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0화 〉IF Route, Bad Ending # 162
IF Route는 본편과는 관계없는, 본편에서 파생된 가상의 시나리오입니다.
보시는 분에 따라서 불쾌감이 들 수 있으니, 본편을 보실 분은 다음 장으로 바로 넘어가셔도 내용 이해에 문제가 없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캐릭터 붕괴도 있을 수 있으니, 유념하여 주십시오.
* * *
딩딩딩. 굿모닝.
알람이 울린다. 온 대륙에 아카펠라 소리가 울려퍼졌다. 이능력자들은 7분마다 울려대는 노랫소리에 짜증이 절로 일었다.
"시끄러워."
혼돈환룡 또한 그 노랫소리가 울리자마자 몸을 벌떡 일으켰다. 처음 들어보는 노랫가락임에도 사람의 정신을 미묘하게 좀먹는 이 리듬은 계속 듣다가는 노이로제가 걸릴 것만 같았다.
"짜증나."
7분. 10분도, 5분도 아닌 미묘한 시각으로 울려대는 통에 도통 잠에 집중을 할 수가 없다. 처음 울렸을 때는 그냥 '별 거 아니구나'하고 넘겼지만, 그게 잠에 빠져들 때마다 울리면 당연히 기분이 더러워지기 마련이다.
"봉효."
"예."
"들려?"
"예. 잘 들립니다."
봉효는 잠에서 깨어난 혼돈환룡의 모습에 눈앞이 아뜩해졌다. 그가 기존 동창의 인원을 설득해 환룡단으로 만들 때마다 주의를 주었던 말이 눈앞에 새록새록 떠오른다.
- 절대로 자는 중에 저 분을 깨우면 안 돼.
"죽여버릴까."
혼돈환룡은 침대에 걸터앉아 고뇌에 빠졌다. 움직이기는 귀찮지만, 이대로 가만히 내버려두면 죽을 때 까지 알람이 울릴 것 같았다.
"지금까지 몇 번 울렸지?"
"세 번입니다. 앞으로 한 번 만 더 울리면 네 번-"
딩딩딩. 굿모닝.
"봉효."
"예."
혼돈환룡이 고개를 양 옆으로 꺾었다.
"모기같은 년 잡고 다시 자야겠다."
지금 10분 고생하면 앞으로 5년을 더 깊게 잠들 수 있으리라. 혼돈환룡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목적지는 서쪽.
자신이 잠들어있었던 석실.
* * *
피닉스는 저 멀리서 날아오는 혼돈환룡의 반응에 상당히 기꺼워했다.
"바로 튀어나오네요. 바쁘게 움직일 필요도 없이."
그만큼 이 노랫소리가 혼돈환룡의 잠을 제대로 깨웠으리라. 피닉스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택배가 오는 것 마냥 손을 비볐다.
"아니죠. 모처럼 정령들끼리 해후인데 마중나갈까요?"
피닉스는 콧노래를 부르며 석실을 빠져나갔다. 새가 아침에 지저귀는듯한 노랫소리는 피닉스를 중심으로 빠르게 퍼져나갔고, 피닉스는 소리에 마력을 실어 자신의 위치를 대번에 알렸다.
"굿모닝~ 라라라 라라 라라라라라 굿모닝~"
빨리 혼돈환룡을 각성시키고 다른 정령들도 각성시키고 싶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는 계획에 피닉스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 온다."
쿵!
흙먼지가 일었다. 저 높은 태산의 봉오리에서 뛰어내린 인영은 피닉스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착지했다. 생각보다 과격한 혼돈환룡의 인사에 피닉스는 손을 흔들어 흙먼지를 털어냈다.
"이봐요. 첫 인사가 너무 과격한 거 아녜....... 헐."
"창염의 피닉스."
흙먼지 속에는 큰 키의 미청년이 있었다. 피닉스는 맥거핀으로나 보던 그 존재 속에 혼돈환룡이 깃들어 있음을 깨닫고 온몸을 떨었다.
"......혼돈환룡?"
"그래. 아주 잘도 깨워주셨어."
혼돈환룡은 몸을 일으켰다. 8척이 넘는 장신에 다부진 체격은 평생 무술을 연마한 무인의 육체였다.
"어, 그러니까, 잠깐만요?"
"아침에 새가 지저귀는 소리만큼 청명한 게 없지."
혼돈환룡은 검을 빼들었다. 별다른 장식 없는 철검이었으나, 그 철검은 혼돈환룡의 마력이 깃들어 절세의 보검이 되었다.
"하지만 모닝콜 알람은 바로 꺼버려야 해."
"이, 너 뭐야! 왜 벌써 무신 몸에 깃들어 있어?!"
피닉스는 주먹을 들어올리며 전투 자세를 취했다. 생전에는 전귀, 그리고 사후 무신으로 추앙받는 SS급 이능력자의 몸에 깃든 혼돈환룡은 한쪽 입꼬리를 비틀며 피닉스를 비웃었다.
"내 부하가 좀 유능해서 말이야. 내가 빙의가 특기라는 걸 알고 최고의 육체를 바쳤지."
"아, 미친? 그딴 말도 안 되는?!"
"말이 되니까 내가 지금 이러고 있겠지?"
육신의 영향 때문인지 혼돈환룡의 말투는 무신이 생전에 말하던 방식과 너무나도 흡사했다. 혼돈환룡은 자신이 무신이라도 되는 것 마냥 행동하고 있었다.
"다, 당신 설마 먹힌 거예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정령이 어찌 한낱 인간 따위에게 먹히겠어?"
혼돈환룡은 피닉스를 위아래로 훑으며 비웃었다.
"과연. 관조(觀照)에 이르니 너무나도 잘 보이네. 피닉스, 너는 아직 굴레를 벗어던지지 못한 모양이구나."
"......당신 설마!"
"그래."
혼돈환룡은 검을 들어 피닉스에게 겨눴다. 그의 눈은 영롱한 회색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여(余)는 신화(神化)에 이르렀도다."
싱크로.
혼돈환룡은 무신의 몸을 통해 신화에 이르러, 자신을 자각하고 말았다.
"SSS...!!"
환속성 100.
피닉스조차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경지이며, 성주를 뛰어넘어 이계신에게 칼을 들이밀 수 있는 최종점.
"발버둥쳐라, 피닉스."
혼돈환룡(??)은 피닉스의 눈에 절망이 휩싸인 것을 보며 은은하게 웃었다.
"지금 자다가 나와서 조금 빡치거든."
"히, 히이익?!"
신벌이 내렸다.
* * *
성주에게도 일격을 먹인 무신의 힘을 자유자재로 이용하며, 스스로 정령임을 자각한 환룡은 혼돈을 제압하고 신화에 이르렀다.
-SSS에 이르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하다.
피닉스는 원작의 경험을 통해 그 진리를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있었고, 그 법칙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피닉스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엇을? 누구를 사랑했길래? 설마 무신의 육체를 가져온 부하? 아니면 자신이 모르는 누군가?
"피닉스. 네 패인은 하나다."
환룡은 검을 번쩍 들어올렸다.
"너는 자고 있던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
"아, 미친."
잠을 너무나 사랑해서 세뇌까지 풀어버렸구나. 피닉스는 역발산기개세로 떨어지는 태산같은 검에 무릎을 꿇었다.
* * *
"주군!"
봉효가 심처로 돌아온 환룡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는 어깨에 기절한 피닉스를 들쳐 매고 비틀거리며 침실로 향했다.
"어디 다치셨...졸면서 걸으시는군."
세계 어디를 내놓더라도 다 때려잡을 무위를 가진 주인이었으나, 환룡은 편안한 잠자리만을 생각할 뿐이었다. 봉효는 그와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리며 눈물을 찔끔 흘렸다.
"걷는 것도 귀찮아서 쓰레기통에 처박히셨던 분이 저렇게 까지 움직이시다니...!"
혼돈환룡에 의해 괴인이 된 이후, 봉효는 그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세뇌하듯 정신교육을 했다.
-이거 꼭 해야돼? 귀찮은데....
-주군, 5분만 더 일하시면 1시간 휴식을 드리겠습니다.
-...그럼 10분 일하고 2시간 콜?
-주군, 동창 한 명의 고독을 떼주시면 하룻동안 말을 걸지 않겠습니다.
-아냐. 열명 다 데려와. 열흘동안 내리 잘 거야.
-주군, 혹시 배고프지 않으십니까? 괴인 하나만 만들어주시면 드시고 싶은 걸 바치겠습니다. 드시고 한 숨 주무십시오.
-백만 괴인 만들어줄테니까 그냥 자게 내버려둬....
봉효는 환룡을 조교했다. 아무것도 하기 싫어 귀찮아하던 그를 상대로 채찍과 당근을 번갈아 사용하며 환룡을 조금씩 일깨웠고, 다크 레기온과 성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환룡에게 진리를 깨우쳐줬다.
-주군. 그러면 주군은 영생을 사시는 존재십니까?
-어. 그러니까 나는 안 죽으니 너 5년동안 하고 싶은대로 살....
-5년만 열심히 일하면 앞으로 영원히 놀고먹을 수 있네요? 오십년, 아니 5천년 넘게?
-......!!
환룡은 개안(改眼)했다. 부하가 가르쳐준 진리에 환룡은 싱크대에 쌓인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할 만큼의 의욕이 생겼고, 봉효는 성주를 쓰러드리기 위한 비책으로 무신의 육체를 진상했다. 무신에 깃들어 100% 동기화한 환룡은 봉효를 크게 치하했다.
"나는 깨달았다. 고맙다, 봉효."
분명히 말하지만, 환룡은 봉효에게 조교당했다.
"조금만 일하면 그 뒤가 평안해진다는 걸."
봉효는 글러먹은 아이를 갱생시킨 자신의 노력에 대견함을 느끼고, 여인을 납치해 침실로 들어가는 주군의 뒤를 가렸다.
"수하가 어찌 주군의 사생활을 염탐할 수 있겠는가...!"
끼이익!
봉효는 침실의 문을 닫았다. 피닉스의 미모에 홀린 동창 조직원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지만, 봉효는 단호한 얼굴로 문을 닫으며 그들을 일갈했다.
"어딜 보려는 것이냐! 너희들은 주군을 욕보이려는 것이냐!"
뭐, 뭐하는 거예요?! 그, 그만둬요! 우리는 같은 정령이잖아요!
문틈 사이로 피닉스의 비명이 흘러나왔다. 문 밖에 있던 이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같은 정령이니까 그런 거다. 아무래도 인간 상대로는 마음이 동하지 않더라고.
사락, 사라락.
"......."
봉효와 환룡단의 단원들은 침묵했다. 귀를 쫑긋 세우고, 흘러나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하악, 하악."
괴인 샤오린은 문에 귀까지 갖다대며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환룡단의 단원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침실 안의 상황을 예견했다.
분명 그거겠지? 그걸 거야. 아니야, 주군이 그럴 리 없잖아? 애초에 주군은 여체였다고. 지금은 남자인데? 무신인데? 야, 움직이는 것도 귀찮아서 자위도 안 할 양반이신데 그짓을 하겠냐? 근데 그런 것 치고는 존나 쌔끈하지 않았냐?
"......."
봉효는 침묵했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리는 결코 주군의 사생활을 볼 생각은 없다. 그렇지?"
"""......예!"""
마음이 통했다. 환룡단은 재빨리 굳게 닫혀진 문에 귀를 바짝 붙였다.
"샤오린...! 숨소리가 거칠다!"
"하악, 저를 이긴 무인을, 주군께서, 흐흐흐...!"
"......이것도 글렀군."
봉효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귀를 쫑긋 세웠다. 그들이 떠드는 사이, 안에서는 무언가 대화가 오고 간 듯 했다.
그, 그만해요! 그 더러운 거 당장 치워요!
같은 정령끼리 왜 그래? 불만있으면 이겼어야지.
그건 당신이 치트쓰니까 그런 거 아녜요?!
꼬우면 이기던가.
"제독. 아닌 것 같은데요...?"
사재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거 남녀간의 교합이 아니라 그냥 사이 나쁜 남매끼리 싸우는-"
그 더러운 자지 당장 빼지 못해?!
"!!!!"
피닉스의 비명이 문틈 사이로 울려퍼졌다. 환룡단은 모두 침묵했고, 사재는 알아서 입을 닥쳤다.
속은 아주 좋다고 물어대는 군. 그 잘난 피닉스가 내 아래에 깔려 앙앙대는 게 아주 보기 좋아.
흐, 흐으응, 그, 그마안! 너, 너무 크단 말예요...!
걱정마라. 나도 처음이니 살살해주마. ...크으, 정말 대단하구나. □.
하으아앙?! 바, 방금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다. 그럼 시작한다...!
퍽퍽퍽퍽퍽퍽퍽!
햐아아아악!! 미, 미쳐버릴 것 같아...!
피닉스.
문틈 사이로 환룡의 거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네가 지금부터 나의 우미인이다.
피닉스는 그 날, 꽃잎이 꺾였다.
* * *
중국 전역을 아우르는 굿모닝 테러가 끝났다.
우두머리가 꺾인 것으로 청화단은 환룡단의 아래에 복속되었고, 청화단의 단원들은 군말없이 환룡을 따라야했다.
피닉스조차 이길 수 없는 괴물은 그 누구도 이길 수 없었고, 청화단의 모든 괴인들은 피닉스가 잡힘에 따라 환룡에게 목줄이 잡히게 되었다.
구심점인 피닉스가 사라짐에 따라 간부들은 급히 모여 회의에 들어갔다.
누군가는 복속을, 누군가는 반격을, 그리고 누군가는 도주를 주장했으나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결국 의견 충돌이 벌어져 제각기 다른 길을 걸을 뻔 했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 8mm 테이프 한 장이 보내졌다.
"......틀겠습니다."
간부들은 눈에 핏발이 선 채, 동영상을 재생했다. 동영상에는 회색 머리칼의 청년, 그리고 익히 알고 있는 푸른 여인이 있었다. 여인은 네 발로 엎드려 청년에게 뒷치기로 당하고 있었다.
[청화단의 단원들에게. 안녕하신가.]
짝!
청년, 환룡은 여인의 볼기짝을 강하게 때렸다. 여인은 교성을 터뜨리며 고개를 떨구었다가, 카메라를 향해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들었다.
[미안해요.... 청화단 여러분. 햐읏!]
환룡이 피닉스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단장의 치태에 간부들은 경악했다.
[저, 아무리 노력해도 이길 수 없었어요...! 흐윽!]
피닉스는 부끄러운지 다시 고개를 떨구었지만, 환룡은 피닉스의 머리를 움켜쥐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너희 단장은 내가 접수했다. 앞으로 피닉스는 내 아내가 되어 살 것이다.]
[......미안해요, 그, 그치만...!]
피닉스는 눈을 질끈 감으며 신음과 함께 말을 토해냈다.
[져버렸는 걸요...!]
뚝.
영상은 그걸로 끝나버렸다. 조작의 흔적은 없었고, 간부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졌네요."
"졌군."
"......."
청화단은 멸망했다.
* * *
이계신이 눈을 떴다.
성주의 인도에 따라 우주를 거닐어, 지구에 발을 디뎠다.
드디어 왔군.
회색의 무인이 그를 반겼다. 이계신은 자신과 동격에 이른 그를 반기며 활짝 웃었다.
드디어 하나가 나타났나. 허나.
이계신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자신감에 넘치는 무인을 비웃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콰득!
무인은 전력으로 싸웠으나, 이계신에게 생채기만 입히고 패배하고 말았다.
이계신은 당당히 홀로 맞서싸운 무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지구를 반으로 쪼개었다.
콰앙!
지구는 폭발했다. 한창 지상에서 간부들을 다시 세뇌시키던 성주도 함께 터졌다.
이계신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