기보다는, 괴인들을 쓰러뜨리고 난 다음이 걱정되기 때문이었다.

유성에 소송을 당해도 국가는 책임지지 않을 것이다. 히어로 협회가 모든 피해 보상을 떠맡기에는 현실적으로 무리였다.

"당국에서는?!"

"괴인의 일이니 히어로 협회에서 해결해달라고 요청을 보냈습니다...."

"돕지도 않을 것들이!"

설지영은 분통을 터뜨리며 바닥을 크게 굴렀다.

그 순간.

구구구구.

땅에서 거대한 진동이 울려퍼졌다. 동시에 마도기어가 보이는 마력 지도가 순간적으로 데이터가 변했다.

파바바박.

"이게 뭐야...?"

괴인들의 반응이 하나 둘 소실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소멸당하기라도 하는 것 처럼, A급 괴인들이 '살해'당하고 있다.

"돌입합니다!"

설지영은 마력을 끌어올리며 내부로 진입했다. 문을 박차고 지하로 달린 그녀는 머리와 몸통이 떨어져 나뒹구는 시체들을 발견하고 손으로 입을 막았다.

"웁...!"

시체인 줄 알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피 대신 붉은 기름이 흐르는 X로이드들이었다. 너무나도 사람같은 모습에 설지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진짜 너무 리얼한...히익!!"

"끄어, 끄어어...."

X로이드들의 사이, 전신에 자상이 가득한 괴인들이 사지가 잘려나간 채 바닥에 누워있었다. 몸통만 남은 그들은 금방이라도 죽을 것 마냥 몸을 떨고 있었다.

"너희 누구야! 누가 보냈어!"

설지영은 괴인의 목을 들어올리며 추궁했다. 하지만 금발벽안의 괴인은 이미 죽어가기 직전이었다.

"ㅋ...."

"크?!"

"큥...큥...."

풀썩. 괴인은 검은 안개가 되어 흩어졌다. 명백히 괴인의 힘이 다해 소멸하는 현상이었고, 설지영은 귀신에 홀린 것만 같았다.

"대체 누가 이런...사람 반응?!"

마도기어에 사람의 반응이 느껴졌다. 설지영은 바로 반응이 보이는 여자 탈의실로 달려가, 아래로 뚫린 구멍을 통해 비상통로로 뛰어내렸다.

저 멀리, 사람 두 명의 생명반응이 느껴진다. 설지영은 전력으로 달렸다.

"아...."

아는 얼굴의 남녀가 있었다. 여인은 알몸으로 코트만 입은 채 바닥에 깔려있었고, 남자는 그 위를 덮친 상태로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알 수도 없는 상황에서, 단지 설지영은 단 하나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피...!"

남자의 등에는 누군가에게 습격을 당한 것 같은, 깊은 상처가 나 있었다.

* * *

"흠, 이게 지휘관의 무기인가?"

절풍의 펜릴은 청화로부터 건네받은 총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구조를 확인했다. 척 보기에도 A급 괴수들의 소재를 이용해 만든듯한 권총은 핸드캐논이라고 부르는 게 더 옳다고 봐야 할 정도였다.

"스캔 떠서 나중에 P한테 보내야지."

펜릴은 마도기어를 통해 총의 내부를 스캔했다.

이미 청화와 이야기가 된 부분이었고, 지휘관이 사용하는 무기에 대한 정보는 제법 비싼 값어치로 P를 설득할 수 있는 수단이 될 것이다.

"거기에 원탁의 히어로까지 괴인이 되었다라...이건 바로 확인해봐야겠네."

삐비빅. 펜릴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홀로그램 속 상대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타깃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제법 재미있는 정보를 얻었다냥. 라스푸틴이 괴인이고, 자기 밑에 있는 여자들 범해서 노예로 만들고 있다고 한다냥."

[......흠, 확실히 중요한 정보네요. 다른 애들도 모르는 것 같던데...혹시 루살카? 아니면 나 몰래 다른 녀석들이? 흠, 알았어요. 이건 한 번 접촉해 볼 가치가 있는 상대네요.]

"......."

펜릴은 고민했다. 지휘관으로부터 들은 정보를 말할까, 말하지 말까.

'너무 곧이곧대로 말하면 걸리니까 돌려 말해야지.'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펜릴은 실실 웃으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흐흐,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너도 성노예 되는 거 아니냥?"

[장난은 집어치워요. 내가 누군데 성노예는 무슨. 괘씸하네요. 라스푸틴 암살하는 거 당신한테 시킬까요?]

"농담도 못하나. 아 참, 타깃의 무기에 대한 정보를 알아냈다냥. 이거 보이나? 총인 것 같은데."

[......길이는?]

"대략 22cm 정도 되는 것 같은데. 굵기는 한 17cm?"

[......흐으으음. 알겠어요. 당신이 농담하나 했으니까 저도 농담하나 할게요. 그거, 자기 사이즈랑 똑같이 만든 총이래요. 푸흐흐.]

뚝. 연락이 끊어졌다. 펜릴은 들고있던 총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자신의 하복부 쪽으로 총신을 붙였다.

"......이, 이게 다 들어가는 거라고?"

철컥.

펜릴은 자신도 모르게 방아쇠를 당겼다. 다행히 마탄은 발사되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