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608화 (608/1,497)

〈 608화 〉2부 2장 03

"어디 다녀오셨어요?"

"히어로 협회 구경. 이야, 시설 참 좋더라고요. 이야기는 다 끝나셨나요?"

"......."

설지영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나를 노려봤다.

이미 가온과 입을 맞춘 만큼 나는 그녀를 러시아에서 한국으로 빼돌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 원탁의 에이전트 요원이 되어있을텐데, 나를 노려보는 눈빛이 다소 이해는 가지 않았다.

"짐승, 변태, 페도필리아."

"......가온 양?"

"어, 그, 말하다보니까.... 죄송해요."

가온은 아무래도 나와 살을 섞은 걸 밝힌 듯 했다. 어느정도로 밝혔는 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나는 설지영의 눈초리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협회장 님. 저를 향해 페도라고 하는 건 가온 양에게 실례입니다."

"아까는 라스푸틴보고 페도라면서요."

"그건 라스푸틴이 일방적으로 하려고 한 경우고, 저는 가온 양과 서로 마음이 맞아서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강간과 화간은 엄연히 다르다.

"가온 양은 저를 믿었기에 함께 잠을 잔 겁니다. 가온 양 처럼 매력적인 여성을 부끄럽게 하는 건 남자가 아니죠."

"잘나셨네요. 그래서 가온 양을 미국으로 데려가기라도 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뇨. 제가 한국에 있을 겁니다. 신서울만큼 안전한 곳이 또 어디있겠습니까? 하하."

"그건...하아, 알겠습니다. 한국 히어로 협회는 정식으로 운디네 양의 히어로 등록을 환영합니다."

"그것도 잠시."

나는 운디네로 등록하는 걸 바라지 않는다. 내가 알고 있는 운디네는 다른 이니까.

"<세이렌>으로 등록을 부탁드립니다. 러시아 쪽에서 <운디네>로 활동하고 있던 이와 똑같은 이명의 히어로가 한국에 있으면 음모론자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한국에서 A급 히어로로 새롭게 출발한다는 의미도 있고요."

"......알겠습니다. 그 정도라면."

협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아직 내 용건은 끝나지 않았다.

"지금부터가 더 중요합니다. 가온 양이 한국에 들어온 '진짜' 이유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페도필리아의 손을 피해 한국에 온 것이 아닙니까?"

"그것도 있지만, 정확히는 '자매'를 노린 마수를 피해서 한국에 온 겁니다. 가온 양에게는 여동생이 한 명 있거든요. 쌍둥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동생이."

나는 가온이 입은 교복의 명찰을 가리켰다.

"누리는 단순히 임시로 오버로크한 이름이 아닙니다. 진짜 동생의 교복을 빌려입은 거죠."

"...일반 민간인에 대한 보호는 조금 어렵습니다. 특별한 요인이 아닌 이상에야...."

"이능력자로 각성했습니다. 가온 양이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각성했으며, 아직 협회에 등록되지 않은 미등록자입니다. 그걸 위해 협회에 방문하려고 했던건데, 지금 주변에 라스푸틴의 요원들이 많군요."

"각성...."

설지영은 머리가 아픈듯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어느정도입니까?"

"후후."

나는 손가락으로 S를 그렸다.

* * *

잠시 뒤.

"대체 뭐임? 갑자기 무슨 사람 납치하듯 끌고와서는 이런 취조실에 갇히는 거 뭐임?"

"누리 양을 납치하려는 자들을 피해 몰래 협회 안으로 데려온 거죠."

"뒷문으로 안전하게 들어온 것 같아요."

"걸리지 않았습니다."

히어로 협회의 도움 덕분에 라온, 유나, 그리고 누리는 무사히 히어로 협회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는 히어로들이 괴인 신고를 받았다며 외국인 여성을 상대로 탐문을 벌이고 있었다.

"마트료시카의 요원들은 당분간 신서울에 들어오지 못할 겁니다. 정치적인 문제도 어느정도 해결했고, 이제 누리 양을 히어로로 등록하는 일만 남았죠."

"오늘부터 나를 <킹갓누리>라고 부르는 거임."

"그건 조금...."

"왜? 언니 지금 나 질투하는 건 아니지? 크크크."

누리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키득키득 웃었다. 내가 넌지시 언질을 준 덕분에 누리는 스스로의 잠재력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이제 우리팀 캐리하는 거임. 오늘부터 나를 캐리머신이라고 불러주는 거임."

누리의 폭탄 스위치가 째깍째깍 돌아가기 시작했다. 오랜 기간 열패감에 휩싸여있던 누리가 자신의 재능이 S급이라는 걸 자각한 이후, 그녀는 주변인들을 깔보는 경향이 생기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속에 응어리진 상처가 열폭으로 터져나오는 셈이지만, 그게 트러블을 일으켜 게임오버로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완전히 찍어누르거나, 아니면 공주님처럼 떠받들어주거나.'

누리를 영입한 지휘관이라면 응당 겪는 딜레마. 하지만 나는 이미 누리를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다.

"와, 그러면 누리가 이제 제일 뛰어난 거네요?"

"그렇지. 언니들, 모두 나한테 맡기셈. 내가 다 때려잡아 줌."

"진짜? 그럼 이제 누리는 90레벨인 셈이니까...마력 공급은 유나랑 라온이한테 집중적으로 해주면 되겠네요."

"아."

누리는 굳어버렸다. 나는 추가타를 이었다.

"월화수목금토일에 일요일빼고.... 유라가유라가, 어때요? 누리는 한 달에 한 번 하면 되겠죠?"

나와 눈빛을 빠르게 주고받은 셋이 음흉한 눈빛으로 목소리를 깔았다.

"그렇네요. 저희는 누리보다 약하니까 누리만큼 성장하려면 사장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저희가 당신의 발목을 잡지 않을때까지 잘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그렇네요. 어차피 99이상으로는 안 올라갈 거 아녜요? 그냥 누리랑 일주일 몰아서 하시죠? 그 다음에는 영원히 안 하면 되니까."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했던가. 기회를 잡았다 싶은 셋이 동시에 협공을 하니 기고만장하던 누리도 자연히 기가 죽었다.

"어, 내 말은 그런 게 아니라...."

"흠, 그렇네? 누리랑은 이제 한 7번 정도만 하면 되니까. 다들 일주일은 참을 수 있지?"

"미안, 언니들. 내가 말 실수함."

누리는 순순히 사과했다. 셋은 다소 어이없어하는 눈빛으로 누리를 바라봤지만, 나는 이미 미래의 누리로부터 이런 성향을 보이는 이유를 전해들었기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친구가 없었으니 뭐 사람들이랑 이야기하는 방법을 알 리가 있나.'

사회성이 떨어지는 환경에서 자란 누리는 타인을 상처입히는 말에 대한 자각력이 떨어진다. 남에게 상처는 많이 받아봤지만, 자신의 말이 타인에게 상처가 된다는 걸 전혀 모른다.

'그러니까 마암룡이랑 싱크로하지.'

어둠속성은 죄다 어둑어둑한 기질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다행히 그런 누리의 성향을 이해해주는 이들만 주변에 가득하다.

"누리야, 그런 말 잘못하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어."

"저희야 익숙해져있지만, 다음 번에는 조금 언행에 주의를 하시길."

"너 내 동생만 아니었으면 한 대 쥐어박았어."

"...죄송."

누리 주변에 착한 사람만 있어서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진작에 싸가지 밥말아먹었다고 안 좋은 일을 당했을텐데.

"실수하면서 성장하는 거니까 괜찮아요. 그리고 누리는 말한대로 약속 지키세요. 킹갓누리가 캐리하는 건데...."

큥큥.

나는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려 신호를 보냈다.

"침대에서 나를 상대로 레이드 할 때 얼마나 하드캐리 할 수 있는지 한 번 보자고. 기대할게."

"......."

김누리, 격침. 동시에 다른 셋도 침묵했다. 나는 속으로 가온에게 잠시 사과한 뒤,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여인, 설지영은 검사결과를 들고 복잡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말씀하신 대로 누리 양의 마력을 검사했습니다. 결과는...암속성 S급."

"워후."

누리는 휘파람을 불며 씩 웃었다.

"역시 나임. 그럼 이제 막 설화공주 같은 이명 받는 거임?"

"그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죠. 누리 양과 청화 님께는 양해를 구하고자 합니다."

설지영은 우리와 마주 앉아 고개를 숙이며 부탁했다.

"누리 양의 S급 등록을 미뤄주시길 바랍니다."

"...뭔 소리임?"

넷은 혼란에 빠졌다. S급이 늘어났는데도 이 경사를 당장 나라 전체에 퍼뜨려야 하건만, 협회장이라는 자가 S급의 존재를 숨긴다는 것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을 법도 했다.

"나...히어로 안 되는 거임?"

스스로는 헌터길이 좋네 마네 이야기를 했지만, 막상 S급 등록이 실패하니 누리는 큰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인 뒤, 협회장이 S급 등록을 거부한 근본적인 이유를 꺼냈다.

"선의철, 서울수복작전."

"......생각보다 이 나라의 사정을 많이 알고 계시군요."

협회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가장 먼저 내 말의 의미를 눈치챈 사람은 라온이였다.

"S급이 한 명 더 늘었다.... 설마 그걸 명분으로 또 그 미친 짓을 벌이려고 하는 겁니까?"

"예. 안그래도 지금-"

"여기서부터는 제가 설명하도록 하죠."

문이 열리고, 백발의 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녀에게로 돌아갔다.

"""아, VIP다."""

"......?"

석하랑은 고개를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선의철 대통령에게는 야망이 있습니다."

선의철에게는 욕망이 있다.

"평양 사태 이후, 빼앗긴 서울을 되찾기 위해 몇 번이고 히어로들을 파견했죠."

평양 사태에서 빼앗긴 큐브를 되찾기 위해 몇 번이고 병력을 보냈다.

"하지만 막대한 병력으로 인해 번번이 실패하였고, 결국 서울 수복 작전은 몇 차례나 무위로 돌아갔습니다. 오죽하면 여당에서도 그 작전 만큼은 안 된다고 말할 정도죠."

큐브를 삼킨 S급 괴수로 인해 작전은 몇 번이나 실패했다. 암암리에 보낸 호국청년단도 전부 서울에서 함흥차사가 되었다.

"선의철 대통령은 3월 1일, 서울 수복 작전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시기에 맞춰 서울을 되찾으려 하는 거죠."

큐브를 찾아 선꼬삼을 탈출하려고 갖은 애를 쓰고 있다.

"그런데 누리 양이 S급으로 나타나는 순간, 선의철 대통령은 서울 수복 작전은 누리 양의 데뷔전이 될 게 뻔합니다."

큐브를 가지고 있는 촉수꺼비에게 누리를 집어던진 뒤, 촉수꺼비가 누리를 능욕하는 사이 촉수꺼비에게서 큐브를 빼앗으려고 할 게 분명하다.

"그러니, 서울 수복 작전이 끝날 때까지는 S급 등록을 미뤄주셨으면 합니다. 대신 누리 양에 대한 지원은 아끼지 않겠습니다."

신난다, 협회장과 설화공주가 우리의 빽이 되었다!

* * *

"그러면 누리 양의 임시 히어로 등록을 위해 잠시 다른 곳으로 안내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협회장은 넷을 데리고 잠시 자리를 떠났다. 누리와 가온은 협회장의 배려에 따라, C등급의 이능력자 자매로 등록될 것이다. 물론 그 실체는 각각 S급, A급의 이능력자가 되겠지만.

"......."

"......."

나는 석하랑과 단둘이 남게 되었다. 협회장이 넷을 데리고 간 이유가 얼핏 예상이 간다.

"차 안 드십니까?"

"제가 좋아하는 차가 아니라서."

"뭘 좋아하십니까?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으시던데."

"딸기와 블루베리가 섞인 믹스 스무디가 마시고 싶군요."

"......."

석하랑은 '이뭐병'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직 내 말에 담긴 뜻을 눈치채지 못한 걸까 싶어, 나는 말을 정정했다.

"블루베리 크림 치즈 케이크."

"윽."

"......서로 떠보는 건 하지 맙시다, VIP 님."

"......물건은 가져왔겠지?"

방 안이 갑자기 차가워졌다. 은은한 마력이 주변에 퍼지기 시작했고, 나는 종이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여깄습니다."

"...케이크? 지금 장난해?"

"알사탕으로도 만들 수 있는데 케이크로 만들지 못하겠습니까?"

"......."

석하랑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한 채 포크를 집어들었다. 우아한 손길로 케이크를 한 입 베어문 석하랑의 입에서 케이크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확실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네. 자. 여기."

팅.

하랑은 마도기어에 대고 손가락을 튕겼다. 너무나도 쿨한 거래에 나는 마도기어 위에 아른거리는 돈다발을 다시 튕겨냈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그건 평범한 블루베리 크림치즈 케이크. 당신이 바라는 '그 성분'은 들어있지 않습니다."

"......호오, 날 가지고 장난친 건가?"

"당신 멋대로 오해를 하고 케이크에 입을 대었을 뿐."

나는 코트 안주머니에서 작은 알사탕을 꺼냈다. 플라스틱 케이스 안에 들어있는 색은 평소와는 다른 짙은 갈색을 띄고 있었다.

"지금까지 거래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다른 구매자 분이 나타나셔서."

"뭐?"

"위약금까지 포함하여 2천억을 쾌척하셨습니다."

"......이 인간이 진짜."

석하랑은 이를 꽉 깨물었다. 나는 알사탕을 안주머니에 다시 집어넣으며 석하랑에게 제안했다.

"하지만 당신께서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신다면 딱 하나, 마지막으로 딱 하나만 더 판매하도록 하죠."

"...뭐지?"

"저희 스튜디오에 이름을 올려주십시오. 홍보하지 않겠습니다. 그냥 명단에만 올려주시면 됩니다."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지?"

"설화공주라는 이름값. 그리고 공포. 오라클 스튜디오를 염탐하는 세력들이 설화공주가 저희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걸 알면 바로 겁을 먹지 않겠습니까? 그래요."

나는 설화공주에게 악수를 청했다.

"저는 당신의 인생 절반을 사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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