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1화 〉OMAKE #002, 노후 준비는 젊어서 부터.
운사 박라온.
한 때는 삼사의 일원으로 대한민국을 이끌어나갈 유망주라고 불렸던 신진 히어로.
거렁뱅이 박라온.
한 때는 모두가 재기 불가능이라고 판단하여 협회에서까지 버려져 나락으로 떨어진 폐품.
청운 박라온.
신관의 도움으로 기적적인 재기에 성공하여, 이전의 한계로 여겨졌던 A급을 훌쩍 넘겨 풍속성과 수속성을 동시에 S급을 달성한 신관의 심복.
궁니르 박라온.
괴인 터뷸러스를 제압하여 자신의 진짜 힘을 되찾아, SS급이 되어 신관의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신창(神槍).
박라온은 신관이 나선 어떤 전장에도 빠지지 않았고, 최전방에서 온몸을 던져 승리를 일구어냈다. 방주에서의 전투를 위해 신관이 지명한 최후의 7인에도 박라온은 가장 먼저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박라온은 피닉스의 힘을 얻은 신관과 함께 성주의 심장을 꿰뚫었다. 더이상 지상에 이계의 괴물은 들끓지 않았고, 세계는 평화를 되찾았다.
2026년.
평화로워진 세계에서 박라온의 이름 앞에는 새로운 타이틀이 붙었다.
<신관의 아내>.
박라온은 히어로에서 은퇴하여, 한 명의 여자가 되었다.
* * *
<2026년 3월 중순, 신서울 카페 Padre Juan.>
"안 됩니다. 굳이 비싼 물건을 살 필요는 없습니다. 리퍼 제품이면 충분합니다."
라온은 완고했다. 내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져 구했던 그 때보다도 더 완고한 태도로 나를 혼냈다.
"...이것 만큼은 양보 못 해."
하지만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다. 아무리 라온이 나보다 연상이라고 해도, 고작 두 살 터울 뿐이지 않은가.
"라온아. 우리 벌이도 괜찮잖아? 그럼 그만큼 써야 나라 경제가 돌아간다고."
"그 전에 우리 가계부터 말아먹을 겁니다. 잊었습니까? 세계는 평화를 되찾았지만, 우리는 직장을 잃었습니다."
세계 최강의 이능력자, 그리고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은 지휘관.
대 괴수 시대에나 통용될 존재였고, 세계를 구한 영웅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라에서는 훈장만 수여했을 뿐 연금이나 포상금은 일절 없었다. 나쁜 백희아.
"그리고 당신, 잊었습니까? 당신에게 있던 재산이 전부 어디로 갔는지."
"...동료들 다 나눠줬지."
애초에 내가 모은 재산이라고는 없었다. 미국에서 가져온 내 개인 재산은 모두 유나와 누리의 성장, 그리고 라온의 재활에 모두 사용되었으니까.
"그렇습니다. 최종 결전 이후, 당신은 당신이 동료들에게 제공한 집이며 슈트며 그 모든 걸 가지라고 나눠주셨습니다."
"......그래도 퇴직금은 줘야하잖아. 다들 엄청 고생했는 걸."
"......."
내 변명에도 라온은 도끼눈을 뜬 채 나를 노려보고 있다. 나는 무어라 대답할 방법이 없었고, 라온은 마도기어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사냥해온 모든 전적을 꺼내놓았다.
"그리고 우리가 사냥한 괴수들의 코어와 부산물을 통해 얻은 수익은 전부 어디로 갔습니까?"
"...기부하고, 세금으로 내고, 장비에 투자하고, 그리고...."
"당신은 당신 개인의 재산으로 조금이라도 모았습니까?"
"......아니요."
단언컨대 나는 내 팀이 벌어들인 돈을 내 개인의 영달을 위해 사용한 적이 없다.
아주 간혹 라온이나 다른 동료들을 위한 선물을 구매하기 위해 내 사비를 쓴 적이 있어도, 기본적으로 데스디나스를 통해 벌어들인 모든 돈은 동료들의 월급과 투자금에 사용되었다.
"결국 저희에게 남은 것은 저희들의 몸뚱아리와 윗층의 사무실 밖에 없지요."
"...그래도 엄청 유명한 사람들 많이 오는 명소 아니야?"
나는 주변을 가리켰다. 당장 이곳에 단골 손님으로 오는 이들만 하더라도 내 동료이자 SS급 히어로들이 태반이었고, 심지어 그중에는 전직 정령도 있었다.
"라온 언니, 너무 그러지 마요."
그리고 카페의 알바생이자 전세계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여인, 유나가 다가와 쇼트 케이크를 내려 놓았다.
"유나, 저희 이거 주문 안 했습니다...?"
"사장님 서비스예요."
진열대에 막 케이크를 집어넣던 카페의 사장, 후안이 윙크했다. 이제는 바리스타인지 파티셰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그의 디저트 만드는 실력은 일취월장이었다.
"사장님 커피랑 디저트 만드는 실력은 분명 SSS급일 거야."
"그건 동감합니다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습니까. 당신, 이거 다시 한 번 보시길 바랍니다."
라온은 내가 넘겨준 카탈로그를 가리키며 엄한 표정으로 따졌다.
"어떻게 침대 하나로 천만원이나 사용할 수 있습니까?"
"라온."
나는 표정을 굳히고 라온의 손을 꼭 잡았다. 라온은 주변을 의식하며 손을 빼려 했지만, 이제 나도 SSS급이 된 만큼 힘겨루기에서는 밀리지 않았다.
"너랑 내가 같이 평생을 잠 잘 곳이야. 마음 같아서는 천만원이 아니라 1억도 쓰고 싶다고."
"윽...!"
라온은 한 방 먹었다는 듯 얼굴을 붉혔고,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라온의 기세가 살짝 누그러뜨러졌기에, 나는 공격의 고삐를 멈추지 않았다.
"잘 생각해봐. TV? 마도기어로 쓰면 돼. 옷장? 애초에 너나 나나 옷 많이 사는 타입은 아니잖아. 있는 거 쓰면 돼. 하지만 침대만큼은 다르다고. 우리가 집에서 있으면 어디에 가장 많이 있겠어?"
"거실아닙니까?"
"아니지. 자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침대에서 사실상 하루에 절반을 보내는 거야. 그런데 그런 침대를 고작 리퍼, 그것도 싸구려 합성목 프레임에 삐거덕거리는 매트리스를 사자고? 난 안 돼. 차라리 예전처럼 사무실 소파에서 자고 말지."
"......당신."
내 일장 연설에 라온은 콧방귀를 뀌며 내 손등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사실 음흉한 생각을 하고 있는게 아닙니까?"
"......."
"지난번에 샤오린 양의 초대를 받아 중국에 갔을 때, 호텔의 침대를 망가뜨렸던 것을 아직도 신경쓰고 계십니까?"
나는 괜히 부끄러워져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유나가 표정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어 다시 라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그런 셈이지. 적어도 내구도가 단단한 걸 사용해야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지 않겠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침대는 그저 잠을 자기 위한 가구 아닙니까."
"아니지. 잠만 자는 건 아니잖아."
여기서 라온과 나의 가장 큰 인식의 문제가 발생했다.
침대.
라온에게는 그저 잠만 자는 공간이었지만, 내게는 잠 말고도 다른 무언가를 해야하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그 거사를 하룻밤 제대로 하고 나면 다리가 주저앉아서 삐거덕거리기 시작할 싸구려 침대를 쓰자고? 나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다.
"라온아, 네가 지난 몇 년동안 힘들게 지내온 것도 알겠어. 그래서 비싼 물건들 사는게 꺼려지는 건 이해해. 하지만 써야할 때는 써야하는 거잖아?"
"그래도 아낄 수 있는 부분에는 아끼자는 겁니다. 막말로 당신도 나도 지금 날백수 아닙니까. 어디서 돈 들어오는 곳 없이 계속 돈 나갈 곳만 생기니 저도 답답합니다. 아낄 수 있을 때 아껴야 합니다."
라온은 가슴을 두드리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펜릴과의 싱크로를 통해 SSS급이 되며 나올 곳은 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간 몸매는 눈으로만 봐도 꽉찬 D컵까지 성장했다.
그리고 저 가슴은 내 거다. 흐흐.
"...음흉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맞아."
내숭은 그만. 나는 라온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끔, 빠르고 강력하게 밀어붙이기로 마음먹었다.
"라온이랑 침대에서 섹스하고 싶어서, 좋은 침대 사자고 하는 거야."
"......."
라온은 표정이 굳은 채 포크로 짚었던 딸기를 떨어뜨렸다. 나는 내 포크로 딸기를 집어 내 입안에 집어넣었다.
"딸기 내 거라니까."
"......당신, 그걸 여기서 말하면 제가 어떻게 되는지 잘 알면서."
라온은 헛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다른 곳에서도 하나 둘 손님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어깨를 돌리거나 목을 좌우로 꺾기 시작했다.
"운사 언니 아주 신났네? 둘이서 지지고 볶고 과시하니까 그렇게 좋아?"
"도저히 옆에서 들을 수가 없군요. 신관 님과 급히 상의를 해야하는 문제가 그거였습니까?"
"흐하하! 야전은 중요한 문제지! 하지만 그것보다 궁니르, 나와의 싸움이 아직 남아있다!"
라온을 중심으로 여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야황, 군신, 개천광 카르나에 이어 아그니까지 라온을 린치하려는 듯 모여들었다.
"당신, 제가 밖에서는 말조심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라온은 나를 질책하는 눈으로 노려봤지만, 나는 당당히 가슴을 두드리며 내 손에 끼워진 결혼 반지를 가리켰다.
"라온아."
"네."
"내가 결혼 전에는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을지 몰라도, 결혼 하고 나서는 너랑만 했거든? 그건 내가 여기 있는 피닉스 걸고 맹세할 수 있어."
내 엄지는 내 심장을 가리켰다.
"내가 만약 결혼 후에도 다른 여자들이랑 했다면, 아마 나는 불에 타 죽었을 거야."
"당신."
라온은 녹색으로 빛나는 눈을 흉흉하게 뜨며 살기를 내비쳤다.
"저 자는 사이에 몰래 펜릴 빼내서 둘이서 한 거 제가 다 알고 있습니다."
"......"
젠장.
"에이, 무슨 소리야?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해? 응? 그렇잖아."
"정정하죠. 펜릴이 저한테서 뛰쳐나가 당신을 잡아먹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순순히 잡아먹혔죠. 맞습니까?"
"......."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라온에게 당당히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라온이 네 몸으로 고양이귀 메이드로 봉사해주는데 내가 안 넘어가고 베기겠니-"
"신관."
라온이 차가운 목소리로 내 멱살을 움켜쥐었다. 금방이라도 싸울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에, 라온을 향해 도발하러 왔던 이들 조차도 지레 겁을 먹었다.
"잠깐 둘이서 조용히 얘기를 하지 않겠습니까...?"
"저기요?"
테이블에 노크 소리가 울렸다. 나와 라온의 고개가 자연히 노크가 울린 방향으로 돌아갔고, 그곳에는 티켓을 들고 있는 유나가 있었다.
"두 분, 카페에서 싸우지 말고 여기 가셔서 섹스하세요."
"......."
"......."
나와 라온은 순순히 티켓을 받고 빠져나왔다. 우리 둘다 SSS급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유나는 무서웠다.
* * *
<유성 호텔, 펜트 하우스.>
"절대 유나에게 겁을 먹거나 미안해서 나온 게 아닙니다."
"알아. 당연하지."
나는 라온을 내 품에 안고 침대에 누워, 흘러내린 라온의 머리칼을 단정히 한쪽으로 늘어뜨렸다.
"일단 사과부터 할게. 펜릴이 갑자기 깨어나서 자기 발정기라고 하잖아.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그러고보니 그 때 싱크로가 풀렸던 것 같기도 합니다. 꼬리로 봉사를 받으시니 좋으셨습니까?"
"......솔직히 조금 많이. 하지만 있잖아, 펜릴이 발정기가 걸렸던 건 너 때문이야. 너."
나는 라온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라온은 눈을 찡그리며 울상을 지었지만, 나는 라온의 이마를 검지로 쿡쿡 찌르며 라온을 추궁했다.
"애초에 네가 성욕을 제 때 안 푸니까, 펜릴이 대신 풀어주려고 뛰쳐나오는 거 아냐. 왜 하고 싶으면 하고 싶다고 말을 안 해?"
"윽...."
라온은 눈을 옆으로 굴리며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나와 라온이 몸을 겹치고 있는 만큼, 나는 라온의 얼굴을 붙잡고 내 얼굴의 바로 앞에 두었다.
"대답안하면 키스 안 할 거다?"
"......치사합니다."
쪽.
라온의 따스한 입술이 내 입술 위에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가불이었다. 라온은 게슴츠레 눈을 감았다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지금 하는 것은 이전과는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예전에는 당신의 이능으로 저를 강제로 강화시켜주기 위함이었다면, 지금은 다릅니다."
"어떻게?"
"......그저 순수하게 사랑을 나누는 행위가 아닙니까."
라온의 몸이 살짝 떨렸다. 나는 라온이 떨지 않도록 마력을 살짝 방출해 라온을 안정시켰다.
"무서워?"
"무섭습니다. 지금의 행복이 사실은 성주가 보여주는 환상이고,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릴까 두렵습니다."
"......걱정마. 그럴 일은 없어."
나는 라온의 볼을 꼬집고 흔들었다.
"자, 꿈 아니지? 현실 맞지?"
"아픕니다."
"아프고 정신 차리라고 한 거였어. 이게 꿈이면 너랑 나랑 지금까지 나눴던 모든 게 물거품 같은 거란 말이잖아?"
내 엄한 말에 라온은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라온이 지금의 관계를 두려워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전직 히어로 박라온 님. 당신은 이제 히어로가 아니야. 히어로가 아닌 일반인의 삶을 살아가는 게 무서운 거지? 힘은 그대로 가지고 있는데, 전혀 다른 삶을 사는게."
"......."
라온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여고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10년 가까이를 히어로로서 살아왔고-그중의 절반은 폐인으로 살아왔지만-, 아직도 스스로를 히어로로 여기고 있는 만큼 두려운 것이다.
"넌 이제 운사도, 청운도, 궁니르도 아니야. 나한테 박히다가 세 번 연속으로 가버려서 울음을 터뜨린 박라온이야."
"......잘 나가다가 그런 얘기는 왜 합니까. 산통 깨게."
"당연히 이런 우울한 분위기 깨려고 한 이야기지. 왜냐면...."
꿈틀.
나의 분신에 다시 열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라온은 허벅지 사이로 솟아나는 뜨거운 것에 눈을 샐쭉였다.
"히어로로서의 삶을 포기하라고 하신 분이, 정작 여기에는 마음껏 이능을 쓰고 계십니까? 피닉스가 죽은 자지 부활시키라고 힘을 주고 사라진 줄 아십니까?"
"...세계를 구했잖아. 그 뒤는 내가 쓰기 나름이지. 그리고 세계 평화를 위해 지금도 힘을 쓰는 중이라고."
나는 부활한 내 분신을 라온의 속으로 밀어넣었다. 라온은 언제나처럼 능숙한 허리 놀림으로 나를 받아들였다.
"이게 세계평화입니까?"
"출산률 상승을 통한 인류 번영에의 기여지."
"풋."
라온은 내 말이 우스운지 내 어깨에 고개를 묻고 몸을 떨었다. 나는 라온의 허리를 향해 손을 내려 자세를 잡았다.
"간단하게 생각해. 이제 너도 나도 히어로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로 살아가는 거야. 알겠지?"
"......비겁합니다, 읏...!"
"그런 의미에서 내 부탁하나만 들어주면 안 돼?"
나는 라온의 귀에 내 부탁을 속삭였고, 라온은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한 손을 볼에 붙여 주먹을 쥐고 비틀었다.
"......이, 임신시켜 달라냥...."
"당연하지."
다음에는 메이드복을 입히고 봉사를 받아봐야겠다. 나는 라온이 원하는 대로, 라온의 속에 내 사랑을 듬뿍 확인시켜줬다.
수 개월 뒤.
"유나한테 감사해야겠습니다."
".......진짜로 그 날 생긴 거 맞아? 세상에."
나는 천만원짜리 침대 위에서 라온의 뱃속에 자리잡은 새 새명의 마력을 느끼고 경탄했다. 라온은 내 볼에 키스하며 베시시 웃었다.
"다행입니다. 서른 전에 낳을 수 있어서."
"신경 쓰지 말라니까."
"어떻게 신경을 안씁니까. 당신 노리는 젊은 애들이 한 둘이 아닌데."
"......."
내가 기가 차서 말문이 막히자, 라온은 다시금 내 볼에 키스하며 몸을 겹쳤다.
"안되겠습니다. 오늘 확실히 도장을 찍어야겠습니다."
"라, 라온아. 나 잠깐 시간이 더 필요한, 허억!"
찌걱.
라온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내 위에 올라타 허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조명 아래에 춤추는 연녹빛의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는 보석처럼 예쁘게 반짝였다.
"사랑합니다, 당신. 처음 당신이 저를 거두어주셨을 때부터."
"아."
나는 드디어 라온이 내게 언제 반했는 지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다시금 확신했다.
"모두가 저를 볼품없다고, 폐급이라고 무참히 버렸을 때, 오직 당신만이 저를 사랑으로 거두어주셨습니다. 예,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오직 당신만이."
나는 라온에게 단단히 도장찍혔다.
"당신, 이거 뭡니까? 옷장 뒤에 처박혀있던데."
"아, 그거? 방주에 쳐들어갔을 때 기념으로 굴러다니던 돌멩이 좀 챙겨왔지. 그게 이제 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방주의 흔적일 걸?"
"......."
역시 입에 풀칠만 하고 살라는 법은 없다고, 우리는 성주 덕분에 떼돈을 벌었다. 유일하게 성주에게 고마웠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