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586화 (586/1,497)

〈 586화 〉2부 1장 16

<일주일 뒤, 스튜디오 청화.>

"왜 아무도 안 오는 걸까?"

"안 오는 게 아니라 사장님이 다 짜른 거잖아요."

유나는 빈정거리는 말투로 내 테이블에 딸기요거트를 놓았다. 아래층 카페에서 사 온 요거트는 갈린 딸기가 듬뿍 담겨있었다. 내가 요거트를 잡는 사이 유나는 제 몫의 커피를 챙겼다.

"사장님. 저희 안 좋은 소문 돌기 시작했어요. 막 동양인 여배우를 구하는 게 사실은...."

"사실은?"

"......성인용 비디오에 출연할만한 사람을 찾는 게 아닌가 하면서."

"그건 다 오해야."

"그치만 상황이 그런 걸요."

유나는 테이블에 놓여진 사람들의 서류를 하나 둘 펼쳤다. 가족같은 회사에 연봉까지 구체적으로 올리고, 필요한 경우 회사 경비로 숙식까지 제공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류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사람들이 분명히 입사지원서를 제출했다.

"이분은 어때요?"

유나는 서류 중 자신이 가장 스펙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서류를 꺼냈다. 20대 청년으로, 체격도 건장하고 제법 얼굴도 잘생겼다. 심지어 지속성으로, 근력마저 D급이었다.

"탈락."

"예? 왜요?"

"이름이 불길해. 그리고 지금 증명사진에는 풍성하지? 분명 대머리 일 거야."

서류에 동봉된 사진에는 정장을 입고 있지만, 분명 입사와 함께 계약서를 작성한 이후에는 후드에 청바지를 입고 나올 법한 사람이었다. 애초에 남자는 패스다.

"유나야. 일단 남자는 다 거르자."

"사장님, 그러니까 순진한 한국 여자들 낚아서 엄한 짓 한다고 하는 거예요."

유나는 인터넷에 구인구직 공고를 올려놓은 사이트를 열었다. 스튜디오 <청화>라는 이름을 둔 회사에는 별점부터가 1점대에 달할 정도로 평판이 좋지 않았다.

- 이 회사 여자 우대가 아니라 여자만 뽑는 거 아님? 사장 외국인이던데 어떻게 심사 통과했나 몰라.

- 자자 정리들어갑니다. 정부지원금 900만원이죠? 개인한테 100만원 지급되고. 그거 다 따지면 연봉 2천임ㅋㅋㅋ

- 면접 보고 온 1인입니다. 들어가자마자 빌런 잘하게 생겼다고 뺀찌먹었습니다. 사장이랍시고 앉아있는 사람 미친 놈이에요 ㄹㅇ

"보세요. 하나같이 다들 평이 좋지 않아요."

"여자만 뽑을 건 맞고, 계약서 쓰고 나면 바로 연봉재계약 할 거고, 마지막에 쟤는 진짜 빌런인데."

"......네?"

"꼬삼이가 보낸 놈이야. 옆에서 우리 감시하면서 우리 실체를 파악하려고 하는 거야."

서울에서 잘못하면 눈뜨면 코 베어간다는 말을 하지만, 신서울에서는 잘못하면 바로 끌려가서 노예가 된다. 선의철이 비밀리에 운영하는 '소나무 부대', 아니 25년 현재의 명칭인 <호국청년단>의 단원들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려고 들 것이다.

"내가 미국에서 온 나름 VIP잖아? 미국에 물꼬를 틀려고 하는 동시에, 뭐 하나 꼬투리 잡아서 감시하려고 하는 거지."

"그냥 감시라고 하기에는...."

"응. 어디 잡히면 세뇌당해서 노예가 될 거야. 우리들나름의 은어로 표현하면...'동년배'가 되는 거지."

호국청년단 대부분 빌런 출신으로, S급 빌런 문신사에 의해 정신적인 제약을 받고 있다. 임무를 거부하면 바로 자살당하는 그들은 뒷세계에서 정적 암살, 선동, 불손분자 색출과 같은 일을 하며 선의철의 절대권력과 함께하고 있다. 당연히 그들은 우리에 대해서도 감시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진짜로 잘 봐야해. 인상이 선하게 생겼지만 알고보니 다크 레기온의 괴인이라든지, 일 잘하게 생겼지만 알고보니 선의철의 하수인이라든지, 엄청 인상 더럽지만 알고보니 모 기업에서 우리를 지원하기 위해 보낸 스파이 겸 보디가드라든지 정말 다양하거든."

C급에서 A급까지 키우고나서 봤더니 선의철의 끄나풀이라 함정에 빠져서 게임오버 당했다더라. B급 동료가 아무 조건없이 아군으로 들어올려고 해서 거부했더니 은유하가 보낸 X로이드 였다더라. 플레이어는 사람에 대한 불신이 늘어남과 동시에 사람을 보는 눈까지 생기게 된다.

"진짜로 믿을만한 사람들 아니면 다 패스야. 그래, 유나같은 여자들."

"사장님이 작업하기 쉬운 여자들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니면 속궁합이 좋을 것 같은 여자들을 말하는 거예요?"

"내 정체를 밝혀도 어디가서 이야기하지 않을 사람들 얘기한 건데?"

"......딸기 씻어올게요."

"꼭지는 자르지 말아줘."

아무튼 동료를 영입하는 것에 있어서 엄청나게 주의해야한다. 오죽하면 몇몇 게임회사에서 신입사원 선발에 관여하는 심사원들에게 이 게임을 두 달간 플레이하게 했다고 할 정도로, 주인공 일행에 들어오려는 동료들은 2/3 가량이 트롤이거나 스파이거나 괴인이다.

'하지만 히로인은 얘기가 다르지.'

이유나를 비롯한 히로인들은 영입에 성공하면 무조건 주인공만을 위해 움직이게 된다. 개중에는 자신이 바라는 이익과 같은 방향이기에 한 배에 타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주인공이 미쳐서 히로인을 먼저 배신하지 않는 이상 히로인은 끝까지 주인공을 믿고 따른다.

따라서 배신하지 않는 보증수표이자 성장 잠재력도 있는 히로인들을 더욱 찾게되고, 결국 히로인 위주의 스쿼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떻게 두 명만 영입하면 걔들로 임시 스쿼드 짜면 될 것 같은데.'

안정적인 괴수 사냥을 위해선 최소 3인 이상의 인원 구성이 필요하다. 단순히 마력을 늘리는 것을 넘어, 그의 전투 경험치를 올려야만이 진정으로 이능력자를 육성한다고 할 수 있다.

"사장님, 여기 딸기 씻어왔어요."

"고마워. 지금 시간이...."

"11시 조금 넘었어요. 저기, 사장님. 슬슬...."

유나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내게 눈치를 보냈다. 나는 마치 일부러 알람이라도 맞춰놓은 것만 같은 유나의 말에 소름이 돋았다.

<마력공급> 쿨타임 : 24분 39초.

"슬슬 뭐?"

"...준비운동 가볍게 하고 오늘치 운동 끝낼 타이밍 아녜요?"

24분 39초 뒤에 하자는 것이 아니다. 지금부터 시작해서 24분 39초 뒤에 사정이 이루어지도록 해달라는 말이었다. 나는 슬슬 내 사정관리를 들어오는 유나에 소름이 돋았지만, 그만큼 유나가 나의 색으로 물들어가는 것에 즐겁기만 했다.

"사장님, 어차피 오늘 오기로 한 사람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유나는 슬쩍 침대끝에 걸터앉았다. 소파도 있지만 굳이 침대에 앉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뿐이었다. 나는 시각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닫았다.

"환기한 지 얼마됐다고 다시 하려고 그래. 지금 1층은 영업시간이라 조용히 해야 할텐데?"

"괜찮아요. 어차피 후안 사장님네 카페 손님 없잖아요."

"...유나야, 그거 사장님 들으면 상처받으신다?"

"없는만큼 저희가 팔아주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후후, 사장님. ...아니, 오빠. 어서 슬슬-"

띵동.

초인종이 울렸다. 유나는 식겁하며 아래층의 눈치를 봤고, 나는 벗으려던 셔츠 단추를 다시 채우고 사무실 입구로 향했다.

"누구십니까?"

"어, 저, 저기...."

눈앞에 나타난 이는 산발이 된 여인이었다. 꾀죄죄한 몰골에 며칠 제대로 씻지 못한 듯 악취가 몸에서 풍기고 있었다. 낡은 외투는 어디 도매장에서 헐값에 나온 걸 주워 입은 듯 잔뜩 헤졌다.

"그...스튜디오 <청화>의 구인 공고를 보고 왔습니다만...."

"합격."

"예?"

내 말에 찾아온 여인도 놀라고 뒤에 침대를 정리하던 유나도 놀랐다. 나는 서류조차 보지 않은 여인을 덜컥 합격시킨 것이다.

"어, 저, 그.... 사무원이 아니라 경비원으로...."

"네. 경비원으로 들인 겁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시선을 맞췄다. 헝클어진 앞머리 사이로 비치는 눈동자는 피곤하지만 강인한 의지가 느껴졌다.

"사무실에서 저도 생활하는데, 함께 생활해야합니다. 그래도 괜찮으십니까?"

"......그, 호, 혹시."

그녀는 눈으로 자신의 몸을 가리켰다. 마주잡은 손이 긴장으로 벌벌 떨리고 있었다.

"......괜찮으시면...씻고 올 수 있게...월급을 일부나마 가불을...."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박라온입니다."

박라온. 그녀는 고개를 풀썩 떨구며 헛웃음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오자마자 돈 얘기부터 해서.... 하지만 제가 몸 상태가 말이 아닌지라...."

"아, 그거라면 걱정마세요. 저희 사무실에 그거 있거든요, 그거."

나는 침대 너머 한 켠에 마련된 화장실을 가리켰다.

"샤워부스랑 목욕탕 있어요. 거기서 씻고 오실래요?"

"...예?"

라온의 표정이 기괴해졌다.

"사무실에 왜 목욕탕이...?"

"아, 그거요? 저는 샤워실만 설치하려고 했는데, 누가 목욕부스는 꼭 있어야 한다고 해서."

유나는 시선을 돌렸다. 나는 라온을 안으로 잡아당기며 문을 닫았다.

"유나 양. 라온 씨가 몸단장을 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전 지금부터 외출하겠습니다."

"네.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라온 언니, 이쪽으로 와주세요."

나는 라온을 유나에게 밀었고, 유나는 라온의 악취에도 내색하지 않고 샤워실로 잡아 이끌었다. 라온은 혼란이 가득한 얼굴로 유나의 박력에 샤워실로 이끌려갔다.

"어, 어...?"

"아참. 라온 씨. 가기전에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나는 일부러, 원작 주인공이 읊어야 할 대사를 읊었다.

"가슴 좀 확인해봐도 됩니까?"

"......."

유나는 나를 황당한 눈으로, 라온은 여러가지로 복잡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은 분명 오해는 커녕 성희롱 범죄자의 말이었지만, 라온은 전직 A급 특유의 기감으로 나를 통찰하려고 했다.

".......그것도 업무의 연장선이라면."

나이스.

누리에게 하면 뺨맞을 소리지만, 라온에게는 가능한 선택지. 나는 황당해하는 유나에게 화장실 안을 가리켰다.

"유나 양, 사이즈 재서 좀 알려주세요. 나가서 속옷까지 싹다 사오게."

"아."

여러 의미로 복잡해졌던 라온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분명 머릿속으로 '내 업무는 밤시중이라느니', '포르노 배우라는 인생의 2막이 강제로 열리게 되었다'느니 하는 온갖 망상을 했을 게 분명하다.

"그럼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사실 알려주지 않아도 알고 있지만, 나는 라온이 충분히 씻을 수 있도록 사무실 밖으로 나섰다.

* * *

추한 모습을 보이는 건 몹시 부끄러운 일이다. 하물며 자존감이 바닥을 파내려가고 있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러하며,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몸을 같은 여인에게 알몸으로 보여주는 것은 더더욱 그러하다.

"와...."

하지만 유나는 씻고 나온 라온의 모습에 감탄사만 내뱉었다. 꾀죄죄한 모습은 마치 정체를 숨기기 위함이었다는 듯, 라온은 어지간한 모델보다도 몸매가 좋았다.

"무슨 크기가."

무엇보다도 유나는 옷 속에 꽁꽁 숨겨져있던 거대한 흉부장갑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자신도 나름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한국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압도적인 볼륨에 유나는 경외감이 들었다.

"그, 그렇게 보시면 부끄럽습니다."

라온은 임시로 받은 유나의 후드티를 걸친 채 유나의 눈치를 봤다. 바지는 아예 맞지를 않아, 라온은 후드티를 원피스 마냥 입은 채 담요만 걸치고 소파에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존대 안 하셔도 돼요. 저보다 한참 언니신데."

"...하지만 유나 양은 선배 아니십니까."

"저 고작 일주일 먼저 입사했는데요, 뭘."

"죄송합니다. 꼭 그런 것도 아니지만 제가 이런 말투가 익숙해서."

라온은 완강한 태도로 자신의 존대를 고수했다. 엄청난 고집에 유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라온의 프로필을 살폈다.

"음...과거에 히어로로 활동하셨네요?"

"예. 부끄럽습니다만, 과거 <운사>로 활동했습니다. 지금은...."

라온은 더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A급 히어로였던 라온이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는 이유는 그녀가 이능력자로서의 근간인 '코어'를 다친 은퇴 히어로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제 마력은 E급 정도지만 개인 전투력은 C급입니다. 최소한 D급 수준의 전력은 되리라 생각합니다."

"......아으으."

유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좌절했다. 라온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기대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 능력의 모든 걸 발휘하여 시키시는 바에 최선을-"

"반씩 나누면 일주일에 네 번은 제 몫이에요. 제가 선배니까."

"......????"

라온은 혼란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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