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6화 〉2부 2장 01
1월이 지나가고, 2월이 되었다.
대한민국 신서울에 자리잡은 <오라클 스튜디오>는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으며, 금발외국인이 세 명의 한국 여인을 데리고 다니는 광경은 분명 신서울에서도 간혹 이슈가 되었다.
헐리우드에서 영화 촬영을 위해 배우를 모집하고 있는 중이더라.
경비원으로 옛날에 그 누구더라...A급 히어로를 영입했다고 하더라.
사실 데리고 다니는 여자들을 다 따먹었다고 하더라.
어린 아이같은 흑발의 소녀는 초등학생으로 금발서양인이 성범죄를 일으키려고 한다더라.
직접 면접을 보러 갔는데 민트초코 먹다가 괴인 될 것 같다면서 까더라.
온갖 루머가 새로운 루머를 낳으며 안좋은 방향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는 가운데, 오라클 스튜디오는 자신들 나름대로 계속 활동을 이어나갔다.
방음 부스가 설치된 사무실 안은 그 누구도 알아볼 수 없었고, 결국 누군가가 그런 소리를 하더라.
사실 거기 금발양아치가 자기 한국인 하렘 만들려고 해놓은 곳 아니냐?
가장 악질적인 소문.
매일 밤이면 밤마다 여자의 신음소리가 들리는데, 그게 매일 밤마다 바뀐다고 하더라.
오라클 스튜디오는 루머에 일정 대응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어느덧 한 고등학교의 졸업 날이 되었다.
* * *
"와, 김누리 쟤 졸업식 나온 거 봐."
"무슨 자신감으로 온 거래? 옆에 남자는 뭐야? 혹시...그거?"
"언니가 C급이니까 자기도 C급인 줄 아나봐. 웃겨."
누리를 향한 온갖 멸시와 모욕이 담긴 질투의 말이 귀에 들린다. 상당히 거슬리는 말이지만, 나는 누리의 벌벌 떨리는 어깨를 누르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화내지 마요. 앞으로 자주 들을 소리니까."
"내가 히어로 되면 저런 것들도 지켜줘야하는 거임?"
"당연하죠. 히어로니까요."
"...나 그냥 헌터 길 걷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누리는 자신이 히어로가 되어야 한다는 것에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있었다. 특히 자신을 향해 모욕을 일삼던 이들도 구해줘야 한다는 것에 상당히 아니꼬와했다.
"헌터 길 걸어도 됩니다. 단, 딱 1년만 저랑 히어로 하면서 힘을 기른 다음에."
"왜 하필 1년임?"
"1년이면 누리도 성장 끝나있을테니까요. 전투 경험 적으로."
"와, 1년동안 나 따먹...흠흠."
나는 누리가 말실수를 할까봐 어깨를 지긋이 눌렀고, 누리는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비틀며 앞으로 나아갔다.
"김누리, 앞으로."
"어떻게 하지, 우리 사장님. 앞으로...."
누리는 졸업장을 받기 위해 앞으로 나서며 내게 윙크했다.
"여고생 못 먹게 됐는데."
"......."
옆에서 가온이 따가운 시선을 보내며 누리에게 눈치를 줬지만, 누리는 단상에 올라 머리가 벗겨진 교장으로부터 졸업장을 직접 건네받았다.
"들었어요? 쟤가 걔래요. 대학도 못간 애."
"무능력자에 아카데미도 못 들어가고...."
"부모가 건물주니까 그냥 백조하겠지, 뭐."
"......진짜 짜증나네요."
가온이 살짝 마력을 일으키며 주변에 살기를 내비쳤다. 누리를 향한 악의는 다소 심하다 싶을 정도로 심했다.
"이해해야죠. 다들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거예요. 누리와 자신 사이의...열등감을."
"하아, 제 동생이지만 미친 것 같아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제가 있으니까 가능한 거죠. 가온 양도 이제 한 달만 열심히 하면 도달할 수 있을 거예요. 누리도 이제 꼭 하루에 한 번 안 해도 될 정도로 성장했고."
세상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자신들이 멸시하는 저 소녀가 지금 사용 가능한 마력량 만큼은 S급 히어로인 광검과 석하랑보다 더 많은 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만약에 과포화되면 어떻게 되는 거죠?"
"넘치는 만큼 절정으로 전환?"
"세상에, 그거 말하지 마요. 얘기하면 누리 분명 더 달라붙으려고 할 거예요."
"어차피 세 자리수 이상은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거기부터는 정령의 영역, 신의 영역이다. 60억 분의 1이 가진 재능은 그저 인간으로서 가진 축복이지, 신의 자리까지 넘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오빠, 나 오늘 졸업했음."
졸업장을 받고 돌아온 누리가 졸업장으로 입을 가리며 나를 올려다봤다.
"나 오늘까지는 고등학생인데...혹시 허쉴?"
"누리야."
가온은 상큼한 미소와 함께 누리의 졸업장을 빼앗았다.
"오늘은 나야, 이 년아."
"......하 씨, 그냥 어제하지 말고 오늘 할 걸."
두 자매는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나는 둘을 데리고 체육관을 빠져나오며 둘에게 속삭였다.
"누리 졸업 기념으로 둘이서 같이하고, 붓는 거만 가온이한테 해주면 되지. 오랜만에 셋이서 할래?"
"......콜."
"왠일이세요, 하는 건 무조건 1:1로만 한다고 하시는 분이."
"그거야 너희가 자매니까."
나의 원대한 하렘 계획에 있어서 아직 3P 이상을 하기에는 적절한 타이밍이 아니다. 하지만 가온누리 자매는 '자매'라는 카테고리로 묶여 3P가 가능하다.
'첫 난교는 4P. 그리고 4P를 할 때는 무조건 3월 1일.'
2월의 이벤트가 모두 끝나고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는 날. 그 날 무사히 이벤트를 넘기고 나면 그제야 비로소 진정한 하렘의 길이 열리기 때문이었다.
"지금 우리 몸 작다고 둘이서 하나 취급이라면서 놀리는 거임?"
"사장님, 그런 거라면 조금 실망인데요."
"무슨 소리입니까. 오해입니다."
솔직히 살짝 뜨끔했다. 나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막 도착한 자율주행택시의 문을 열고 둘을 안으로 밀어넣었다.
"우리 어디가는 거임?"
"사무실? 아니면 다른 팀원들 눈치 안보이게 우리 집?"
"히어로 협회."
둘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누리는 누리대로 문제가 있었고, 가온은 가온대로 문제가 있었다.
"사장님, 나 잘못하면 내 정체 드러나는 거 아님?"
"저 아무래도 한국 협회는 조금 껄그러운데...."
"걱정마요. 누리 진짜 정체 들킬 일도 없고, 가온이한테 시비거는 놈들은 알아서 정리될 겁니다. 잠시만."
치지직. 마도기어에 카메라로 촬영하는 듯한 영상이 떠올랐다. 서로 다른 앵글에서 촬영하고 있는 히어로 협회에는 제법 많은 이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개중에는 검은 정장의 외국 여자들도 몇몇 보이고 있었다.
"윽. 역시 있네요."
"라스푸틴에게 큥큥당한 시녀들이군요."
멀리서만 봐도 알 것 같다. 귀걸이 형식으로 착용하고 있는 무전기를 통해 <마트료시카>의 단원들은 연락도 없이 잠적한 <운디네>를 찾아 한국 히어로 협회 주변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앞뒤로 다 막고 있는데 어떻게 하죠?"
"걱정마세요. 일부러 날이 겹치게 일정을 조정했으니까."
나는 품에서 이 상황을 타개할 물건을 꺼내들었다.
"우리는 그냥 조용히 사람들 몰려드는 인파에 섞여들어가면 됩니다."
히어로 협회에 몰려든 사람들은 누군가를 보기 위해 앞에 모여든 대중들이었고, 그 누군가는 나로 인해 신서울에 올라왔다.
"다들 설화공주에 눈이 팔린 사이, 우리는 뒷문으로 슬쩍 들어가도록 하죠."
[사장님, VIP가 막 동대구역 지났다고 하는데요.]
"예, 그러면 직거래를 하러 가겠습니다."
나는 품안에 넣어둔 50억짜리 풍유환 케이스를 잘 토닥였다.
* * *
한 시간 뒤.
유성자동차의 의전용 차량에 오른 석하랑은 눈앞에 마주앉은 젊은 남자의 모습에 절로 짜증이 일었다.
"언니, 지금 뭐하자는 거야?"
"하하, 언니라뇨. 저는 남자아닙니까."
"장난치지마."
"...얘는 점점 날이 가면 갈수록 재미가 없어지네."
정장의 남자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그의 얼굴에서 기계안이 툭 튀어나오더니, 앞에 홀로그램으로 금발의 여인을 만들어냈다.
"오랜만이야, 하랑아. 작년 크리스마스 이후로 처음이지?"
"그래, 오랜만이네. 내가 잡은 A급 괴수의 코어, 언니가 사들인 이후로 처음이지."
"덕분에 그걸로 제법 재미 많이 봤어. 그런 의미에서 유성의 스폰 받을래?"
"유성 스폰 받을 바에는 내가 회사 하나 차리고 말지. 됐고, 무슨 의도로 이렇게 나를 부른 거냐니까."
석하랑은 차에 놓인 사탕을 뒤적거렸다. 마음에 드는 맛이 하나도 없어, 별 수 없이 포도맛 사탕의 껍질을 깠다.
"그냥 오랜만에 이야기나 나눠볼까해서 불렀어."
"허이고, 동선 하나하나 돈 냄새로 움직이는 분이 잘도 그러시겠다."
"......돈 냄새가 나는 이야기를 하는 거지. 내가 최근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거든."
은유하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눈으로 웃었다.
"부산 모 원룸에 B컵 브래지어가 그렇게나 많이 배송되었다고 하지?"
"윽."
석하랑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비록 둘은 대외적으로는 트러블을 가지고 있으나, 같은 병을 앓고 있는 동병상련의 전우였다.
"나, 나는 모르는 일인데?"
"웃기지마. 네가 유성의 속옷을 걸렀어도, 원룸까지 가는 택배를 누가 옮겼다고 생각해?"
"...망할. 그래, 내 B컵 됐다. 그게 뭐?"
석하랑은 순순히 자백하며 가슴을 활짝 열었다. 이전과는 사뭇 다른 존재감에 은유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설마 가슴 자란 비법을 물으려고 하는 건 아니지?"
"1억 줄게. 불어."
"와, 그걸 또 사려고 한다고? 언니가 그러니까 나랑 사이 멀어지는 거야."
그냥 물어보면 될 것을. 겉으로는 빈정거리면서도 석하랑은 속으로 자조했다.
"직접 와서 물어보면 그냥 대답해줄게. 비법이라고 해봐야 뭐 특별한 것도 아니고."
"내가 어떻게 네 앞에 서겠니? 대단하신 S급 설화공주님 앞에."
"...하여튼."
S급들이 이능력자의 생각을 어느정도 읽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안 이후로, 은유하는 자신에게 '본체'를 단 한 번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짜증나게 할 거면 그냥 여기서 그만하자. 이제 협회 다 왔다고."
"솔직히 말해. 너 협회에 온 이유, '그 물건'을 가지러 온 거 아니야?"
뜨끔. 석하랑은 얼음장같은 표정을 유지했다.
"네가 특별한 이유도 없이 신서울을 다녀갈 때마다 속옷 주문량이 늘었어. 심지어 네가 데리고 다니는 스쿼드 애들도 갑자기 돈을 팍팍 쓰기 시작했지. 돈의 흐름만 조금 보면 모든게 보인단다, 하랑아."
"......그렇다면 어쩔 건데? 그거 내가 지금 가지러 온 거면, 어쩔 거냐고."
석하랑은 배짱을 부리기로 했다.
"2천억 줄게. 팔아."
"싫은데."
"......2천억이 장난이야?"
"이건 신용의 문제야. 판매자가 나를 믿고 계속 팔아주는 거라고. 그러니까 연락처도 못 주고, 웃돈줘서 사려고 생각하지 마."
"그래, 안 밝힌다 이거지. 알았어. 나중에 내가 독점해서 사려고 할 때 울면서 달라붙지마."
픽.
홀로그램 화상이 사라졌다. 석하랑은 입안의 포도맛 사탕이 괜히 쓰라렸다.
"......부작용이 너무 심하니까 말을 못하는 거지."
석하랑은 몸속에 들끓는 마력을 가볍게 갈무리했다. 지난 몇 주간 신서울에 오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집에서 매일같이 마력을 갈고 닦아야만 했다.
풍유환의 부작용.
......가슴만 커지는 게 아니라, 마력이 늘어난다. 그것도 그냥 늘어나는 게 아니라, S+급에 있던 사람도 SS급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엄청난 부작용이 있기 때문에 석하랑은 차마 말을 할 수 없었다.
"......분명 연결고리가 있어."
석하랑은 기억을 더듬어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신서울에서 각종 기행을 일삼지만, 그런 모습이 연기가 아닐까싶은 금발서양남. 전 원탁의 히어로인 오라클의 지원을 받고 있는 자.
'지휘관이랑 분명 관계가 있다.'
지휘관 본인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하는 석하랑이었다.
* * *
<잠시 뒤, 히어로 협회 인근 유성카페 4층.>
"어후, 사람 많네."
"이제 어떻게 들어가실 거예요?"
석하랑이 온다는 소식에 모인 사람들의 인파는 점점 더 늘어만 갔다. 누구나에게 열려있어야 할 히어로 협회의 정문은 C~B급 히어로들에 의해 출입이 통제되고 있었다.
"뒤로 들어갈 겁니다. 이거 때문에라도 오늘 꼭 들어가야하니까요."
"오늘 꼭 해야함?"
"당연하죠. 누리야, 한 번 생각해봐요. 졸업식이 다 끝났고, 학교에서는 이제 김누리 잘 치웠다 생각하면서 킥킥대고 그러던 찰나에...."
나는 누리의 입안에 티라미슈를 넣었다.
"갑자기 김누리가 C급 수속성 이능력자로 각성했다고 떡하니 나타나는 거임."
"......흐흐흐, 개꼬신데? 플랜카드도 못 걸 거 아님? 졸업한 사람인데. 크흐흐."
신서울 대학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값어치 있는게 이능력자 각성이다. 누리를 그렇게 무시했던 학교에 대한 소소한 복수이자, 누리가 활동하기 편하도록 하는 사전작업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라온이랑 가온이는 조금 늦네요. 이제 슬슬 시간인데...."
"죄송합니다. 옷을 찾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정장 차림으로 나타난 라온의 뒤에는 부끄럽게 숨어있는 작은 소녀가 있었다. 누리는 낄낄거리며 웃기 시작했고, 나와 유나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어서와요, 가온 학생."
"지, 진짜로 이걸로 들어갈 수 있어요?"
"그럼요."
가온은 라온의 옆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 모습은 누리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등 다를 게 없었다.
"교복은 천하무적의 방패인 걸요."
임무.
라스푸틴이 한국에 파견한 큥큥시녀단의 이목을 피해 히어로 협회에 다녀오기.
우리는 혼란을 주기 위해 가온을 누리처럼 위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