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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580화 (580/1,497)

〈 580화 〉2부 1장 10

호텔에서 가볍게 조식을 하고 나온 우리는 부산역에 도착했다. 아침부터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가운데, 유나는 전화로 부모님께 안부를 전했다.

"네, 네. 호텔에서 자고 이제 부산역 왔어요. 표 사고 도착시간 말씀 드릴게요. ...죄송해요. 워낙 걱정이 많으셔서."

"괜찮아. 부모님께서 유나 걱정하는 건 당연한 거야. 신서울역 도착하면 마중나오실 걸?"

"서, 설마요."

"아냐. 내가 천기를 읽었거든? 우리 괜히 역에서 같이 가다가 의심받을 거야. 그러니까 신서울역부터는 따로 행동하자."

내 단언에 유나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저, 저를 버리시는 건가요? 이게 그 말로만 듣던 먹버...?"

"남들 오해할 말은 하지 말자."

주변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외국인에 대한 안좋은 시선까지 더해져, 나는 유나의 허리를 휘감으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

"한 번만 더 그런 장난치면 사람들 앞에서 내가 손장난 칠 줄 알아라."

"......네."

네 손끝은 거의 유나의 왼쪽 가슴을 쥘락말락 했다. 당연히 그 누구도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유나는 벌게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신서울 부터는 내가 할 일이 있어. 사무실도 구해야 하고, 숙소도 구해야 하거든."

"어...다 정해진 거 아니셨어요?"

"오라클 스튜디오가 한국 진출한다는 얘기 없었지? 사전에 준비된 건 아무것도 없어. 내가 다 알아서 현지 조달해야 해."

사무실과 숙소의 위치는 당연히 정해져있다. 튜토리얼을 진행하다보면 어느 장소에 도착하게 되고, 주인공은 운명과도 같은 계약을 맺게 된다.

'유나가 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지.'

괜히 다른 장소로 계약하려고 하면 온갖 트러블이 발생한다. 괜히 시간을 허비하느니 적당히 이벤트를 보고 사무실을 구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었다.

'숙소는 근데 좀 바꿔야겠다.'

원래 정해진 숙소로 가면 메인 히로인과의 이벤트에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나는 그보다 더 좋은 숙소로 갈 방법을 알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할 행위들을 생각하면 그 숙소가 훨씬 더 좋았다.

"권력은 쓰라고 있는 거지...흐흐."

"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다 들어놓고 못 들은 척은."

"......그런 의미심장한 혼잣말을 하시니까 그런 거예요."

유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나는 유나의 허리를 토닥였다.

"기대하라고 하는 말이야. 나중에 숙소 구하면, 거기서 또 우리 일일과제 할 거니까. 이제 17시간 정도 남았다?"

"......."

유나는 다시 침묵했다. 손을 꼼지락 거리는 게 집에가서 어떤 변명으로 외박을 할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아카데미 방학 훈련 캠프에 참가한다고 말씀드리면 믿으실까요?"

"후후, 유나가 어른의 계단에 올랐구나. 남자와 하룻밤 자기 위해 부모님께 거짓말도 하고."

"하지만 17시간 뒤면 거의 자정이잖아요."

"꼭 밤에 하라는 법은 없지. 낮에 외출하는 것 정도는 괜찮잖아? 공부한다고 말씀드리고 나오면 의심하지 않으실 걸."

"아."

유나는 두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후후. 나야 유나가 저녁에 만나기를 바라면 얼마든지 시간을 낼 수 있지만."

"노, 노력해볼게요."

유나는 가볍게 두 주먹을 쥐었다. 아마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머릿속으로 어떻게 하면 외박을 해도 어색하지 않을 지 고민하지 않을까.

"그럼 기차 타러 가자. 가는 동안...그래. 한국에 있는 이능력자들이나 한 번 훑어볼까?"

"......여자만 찾으실 거죠?"

정곡이 찔렸다. 하지만 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유나야."

나는 유나의 볼에 대고 속삭였다.

"선택하는 건 너야."

"네?"

"너랑 같은 스쿼드가 될 사람인데, 네 의견도 중요하지 않겠어?"

물론, 나중에 함께 침대에서 뒹굴 사이기도 하지만. 나는 뒷말을 삼키며 유나와 함께 기차에 올랐다.

* * *

'사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유나는 오케이 하겠지만.'

유나는 관대하다.

내가 대놓고 한국의 이능력자들을 훑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여자 이능력자들을 집중적으로 보고 있는 걸 알면서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천명>, <망야>, <김치 리퍼 Mk.2>...."

사람 한 명 한 명 말할 때마다 유나는 몸을 움찔거렸다. 하나같이 B~A급의 여성 이능력자들로 제법 얼굴이 반반한 이들이었다.

"처음 보는 애들인데."

DLC로 추가된 동료 히어로들이 분명하다. 히로인들이 공략의 핵심이기는 하지만, 꼭 히로인으로 최종 스쿼드를 구성하지 않아도 클리어는 가능하다.

히로인만 SSS가 가능하지만 DLC는 또 어떻게 될 지 모른다. 나는 익히 알고있던 얼굴들을 제외하고 처음 보는 얼굴들을 차근차근 살폈다.

"음…."

<메뉴>

나는 상태창을 열었다. 지금부터 하는 말은 유나에게는 들리지 않고, 유나는 내가 깊이 고민에 빠진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다들 고만고만한데…."

그는 적절히 방제를 바꾸었다. '뷔페에서 먹을 음식 정한다'라는 방제로 바뀌자마자, 채팅창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누리마을갈비탕] : 비히로인 파티로 최종보스 공략허쉴?

[지존광견] : 남캐팟ㄱㄱㄱㄱ

[마음만은20대] : 빌런 파티 어때요?

"히로인 16명 다 따먹을 건데요."

시스템이 열려있는 동안은 자유롭게 방송을 보는 이들과 대화가 가능했다. 나는 나를 향해 카메를 들고 있는 사람과 본격적으로 논의하고 싶었지만, 그는 내게 일절 훈수를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그는 내 선택을 존중했다. 나는 그의 배려를 존중해 그 어떤 남자도 동료로 영입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때문에 나는 처음부터 못을 박았다.

"스쿼드는 무조건 히로인. 아니면 히로인 관련 여자."

우선순위가 히로인으로 정해지니 사람들은 아쉬워하면서도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이유나를 보내버린 내가 과연 히로인을 어떻게 공략할 것인가. 나로서는 그의 지식을 바탕으로 공략집을 들고 공략하는 셈이라 딱히 걱정될 것은 없었지만, 저들은 또 보는 관점이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석하랑ㄱㄱㄱㄱㄱㄱ

당연히 순서대로면 박라온 아님? 아님 김누리거나

서순 꼬아서 후반에 들어오는 히로인 공략하는 건 어떰?

채팅창이 각자 원하는 히로인으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그와중에 단연 압도적인 화력을 자랑하는 이는 음성 도네이션까지 하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누리마을갈비탕] : 누리 자매덮밥 가즈아아아아

"<운디네>요? 김가온?"

김누리의 쌍둥이 언니. 루트에 따라서는 괴인이 되는 빌런이지만 살릴 수 있기야 하다. 동료로 영입하려면 조금 조건이 까다롭기는 한데....

"아 참. 잠시만요."

생각난 김에 나는 바로 운디네를 검색했다. 그러자 내가 그의 지식으로 알고 있던 원작과는 사뭇 다른 내용이 튀어나왔다.

"<운디네>가 두 명?"

DLC 추가 캐릭 있어요!

김가온한테 이명 물려준 스승임ㅇㅇ

누리 가족 스토리가 너무 암울해서 언니 스승 붙여놓은 듯.

"......흐흠. 러시아 사람이네요?"

김가온이 러시아에서 활동하는 히어로니까요.

앗앗

라스ㅍ...ㅋㅋ, ㅈㅅ!

누군가가 스포를 하려고 하니 입이 근질근질하다. 당장 정체를 까발리고 싶지만, 나는 웃음을 참았다.

"어디...이름이 아나스타샤네요? 당첨."

???

당첨이라니ㅋㅋㅋ

설마

"후보에 넣도록 하죠. 잘 먹겠습니다."

그는 광검과의 관계로 눈치를 봤지만 나는 눈치를 볼 이유가 없다. 나는 운디네를 속으로 되뇌이며 다른 여자를 확인했다.

"지금 접촉 가능한 히로인이…잠시만요."

나는 리스트를 우선 뽑았다. 간부진을 제외한 10명의 히로인 중 무난하게 접근할 수 있는 자가 누가 있을까.

박라온. 공고를 올려두면 알아서 찾아올 것이다.

김누리. 야밤에 공원에 나가면 만나게 될 것이다.

정슈리. 유나의 친구니 유나가 소개시켜 주면 만나게 될 것이다.

"지금 안 되는 사람은…."

히카리. 대전 지하실에 갇혀있지만 구할 전력은 아니다.

샤오린. 중국의 군신이다.

아르엘. 유럽을 중심으로 돌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천가을. 1장의 메인 빌런으로 서울 구로의 지하에 있을 것이다. 혼자 가는 건 자살행위다.

"......그럼 신서울에 둘."

은유하. 그리고 백희아.

재계와 정계의 거목은 내가 알고 있던 20대 초반의 어린 여인들과 사뭇 다르다.

"은유하가 한 살 연상이고 백희아가 한 살 연하였죠?"

주인공의 나이는 26살. 따라서 은유하는 27살이고 백희아는 (명목상) 25살이다. 가장 나이가 많은 천가을은 분명 3-

"흠흠. 나머지 한 명은 지금 부산에 있네요."

석하랑. 2025년에도 여전히 S급으로 머물러 있는 한국 유이한 S급.

DLC로 많은 이능력자들이 추가되었어도 S급이 둘 뿐인 건 여전했다. 그나마 위안거리가 있다면 B~A급의 수가 늘어났다는 정도.

"...셋 중에 한 명 정도는 지금 따먹, 아니 공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내 혼잣말에 채팅창에 또다시 혼란이 내려앉았다. 대놓고 공략 선언을 하니 사람들은 오히려 나를 도발했다.

야 기차 돌려!!ㅋㅋㅋ

둘 다 숨어있을텐데 어떻게 접근하려고요?

정체 밝히면 선꼬삼네 부하들이 와서 게임오버 당하는 거 아님? 최소 4월까지는 조심해야할텐데.

"정체를 밝히면 그렇게 되겠죠."

<문신사>에 의해 조종당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머리에 오징어먹물을 뒤집어 쓰게 될 것이며, 무궁화 라택스 옷을 껴입고 문신사의 이능력을 SS까지 강화시키게 될 것이다.

"문신에 조종당해서 문신사랑 다른 여자들 마력 강화시키는 생체딜도행?"

그리하여 문신사는 큐브까지 손에 넣어 대한민국 전체를 세뇌하여 뒷세계에서 군림하게 된다. 12월 25일, 성주가 도착하는 날까지 문신사는 한국의 뒷세계에 군림하는 여제가 되어 주지육림을 펼치다 멸망을 맞이하게 된다.

"그럼 정체를 안 밝히고 접근해서 먹으면 되는 거잖아요. 아, 물론 바로는 못 해요. 유나처럼 어디 공략 난이도가 쉬운 애들도 아니고."

히로인들 각자 부여된 고유 번호상 은유하는 7, 백희아는 10이다. 사실상 공략 난이도나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간부나 정령은 또 별개의 얘기지만, 인간 히로인들은 적어도 그랬다.

"최소 일주일 가량은 작업 들어가야 접근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그건 히로인 넘버가 13인 석하랑도 마찬가지. 제각기 접근하는데 장단점은 있지만, 한 명을 선택하면 다른 이들과는 조금 척을 지는 셈이다.

히어로 계를 대표하는 자, 석하랑.

재계를 대표하는 자, 은유하.

정계를 대표하는 자, 백희아.

20대 중반에 접어든 세 히로인은 한국을 셋으로 양분하는 집단의 우두머리나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선의철이라는 거악 아래에 이익집단의 대표 격으로 손은 잡고 있지만, 동시에 각자 원하는 이상이 달라 서로 견제하며 암투를 벌이고 있었다.

"침대위에서의 암투...암컷투쟁을 벌이게 하기 전까지는 서로 적인 셈이죠."

셋을 동시에 공략하기에는 너무 리스크가 크다. 본격적으로 게임이 시작되어 주인공 일행이 크게 활약하는 3월 이후라면 모를까, 그 전까지는 괜히 이곳 저곳에 문어발을 펼쳤다가 호되게 당할 수 있다.

"그러면...누구랑 가장 먼저 접촉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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