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2화 〉2부 1장 02
"아, 진짜 모르겠다."
청년은 오늘도 어김없이 루트 진입에 시도했다가 실패했다. 눈앞에 떠오른 게임 오버 화면에 절로 짜증이 났지만, 본인의 플레이에 따른 업보라 어쩔 수 없었다.
"얀데레 엔딩 무섭네...."
사랑하는 여자는 무섭다고 하더니. 고작 세 다리 걸쳤을 뿐인데 피닉스 루트에 진입하려고 이것 저것 시도하다가 푹찍당했다. 고통은 없었지만 마음이 아팠다.
업적 달성!
"이런 걸 업적이라고 하지 말라고...."
DLC가 발매된 지도 어언 한 달이 훌쩍 넘었건만, 제작사 측에서는 1년동안 무슨 준비를 한 건지 아직까지도 클리어율 100%가 나오지 않고 있다.
"이 새끼들 주인공 어떻게 죽는 지만 연구한 건가?"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주인공을 죽이더라. 괴수에게 습격을 당해 죽는 건 양반이고, 히로인이나 동료들에게 죽는 경우도 허다했다.
- 물론 그 대부분이 좆을 좆대로 놀리다가 좆된 경우였지만.
"진짜 빡치네...."
청년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스트리밍 사이트에 접속했다. 쟁쟁한 게임들 가운데 <푸른 하늘의 데스디나스>라는, 소위 '덕내'나는 19금 미연시가 당당히 시청자 리스트 중 5위 안에 들락날락 거리고 있었다.
"다들 이걸 왜 보면서 하는 거지...?"
청년은 이해할 수 없었다. 공략 방송으로 이름을 내걸었다고는 해도, 게임은 남이 하는 걸 보는 것보다 내가 하는 게 더 재미있는 부류였다. 자기가 하지 못하는 걸 방송으로라도 대신 보는 게 아니라면-
"아, 하긴 그렇기도 하겠다."
방송을 보면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자신이 아무리 공략본을 봐도 들어갈 수 없는 히로인 루트를 포기하게 되는 경우라거나, 아니면 자신이 연예인처럼 보는 방송인이 히로인과 썸을 타는 걸 보며 흐뭇해 한다거나.
"뭐 특별한 거 없나...?"
청년은 굳이 따지자면 정보를 수집하는 쪽이었다. 방송을 통해 뭔가 새로운 정보가 있으면 그것을 자신이 직접 체험하자는 위주였고, 따라서 시청자가 1만명이 넘는 대기업 방송인부터 하꼬방까지 전부 수박 겉핥기로 찾아보는 타입이었다.
"어디보자...응?"
페이지를 쭉쭉 넘기다보니 이상한 방이 보였다. 데스디나스 플레이를 송출하는 채널만 전세계에 수 만개에 이르는 와중에, 유독 청년의 눈에 띄는 한 방소이 있었다.
<경력있는 신입 청화쟝의 DLC 처녀방송(feat.남편)> 시청자 수 : 2명.
"뭐야, 이건?"
누가 방송하다가 말아먹어서 갈아엎었나? 게임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지만, 스스트리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얼공 안하는 사람인가?'
청년은 잠깐 머리를 식히기 위해 방송을 눌렀다. 경력있는 신입이니 뭔가 다르지 않을까.
[음...여자 지휘관 고르면 어떻게 될까요..?]
[어느쪽이든 상관없지. 히로인들은 네가 본심대로 대해주면 동성애도 오케이 하는 애들이니까.]
"헉."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였다. 육성으로 들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도 없는 두 명의 목소리에 청년은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남자로 갑니다.]
[왜?]
[그래야 히로인에게 박을 수 있으니까요...!]
"그건 인정이지."
청년은 여신의 목소리를 가지고 상스러운 발언을 하는 스트리머에 불경하게도 공감했다. 'feat.남편'이라는 문구가 조금 거슬리기는 했지만, 부부가 함께 방송을 하는 건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19금 미연시를 아내에게 방송시켜서 돈을 벌려고? 아내는 좋다고 남자 주인공으로 플레이? 윽.'
돈이 정말 무섭구나. 청년은 도대체 이들이 어떤 자들일까 궁금하여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청년 이외에 들어온 2명은 아무 말 없이 방송을 시청하고 있었다.
[라스트지휘관] : 저기요
[라스트지휘관] : 캠은
[라스트지휘관] : 안켜시나요?
[아, 캠이요? 지금 신체 데이터 스캐닝 중이라 잠시 꺼뒀습니다. 아, 방금오셨구나. 반가워요.]
"......어우, 소름."
청년은 오한이 들었다. 목소리를 일부러 흉내내려고 해도 이정도로 똑같지는 않을 것이다. 일부러 컨셉을 잡고 하는 거라면 두 부부 모두 소름이 돋을 복화술사였다.
"한 명은 P쟝이고 한 명은 P형이네."
컨셉 방송치고는 상당히 독특하다. 신체 데이터를 스캔하고 있다면 진짜 처음 VR에 접속하는 사람이 게임을 하는 셈이었다.
[라스트지휘관] : 게임은 아내분이 하시나요?
[예. 저는 클리어해봤고, 아내는 옆에서 보기만 하고 플레이하는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라스트지휘관] : 아내분이 이거 플레이하는 거 뭐라고 안 하세요?
[......이걸로 아내를 만나서 딱히.]
플레이어의 신체 데이터가 스캔 되는 동안 방송은 거의 남편이라고 불리우는 젊은 목소리의 남자와 청년의 대화로 채워졌다.
[라스트지휘관] : 혹시 피닉스 성우 분들이세요? 부부는 컨셉?
[...성우는 아니고 그냥 제 육성입니다. 아내도 그렇고. 진짜 부부에요.]
[라스트지휘관] : 그러시구나ㅎㅎ
청년은 갑자기 궁금해졌다. 과연 아내가 남자 주인공이 되어 다른 여자들과 하는 걸 어떻게 생각할까. 떡씬에서만 자기가 하겠다고 나서지는 않을까? 아니면 그 부분만 스킵하는 게 아닐까?
[아, 다됐어요.]
궁금한 것을 물어보려던 사이, 다시 신경쓰이는 목소리의 주인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마저도 똑같은데 혼잣말조차 존댓말을 하는 컨셉 유지에 청년은 절로 혀를 내둘렀-
"니미 씨발?"
화면에 나타난 여인을 보자마자 청년은 욕지기를 내뱉었다. VR기기와 스트리밍 프로그램이 결합된 는 게임 내부의 플레이어의 전신을 바로 옆에서 카메라로 찍는 듯 보여주는 시스템이었다.
[한 명 더 늘었네요? 반가워요, 라스트지휘관님.]
"와, 씨발. 뭐야 이거?"
코스프레 대회를 나가면 제작사에서 차원문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닮아있었다. 아니, 그 전에 어떻게 저렇게 선명하게 머리와 눈동자를 푸른색으로 꾸밀 수 있는 거지?
[라스트지휘관] : 와ㄷㄷ 피닉스 님이랑 똑같네요ㄷㄷㄷ 차원문 찢고 나오신 줄ㄷㄷ
[저는 청화에요!]
스스로를 청화라고 소개한 여인은 VR위치의 카메라를 180도 돌렸다. 청년은 화면에 나타난 상대에 기겁을 했다.
"피닉스...?!"
[짜잔! 피닉스 코스프레! 투구 안쪽 안보이도록 재현하느라 힘들었어요!]
[저는 전속 카메라맨 [프로듀서]입니다.]
창염의 피닉스(인간형)와 너무나도 닮아있는 여자.
창염의 피닉스(괴인형)과 너무나도 닮아있는 남자.
청년은 마치 두 명의 피닉스가 함께 방송을 하는 듯한 모습에 오한이 들었다.
[라스트지휘관] : 준비 진짜 제대로 하셨네요. 보고 찐인줄.
[찐? 찐따요?]
[진짜 같다는 말이다. 죄송합니다, 얘가 아직 은어는 약해서.]
[한글 놔두고 왜 줄여서 말해요? 말이라는 건 괜히 함축해서 말했다가는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는단 말이죠. 자고로 언어란 그 사람의 마음을 진솔하게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서-]
뚝. 프로듀서는 청화의 말을 음소거시켜버렸다. 방송을 이끌어나가는 메인 진행자의 마이크를 꺼버린 프로듀서는 끊임없이 재잘거리는 청화를 가리키며, 우측 하단의 서브 캠에서 스케치북으로 뭔가를 적었다.
[죄송합니다, 얘는 말을 많이 하지 않으면 죽는 병에 걸렸어요.]
"......컨셉 진짜 제대로 잡았는데."
청년은 슬쩍 시간을 확인했다. DLC 업데이트 중 하나인 온라인 컨텐츠, <친선 교류전>을 하려면 아직 시간이 한참 남아있다. 이미 스쿼드 구성은 끝내놓았으니, 적당히 휴식을 취할 겸 방송을 구경하기로 마음먹었다.
"...시간도 남았는데 좀 볼까?"
청년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고 방송을 시청하기 시작했다. 청년과 마찬가지로 뭔가에 홀려서 들어왔는지, 아니면 신체 데이터 스캐닝이 끝난 화면을 보고 얼굴에 낚여서 들어왔는지 사람들이 벌써 10명이 넘었다.
[유나천사] : 코스프레 플레이임? 그게 가능?
[우리집누리는안물어요] : VR 아바타 아니에요? 그럼 저게 진짜 얼굴에 몸이라는 건데?
[PPP] : 어우야 P님 역시 빨통 오진다
<알림> PPP님이 매니져에 의해 영구정지 되었습니다.
"......칼삭 오졌다."
청년은 소름이 돋았다. 채팅이 올라오고 난 지 0.1초도 지나지 않았을텐데, 시작부터 분위기를 흐린 자는 순식간에 퇴장당했다.
[뭐에요? 밴? ...어머나, 칭찬은 고마운데 이거 주인 있어요. 푸흐흐.]
"......부부라고 하더니 멘탈 장난 아니네."
청년은 채팅을 읽고 오히려 대수롭지 않게 흘려넘긴 청화의 태도에 소름이 돋았다. 앞으로 자신처럼 피닉스와 너무나도 닮은 모습에 이끌려 들어오는 이들이 수두룩할텐데, 어지간한 맨정신으로는 제대로 버티지 못할 것이다.
'아니지. 남편 보는 옆에서 다른 여자랑 남자 몸으로 떡치는 게임 하는 것 부터가 정상이 아니구나.'
과연 얼마나 방송이 오래 갈 것인가. 청년은 복권을 긁는 마음으로 현금을 충전했다.
[라스트지휘관] 님이 1개월 구독!
청년은 그렇게 저세상 방송의 첫 번째 구독자가 되었다.
* * *
가상현실게임의 방송은 1인칭 시점이 기본이기는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 스트리머의 플레이를 3인칭으로 구경하는 시점 또한 가능하다.
전자의 경우야 플레이어의 시각 정보가 그대로 송출되는 셈이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플레이어의 활약을 옆에서 촬영하는 '카메라맨'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방송의 매니저 겸 채팅방 관리인 겸 카메라맨 겸 훈수, 종합하여 <프로듀서>가 되었다. 방송을 하게 되면 창염 뿐만 아니라 나까지 정체가 드러날 수 있지만, 중요한 건 방송을 통해 '누군가'가 보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시청자를 위한 방송이 아니라, 제작사의 함정에 빨려들어가지 않기 위한 방송.
제 3자가 보고 있는 도중에 DM을 걸어 추가 업데이트 파일을 받게한다거나, 그런 식으로 정신을 납치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없을 것이다.
"어, 구독 리액션이요? 그런 거 몰라요! 푸흐흐."
소통하되 소통하지 않는다. 그저 플레이만 보여줄 뿐인 실력방송을 표방하는 청화는 신체 데이터 스캔 이후 얼굴이 공개되며 늘어난 시청자들에 대해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이거 후원하는 거 끄면 안 되요? 자꾸 소리 울려서 시스템 설정하는 거 보기 힘든데."
"그냥 옆에서 새가 짹짹거린다고 생각해라."
"음...알았어요. 훈수나 그런 거 있으면 적당히 거르면 되겠죠."
"훈수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이 세상 그 어떤 플레이어보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잘 알고 있다.
'자잘한 인물이면 몰라도 중요 인물에 관한 건 우리가 더 잘 알고 있지.'
당장 단적인 예로 들어도 석하랑 루트에서 파생되는 <광검 생존 루트>만 하더라도 우리는 루트 진입 방법부터 시작하여 어떻게 해결하면 되는지 잘 알고 있다. 물론 우리의 방법은 괴인식 해결 방법이고 DLC는 히어로식 해결 방법이지만.
"훈수하면 역으로 훈수해버립니다~! 저는 경력있는 신입이어서 여러분이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있어요."
청화는 시청자들을 상대로 역으로 협박했다. 몇몇은 농담으로 받아들였지만, 실제로 거기에 역으로 낚여서 DLC의 스포를 하는 자가 있었다.
[님 샤오린 언니 누군지 암? 알면 5만원.]
"봉효구요, 이복오빠고요, 충성 빠돌이 하나 있어요."
시청자들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무렇지 않게 스포를 해버린 청화의 말에 시청자들은 혼란에 빠진 것이다. 물론 청화는 그런 시청자를 배려하지 않고 제 말을 이어나갔다.
"샤오린 동영상 SR-6974 원본을 걔가 들고 있는 거 알기나 하세요? 네? 오빠가 왜 그런 걸 들고 있냐고요? 안알려줌! 푸흐흐."
청화는 나를 향해 손으로 목을 그었다. 나는 웃으며 질문을 날린 시청자에게 한 시간 채팅금지를 먹였다.
?????
5만원 안 받음? 채금하면 도네 못 해요
당장 샤오린 루트 다시 깨러갑니다
"돈 받으려고 하는 거 아니고, 그냥 저희가 플레이 하는 거 구경이나 하라고 방송하는 거예요. 썩은 물들의 실력방송? 어디보자...지금 20명 정도 모였네요. 그럼 여기서 경력있는 뉴비 질문!"
청화는 이미 게임에 접속했다. 항상 보던 오프닝은 이미 지나갔고, 성별은 남자 캐릭터-원작의 지휘관인 시안.w.히비스커스를 선택했다.
"제가 알기로는 이런 선택지는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청화는 내게 구원의 시선을 보냈다. 나 또한 처음 보는 질문지였다.
<당신의 직업을 골라주세요!>
- 금발서양남
- 현직 히어로
- 전문 괴수 사냥꾼
- 용병
"...이건 또 뭐죠?"
"나도 몰라."
아무래도 무궁화보이 이외에 또다른 흑역사가 생겨난 듯 모양이다.
"그런데 금발서양남이 직업이에요?"
"나한테 따져봐야...."
위치>ending # 15-929, [나만 사랑한다고 했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