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3화 〉2부 1장 03
"미치고 환장하시겠네. 이걸 방송켜서 한다고? 아무도 잡아갈 사람 없는데."
남자는 태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볐다. 타들어가는 꽁초처럼 남자의 마음도 썩어들어갔다.
"하 씨, 처리하기 곤란할 수도 있는데."
남자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채팅창을 예의주시했다. 하꼬방이나 마찬가지인 시청자 수였지만, 방송을 시작하고 고작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두 자리 수로 스타트를 하는 건 분명 이례적인 일이었다.
'분명 나중에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남자는 둘의 성격을 떠올렸다. 소통은 일절 없이, 어그로를 끄는 이들에게 역으로 스포를 하며, 자신들 멋대로 움직이는 저세상 방송이 될 게 분명했다.
"......이러다 나 시말서 쓰는 거 아닌가?"
다행히 긴급탈출 루트를 마련하여 딱히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모처럼 밖으로 나온 이들이 다시 안으로 잡혀들어가는 건 남자로서도 사양이었다.
"아니지, 아니지. 지들도 불안해서 방송 킨 거겠지?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으면 걔들이 개수작 부리지 못하게."
잔걱정이 심한 남자와 경계심이 강한 여자가 연인이 되니 무턱대고 미친 짓을 저지른다. 둘을 옆에서 지켜봐왔던 남자로서는 충분히 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으나, 회사 사람들은 분명 난리가 났을 것이다.
뚜르르.
남자는 스마트폰을 열어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금방 전화를 받았다.
"야, 탁화야. 너네 지금 어떻게 됐냐?"
[사장님, 저 좆됐습니다. 방송 켠 순간부터 저희 관리팀 24시간 대기모드로 들어갔습니다.]
"그래? 뺑이쳐라. 고생하고. 괜히 나 이사진에 불려나가도록 일 크게 만들지 말고 너희들 선에서 알아서 처리해. 알겠어?"
[물론입니다. ...그런데 사장님, 진짜 무슨 일 안 나겠죠?]
남자의 목소리에는 불안감이 가득했다.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는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왜 갑자기 방송이죠?]
"돌다리 두들겨보고 비행기로 날아가는 놈들이니까. 뭐...이유야 여러가지가 있지."
서로 사랑을 슬슬 바깥에 과시하고 싶어한다거나.
방송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어한다거나.
방송을 보게 될 '누군가'에게 자신들을 지켜달라고 무언의 시위를 벌인다거나.
"50일 정도 꿀빨았으면 됐잖아. 너희들 일이 걔들 DLC 하는 동안 사고 안 터지도록 서포트 하는 거 아니냐."
[50일 동안 잠잠했는데 비상이 떨어지니까 그러는 거 아닙니까. 사장님, 지금 어디십니까?]
"나?"
남자는 제주도의 해변가를 걷고 있었다. 강한 바람에 남자가 입은 샛노란 코트가 펄럭거렸다.
"알아서 뭐하게. 뭐 사고 터지면 나 부르려고? 냅둬라. 내가 맡은 프로젝트는 다른 쪽이지 이 쪽이 아니라고."
[그러면서 왜 저희는 이쪽으로 파견 보내신 겁니까...?]
"동기 사랑 나라 사랑. 너희 동기가 사고쳤으면 연대로 책임져야지. 끊어. 고생해라."
뚝. 남자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고 휘파람을 불었다. 다행히 주변에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겜창부부가 DLC를 안할 리가 없...응?"
삐리리. 남자는 자신의 스마트폰에서 뽕짝 트로트 벨소리가 울리자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전화를 건 상대를 보자마자 남자는 바람이 적은 돌담 밑으로 쪼그려앉았다.
"예, 예! 전화받았습니다."
[야. 너 알았냐?]
신경질적인 상대의 목소리에 남자는 침이 꼴깍 넘어갔다.
"아, 아뇨. 죄송합니다. 저도 몰랐던 사안이라.... 제가 전화해서 경고할까요?"
전화를 건 상대는 남자조차 어쩔 수 없는 신적인 존재. 자신이 일개 계열사의 사장이라면, 상대는 그룹 전체의 위에 우뚝 서있는 그룹의 회장.
[아니,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닌데....]
그런 상대가 자신에게 난감한 듯 물었다.
[...이거 구독이라는 건 어떻게 하는 거냐?]
"......."
강한 바람에 작은 돌조각이 틀틀거리며 돌담에 부딪혔다.
* * *
원작 주인공에게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시안.화이트.히비스커스. 디폴트 네임 시안. 플레이어는 이 '시안'의 이름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고, 그것이 인류를 구할 지휘관의 이름이다.
그리고 그의 과거 이름은 백청화.
선의철에 의해 <무궁화 보이>라는 이명으로 활동한 S급 히어로였으나, 평양 사태로 몸의 마력을 모두 잃고 미국으로 어떻게 건너가 새로운 삶을 살고 있던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다.
미국의 히어로 아카데미 비능력자 부문의 지휘 계열에서 수석 졸업이라는 쾌거를 달성했고, 지인이자 원탁의 히어로인 오라클의 요청으로 한국에 파견 지휘관으로서 유망주를 발굴하는 것이 이야기의 시작이며 주인공의 배경이었다.
그것이 금발서양남 시안의 이야기.
하지만 DLC 답게 주인공의 '현재' 직업이 몇 개 추가되었다.
"어, 음, 주인공 직업이 다양하네요?"
"히어로, 헌터, 용병이라...."
"왜 빌런은 없을까요?"
"그러면 이야기 진행이 안 되잖아. 악의 조직 간부 직속 부하라도 되면 어쩌려고? 그러다 까딱 잘못하면 성주 도와서 세계 멸망시키게 될 수 있어."
"그건 안 되죠."
세계를 구해야하는 영웅담에 빌런 주인공이라니. 그건 빌런이라기보다는 다크 히어로에 가깝지 않을까. 창염은 금발서양남이라는 항목은 일찌감치 치워버린 뒤, 세 가지 항목을 손가락으로 까딱거리며 내게 물었다.
"이거 선택해서 달라지는 거 있어요?"
"직접 해보면 알겠지."
청화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가장 위에 있는 히어로 항목을 열었다.
§□□□□□□□§
<히어로>
당신은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히어로입니다. 하지만 괴수의 공격으로 무릎을 다쳐 현장에서 뛰기 어려워진 당신은 이제 후진 양성을 위해 당신만의 히어로 아카데미를 운영하고자 합니다.
# 전투력 : C.
원래는 A급 실력이었으나 깊은 상처로 인해 전투력이 많이 약화되었다.
# 마력 : B.
출중한 재능으로 A급 유망주로 꼽혔으나 아쉽게도 B급으로 머무르게 되었다.
# 명예 : A.
B급 히어로였으나 활약 만큼은 여느 A급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 10명 중 7명은 아는 당신의 명예는 아카데미를 이끌어나가는 자산이 될 것이다.
# 자금 : D.
히어로 활동을 하며 얻은 자금 대부분은 상처의 치료와 아카데미 설립에 사용하고 말았다. 까딱 잘못하면 월세가 밀릴지도 모른다.
<특성>
[히어로] : 히어로 영입 확률 소폭 증가. 빌런 영입 확률 대폭 감소.
[현장 지휘관] : 지휘력 상승. 아군 지시 미이행 확률 대폭 감소.
[전우찬스] : 확률에 따른 동료 히어로들의 다양한 지원.
§□□□□□□□§
"이건...."
"박라온이 지휘관이 된 격이군."
"저도 그 생각했는데!"
현장에서 다쳐 후진 양성을 도모하는 히어로는 꽤나 제법 있었다. <청운> 박라온의 경우처럼 <운사> 시절의 과거를 되찾기 위해 히어로로 활동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그 박라온이 순순히 영광을 되찾기를 포기하고 새로운 히어로를 기르는 루트나 다름 없었다.
"음...이러면 그 무궁화 친구는 어떻게 되는 거죠?"
"글쎄. 적당히 비슷하게 달라지지 않을까?"
[누리마을해장국] : 네! 직업마다 다 바뀌어요. 아예 완전히 갈아엎은 경우도 있어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누리마을해장국 님."
이래서 방송이 좋다. 이 정도는 훈수라고 하기 보다는 선택을 함에 있어서 적당한 가이드라인이었다.
"무궁화였는지 개나리였는지는 직접 하면서 알아보겠습니다."
"히어로로 선택을 하면 말이죠."
나와 청화는 히어로라는 선택지를 두고 서로 애매하게 웃었다. 나나 청화나 히어로의 성향은 결코 아니었다.
"자금이 D급.... 초반에 돈이 쪼들리는 거야 어떻게든 벌면 그만이니까 돈은 문제 없어요. 초반 동료들도 돈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들이니까."
"나는 이게 제일 마음에 드는데."
나는 [현장 지휘관] 특성에 눈길이 밟혔다. 지시 미이행 확률이 감소한다는 말에 나는 속이 다 편안했다.
"이 길을 걸으면 최소한 트롤러는 없겠어."
"대신 명예나 평판을 어어어엄청 신경써야할 각이네요. 조금만 비열한 짓 하면 바로 팬들이 안티로 돌아설 걸요?"
오오오
P님 역시 예리해
시청자들의 반응으로 유추한 히어로 플레이는 청화의 예상과 비슷했다. 정도를 걸어야 하는, 바른 길만 걸어야 하는 순수한 히어로. 예전부터 활약했다고 하니 히어로 직종의 동료들과는 인연을 쌓기 쉬울 지 몰라도, 선의철의 헬조선에 암약하는 자들을 생각하면 여러모로 신경쓸 게 많은 직업이었다.
"그래도 여긴 누가 동료로 영입하기 편한 지 대충 알고 있잖아?"
"현직 히어로들이겠죠. 뭐 꼭 히어로 아카데미라고 해서 히어로만 키우라는 법은 없지만...일단 다른 것도 확인해보죠. 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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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당신은 유명 헌터 길드의 유망주였습니다. 괴수를 사냥하여 코어와 부산물로 돈을 버는 사냥꾼인 당신의 길드는 감당 못할 괴수로 인해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당신은 이제 헌터 길드의 수장으로서 새로이 길드를 이끌어야 합니다.
# 전투력 : B.
헌터로서 어디가서 약하다고 꿀리지 않을 수준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
# 마력 : C.
마력 양은 적으나 괴수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전투 기술을 가지고 있다.
# 명예 : B.
제법 유명한 헌터 길드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으나, 그 자부심은 하루 아침에 무너졌다. 명예를 되찾을 지는 당신의 손에 달렸다.
# 자금 : C.
길드를 통째로 물려받아 자본과 시설은 어느정도 마련되어 있다. 하지만 정기적인 괴수 사냥을 나서지 않으면 금방 자금줄이 마를 것이다.
<특성>
[헌터] : 헌터 영입 확률 소폭 증가. 히어로 영입 확률 소폭 감소. 빌런 영입 확률 소폭 감소.
[사냥꾼의 눈] : 괴수 레이드 시 낮은 확률로 급소 판별.
[모험가] : 확률에 따라 던전 토벌 시 다양한 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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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이 기준이니까 확실히 헌터들이 자리잡았을 때죠. 그런데 던전...?"
"큐브로 만들어진 이계같은 곳인 듯 한데. 그 호로관 메뚜기처럼."
"아하. 그런 던전이요."
과연 여기서 말하는 던전이 나와 청화가 익히 알고 있는 던전일 지, 아니면 진짜로 판타지에서나 나올 법한 던전인지는 직접 겪어봐야 할 일. 자금이 B급으로 기반은 마련되어 있으니 사람만 데려와 쓰면 그만이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용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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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병>
당신은 이능력을 각성하여 히어로도 헌터로도 활동하지 않는 프리랜서 용병입니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며, 모 유명 그룹의 의뢰로 용병단을 구성하여 육성하는 계약을 맺었습니다.
# 전투력 : A.
어지간한 일에도 손을 담궜던 만큼 전투 경험이 풍부하다.
# 마력 : D.
태생적인 마력의 부족함으로 A급 전투력을 살리기 위해서는 도구의 도움이 절실하다.
# 명예 : D.
돈만 받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용병 업계에는 다소 알려져 있으나 세간의 대부분은 당신을 알지 못한다.
# 자금 : A.
모아둔 돈도 충분하며 계약금도 엄청난 액수가 준비되어있다. 하지만 계약 조건을 달성하지 못할 경우 물어야 할 위약금은 절대로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특성>
[용병] : 빌런 영입 확률 소폭 증가. 헌터 영입 확률 소폭 증가. 히어로 영입 확률 대폭 감소.
[자본주의의 화신] : 자금력에 따라 일시적으로 동료 계약이 가능.
[암거래] : 확률에 따라 블랙마켓 이용 시 다양한 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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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이네요...."
"말 그대로 용병이군. 어디랑 계약했는 지 조금은 짐작이 가지만...."
"그쵸? 근데 세 군데 정도 있지 않을까요? 하나는 이거, 하나는 이거. 나머지 하는...푸흐흐."
청화는 손가락으로 숫자 7을 그렸다가 숫자 10을 그렸다가, 마지막에는 손날을 세워 목을 그었다. 확실히 전자의 둘이 계약의 배후라면 모를까, 자존심이 무척 짧고 가는 그 자라면 충분히 위험한 계약이었다.
"어느쪽을 골라도 다 일장일단이 있어서...아, 훈수 온이에요. 여러분, 혹시 선택에 따라 초기 멤버가 달라지나요? 스타팅 3명 말이에요, 스타팅."
[히토미러브] : 훈수하면 역으로 훈수나 스포한다더니?
"그 정도는 알려주셔야 저도 제 남편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선택하죠."
청화는 볼을 부풀리며 불만을 드러냈다. 굳이 남편을 언급하는 것에 시청자들은 짹짹거리며 구시렁거렸지만, 나는 그냥 가만히 내버려두기로 했다.
[히토미러브] : 방장 진짜 스포 안 할 거임?
"약속하죠. 그냥 스타팅만 알려주세요."
[히토미러브] : 유나만 고정임. 나머지는 비밀. 푸흐흐.
시청자는 우리를 상대로 도발했다. 다른 이들의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이유나'를 제외한 나머지 히로인들은 경우가 다른 듯 했다.
박라온, 김누리 이외의 히로인이 합류할 수도 있는 것이고, 여자 히로인이 아닌 남자 히로인이 합류할 수도 있는 것이고, 의외로 그냥 김이박 스타팅 트리오가 그대로 직업만 다르게 합류할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직업을 어떻게 선택하느냐의 문제네요."
"가볍게 생각해. 뭘 하든 그에 맞춰 움직이면 되니까."
나는 청화를 다독이며 생각에 잠겼다. 과연 어떤 선택을 내리면 좋을까.
"저희야 뭘 하든 상관없으니 이건 여러분에게 맡길까요?"
나는 청화의 선택을 따르기로 했고, 청화는 다른 이들의 선택에 맡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