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3화 〉[백합외전] 창염과 피닉스 017
창염에게 착유...아니 마력이 빼앗긴 뒤.
나는 석하랑의 연락을 기다렸다. 창염의 금딸로 인한 폭주는 나의 고귀한 희생으로 막을 수 있었지만, 완전한 원인을 해결하지는 못했다.
"제주도에 진짜 딸기 없어요?"
[예, 죄송합니다만 진짜로 없습니다. 백방으로 찾아봤는데....]
"아...미치겠네."
딸기를 보급하지 않으면 다시 착유당한다. 내 머리 위에 있는 파랑새는 차라리 딸기가 없어달라고 벼르고 있었고, 나는 급히 딸기를 찾아야만 했다.
"진짜 미국으로 날아가야하나?"
[그, 그러지 말아주십시오! 제가 헤엄쳐서라도 딸기를 챙겨가겠습니다!]
"꼭 부탁드려요."
어지간하면 민폐인 주문이라 이렇게까지 얘기하지 않지만, 이 문제는 나의 정조가 걸린 문제다.
[제가 반드시 피닉스님께 딸기를 보급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삑.
나는 부산으로 향한 히어로가 돌아오기를 기대하며 연락을 끊었다.
"...여기 혹시 딸기가 구현되어있지 않은 곳이 아닐까요."
[그건 지옥이네요.]
"진짜 딸기 보급하러 미국으로 날아가야하나...?"
바로 근처에 다른 나라가 있지만 그곳으로는 가지 못한다. 그곳에는 나를 향한 악의가 도사리고 있으니.
딸기에 나를 향한 수면제나 최음제같은게 섞여있을지도!
삐빅.
[저기, 피닉스 씨.]
"앗, 하랑. '씨'는 빼도 되는데요."
[...피닉스. 소식 들었어요. 딸기를 찾고 있다고.]
"네. 제가 딸기만 먹고 사는데, 딸기가 없으면 몸에 가시가 돋는 사람이라서요."
[...그 정도로 심해요?]
"그냥 농담, 농담이에요. 혹시 뭐 말하고 싶은 거 있어요?"
석하랑은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당연히 나는 석하랑이 내 눈치를 보기를 원치 않기에, 나는 그녀에게 먼저 화두를 던졌다.
"S급 코어 때문에? 아니면 딸기 때문에? 솔직히 그런게 아니었으면 하긴 해요. 하랑이가 저한테 연락하고 싶어서 전화한 거라면...언제든지 환영이에요."
[...다른 이유가 있어서 전화한 거라면 실망할 거예요?]
"에이, 그럴 리가 있어요? 저는 하랑 얼굴만 봐도 기분이 좋아진답니다."
미녀를 눈앞에 두고 둘이서 대화하는데 어찌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있으랴? 석하랑은 얼굴을 붉히며 옆의 눈치를 봤다.
[그, 그런 말은....]
'옆에 누가 있네.'
있으면 더 해야지.
"왜요? 하랑은 아닌가요? 이유가 있어야만 꼭 전화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 그렇긴 한데....]
"저는 하랑이 저한테 부담을 가지지 않았으면 해요. 하랑 부탁이면 뭐든지 들어줄 수 있답니다. 말만 해요. 혹시 직접 얼굴을 보고 싶어서 연락한 거예요? 어디있어요, 지금? 제가 부산으로 올라갈게요."
[자, 잠깐만요! 제가 말할게요. 진정해주세요.]
"직접 보고 말해도 되는데...."
아쉬움 한 번 투척. 하지만 석하랑을 상대로 이이상 넘어가는 건 뇌절이다. 석하랑이 얼음타입이고 차가워보이지만, 상당히 비점이 낮은 다혈질이다.
[저기요....]
누구를 닮았을까? 아마 둘 다 닮지 않았을까.
"네, 들을게요."
[피닉스ㅆ...가 요청한 사안이 받아들여졌어요.]
딸기가 들어왔냐고 묻고 싶었지만, 나는 말을 참으며 반문했다.
"코어 문제 맞죠? 축하해요, 하랑."
[고마워요. 피닉스 덕분에 S급 코어가 한국에 들어왔다고 지금 다들 기뻐하고 있어요.]
"오우, 아니죠! 저는 하-랑에게 준 거지, 한국에 준 게 아니에요."
나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며 화냈다.
"코어는 하랑의 물건이에요. 저 그렇게 얘기하면 화낼 거예요?"
석하랑의 표정이 굳는게 눈에 한 눈에 보였다. 내게 당황했다기보다는, 주변인들이 표정이 굳는 것에 당황한 것일 터.
'딱봐도 신서울로 호출받았구만.'
익숙한 구조가 눈에 보인다. 내가 자주 본 건 2025년의 설비지만, 석하랑의 뒤에 보이는 배경 자체가 내게는 수없이 봐온 히어로 협회 건물의 배경이었다.
즉, 나는 정부 측 인사의 대표로 나온 석하랑을 상대로 대놓고 개인과 나라를 구분해버렸다. 석하랑에 대한 배려는 명백히 아니었지만, 석하랑을 이용해먹으려는 놀부 심보는 용서할 수 없다.
"히어로가 코어를 얻었는데 그걸로 세금을 떼어먹지는 않겠죠?"
[무, 물론이죠! 정부는...공식적으로 이번 S급 코어가 '설화공주가 받은 것으로 하기로 했어요. 이에 대한 양도라거나, 증여라거나.... 그런 건 전부 일절 없는. 이른바...취득?]
"하랑이 그걸로 좋게 쓴다면 저는 어디든 좋아요. 사실 세금을 얼마나 떼어가든 상관없는데, 여기나 저기나 세금 도둑이 너무 많아서 탈이라니까요."
옆에 있는 세금 도둑들이 헛기침을 하는게 여기까지 들린다. 나는 표정을 숨기고 마도기어의 스크린 하나를 해상결계 쪽으로 열었다.
"배타고 오시거나, 날아오시거나, 비행기타고 내리시거나. 하랑은 바닷길 위를 얼리고 넘어올 수 있어요. 저기는 하랑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에요."
창염의 결계 속으로는 오직 한 종족만이 들어갈 수 있다.
나, 또는 석하랑.
까놓고 말해서 정령 빼고는 못 들어간다.
'상공에서 침투하는 것도 실험해보고, 바다 밑으로 들어가는 것도 실험해보고, 밤에 몰래 들어가는 것도 확인해봤겠지.'
전부 다 실패했으니까 나의 요구를 들어줬을 것이다.
나는 알고 있다.
저들이 밤에 한 일을.
모비딕을 중심으로 펼쳐진 결계는 위아래도 당연히 결계가 펼쳐져있다. 아마도 아래로 침투하는 자들이 많았겠지만, 그들 모두 불에 타죽었다.
[문신사의 빌런부대 중에 잠수 가능한 애들 몇이 불에 타죽었는지 아세요? 푸흐흐.]
딱히 죄책감은 없다. 빌런들이 멋대로 잠수하다가 죽었을 뿐이니.
"S급 코어, 하랑이 가져가면 돼요."
[네. 그...그래서 말인데요. 피닉스, 딸기 좋아하죠?]
"없어서 못 먹죠."
진짜다.
[제주도로 내려가는 배가 하나 있을 거예요. 어, 음...유성이 특별히 화물선을 하나 준비했는데-]
"지금 어디에 있죠?"
나는 날개를 펼쳤다.
[피, 피닉스?]
"유성이라는 분께 감사 인사를 전해주세요! 아니, 제가 전하러 갈게요!"
멕이는 거다.
"지금 먹으러 갑니다!"
딸기를.
* * *
뚝.
피닉스와의 연락이 끊어졌다. 석하랑은 표정이 굳은 모두를 보며 괜히 자신이 미안해졌다.
"그, 그게...."
"이래서 양키는 안 됩니다!"
공식석상에서 험한 말이 나왔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걸 따지지 않았다.
"무례합니다! 저 자를 당장-"
"당장 어떻게 하면 좋겠소? 마침 잘됐군. 말해보시오."
"......."
착석. 모두가 한숨을 내쉬었다.
피닉스의 오만방자함은 그들이 받아들이기에 몹시 무례하고 불손했으나, 누구도 그걸 따지지 못했다.
괜히 밉보였다가는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버릴텐데, 어떻게 감히 따지고 들겠는가?
하물며 다른 S급들과 달리, 피닉스를 향한 구속구는 존재하지 않았다.
"피닉스를 자극하지 맙시다. 그녀는...어쩌면...."
이제는 모두가 석하랑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어쩌면 피닉스가 아니라 석하랑까지 떠나버릴 수 있다는 불안감에,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 그보다 어떻게 합니까? 피닉스가 유성의 배를 향해 날아간다니."
"피닉스는 제주도민들의 불안감을 모르는 건가!"
"......에휴."
그 어떤 힘으로도 피닉스를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법과 자본과 애국심과 인질이라는 그 어떤 수단으로도 다스릴 수 없는 S급 히어로의 존재에 혼란이 가득해지는 가운데, 석하랑은 누군가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쟤, 유성 몰라...^^;;?]
"어...."
석하랑은 이모티콘에서 흐르는 땀에 자신도 괜히 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아니, 어떻게 유성을 몰라???]
"큰일났다...."
누군가가 피닉스이 행위로 인해, 그만 명예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 * *
"저기있네요."
나는 제주도를 향해 내려오는 배의 갑판에 내려앉았다. 배 위에는 아무도 없었고, 화물만 가득했다.
[사람이 아무도 없네요.]
'사람만 없지.'
사람의 형상을 한 이들은 차고 넘친다. 나는 날개를 접고 살포시 착지한 뒤,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아아, 이 영롱한 딸기향.]
배 위에 있는 컨테이너에는 모두 딸기 제품들로 가득 차있었다. 화물선 자체가 딸기로 차있는 만큼, 나는 이게 왠지 모르게 나에 대한 공물선같아 조금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이 딸기를 공수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탈이 이루어졌을까? 아마 대형마트는 기본이고 골목에 있는 작은 과일가게에서도 징발이 이루어졌겠지.
솔직히, 이 세계에서 딸기를 밥처럼 먹는 존재가 세상에 어디있단 말인가? 전생에 딸기를 못 먹어서 죽...지는 않았겠지만, 그녀의 행동은 딸기귀신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 이상한 말이 아니라 딸기농장주라고 불러주시겠어요?]
실제로 창염은 나를 시켜 미국에 딸기 농장을 차렸다. 코어를 판매한 돈으로 넓은 땅을 사들인 것으로도 모자라, 딸기밭을 보호하기 위한 A급 괴인들을 사방에 펼쳐두기까지 했다.
당연히 레이더에는 걸리지 않도록 결계까지 치고, 괴인들을 이용해 자동화 공장으로 만들어버리기까지 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괴인은 아니지만-
"실례하겠습니다, 피닉스 님."
멀리서, 그녀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검은 오피스룩에 금발을 입은 여인은 가슴이 나만큼이나 컸...아니, 창염만큼이나 컸다.
[어우야. 가터벨트라니, 역시 꼴림을 아는 여자라니까요?]
'그건 인정하지만, 가슴이 사기잖아.'
[가슴이 사기면 어때요. 섹스로이드라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데.]
'엑스로이드.'
나는 그녀의 엑스로이드를 앞에 두고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은유하 씨."
"......."
선빵필승.
나는, 누구처럼 뭉그적거리며 간 보는 것을 싫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