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5화 〉2부 1장 15
<잠시 뒤, 사무실.>
선의철.
이 세계의 대한민국 18, 19, 20, 21대 대통령으로, 평범한 야당의 의원이었던 그는 평양에서 S급 괴수가 나타나 난리가 났던 <평양 사태>를 계리고 정권을 잡는데 성공했다.
대외적으로는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으나, 실제로는 범죄조직을 운용하고 여론을 조작하며 반대파들을 빌런으로 몰아 잡아들이거나 괴수에게 살해당한 것처럼 꾸미는 등 뒤로는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메인 빌런 중 하나다.
그가 저지른 악행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전세계적으로 우경화가 되어가는 와중에 벌인 그의 행각은 다른 국가의 독재자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애초에 이 세계관의 지배자들은 여러 독재자, 학살자들의 이미지를 하나로 모아 만든 악인이다.
가령 중국의 경우, '모택평'.
그는 삼국시대의 한 유부녀 킬러가 현대에 환생했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으며, 중국 인민들의 신망을 받기 위해 스스로 개명까지 한 자가 있다.
게임 상 예전에 사망한 S급 이능력자의 부활을 위해 인민 100만명을 제물로 바친 인신공양을 저지른 것이 대표이며, 메인 스토리 상 중국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보내지는 적 병력들이 모택평이 보내는 추격대다.
또한 유럽 연합의 경우, '아돌프 빌헬름.'
독일 출신의 그는 교황청의 추기경으로 일하며, 동시에 전세계 히어로 협회를 뒤에서 조종하는 <원로원>의 일원이기도 하다.
그의 정체성을 단적으로 얘기하자면, 그의 인중에는 누구나 익숙한 콧수염이 달려있다. 그는 히로인 중 한 명인 영국의 여왕 아르엘을 중심으로 유럽 연합 전체를 혼돈에 빠뜨리는 인간인다. 원로원 중 한 명이지만, 랜덤하게 다크 레기온의 스파이로서 세계를 혼란에 빠뜨린다.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굳이 게임에서도 신경을 써야하나 생각이 들지만, 플레이어가 겪는 문제는 어쩔 수 없이 세계 정세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큐브>.
이계신의 코어가 27개로 쪼개진 물건으로, 막대한 마력을 가지고 있어 어떠한 소원도 들어주는 물건이다. 그걸 각국의 정치인, 빌런, 괴인, 괴수 등이 가지고 있으며, 플레이어는 이 큐브를 하나로 모아야 성주와의 전쟁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머쥘 수 있다.
"그래서 선의철이라는 자는 말이야, 큐브를 통해 거기를 늘리려고 하는 거야."
"......고작 그런데 쓴다고요?"
"거기에 더 있기는 하지."
이왕 그곳의 길이를 늘리는 김에 굵기도 확대한다거나, 정력도 늘린다거나, 오랜 정무로 늘어진 뱃살을 제거한다거나, 키를 늘린다거나, 스트레스로 인해 벗겨지기 시작한 두피 부분에 숱을 늘린다거나.
"선의철은 엄청나게 이기적인 사람이라서 자기한테만 소원을 쓰려고 해. 그래서 나는 한국에 들어왔어. 여기가 가장 내가 힘을 길러서 활동하기 편한 국가거든. 아니다, 내가 힘을 기른다기보다는...."
나는 유나의 얼굴을 붙잡았다.
"내가 키울 히어로들이 성장하기에 정말 좋은 곳이야. 유능한 인재도 많고, 한 두 시간만 움직이면 괴수들과 직접 얼굴 맞대고 싸울 수 있는 곳까지 갈 수 있고. 괴수는 화수분처럼 쏟아지고. 유나도 있고."
"...그렇게 갑자기 훅 들어오시면 어떻게 해요?"
"농담 아니야. 유나 아니었으면 나 진짜 미국으로 돌아갔어."
유나는 내 말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나는 결코 농담을 하는게 아니었다. 이유나라는 존재가 한국에 있기에 나는 한국에 들어왔다.
'성주가 유나를 타깃으로 한국에 오지.'
최종보스, 명왕성의 주인은 자신이 지구에 떨어뜨리고 간 이계신의 몸-'이유나'를 회수하러 한국에 온다. 제작사가 만약 게임의 배경이 될 나라를 다른 국가로 선정했다면, 아마 이유나는 전혀 다른 이름으로 다른 국가에서 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럼 당연히 플레이어도 다른 나라에서 진행하게 되었을 거고.
"저 알아요. 그런 말로 저 감동시키려고 하시는 거예요?"
"믿지를 않네. 내가 너한테 거짓말을 왜 하겠어?"
"알았어요, 알았어요. 오빠 한국에 붙들어놓기 위해서라도 제가 항상 곁에 있어드리면 되겠네요.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정부가, 나라가 적이 되는 셈인데. 오빠도 아까 찜질방에서 보셨잖아요."
"잘 봤지. 다들 선의철 연호하는 거."
신서울은 선의철의 왕국이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메인 스토리에서 선의철은 사사건건 개입하며 플레이어를 짜증나게 만든다. 대표적으로 괴수를 사냥하고 얻은 코어를 정산하기 위해서는 세금을 무려 최소 33% 국가에 납부를 해야만이 정산금을 받을 수 있다거나 하는 것이 선의철 식 독재의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니까 더욱더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동료들을 영입해야해. 모두가 서로를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사람들로."
"무척 어렵네요. 한국에 그런 히어로들이 있을까요?"
"있겠지. 그런데 유나야, 꼭 그런 히어로만이 아니더라도 믿을만한 사람들은 많아."
"...설마?"
나는 사무실에 들여온 화이트보드에 몇 가지 단어를 적었다.
"일단 우리가 믿을만한, 그리고 우리에게 힘이 되어줄 사람을 적어보자. 먼저 히어로. 대표적인 예가 우리가 영입하고자 하는 석하랑이 있지?"
"네. S급 히어로기도 하고, 한국 히어로 협회를 대표하는 분이니까 분명 엄청난 힘이 되어줄 것 같아요. 그런데...."
유나는 뭔가 찝찝한 지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광검 님은요?"
"아, 그 양반."
<광검(光劍)>. 석하랑보다 더욱 강력 이능력자이자, 알려지지 않은 세계 최강의 검사. SS급의 힘을 자랑하고 있지만 그 모든 진실을 숨긴 채, 수 년째 S급으로 은거하고 있는 신서울의 수호자.
"선의철 하수인이잖아. 안 돼."
"음...설득하면 분명 엄청난 아군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혹시 남자라서 안 되는 거예요?"
"아니. 광검은 분명 석하랑 만큼 뛰어난 동료가 될 거야. 하지만 이미 늦었어. 광검은...안 돼."
석하랑의 친부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선의철의 개가 되기를 자처했다. 엇나간 부정으로 인해 광검은 석하랑과 완전히 척을 지는 길을 걷게 되었고, 그에 따라서 석하랑이 한국을 대표하는 히어로가 된 것이다.
"신서울 자택에 처박혀서 꼼짝도 않고 나오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거야."
나는 유나에게 다가가 유나의 등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적었다.
시한부거든. 조만간 죽어.
"......네? 그걸 어떻게."
"내가 누구를 뒷배경으로 두고 있다고 생각해?"
나는 명함을 다시 꺼내들었다. 그에 유나는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아...그 분에게 들은 건가요?"
"어. 다 닳기 전에 들었던 거지."
<미래예지>의 이능을 가지고 있는 <오라클>의 이름을 팔았다. 그의 예언은 절대적이기에, 그 어떤 발버둥으로도 운명을 거스를 수는 없다. 광검은 죽는다.
'사실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해.'
사실 이미 어느정도 귀동냥으로 들은 건 있다. DLC 없데이트 내역을 훑던 나는 진작에 몇몇 문구를 보며 몇 가지 스포를 당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광검 구명 운동.
- 살아님이 광검계신다!
...아마도 높은 확률로 DLC에서는 광검을 살릴 수 있는 케이스가 될 것 같지만, 나는 광검말고 다른 여자를 한 번 건드려볼까 생각 중이기에 광검은 딱히 살릴 이유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죽이는 편이 석하랑을 영입하기에 더 적절하니까.
"...뭐,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하는 게 제일 좋겠지만. 다음. 히어로 말고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음...헌터요?"
"그래. 헌터가 가장 대표적이지. 우리가 쓰러뜨려야 할 적은 괴수들도 있으니까. 아니, 괴수가 사실 메인이기는 해."
"혹시 생각해둔 헌터 있으세요?"
"나야 뭐 직접 얼굴 보고 판단해야하니까...유나 너는 어때? 혹시 주변에 추천해줄만한 사람 있어?"
"......."
유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에 나는 조금 의아함을 느꼈다.
'여기서 유나가 정슈리 추천해줘야 하는데?'
정슈리. 히로인 4번. 화속성 A급에 다른 속성도 꿀리지 않는 재능을 가진 여인으로, 멀리 이국에서 왔다가 한국에 정착한 여자. 한국에서 이능력을 각성하고 A급의 재능을 인정받아 귀화한 히로인.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유일하게 격의없이 유나와 친하게 지내는 유일한 친구. 슬랜더 몸매지만 워낙 몸매의 비율이 좋아 에이전시를 통해 모델 일을 겸하고 있어 육체미 만큼은 밀리지 않는다.
"음...딱히 없는 것 같아요."
"정말?"
"네. 오빠한테 소개시켜드릴만한 믿음직한 사람은...죄송하게도 제 주변에는 없어요."
유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알고 있던 것과 조금은 다르지만, 딱히 크게 문제될 건 없었다.
"유나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럼 사람들을 일일이 하나 둘 살펴보는 방법밖에 없지?"
"어떻게 하실 거예요?"
"오디션. 그리고 모집 공고."
나는 <오라클 스튜디오>의 명함을 치켜들었다.
"우선 헐리우드 진출을 명목으로 사무직 직원을 모집할 거야. 아마 확정적으로 한 명 올 거고."
사무실에 항상 상주하고 있을 경비원, 그리고 커피 심부름이 가장 중요한 업무를 차지하는 인턴 알바.
"유나야, 너 혹시 입사원서 내 본 적 있니?"
"...입시원서는 내 본 적 있어요."
"그래? 그러면 이런 문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나는 미리 준비한 문구를 유나에게 보였다.
"......이거로 진짜 영입하려고요?"
"어."
가족 같은 회사.
"어차피 다들 한 집 한 침대에서 구르면서 가족이 될 사이인데, 거짓말 한 건 아니잖아? 후후."
"......오빠, 합동 결혼식이라도 할 참이에요?"
"유나야. 영웅은 삼처사첩이라고 하더라."
유나의 표정은 썩었다. 하지만 나는 굳이 뒤에 말을 덧붙였다.
"나는 지구를 구할 대영웅이 될 거야. 세계를 구한 남자가 여자 16명 정도 아내로 맞이하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
"오빠 잘못하면 칼로 배 찔리거나 하는 거 아녜요?"
"걱정마. 다 각오하고 하는 거니까."
유나는 머리를 쥐어 뜯으며 좌절했다. 나는 낄낄 웃으며 마도기어를 통해 우리 회사의 직원 모집 공고를 올렸다.
"오빠."
"응."
"정실은 저에요."
"......."
이유나, 무서운 아이.
* * *
<그 시각, 부산 종합 터미널 재활근로센터.>
"이건...좀 어렵겠는데요. 여자분이라서 좀 그래요."
"성차별입니다. 할 수 있습니다. 믿고 맡겨 주십시오."
머리칼이 푸석푸석하고 산발이 된 여인은 허리까지 숙이며 상대방에게 부탁했다. 꾀죄죄한 몰골과 낡은 코트는 여인이 얼마나 몰려있는지 가늠케 했다.
"허드렛일도 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시키셔도 됩니다. 저 어지간한 성인 남성들보다 힘은 그래도 셉니다. 비록 이런 몸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사정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A급 히어로셨던 분께 인턴도 안 시킬 잡일을 시킬 수는 없잖습니까."
허벅지위에 올려진 여인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만 여인은 표정을 지우고 다시 한 번 머리를 숙였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일만 시켜주신다면...뭐든지 하겠습니다."
"......박라온 씨, 아니 <운사> 님. 한 때 당신을 동경했던 팬이자, 당신 덕분에 목숨을 구했던 사람으로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남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 길드에 들어오시면 분명 운사 님의 몸을 노리는 늙은 변태새끼들이 있을 겁니다. 그러니...제발 부탁드립니다. 저희 길드에는 오지 말아주십시오."
"......."
여인, 과거 <운사>라고 불렸던 박라온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센터를 나왔다. 하늘은 우중충한 구름이 드리워있고,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했다.
치직, 치지직.
마도기어의 배터리도 어느새 다 닳아버렸다. 마력을 충전하면 다시 사용할 수 있지만, 애초에 너무 낡고 험하게 써서 고장나기 일보 직전이라 마력방전이 너무 심했다.
".....마지막."
박라온은 마지막 희망을 걸고 구인구직란을 뒤지기 시작했다. 제발 어떤 곳이라도 좋으니, 자신을 순수하게 한 명의 인간이자 구직자로서 대해 줄 곳을-
"아."
라온의 눈이 빛났다. 올라온 지 얼마 지나지 않고, 처음 올라온 공고였지만 왠지 모르게 직감이 말하고 있는 듯 했다.
"가자. 신서울로."
라온은 주머니에서 잔액을 확인했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으며, 지나가는 이들에게 허리를 굽신거리기 시작했다.
"저...신서울 갈 돈이 없는데 조금만...."
약 세 시간 뒤.
라온은 간신히 신서울로 올라가는 막차를 탈 수 있었다.
- 사무실 직원 모집합니다.
가족 같은 회사!
열정 가득한 분위기!
필요시 저녁, 숙식 제공!
연봉 3천 보장! (※정부 지원금 포함)
만 19세~29세 여성 우대!
모집 : 사무원, 경비원 각 1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