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7화 〉[백합외전] 창염과 피닉스 021
은유하와의 가계약을 맺은 뒤.
나는 유성의 배를 타고 내려온 온갖 딸기와 함께 제주도 해상 라이프를 만끽하고 있었다.
이 세계에 떨어지기 전이야 제주도 여행을 비행기 타고 몇 번 다녀온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장기간 최고급 호텔에서 머무르기는 처음이다.
"유하, 딸기."
"네."
"유하, 딸기케이크."
"네."
"유하, 커피."
"네. ...잠깐만요. 딸기가 아니고?"
은유하, 그러니까 X로이드에 빙의한 은유하는 나를 바로 옆에서 보좌하며 내 시종이 되었다. 24시간은 대부분 인형이자 AI비서로서 활동하지만, 가끔 빙의하여 나와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는 했다.
"카페인이 조금 들어가야 머리가 잘 돌아가거든요."
"카페인 때문이라면 에너지 음료를 마시는게...."
유하는 자신이 내려놓은 커피를 내게 건넸다. 나는 진하게 우려낸 블랙 커피로 입가심을 하며, 딸기케이크를 한 입 베어물었다.
[옴뇸뇸.]
포크? 포크로 움직이는 시간조차 사치다. 유하는 내 입에 케이크 조각을 포크로 건넸고, 나는 그걸 입에 넣고 열심히 마도기어를 조작하고 있었다.
"이야기로 들을 때는 몰랐지만...정말 신기하네요."
"빅-데이터의 도움이죠. 이걸로 이제 이 나라에서 돈을, 코어를 왕창 털어먹어야하고."
나는 호텔에서 어떻게 이 나라의 괴수들을 사로잡아 코어를 수급할 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선의철이라는 존재가 있는 이상 운신의 폭은 그리 넓지 않았지만, 나라는 존재가 헌터로 나선 이상 최소한의 자유는 가지고 있다.
"세금으로 안 뜯기고 코어를 벌 곳이 필요해요."
즉,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금을 왕창 벌어들일 수 있는 '합법'내에서의 제약이 많다는 말. 뒤로는 얼마든지 벌어들일 수 있고 나는 '갑'의 위치에 서있지만, 이 땅에서 활동하려면 세금이 미친듯이 뛰어오른다.
"납세의 의무는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데, 그게 선의철인건 조금."
"의외네요. 세금 자체를 싫어할 줄 알았더니."
"싫어하지는 않아요. 좋아하지도 않지만, 그래도 번만큼 내야한다고 생각은 해요."
[사실 히로인 공략을 원하면서. 푸흐흐.]
"......."
이 게임에는 블랙마켓, 그러니까 은유하를 통하여 뒷돈을 챙기는 암거래 시장이 있다.
이곳은 세금을 내지 않는다. 불법인만큼 세금도 적고, 약간의 수수료만 내면 대부분의 코어 대금을 정산할 수 있다. 은유하를 상대로도 약간의 호감도도 얻을 수 있고.
그러나 '불법'에 가까워질수록, 누군가와의 거리감은 점차 멀어지게 된다.
"꼭 누가 좋아할 말을 하시네요?"
"누구요? 선가놈?"
"...그 사람은 아니에요."
은유하는 일부러 말을 아꼈다. 아마도 내가 그 존재가 '여자'에 '미녀'인 걸 알면 바로 개수작을 부린다고 생각하고 있을 터.
백희아.
정계 히로인이자 협회의 존재라는 특이한 위치에 속한 그녀는 선의철의 정적이며, 동시에-
[애국보수 히로인이죠.]
...국위선양과 국가안보를 최우선으로 신경쓰는, 조국의 무궁한 발전과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히로인이다.
즉, 불법을 저지르면 저지를수록 백희아의 호감도는 바닥을 친다. 특히 세금에 민감하게 반응하기에, 탈세를 저지르면 백희아와는 히로인 관계가 아니라 정적이 될 수도 있다.
[가슴이냐, 엉덩이냐 이래로 최대의 난제로군요! 둘 다 빈유지만.]
탈세를 저질러서라도 많은 돈을 가지게 해줘야만 호감도가 오르는 여자, 은유하.
세금을 왕창 물더라도 나라를 위해 일해아먄 호감도가 오르는 여자, 백희아.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에게는 항상 둘 중 한 명의 노선을 정해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압도적인 돈으로!]
세금도 많이 내고 뒷돈으로도 많이 챙기면 된다. 양쪽이 불만을 가질 수조차 없게끔 돈을 마구잡이로 쓸어당기면 그만이다.
"유하. 얼마전에 이야기한 거, 잘 해결 되었나요?"
"물론이죠. 고객님의 요청대로 충분한 세탁이 이루어졌답니다?"
그걸 위해서 나는 돈줄을 찾고 있다. 세금을 물지 않으면서, 다른 이들이 개입될 여지를 최대한 줄이며, 동시에 이 나라에서 가장 위협적인 요소에 대항할 수 있는 길을 선택하고자 했다.
"사흘 뒤에 제주도에 배가 도착하면 바로 출발할 수 있어요."
"좋아요. 바로 출발하는 거로 하죠."
나의 마도기어는 어떤 한 장소의 지도가 펼쳐져있었다.
바로 인천.
그 중에서도 영종도.
"바야흐로, 인천상륙작전."
우리는 섬에 상륙하여 괴수들을 쓸어버릴 계획이다.
* * *
늦은 밤.
석하랑은 홀로 블루베리가 든 음료를 홀짝이며 빈백에 누웠다.
"...외롭네."
이전에도 느꼈지만 최근따라 더 외롭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자신이 부산을 벗어나지 못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상대도 어쩌다보니 제주도에 묶이게 되었다.
지역을 지키는 영웅.
사람들은 히어로의 자리 이탈에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신서울의 수호자인 광검만 하더라도 지난 수 년간 해외는 커녕 신서울 밖으로 나간 적이 없으며, 석하랑 또한 마찬가지였다.
고작해야 신서울 본부 협회에 직접 방문하거나 하는 일이 아닌 이상에야, 석하랑이 부산을 비우면 그야말로 난리가 난다.
공적인 일로도 비워도 사람들이 언성을 높이는데, 사적인 일로 비운다?
"...욕 먹겠지?"
석하랑은 베란다로 나왔다. 그리고 난간에 몸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보고싶네…."
"저도요."
"힉?!"
석하랑은 기겁을 하며 뒤로 몸을 내뺐다. 눈앞에는 푸른 날개를 펄럭거리고 있는 여인, 자신이 보고 싶다고 생각한 여인이 날개를 펄럭이며 날고 있었다.
"무, 무슨…!"
"보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제, 제주도는 어떻게 하고…?!"
"그거야 뭐 긴급출동하면 되죠. 군대도 5분 대기조인데, 설마 그거가지고 따지겠어요? 푸흐흐."
피닉스는 날개를 접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잘 포장된 케이크 상자가 들려있었다.
"내일이면 조금 진지한 일 하러 가는데, 며칠 못 볼 것 같아서 찾아왔어요."
"...이야기는 들었는데요."
석하랑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정말, 제가 안 도와줘도 돼요?"
"흐흥, 저랑 같이 인천 데이트 가고 싶은 거예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와락. 피닉스는 석하랑을 단숨에 끌어안았다. 석하랑의 발등 위에 까치발을 들고 서며, 가슴을 딱 붙이며 고개를 들어올리며 속삭였다.
"미안해요, 하랑. 그러려면 근처에 괴수들부터 처리해야해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위험할 수 있다는 거예요."
"푸흐흐. 설마요."
"......."
석하랑은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미 그녀는 히어로로서 연차가 쌓이며 신서울의 실체를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듯 했고,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미 허가는 받아뒀어요. 세금 문제는…조금 골치아프기야 하지만, 그래도 유성의 도움 덕분에 큰 문제는 없겠죠."
"유성과의 제휴…."
유성은 산하 길드 중 하나를 재편하여 미국의 스트로베리, 피닉스의 길드와 제휴를 맺었다.
청화단.
유성이 만들어낸 헌터 길드에 대해, 헌터 길드 스트로베리는 피닉스를 고문으로 파견하는 식으로 대외적으로 알렸다.
피닉스는 나서지 않되, 실력있는 유망주들을 키우는 방식.
즉, 피닉스라는 존재가 돈을 벌어들이는 건 유성으로부터 받는 자문료 뿐이었다.
"여론도 딱히 나쁘지는 않아요. 아카데미 식으로 운영한다고 하니까 오히려 좋아하던 걸요? 자기네 헌터도 혹시 잠시 파견 가능하냐고. 푸흐흐."
"피닉스, 그 중에는 분명…."
"알아요. 하랑이 걱정하는 거. 하지만 말이에요, 사람사는 곳은 어디든 다 똑같답니다?"
피닉스는 석하랑의 허리를 잡아당기며 거실로 향했다. 그리고 석하랑을 아래로 향하게 눕힌 뒤, 석하랑의 어깨를 붙잡으며 눈을 마주했다.
"미국에서도 그런 사람들은 수두룩했어요. 하지만 저는 살아남았죠. 제가 사람 보는 눈은 확실해서."
"...믿을게요. 피닉스. ...하나만 말씀드리자면."
석하랑은 눈을 질끈 감으며 피닉스의 허리를 손으로 휘감았다.
"이 나라에서 그 어떤 사람도 믿지 마세요. 누구도."
"어머, 하랑도?"
"......저도."
하랑은 피닉스의 허리를 붙잡고 몸을 빙글 돌렸다. 순식간에 피닉스는 아래를 향했고, 석하랑은 피닉스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표정을 굳혔다.
"이렇게, 언제든 덮쳐질 수 있으니까."
"어머나…."
피닉스는 게슴츠레 웃으며 검지로 입술을 가볍게 핥았다.
"하랑이 상대라면...덮쳐지는 것도 좋을 지도?"
"......야."
석하랑은 으르렁거리며 피닉스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니...내 말이 말같지 않나…?"
콰득.
석하랑은 피닉스의 볼을 붙잡으며, 서투르지만 거칠게 입을 맞췄다.
* * *
[키스만 1시간 가까이 하다니.]
'그렇게까지 적극적일 줄은 몰랐지.'
나는 석하랑을 깊게 재웠다. 아직 석하랑의 처음을 취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또 결국 석하랑과 물고 빨며 비비게 되었다.
...딱히 내가 비비는 걸 좋아하게 된 게 아니라, 비비는데도 성감에 몸서리를 치며 좋아하는 하랑을 보니 안 비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지가 있으면 더 좋아할텐데.'
[글쎄요. 하랑은 피닉스랑 시간을 보낸다는 것 만으로도 좋아하고 있는데요?]
'원래 플라토닉에 에로스가 감미되면 그게 진짜 대박이란 말이지.'
[오늘 아침만 하더라도 알몸으로 서로 입맞췄으면서.]
"......."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괜히 무안하여 옷깃을 당겨 목을 가렸다.
다른 이들이라면 그냥 핥고 끝났을테지만, 정령이 물고 빠는건 남달랐다.
"고객님?"
"아무것도 아니에요. 잠깐 계획을 검토하고 있었어요."
나는 헛기침으로 정신을 환기한 뒤, 사방을 훑었다.
"제법 많네요."
"다들 기대하고 있거든요. 영종도 탈환을."
이번 원정대의 규모는 20명.
적은 수 처럼 보이지만, 현재 이 나라의 이능력자 수를 생각하면 엄청나게 많은 숫자다. 특히 우리가 갈 곳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다만.
여기 있는 이들 중에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 다섯 명이 모이면 그 중 한 명은?]
'반드시 괴인이 있다.'
내 앞에 있는 이들 20명의 이능력자 중 무려 4명이 괴인, 그러니까 선의철이 보낸 스파이였다.
그리고 나머지 16명은, 유성의 X로이드다. 저들은 스파이들을 주변에서 감시하며 그 동향을 살피고 있을 것이다.
'기다려라, 문신사.'
겁도 없이 텔레포트로 내 근처로 넘어오는 순간, 바로 붙잡아서 다리를 벌리게 만들리라.
[문신사랑 비비는 건 아니죠?]
'비비지는 않아.'
비비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