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7화 〉2부 2장 02
"여기는 인형A. 타깃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양키와 함께 이동중이다."
"여기는 인형B. 확인완료. ...교복을 입고있다. 식별 바란다."
"여기는 인형C. 번역완료, 김누리. 동생인 걸로 추정된다. 양키와 함께 정문으로 들어가는 중."
"......동생도 저렇게 작다니. 동양인은 원래 저렇게 작은 건가?"
"불쌍하군."
그들은 눈앞에서 운디네를 놓쳤다.
* * *
설화공주님!! 여기 좀 봐주세요!!
요즘 신서울에 자주 오시는 이유가 뭡니까!
설마 서울수복작전에 참가하시는 겁니까?!
차에서 내리자마자 석하랑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외침 속에 머리가 다 아찔했다. 가슴이 커졌다고 해서 청각도 발달되는 건 아닐텐데, 사람들의 목소리는 세밀한 바늘처럼 석하랑을 찔렀다.
‘한국 사람이 나라 수도 오는 게 그렇게 문젠가.’
아무리 자신이 나라의 유이한 S급이라고 한들, 개인적으로 신서울에 방문할 때가 있는 법이다.
당연히 본래의 목적을 숨기기 위해 화보 촬영이나 A급 괴수 퇴치, 강연 등등의 일정을 끼우기는 했지만, 자신이 신서울에 온 건 정치적인 의도가 전혀 없었다.
드디어 광검 몰아내고 헬조선 원탑의 히어로가 되려는 셈인가?
선의철 조카랑 사이가 좋다고 하던데...혹시 결혼하는 거 아니야?
부산에서 왜 자꾸 올라오는 거지? 설마 신서울 공략하려고 그러는 건가?
“.......”
석하랑은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자신은 그저 자신의 일을 할 뿐이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설화공주 님.”
“오랜만입니다, 협회장 님.”
석하랑을 마중나온 회색 머리칼의 여인, 한국 히어로 협회의 협회장 <나이트메어> 설지영은 허리까지 숙이며 석하랑을 맞이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보는 눈이 많습니다.”
“예. 밖에서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상당히 난감하죠.”
석하랑은 설지영의 안내에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석하랑의 등장에 궁금해한다고 한들, 히어로 협회의 건물 안으로 쫓아갈 만큼 간이 큰 사람은 없었다.
둘은 아무 말 없이 복도를 걸었고, 곧 밀실에 가까운 회의실에 마주앉았다. 설지영이 먼저 화두를 던졌다.
“...지난 번의 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직접 보시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설지영이 마도기어를 두드리자 석하랑의 앞에 화상 스크린이 떠올랐다. 그곳에는 석하랑의 마력을 정밀 검사한 결과가 나와있었다.
“97.”
석하랑은 이름 옆에 붙은 작은 숫자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오랜 연구 끝에 밝혀진 S와 SS급의 경계에서, 석하랑은 무려 1이나 더 높은 수치로 SS급에 이른 것이다.
“설화공주께서는 대중에게 언제 밝히는 게 좋을 것 같습니까?”
“SS급의 마력 컨트롤이 익숙해지고 난 다음이 좋겠습니다.”
“좋은 선택입니다. 괜히 경솔하게 나섰다가 살인귀의 이목을 끌면 난감해지니까요.”
설지영은 스스로 살인귀의 이명을 언급해놓고는 몸서리를 쳤다. 그만큼 살인귀라는 이명은 사람을 질리게 만드는 이명이었다.
“그래서 설화공주 님, 갑자기 마력이 성장한 계기가 무엇입니까?”
“그건 지난번에 말씀드렸잖아요. 규칙적인 생활습관으로 자다가 일어났더니, 어느 순간 SS급이 되어있었다고.”
“...아직도 믿기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자고로 히어로가 각성하는 순간이란 절체절명의 상황에 몰렸을 때 모든 잠재력을 발휘하여-”
“당신의 영웅론에 대해서는 듣고싶지 않습니다. 제가 궁금한 건 단 하나.”
삑.
석하랑은 가운데에 홀로그램으로 된 남자의 얼굴을 띄웠다. 최근 신서울에서 악성 루머에 시달리고 있는 금발외국인, 시안의 얼굴이었다.
“이 남자가 정말 진정으로 오라클과 관련이 있는 지 없는지 알고 싶은 겁니다.”
“오라클 스튜디오의 사원이니까 관계가 있지 않을까요?”
“제가 그걸 묻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 그러십니까?”
“...원탁의 관계자일 것이다? 그것도 에스콰이어 길드원도 아니고 제법 높은 등급에 속하는 사람이다?”
설지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석하랑의 가정을 부정하는 그녀의 눈빛에는 다소 씁쓸함이 묻어났다.
“객관적으로 말해 원탁의 높으신 분이 이런 나라에 오실 이유는 없습니다. 그나마 건수가 있다면 38선의 괴수들이겠지만, 코어도 챙겨가지 못하는데 뭐하러 그런 복잡한 방법으로 한국에 들어오려 하겠습니까.”
타깃, <금발서양남>의 정체는 무엇일까. 석하랑과 설지영의 혼란이 더욱 가중되는 가운데, 설지영의 마도기어로 연락이 들어왔다.
[협회장님, 잠깐 확인해주셔야 할 게 있습니다.]
"뭐죠?"
[그...예전에 C급으로 등록되었던 김가온 양 있지 않습니까?]
"예. 그 러시아에서 활동하다가 한국으로 쫓겨났다고 하던 그 분 말이죠? 길드에서 크게 사고쳐서 쫓겨났다고 하던 분. 안그래도 협회 주변에 러시아 쪽 사람들 깔려서 찾고 있다고 하던데...."
[마트료시카 소속 A급 이능력자, <운디네>였습니다. 지금 저희 쪽에 신변 보호 요청을 하러 협회에 들어왔습니다.]
둘의 표정이 굳었다.
* * *
"저, 정말 이래도 될까요?"
"물론이죠. 가온 양, 의외로 한국은 A급이 그리 많은 나라가 아니랍니다? 전국적으로 따져도 40명이 채 되지 않아요. 한 명 한 명이 중요한 시국이니까 괜찮아요."
누리의 교복을 입은 가온은 심호흡을 하며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저 때문에 괜히 외교문제로 비화되는 거 아녜요?"
"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죠. 휴가 명목으로 길드에서 무단 탈퇴를 한 셈이니까."
나는 가온에게만 라스푸틴의 실체를 알렸다. 당연히 그녀는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오라클의 예언을 핑계삼아 신뢰를 얻었다.
"생각해보니 사장님, 러시아 쪽에 전갈 넣겠다고 한 거 거짓말이었죠?"
"물론이죠. 그래야 가온 양이 믿으니까. 안 그랬으면 술 취했던 가온 양이 저를 믿었을 까요?"
"그건 그렇죠. 아, 온다."
문이 열리자 회색 머리칼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여인의 모습에 잠시 반가움을 느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한국 히어로 협회 협회장, A급 <나이트메어> 설지영이라고 합니다."
"오라클 스튜디오 한국 지부 지사장, 시안입니다. 한국 이름은 백청화니까 청화라고 불러주시실."
"......<운디네>, 김가온이라고 해요."
김가온과 설지영은 서로 가볍게 악수를 주고받았다. 설지영의 키는 거의 나와 비슷할 정도로 컸고, 둘의 악수는 김가온의 머리 위에서 이루어져야만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신변보호요청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사실대로 말씀해주시길."
"조금 적나라하지만 진짜 사실대로 말씀드려도 됩니까?"
"물론. 아무래도 당신이 이 상황을 만든 주동자 같으니. 참고로 밖에는 러시아에서 온 요원들이 깔려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협회는 러시아 협회으 요청에 따라 운디네 양을 정식으로 러시아로 되돌려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사, 사장님."
가온은 나를 향해 구원의 눈빛을 보냈다. 나는 그녀를 안심시킨 뒤, 설지영이 가온을 무조건 보호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풀었다.
"라스푸틴은 페도필리아입니다."
"......예?"
설지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못 들으셨습니까? 라스푸틴은 페도필리아...아뇨, 한국에서는 잘 쓰이는 말이 아닌가요? 죄송합니다. 롤리타 컴플렉스, 어, 음, 번역이...아! 아동성애자입니다."
"......."
설지영의 눈이 한참동안 가온에게 꽂혔다. 21살인 그녀는 확실히 여고생 교복조차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어려보였다. 마치 여중생이 언니의 교복을 훔쳐입은 것 마냥.
"김가온 양은 라스푸틴의 마수를 피해 한국으로 도망친 겁니다."
"그, 그...."
무릎에 손을 올린 가온이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저, 저는 싫다고 했는데...!!"
"...자세하게 말씀해주시길."
설지영의 눈빛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 * *
설지영이 김가온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나는 복도를 빠져나와 화장실을 찾았다.
"틀린 말은 아니죠. 실제로 라스푸틴은 운디네를 강간하려고 했으니까."
- 선의철이 요기있네?
- 선날ㅋㅋㅋㅋ
- 틀린 말은 아니지ㅋㅋㅋ
"7~8월 즈음에 러시아에서 8mm 테이프 여러 개 누리 앞으로 날아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 솔직히 그거 좀 거북하긴 해
- 그럼 이제 어캄? 대외적으로 밝히지도 못할 텐데
- 아직 라스푸틴 원탁인 거 아님?
- 대외발언권 생각하면 이거 미스낸 것 같은데
<누리마을해장국> : 저 이 상황 똑같이 하다가 배드엔딩 났는데 스포해도 됨???
"......?"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딱히 배드엔딩이 날만한 데이터는 없었다.
"해도 됩니다."
<누리마을해장국> : 선가놈이 라스푸틴한테 뇌물 받아서 김가온 납치하려고 하는데, 누리 납치당해서 게임오버 당함. 누리 루트ㅇㅇ.
"오호."
전혀 예상치 못한 게임오버다. 한 번 히로인을 정한 이후, 그는 단 한 번도 게임오버를 내지 않았기에 의외로 게임 오버 케이스는 그리 많지 않았다.
"정보 고맙네요. 근데 이거 훈수로 봐야하나?"
<누리마을해장국> : 남의 누리라도 라스푸틴한테 큥큥당하는 건 쵸큼....
"흐흐, 알았어요. 근데 그거 왜 게임오버 당했는지 알겠네요. 지휘관 세력 혼자서만 지키려고 하니까 그러죠."
저벅, 저벅.
마침 멀리서 정장 차림의 여자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나는 시스템창을 내리고 그녀에게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갑자기 왠 인사?"
"저를 찾으러 오신 것 같아서."
"...감은 좋으시네요. 따라오세요."
일언반구도 없이 따라오라는 여인의 말에 나는 느긋한 발걸음으로 그녀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이능력자도 아닌 평범한 인간이라 다들 혼란스러워하지만, 이 길이야말로 가온누리 자매와 우리 세력을 지켜줄 길이었다.
"안에 잠깐 들어가세요."
히어로 협회 한 켠에 마련된 작은 창고. 갇히면 영영 빠져나오지 못하는 뒤주같은 공간에 나는 대범하게 들어갔다.
끼이익, 쿵.
문이 잠기고, 곧 반대편에 스크린이 하나 나타났다.
- 앗
- 앗
- 앗
모두가 스크린 속 모습을 보자마자 정체를 깨닫는다. 나는 수렴첨정을 하는 대비마마를 마주한 영의정의 심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그대는 미국을 위해서 움직이는 건가?]
"아뇨. 한국에 기틀을 마련하면 귀화할 생각입니다. 미국은 살만한 곳이 아니거든요."
미국은 현재 미국 나름대로 문제가 많은 곳이다. 주인공이 헬조선에서 반격의 탄환을 갈고 닦지 않으면, 미국의 뒤에서 암약하는 한 존재에 의해 미국 전역이 불바다가 될 것이다.
"이름도 미리 정해놨답니다. 백청화. 제 지금의 이름을 한국식으로 맞게 바꾼 이름이지요."
[......흠, 그런가. 알겠네. 그게 자네의 진의라고 한다면 그리 알지.]
여인은 부채를 펼쳤다. 아직 발을 거두지는 않았으니, 서로 철저하게 이용하는 단계일 뿐이다.
[자네의 정체가 진짜로 스튜디오의 직원이든, 원탁의 끄나풀이든, 아니면 사기를 쳐서 한국 여인들을 겁탈하려는 한량이든 나는 신경쓰지 않아. 중요한 건 자네의 그 안목. 그래.]
촤락. 여인은 부채를 접어 내게 겨눴다.
[S급 랭커를 발견한 그 안목을 믿어보겠네. 부디 한국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히어로들을 많이 발굴해주시게.]
"물론입니다. 대신 반드시 약속을 지켜주시길. 가온누리 자매와 가족에 대한 신변보호, 꼭 부탁드립니다."
[그거야 당연하지. 감히 저 노란머리 강간마들에게 우리의 자랑스러운 S급, A급 히어로 자매를 넘겨줄 수 없지. 아, 혹시 자네 쪽으로 우리 사람 한 명을 보내도 되겠는가?]
"죄송합니다만 제 아래에서 일할 사람은 철저히 저를 위해 움직여야 할 겁니다. 그럴 각오가 되어있다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여인은 길게 침묵했다. 나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한 마디를 덧붙였다.
"걱정마십시오. 이게 다 당신의 나라, 제 반려의 나라를 위한 일이니까요."
[...! 자네는 설마?!]
"예, 그렇습니다. 저는 결혼귀화를 할 겁니다."
거래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 * *
"<대원군>. 히로인 중의 한 명이자, 주인공 세력을 정치적으로 암암리에 서포트해주는 여자."
한국 내에서도 과도한 국뽕으로 거부감을 받으며, 외국에서는 아예 안티가 더 많은 히로인.
"한국인 히어로 보호를 위해서라면 그녀는 라스푸틴, 러시아 협회와 척을 지는 선택도 마다하지 않을 겁니다. 애초에 러시아 협회는 선의철과 연결되어 있으니 적대하는 부담도 덜하겠죠."
선의철도 A급 히어로를 러시아에서 빼가려고 하는 것에 겉으로는 난색을 표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 팀의 정치적 후원자가 될 여자, 언젠가 우리 팀의 일원이 될 여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답은 애국코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