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7화 〉[백합외전] 창염과 피닉스 001
이 이야기는, 어쩌면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이야기.
* * *
"아, 좆됐네요."
눈을 뜬 순간, 나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아, 아아, 아아아아아아."
아무리 말을 해도 목소리는 내가 요 며칠간 계속 들어온 '그녀'의 목소리다.
"어떡하죠…."
심지어 말을 해도 존대가 튀어나온다.
왜? 어째서? 나라는 인간이 말하는게 기본적으로 존댓말이 나오는 사람인가?
아니다.
"왜 존대가 나오죠…?"
[그건 네가 이 몸에게 빙의했기 때문인 것이야.]
"씨발, 깜짝이야."
나는 마그마 속에서 튀어나온 파랑새를 보고 진심으로 놀랐다.
파랑새? 짧은 다리에 통통한 몸통, 그리고 작은 날개를 펄럭거리는 녀석은 뱁새와도 같았다.
"누구세요?"
[알면서 왜 그렇게 묻는 거지?]
"그야 인정하면 제가 미친놈이 되니까 그렇죠."
[너는 이미 충분히 미친놈이라는 것이야.]
파랑새는 내 머리 위로 날아올라 자리를 잡고 앉았다.
[너, 창염의 피닉스, 빙의함. 나, 창염. 몸 주인.]
"어머나, 씨발?"
[내 몸으로 욕하지 말라는 것이야.]
푸욱.
아프다. 이마가 부리에 찍히니 더럽게 아프다. 피는 나지 않는데 이마에서 뭔가가 흘러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앗, 저것이 설마 마력?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너는 나에게 빙의했고, 나는 네 기억을 모조리 읽었다는 것이야. 덕분에 모든 걸 알게 된 나는 내가 정령임을 자각했다는 거기도 하고.]
"아...잠깐만요. 창염이 창염임을 자각했다는 건 엄청 골치아파지는 건데…."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야.]
푸욱. 또다시 부리가 이마를 찔렀다. 뭔가 헤드기어라도 머리에 달고 살아야 하는게 아닐까.
[네가 생각하는 그런 모든 걱정들은 접어두고, 그냥 즐기고 싶은 대로 살라는 것이야.]
"네?"
이게 무슨 참신한 개...아니 새소리일까.
"보통은 몸을 차지한 사람을 죽인다거나, 저한테 저주를 하거나 그러지 않아요?"
[내가 왜? 푸흐흐, 나를 그렇게 사랑해주는 사람을 내가 왜?]
"...그렇게 말해주면 어쩔 수 없고요."
기억을 읽었다고 하니 아무런 저항을 할 수가 없었다. 설마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지는 않겠지만-
[아닌데? 게임 도중에 나로 딸친 것도 알고 있는데?]
"......죽여주세요."
[푸흐흐,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이야.]
파랑새, 스스로를 창염이라고 주장하는 새는 총총걸음으로 내 몸에서 내려왔다. 나는 그녀가 편안하게 두 손을 모아 자리에 앉게 만들었다.
"저는 그러면 이제 뭘하면 되죠? 성주를 만나면 자궁이 큥큥거려서 바로 배드 엔딩인가요?"
[아, 그거라면 걱정말라는 것이야. 네가 나를 자각시켜준 덕분에, 더이상 세뇌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야.]
"......."
그게 가능한가라고 묻고 싶었지만, 나는 창염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세뇌 안 당하는 거 맞아요?"
[물론.]
"이계신이 와서 쿵쾅대고 가면 우리 죽는 거 아녜요?"
[이계신이 올 원흉을 제거하면 되지.]
"이계신이 올 원흉이라고 하면 큐브랑 성주밖에 없는데….아!"
나는 창염의 계획을 얼추 파악할 수 있었다.
"큐브를 모두 제거하고, 성주가 지구에 오지 못하게 힘을 기르자?"
[그럴 필요도 없어. 큐브 하나만 있으면 되는 걸.]
"...?"
[내 말 믿고 일단 움직여봐. 지금은...그래. 우선 밖으로 나가볼까?]
창염은 천장을 가리켰다. 용암이 뚝뚝 흘러내리는 공간은 마치 마력을 이용해 내가 숨을 쉴 공간을 마련한 듯 보였다.
"밖으로 나가기 전에, 하나 질문이 있어요."
[뭐?]
"성주도 이계신도 아무 문제 없이 해결할 수 있으면, 저는 다시 남자로 돌아갈 수 있나요?"
[남자로 돌아가려는 이유는?]
"그야 창염이랑 떡 치고 싶으니까."
[푸흐흐.]
어차피 생각이 읽히는 거, 나는 막나가기로 했다. 내 감정, 내 마음을 숨긴다고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을 것 아닌가?
[그거라면 유감이네. 나는 전력으로 너를 공략할 거거든.]
"네?"
[이 세상은 남녀의 섹스보다, 레즈백합보빔섹스를 원한다 이거지!]
"......."
아무리 창염이 민달팽이 선호자, 아니 레즈비언이라고 해도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닐까.
"반대가 되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제가 당신을 공략해야지, 왜 당신이 저를 공략하죠?"
[농후한 가위치기의 즐거움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
"...하아, 미치겠네. 이봐요. 제가 히로인들을 자지 하나로 전부 굴복시킨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제 자지 없이 떡을 치라고요?"
[너는 그냥 가만히 있으면 돼. 내가 다 물고 빨고 해줄테니까.]
"......."
괜히 밖으로 나갔다가 창염에게 백합 강간을 당하는 게 아닐까. 나의 남자로서의 존엄성은 과연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그…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얼마든지.]
"......그거, 가능?"
[......아하하하하!]
창염의 맑은 웃음 소리가 울려퍼졌다.
"웃지 마요. 저 지금 진지하니까."
[가능은 한 것이야. 가능은 한데...나중가면 그냥 떼어 달라고 떼 쓰게 될 걸?]
"절대 그럴 일 없어요."
나의 자존심을 위해서.
"미안해요, 창염. 당신의 몸을 후타나리로 만들어서."
[아직 만들지도 않았는데 김칫국부터 원샷으로 들이킨다는 것이야.]
"...진짜 기억 읽은 거 맞나보네요."
[그럼. 흐흥, 기억을 읽었으니까 이렇게 좋게 좋게 대해주는 거지, 아니었으면 지금쯤 정신세계에서 골백번도 불태워 죽였을 걸?]
"제가 느낀 당신이라면 불태워놓고 기억 지워버리거나 할 것 같은데…."
[푸흐흐.]
창염은 그저 웃기만 했다. 그리고 푸른 불길이 되어 내 몸으로 깃들듯이 사그라들었다.
[이제 슬슬 출발하자.]
'어디로?'
[몸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하지만 내가 가고 싶어하는 곳이 어디인지 알지?]
"...하아."
결국 그곳으로 갈수밖에 없다.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고, 모든 이야기가 끝나는 곳.
"게임 속 세상에서 고향을 찾게 될 줄이야…. 그것도 딸기 디저트 맛집 때문이라니…."
[오빠, 달려어어!!]
"......."
나는 창염이 가르쳐준대로,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아, 가는 중에 괜히 신나서 막 날지 말라는 것이야.]
"그럼 어떻게 해요?"
[아메리카에서 시민권 발급해서 정식으로 입국해야지. 괜히 혼자서 미친듯이 날아가다가 미사일에 배빵당하고 싶어?]
"......??"
세상에 어떤 바보가 그런 짓을 저지르겠나.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 * *
빵빵---!
차들의 경적소리가 크게 울려퍼진다. 곳곳에서 F로 시작하는 말이 난무하며, 사람들이 짜증과 악의가 난무한다.
"난리났네요."
나는 빵모자를 눌러쓰고 인파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감히 나를 건드리는 사람들?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나를 건드릴 시간에 괴인들로부터 도망치는게 빠르니까.
"보스, 어떻게 할까요?"
"시켜만 주시면 저희가 가서 처리하겠습니다."
내 주변에는 온통 금발벽안의 정장 여인들이 나를 보호하듯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나를 목숨걸고 지키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엿보였다.
다들 나보다 훨씬 약한 B~A급임에도 불구하고.
"됐어요. 괜히 코어 부활시키는데 마력 쓰기 아까우니까 몸 사려요. 어차피 히어로들이 알아서 해결해주겠죠."
"보스, 또 츤츤거리십니다."
"...그런 건 또 어디서 배워온 거야."
나는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펍은 이미 사람들이 모두 도망쳐 우리밖에 없었다.
"꺄아아아악!!"
"괴인이다아아아아!"
곳곳에서 비명이 울려퍼졌다. 도시는 아비규환이 되었고, 나는 저멀리 고층 건물 위를 뛰어다니는 곱등이 같은 괴인을 향해 가볍게 손을 튕겼다.
"컷."
후우.
나는 성냥의 불을 끄듯 검지를 후 불고 몸을 돌렸다. 전형적인 겉멋충이었지만, 이게 또 안 하면 섭섭한 느낌이 없잖아 있다.
[이열, 멋진 척.]
'멋진 척 하는게 아니라 멋진 거다. 이 얼굴에 이 몸으로 하는데 안 멋질 수 있나?'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는 것이야. 그런 의미에서 저기 뒤에 자궁 큥큥거리는 부하들이랑 가위치기 한 판?]
'닥쳐.'
내 인생에 요철은 있어도 가위치기란 없다. 창염은 계속 나를 백합의 길로 인도하지만, 나는 결코 굴하지 않을 것이다.
[과연 당신이 수많은 히로인들을 눈앞에 두고도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요? 네? 그냥 순순히 백합의 즐거움을 깨닫고 여자가 되는 건 어때요? 그리고 저랑...푸흐흐.]
'두고봐.'
내가 남자의 몸을 갖추는 순간, 창염은 내 자지에 헐떡거리며 정령인생 싹다 손해봤다고 외칠 것이다.
나는 절대, 결코, 네버!
백합에 물들지 않을 것이다!
나는 피닉스(Phoenix).
잃어버린 나의 페니스를 찾기 위해 전 지구에 흩어진 27개의 큐브를 찾는 헌터다.
[저랑 키스하면서 비비는 거 어때요?]
"......."
비록 페니스는 넣지 못하더라도, 피닉스로서 창염과 불꽃으로 비비는 건 괜찮지 않을까...?
"핫."
정신차려라, 나.
결코 나는 암컷이 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